며칠 전에 정지용을 이야기할 때, 1987년까지 출판금지, 열람금지로 묶였다고 했지.
그 시인 중 하나가 백석이다. 

나도 1987년 해금조치 이후에야 백석의 시를 만날 수 있었단다.
그런데, 백석의 언어를 처음 읽었을 때, 깜짝 놀랐어.
어쩜 이렇게 그 시대의 언어를 오롯이 잘 잡아둘 수가 있었을까 하고 말이야. 

우선 교과서에서 배웠던 <여승>을 한번 읽어 보자.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승)

이 시를 <서사적>이라고 하는 건,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란다.
화자는 어떤 여승을 만났지. 그 여승은 '옛날'같이 늙었고, '불경'처럼 서러워졌대.
여승의 늙을 모습을 보고 서러워졌다는 말을 조금 새롭게 표현한 것일 뿐이야. 

2연에서 과거로 시간이 회상되지.(이런 걸 시간이 역행한다고 그래.)
평안도 어느 깊은 산 속 금점판(금광)에서 파리한 여인을 만난 일이 있어.
여승의 젊은 시절이겠지.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뭔일로 딸아이를 때리면서 울었대.
그런데, 그 기억이 남아있어. 촉각적으로. 차갑게... 

그 여인과 이야기나눌 기회가 있었겠지.
일벌처럼 일하러 집나간 남편은 십 년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금광으로 일하러 갔단 말을 듣고 금점판에 옥수수를 팔러 다닌다고...
그랬는데... 

남편은 만나지 못하고, 어린 딸은 그만 죽고 말았어.
죽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도라지 꽃을 좋아하더니 돌무덤으로 가고 말았네요...
이렇게 말하는 엄마의 아픈 마음. 

그래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벗어나려 여승이 되는 이야기로 마감이 된단다.
산절의 마당 귀퉁이에서 긴 머리 오리가 잘리워져 툭툭 떨어지는 모습.
그 시간에 산꿩이 울었어.
세상을 버리는 여인의 <눈물 방울>과 함께 울어주는 <산꿩도 섧게 우는> 울음.
꿩이 뭐 서럽다고 울었겠니? 감정이입이지.  

남편은 나가고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이 어떠할지... 상상하기도 어렵구나.
교과서에서 배운 <규원가> 기억나니?
허난설헌의 노래.
'군자호구(군자의 좋은 짝)' 되길 원했지만, '장안유협 경박자(경박한 인간)'를 만난 여인.
'베 올에 북 지나듯(시간이 빨리 지나) 시간이 흘러' 삼 년이 가도록 집에 얼굴을 안 내미는 남편.
근데, 허난설헌은 자식이 셋 있었나봐.
그 자식 둘이 죽은 걸로 보아, 전염병이라도 돌았는지 모르지.
허난설헌의 한시를 한번 읽어 보자.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去年喪愛女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蕭蕭白楊風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鬼火明松楸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玄酒存汝丘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應知第兄魂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夜夜相追遊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縱有服中孩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安可糞長成

황대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浪吟黃坮詞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血泣悲呑聲 (허난설헌, 곡자 哭子)

두 아이를 차례로 잃은 어미.
광릉 땅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겠지. 두 무덤이 마주보고 있는 광릉 땅. 
자식들의 무덤에 제사를 바치러 가는 어미의 마음...
두 남매가 그나마 옆에 있으니 서로 위로가 되어 어울려 놀라는 말을 남기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겠다.
뱃속에 아기가 있는 것을 보면 임신 중인데, 그 아기가 자라는 것이 즐겁지도 않구나.
황대노래는 중국에서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모를 비판'하는 노래였대. 

요즘에야 영아 사망률이 낮지만, 예전엔 어린 시절에 자식을 보낸 부모가 많았다는구나.
허난설헌은 양반집 부인이었고,
여승의 여인은 가난한 여인이었지만, 자식 잃은 슬픔은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여승에게서 나는 냄새는 '불경'의 낡은 냄새, '가지취'의 낙엽 냄새 같은 것이었단다.
속세의 화장품 냄새처럼 여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후각적 감각이 느껴지지 않지.
또 여인의 우는 소리를 듣고 '가을밤처럼 차갑게' 촉각적으로 표현한, 청각의 촉각화,
공감각적 표현도 느낄 수 있구나.

백석의 시에 드러난 인물들은 '일제 강점기의 민중'이라고 볼 수 있단다.
구체적으로 일본놈들로 인한 피해자인지는 드러나있지는 않아.
일본놈 때려잡자! 이런 건 시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그 민족의 삶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그 시대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란다.
일하러 나간 남편이 10년이나 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면, 무슨 일이 생겼겠지. 무서운 시대.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일제 강점기의 암흑기란다.
그 시대에 무너져가는 <농촌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서 <민족적 원형>을 탐구하고,
모국어로 보존하여 재생하는 일에 백석은 열심이었지.
김영랑처럼 아름다운 언어를 갈고 닦은 시인과 같은 시대에 말이야.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고,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아프게 그린 시로 거미 이야기를 쓴 <수라>가 있단다.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수라(修羅))

수라,는 수라장, 아수라장 처럼 쓰이는 말로,
불교의 여섯 가지 세상(육도)의 윤회에서 나온 한 세상이란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곳이지. 이 세상이 그렇게 쌈박질하는 곳으로 변했다는 판단이겠다. 

차디찬 밤, 그런 시대,
거미새끼를 한 마리 쓸어 버린다. 무심하다. 

2연에서 큰 거미가 온다. 가슴이 짜릿하고, 서러워한다. 

3연,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에 알에서 갓 깨인듯한 작은 거미가 아물거린다. 가슴이 메인다. 서럽다. 

그것을 쓸어버리지 못하고 고이 버리며 가족과 만나기를 빈다. 슬퍼하면서... 

가족이 흩어져버린 상태를 백석은 <수라>라고 표현한 것이다.
평화롭던 농촌 공동체는 해체되고 세상은 수라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마찬가지 의식을 드러내는 시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이 있다.
<수라>에서는 서럽고 슬프게 가슴 메이는 화자는 <남신의주~>에서 좀 강하게 변한다.
그 변화를 보자. 이 시는 기니까 부분 부분 잘라 볼게.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첫 부분에선 <거미>에서와 같이 <해체된 가족>을 이야기한다. 어렵지 않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이 시의 제목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인데,
옛날에는 주소란 것이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편지를 부치는 일도 없었을 뿐더러, 평생 거기 눌러 살았으니 주소가 의미가 없을 밖에.
근데, 근대화되면서 도시의 주소는 공동체를 해체한 증거가 된다.
남신의주란 도시의 유동(동네) 박시봉씨 네 집에 방을 하나 얻어 셋방살이를 시작한 삶.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날은 저물고 바람도 불어 추위는 더해 온다.
두렵고 험한 시대. 일제 강점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목수네 집에 헌 삿자리(짚을 엮은 자리)를 깐 방에서 주인을 붙인
셋방살이가 시작된다.
그 셋방은 마치 '싸구려 커피'에 나오는 집처럼 눅눅하고 불쾌하다.
그리고 무척 좁다. 또한 외롭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곰팡이 냄새나는 춥고 눅눅한 방. 혼자 있어도 너무 좁은 방.
질옹배기에 지푸라기 등 불을 피워와서 손도 쬐고,
맨날 누워 뒹굴면서 슬픔과 어리석음을 반추(되새김)하는 화자.
갑자기 고향 생각에 가슴이 콱, 메이고 눈물이 고인다.
이럴 때 쓴 시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던 정지용의 향수와도 같은 마음이겠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저 슬퍼하던 이전의 <거미>에서와는 달리,
이 시에서는 <그러나>가 나온다. 반전. 전환.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님을 깨닫는다.
세상은 크고 높은 힘, 운명 같은 것이 있어서 나를 굴리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제 여러 날을 보내면서 마음이 가라앉는다. 슬프거나 좌절스럽지만은 않다.
더러는 나중에 싸락눈이 쌀랑쌀랑 창문을 두드리기도 하는데,
춥지만 화로를 끌어 안고 생각한다.
먼 산 뒷옆 바위섶에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올 때 하이야니 눈을 맞으며
마른 잎새에서도 쌀랑쌀랑 소리도 내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떠올린다.
마치 '지금 눈 내리는' 시대에도 '여기 노래의 씨를 뿌리'는 초인처럼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살겠다는 힘을 내는 모습.
농촌 공동체가 해체된 도시에서 외롭게 살지만, 현실 극복 의지를 가진 인간임을 표명하는 멋진 시.
이런 것이 이 시의 힘이다. 

그의 시에는 '공동체'를 긍정하는 시들이 많다.
많은 작품을 다룰 순 없으니,
먼 타지에서 고향을 떠올리는 따스한 시를 한 편 소개하고 마칠까 한다. 그의 <고향>이다.

나는 북관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

북관은 특정 지명이라기 보다 북쪽의 타향을 뜻하겠다.
어느 타지에서 앓았는데, 부처같고 관우같은 의원이 진맥을 한다. 

진맥을 하며 심심했던지 고향을 묻는데,
아무개 씨를 들먹인다. 화자도 아는 이인데 의원은 막역한 사이란다.
화자가 아버지처럼 존경한다고 하니
의원이 넌지시 웃고 말없이 진맥을 한다.
이제 의원은 진맥을 할 뿐이지만,
그와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 같아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같은 의원도 함께있는 현실에 만족한다. 

타향을 유랑하는 사람은 소외감과 고독감에 몸부림치다 병이 난다.
그렇지만 의원의 한 마디 말처럼 작은 것에도 감동한다.
이 시에도 짧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서사적>이라고 한다.

공동체 생활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들어 있다.
고향에는 따스한 정이 있는데, 타지에서는 마음이 시리기만 했던 화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에서 그렇게 떨었던 화자가 안쓰럽다.

참고로, 이 <고향>이라는 시가 2004 수능에 출제된 적이 있었는데,
창의적인 문제에서 '복수 정답'의 시비에 걸려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 문제를 한번 보자.

(고향)의 <의원>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을 <보기>에서 고르면?

<보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가 비밀의 방에 이르고자 한다.
비밀의 방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있다.
미궁을 통과하는 길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번 들어가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문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니다.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하고 열리는 문이다.
테세우스는 미궁의 문을 찾아 실 끝을 미궁의 문설주에 묶어 놓은 뒤
자신의 예지와 본능으로 미로를 더듬어 비밀의 방에 이른다.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인 후 실을 따라 무사히 밖으로 나온다.
이 '미궁의 신화'는 문학 예술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형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① 테세우스 ② 미노타우로스 ③ 미궁의 문 ④ 비밀의 방 ⑤ 실   

이렇게 <유사한 것을 추리>해 내는 것을 줄여서 <유추>라고 한다.
[나 - 의원 - 고향] 이런 관계와 유사한 것을 찾아 보자는 것이다.
'나'는 '의원'을 통해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보기>에서는 '테세우스'가 '미궁의 문'을 통해 '미노타우루스'를 죽이고 '실'을 따라 탈출에 성공한다.
문제 출제 의도는 주어진 시에서 '화자'가 '의원'을 통해 '고향'을 떠올리는 긍정적 방향의 경험을 하므로,
'테세우스'가 '실'을 통해 '탈출'에 성공하는 관계를 유추하는 것으로 구성한 것이다.

[테세우스 - 실 - 탈출] 이렇게 되면, 의원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실>이 된다.
애초에 <실>을 정답으로 발표한 교육과정평가원의 의견에 반박한 사람이 있었는데,
'테세우스'가 '미궁의 문'을 통과하여 '괴물'에게 다가간 것도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다는 의견이었고,
그것을 인정해서 <미궁의 문>도 정답으로 인정한 것이다. 

아빠 의견은 애초의 평가원 의도가 훌륭한 문제였던 것 같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한다면 3번도 오답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문제였다.  

백석의 시 세계는 더 풍부하니 다음에 다시 다룰 기회가 많을 줄 안다.
낮밤의 일교차가 크다.
감기 조심하고 기말고사 준비 잘 하기 바란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립간 2010-11-25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 학생의 질문입니다. 불경과 서러움은 어떤 연관이 있죠?

글샘 2010-11-26 16:54   좋아요 0 | URL
이런 불경스런 질문이 있나?

그건 저한테 물으심 안 되죠. ㅋㅋ 화자에게 물어야지.
유사성에 기초한 '비유'인데,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는 쉽사리 그 유사성이 떠오르지 않죠.
제 추측엔, 절간에 들어간 사람들이 뭐, 다들 사연을 갖고 살았던 데서, 절간의 인생 - 불경 - 서러움... 이런 비유가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요. 제 맘이죠.
조지훈도 '고운 뺨이 정작 고와서 서럽다'는 표현이 있죠.
중이 되어버린 여인을 보고 서러워하는 마음... 불경은 그저, <절간, 스님>을 떠올리는 것 정도...

마립간 2010-11-30 13:39   좋아요 0 | URL
제가 학생의 입장이 될 때는 진보적인 입장이 되서요.^^ 답변 감사합니다.

cyrus 2010-11-25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간 바빠서 글샘님 문학 수업에 뒤늦게 접하네요^^;;
백석의 <여승>을 문학 교과서에 처음 접했는데, 내용이 슬퍼서 저에게는 잊혀지지 않고 있는
시 중 하나입니다. 이 시 덕분에 백석이란 인물도 알게 되었습니다.
독백체처럼 이루어져 있는 그의 시가 마음에 와닿는 것도 처음이었고요.
오랜만에 <여승>이라는 시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샘 2010-11-26 16:54   좋아요 0 | URL
여승은 아무래도 슬픈 정조가 지배적이죠.
백석의 시 세계는 참 넓어서... 저도 그 중 여승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순오기 2010-11-2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금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건 우리들 복이지요.^^
처음 백석을 접했을 때의 감격이 다시 떠오르네요.


글샘 2010-11-29 15:52   좋아요 0 | URL
저도 백석 시 전집을 들고 한 달을 살았답니다.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진 시집...

반딧불이 2010-12-0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시를 읽으면 어디에서나 쓸쓸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아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기대했는데 언급을 안하셨네요.
 

오늘 휴전선 아래 최북방 연평도에 폭탄이 터져서
군인과 민간인이 죽고 다치기도 한 사건이 일어났다. 

올 봄에 일어난 '천안함 침몰 사건'처럼 이번 연평도 사건도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밝히는 일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언론에서야 북한의 도발이다.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고 야단들이지만,
이솝 우화의 양치기 소년처럼 여러 번 거짓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게 된단다.

항상 남한은 북한이 먼저 공격했다고 하고, 북측은 반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진실은 늘 숨어 있거든.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사는 현실은 이렇게 고달프다.
뉴스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일.
사람의 말은 (人+言) 합쳐져서 '믿을 신' 자가 되어야 하는 건데... 

오늘은 분단과 관련된 시를 몇 편 추려볼게.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어서는 안 되겠지만,
사소한 군인들의 실수였을지도 모를 일을 전쟁의 위협처럼 뻥치는 넘들도 있을 수 있으니 가증스런 노릇이다.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휴전선 이북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전쟁은 그들을 뿔달린 도깨비로 그리게 한다.
이북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남 사람들도 마찬가지 괴물일 것이다. 

우선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시를 한번 보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 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이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심상은 두 가지다. '물'과 '불'
이 둘 중에서 '생명력'을 가리키는 것은 무얼까? 물이지?
모든 생명의 근원에는 물이 있어야 한단다.
메말라가는 나무도 물만 있으면 자랄 수 있고,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도 물 속에 동동 떠 있지.
그렇지만 '불'은 '파괴', '소멸'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심상을 <원형적 심상>이라고 불러.
<물>은 '생명'이라는 원형적 심상을 불러오고,
'소멸, 전쟁'의 원형적 심상을 가진 말은 <불>이 되지.
<어머니>란 존재는 세계 어디서나 어느 시대 문학에서든 보통 '사랑,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듯이 말이야. 

이 시의 1,2연에서는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어.
'우리'는 아직 만나지 못하는 존재야. 서로 메말라 있지. 물이 되어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가물어서 비를 기다리는 집에서도, 바다에서도 다 물을 좋아하지. 

3연의 시작, <그러나>...
우리는 물로 만나지 못하고, 불로 만나려고 하고 있어.
바로 오늘과 같이 남북이 전쟁이라도 벌일듯이 을근들근 다투는 형국과 같지. 

그렇지만, 4연에서 그대를 부른단다.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만날 때, 불로 만나면, 서로 소멸되고 말겠지.
그래서 화자는 <흐르는 물>로 만나자고 그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아니라 '푸시식푸시식' 불꺼지는 소리를 내는 물의 만남. 

아~ 이제 전쟁 따윈 다 좋아하는 넘들 줘 버리고,
불꺼지는 물로 만나자는 평화의 노래.
땅은 비록 휴전선으로 반쪼가리 났지만, 남과 북은 <넓고 깨끗한 하늘>에서 만날 수 있겠지.
마치 중학교때 배운 이강백의 희곡 <들판에서>의 싸이코 형제처럼 민들로 씨앗을 날리면서
화해하는 분위기가 떠오르는구나.

이 시를 꼭 남북 분단의 상황으로 보지 않아도 돼.
메마르고 건조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도 있고,
그런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황폐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생명력의 원천 '물'의 힘으로 대립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제야. 

보통 전쟁이나 분단을 소재로 이야기하면,
고통, 한스러움이 드러나기 쉬운데, 이 시에선 만남의 기대가 긍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단 특징이 있어. 

아빠가 알고 있는 시 중에 가장 섬찟한 시가 김종삼의 <민간인(民間人)>이란다.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민간인) 

제목은 '민간인'이란다. '군인'의 상대적인 말이지.
민간인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사람이란다.
미군들이 맨날 이라크에 폭격을 퍼붓고는 한다는 소리가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하겠다는 뻥을 치곤 하지. 

1947년이면, 일본이 패퇴하고
위도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점령군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때야.
쉽게 말해 미국의 식민지였던 셈이지. 

심야. 이북의 황해도 해주 앞바다 용당포란 조그만 포구에서
사공이 조심스레 노를 저었어. 어디로? 이남으로 가고 있겠지. 
이북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대.
땅을 무상으로 나눠줄 때만해도 이북의 분위기는 좋았는데,
지주와 친일파, 가진자들을 처참하게 숙청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어.
일제 강점기, 식민지 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일본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겠는데,
과연 누구까지 죽이고, 누구까지 벌을 줘야 하는 걸까?
그런 데서 이북은 사람살 곳이 못된다고 판단해서 이남으로 도망을 친(월남한) 사람이 많았단다.
<정의>를 가장한 피의 학살 앞에서 말이야. 

그렇게 몇몇 가족이 조심조심 배를 타고 남하하고 있는데,
울음을 터뜨린 '영아(갓난아기)'가 있었어.
처음엔 입을 틀어막으려 했겠지.
그래도 소리를 줄일 수 없게 되자... 어떻게 되었겠니? 

이십 몇 년이 지났으니 1970년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분단은 지속되고 있고,
그 바다에 빠뜨린 영아에 대한 진실은 누구도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시다. 

민간인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지.
특히 그 중에서도 '영아'가 무슨 사상적 대립이 있을 것이며, 무슨 주장을 했겠냐고.
그렇지만, 살기 위해서... 오로지 죽지 않기 위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영아가 생매장되었던 곳.
그 <삶을 위한 죽음의 현장>이었던 이야기를 짧은 글 속에서 비극적으로 엮어내었단다. 

자, 이 시에서는 소설처럼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 같지?
이런 시를 <서사적>인 시라고 그래.

전쟁 중의 시를 두어 편 보자.
모두 가톨릭 계통의 '구 상' 시인의 시야.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 공산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구 상, 초토의 시8 -적군 묘지 앞에서)

전쟁 중인데, 이 땅은 모두 불타버린 땅, 초토(焦土)가 되어버렸어.
전쟁 중이어서 적군은 모두 쏘아 죽이고 찔러 죽이고 터추어 죽이곤 했지만,
불쌍해서라기 보다는, 시신이 썩으면 거기서 벌레가 꼬이고, 결국 전염병의 근원이 되고 말아.
그래서 적군이지만 시간이 있으면 끌어 묻어버리곤 하는 거지.
시간이 없으면 무리지어 놓고 불을 질러버렸단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3연의 이 역설적인 표현이 이 시의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야.
살아서는 적군이 되고 원수가 되지만, 죽고 나서는 싸울 일이 없으니 말이지.
그런데 이 역설 속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죽는지...' 이런 의혹이 일어나게 되지. 

마지막 연의 '은원'도 마찬가지 역설이란다. 은혜와 원망이라니...
우선, <원망>은 적군이어서 싸우다 죽이는 상황에 대한 원망이겠지. 전쟁에 대한 증오심.
그렇지만 <은혜>는 '죽음'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삶'에 대한 소중함, 되찾은 평화... 이런 것이겠지.
다투다 죽게 되어 참으로 <원망>스럽지만, 죽음 앞에서 더이상 적군은 없다는 <은혜>로운 깨달음. 

죽음 앞에서 진정한 화해와 통일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은혜입은 것이란 거야.
동족의 상잔이란 비극 앞에서 그저 원한 만을 갖게 하는 시보다는 이런 시가 깊은 뜻을 담았다고 생각해. 

물론, 증오심으로 가득한 시도 있단다.
박두진 작사의 6.25의 노래가 그런 것이다.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케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씻으리 <후렴>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고 또 싸워서 다시는 이런 날을 오지 않게하리 <후렴> (6. 25의 노래)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찌르고 이 <나라>와 이 <겨레>를 빛내겠다는 원한으로 가득하지.
슬픈 역사에서 나온 노래지만, 이런 노래를 다시 들고나오는 시대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평화로운 세상으로 가진 못할 망정,
외국의 농간에 놀아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참 밉다. 

구 상 시인의 <초토의 시 1>도 한번 읽어 보렴.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 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구 상, 초토의 시 1> 

하꼬방은 판잣집을 일컫는 말이야.
전쟁 중에 제대로 집을 짓지 못하고 어디서 박스같은 것을 주워다 급조한 집이지.
피란민(전재민) 집은 그렇게 볼품없었을 거란다.

그 하꼬방의 유리창이랄 것도 없는 곳에서 해바라기처럼 뭔가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여럿이다.
그 볼품없는 아이들의 얼굴이지만,
아무리 전쟁중이어도 아이들은 이 세상의 미래다.
그래서 햇빛마저도 경의를 표하듯 눈부셔서 돌아서고, 화자도 그러지.

울상이 된 그림자... 전쟁 중의 아이들을 바라본 화자의 참혹한 심정이 드러나는 말이다.
전쟁 중의 가난과 참화는 빛나야 할 어린아이들의 얼굴에 어둡게 가리워졌음에 침통하려는 순간,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는 개나리가 휘어지듯 망울이 져 있다.
전쟁 중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는구나.
5연에서도 같은 발견을 한단다.
언덕배기를 달려 내려가는 체니(처녀, 소녀)의 앞니가 빠진 모습, 아, 죄 없음.
천진무구함,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그 모습의 발견.  

전쟁통에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들었고, 온통 먼지투성이인 비극적인 세상에서,
화자는 <개나리의 망울>을 발견하고, <소녀의 죄 없는 순수>를 발견한단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술 취한 듯>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된단다. 

아빠가 대한민국에서 45년 살면서 느낀 건데,
텔레비전에 나온 말을 그대로 믿는 건 바보란다.
그럼 어떻게 볼까?
글쎄. 그것이 고민인데, 그래서 책도 보고, 생각도 하는 것이겠지. 

사실과 진실은 늘 다른 것이거든.
지난 봄에 바다에 <천안함>이란 배가 두동강 나서 가라앉았고, 마흔 여섯 명의 젊은이가 죽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렇지만, 바다에 빠져 죽은 젊은이들을 갑자기 <영웅>으로 만들고,
모금까지 해서 큰 돈을 유가족에게 주면서, <천안함>을 피격한 것은 북측의 <어뢰>라고 밀어붙인 주장은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니, 국민을 우롱하고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야.
그들은 <진실>이 밝혀지면 많은 것을 잃는 사람들이겠지.
아니면 <진실>을 은폐해서 많은 것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이거나.
암튼, 오늘의 연평도 사태도 워낙 군사지역이어서 <사실> 자체가 무언지 알기 어렵구나.
오로지 국방부의 발표만이 유일한 발언인 시점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는 따지기 더 어려울 것 같다.
시간이 좀 지나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언론, 방송의 문제를 풍자하는 <당나귀 길들이기>란 시를 한번 읽으면서 마치자.

당나귀 한 마리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아침, 저녁으로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당나귀의
불온한 상상력을 거세(去勢)하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도 쉬지 않습니다.
간혹 당신의 성급한 채찍에
뒷발질로 날뛰는 당나귀가 있더라도
안심하십시오, 그 놈들의 습성은
당근 뿌리 하나에도 이내 아픔을 잊고
부드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온순한 짐승으로 돌아갑니다. (오종환, 당나귀 길들이기 -TV론) 

오종환 시인은 당나귀를 길들이는 <우화>를 통해서 <방송>을 비꼬고 있단다.
이런 시를 <우의적>, <우화적>, <풍자적>이라고 하지.
당나귀에게 반복해서 이야기하기.
주말에도 반복하기. 그래서 상상력을 거세하기.
억압에 저항하는 당나귀가 있더라도,
그놈들은 당근(유혹)에 금세 익숙해질 것이란 이야기. 

제목에 TV론, 이라고 부제를 붙여 둔 걸 보면,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방송을 장악하고,
거기서 반복적으로 거짓된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국민을 무지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상황을 풍자하고 있단다.
<불온한 상상력>은 사실은 <비판적 사고력>이 되겠지.

<우민 : 어리석은 백성>을 만들어야 저항이 줄어드니
맨날 <늑대가 나타났다>를 외치는 거야. 그렇지만 양치기 소년은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단다.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백성도 때가 되면 깨닫게 되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
이 굴레는 한국 국민의 깨달음에 역시 질곡(수갑과 족쇄)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더 읽고 공부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아.
오늘은 좀 딱딱한 이야기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니 한번 이야기해 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11-23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11-3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종환 시인의 '당나귀 길들이기'라는 시는 처음 접하네요. 이분의 시를 좀 찾아봐야 겠어요.
 

요즘엔 날이 따뜻하구나. 봄날 같아.
누군가는 지구 온난화가 인간이 저지른 환경 오염때문이라고 하는데,
또 어떤 학자는 지구는 원래 1500년 주기로 냉온의 변화가 생긴다고도 하더라.
아빠는 지구처럼 큰 천체가 인간 정도의 작은 존재때문에 완전히 망가지는 건 아니라고 봐.
물론 대기 오염, 무차별적 삼림 남벌 등도 원인이 되겠지만, 지구는 그 나름의 진행이 있겠지.  

오늘은 참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 정지용의 시를 몇 편 소개할게. 
정지용의 시 중 가장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의 힘을 드러낸 시는 역시 <호수1>이야.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1) 

한 행을 다섯 글자로 간결하게 정리했고,
이 간단한 서른 한 자로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을 참 효과적으로 표현했단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시를 쓴 사람인데, 한국 전쟁 이후에 북한으로 가게 된단다.
본의든 아니든, 해방 후에 이남보다 이북이 지식인에게 더 인기가 있었단 건 전에 한번 일렀을 거야.
그래서 남한에서는 1987년까지 정지용의 시를 읽을 수 없었단다.
시를 보면, 전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 냄새가 없는데도 말이야.
교과서에서 배운 '여승'의 시인, 백석도 마찬가지지. 

정지용의 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향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한 시,
시각적 표현과 다양한 감각적 표현을 활용하여 누구라도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시, 향수. 
1927년 3월 일본에 유학가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읊은 시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鄕愁)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로도 유명한 곡이지.
한 연은 4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말미에 똑같은 후렴구를 붙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 절절하게 한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으로 고향을 그리는 것이 1연이지.
넓은 벌 동쪽 끝에는
옛날 이야기를 지줄대고 떠들듯 정겨운 실개천이 휘돌아 나오는 풍경. 풍경 하니까 '선경'이 떠오르는구나.
앞에서는 경치를, 뒤에서는 감정을... 선경, 후정. 
얼룩백이 황소는 소 중에서 얼룩무늬가 있는 칡소를 뜻한다고 그래. 범소라고도 하는데,
마치 호랑이처럼 세로로 얼룩얼룩한 무늬가 줄지어 있단다.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의 얼룩소가 점박이 젖소는 아니란다.
그 소가 해설프게(뭔가 좀 어설프고 느릿느릿한 느낌이지? 충북 옥천지역 방언으로 여겨진다.)
게으른 울음을 '음메~~'하고 울어.
근데, 무슨 빛?
금빛.
울음은 '청각'적 심상인데, 금빛처럼 '시각'적 심상을 썼으니, 청각의 시각화. 공감각이지. 
2연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도 마찬가지야. 바람 소리를 들은 거니깐 청각인데,
말을 타고 달리듯 시각적으로 표현한 청각의 시각화, 공감각이지.

2연에서는 아버지가 떠오르는구나.
아, 고향~ 하니, 처음 떠오르는 건, 고향의 전체적 풍광. 그 담엔 아버지.
좀 가부장적 시대의 냄새가 난다.
그 담 연에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단다.
흙에서 자란 화자가 풀섶 이슬에 함부로 쏜 화살을 찾다가 함추름히 옷을 적시던 고향. 

그 다음 4연에 가서야 '아내'가 생각난대.
만약 아빠가 외국에 가서 일하면서 고향을 떠올린다면, 1번이 아내고 2번이 자식일 텐데 말야.
시대적 환경이 이렇게 반영되곤 했단다.
근데, 그 아내가 '사랑스럽고 보고픈 그대'가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지. 그것도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떠오른대.
그 발벗은 아내의 얼굴도 아니고,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는 모습이 떠오르는...
하긴,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어린 나이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을 시켰으니 그럴 법도 하지. ^^ 

마지막 연에선 하늘의 별과,
두런두런 가족들의 말소리가 은은하게 사라져가는 듯 시가 마무리되는구나.
연극 용어로 F.O. (fade out) 비슷하지. 

이렇게 아름다운 용어로 고향을 그린 이 시인의 다른 시 <고향>은 조금 직접적으로 아픔을 드러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처음과 끝은 역시 수미상관이다. 가운데서는 뭐가 나와야 하지?
고향 상실의 아픔을 강조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아픔의 <심화>를 이룬단다.
그게 수미 상관이야. 

이 시의 2연과 3연, 4연과 5연은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드러낸다. 대조적이라 하지.
2연에선 산꿩과 뻐꾸기의 변하지 않음, 그렇건만, 3연에선 마음의 허전함과 떠돎.
변하지 않는 자연과 변하는 인간사의 대비, 대조... 그걸 통한 고향 상실의 슬픔을 쓰는 시란다. 
4연도 흰 점꽃의 인정스러운 불변과 5연의 풀피리 소리 상실, 메마르고 쓰디쓴 입술의 대조.
그렇게 일제 강점기 고향을 잃어버린 아픔을
시각, 청각, 미각 등 다양한 감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전에 김광균의 <와사등>을 설명하면서 그의 시가 모더니즘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뭔가 현대적인, 모던~한 것들을 표현하려 했다는 거야.
현대인의 외로움, 서양적인 가로등(와사등)이나 고층 건물, 기차 등...
정지용도 모더니즘적 경향이 드러나는데, 다음 시 <카페 프란스>를 한번 보렴.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롯[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카페프란스)

♣ 루바쉬카 : 러시아 남자들이 입는 블라우스 풍의 상의.
♣ 보헤미안 : 집시(Gypsy)나 사회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 페이브먼트 : 포장도로.
♣ 패롯 : 앵무새.
♣ 울금향 : 튤립(tulip).

'카페'란 것도 일제 강점기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생긴 것이겠지.
원래 커피를 '카페'라고 부르는데, 커피집이란 소리지. 뭐 술도 팔고 그런 가게였지만.

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고, '루바쉬카'나 '보헤미안 넥타이'로 차린 이들이
카페에 가서 농담이나 하는 '세태'를 쓴 시란다. 그야말로 '모던~'한 시라고 볼 수 있지.
외국 종자의 강아지는 주인이 기르는지 사람을 졸졸 따르는 카페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지. 

정지용의 시는 이처럼 <향수>나 <모더니즘> 계열의 시 외에도 <전통>에 대한 동양화적 표현도 하고 있다.
그의 시 <인동차(忍冬茶)>를 보자.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인동차) 

  

인동차는 겨울을 이겨낸, 이런 시련 극복의 심상도 가지고 있지.
늙은 주인(곧 화자)의 내장에 시도때도 없이 인동차 달인 물이 들어간단다. 

자작나무 숯이 타는 불이 붉게 피어오른 방,
방구석엔 무에 파릇하게 순이 돋고,
김도 서리는 풍경이 그려지고 있구나.
'잠착(潛着)하다'는 말은 '밑으로 가라앉다.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골똘하게 쓰다.' 같은 의미란다.

산속에서 달력도 없이 '한겨울'을 하얗게 보낸다.
하얀 것은 눈이 많이 내려 시련을 겪는 모습이기도 하고, 화자의 늙은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고요하고 적막한 산중의 고요한 모습 속에서
한세상의 고난을 되새기는 노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중국의 사상사에서 이렇게 고요한 자연에서 조용하게 지내는(은일 隱逸, 숨어서 편안히 지냄) 일은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며 옳고 그름을 다투는 입신양명보다 낫다고 여겨지기도 했단다.
그런 대표자가 노자와 장자이고, 그런 것이 종교적으로도 발전한 것이 도교란다.
이런 시를 동양적 은일의 세계를 그린다고도 하고, 정신의 여백의 아름다움을 그린다고도 하지.
서구적 이미지로 가득하던 <카페 프란스>와는 대칭적인 위치에 놓인 시란다.
마지막으로 속세와 단절된 고요한 산속의 이야기를 한편 더 읽어 보자.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장수산(長壽山) 1>

♣ 벌목정정 : 나무를 도끼로 찍는 소리
♣ 아람도리 ~ 베혀짐즉도 하이 :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베어질 만도 하다
♣ 멩아리 : 메아리
♣ 쩌르렁 :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소리이지만 그 뒤의 고요를 강조하고 있다
♣ 밤이 조희보다 희고녀 : 밤이 종이보다 희다(검은 밤을 배경으로 흰 눈으로 뒤덮인 산의 빛나는 모습)
♣ 이골을 걸음이랸다? : 골짜기를 내가 걸어감
♣ 조찰히 : 조촐하게, 맵시가 아담하고 단정하게
♣ 늙은 사나이 : 웃절의 중
♣ 줏는다? : 본받아 볼까?
♣ 올연히 : 홀로 우뚝한 모양(시적 화자의 지향하는 태도)

이 시의 특징이라면 <산문시>이고,
산속의 <은일사의 삶>을 그린 것이고,
말투는 <옛스런 어투>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말투의 마무리를
'~하이(하구나), 희고녀(희구나), 걸음이랸다?(걸음일까?), 줏는다?(주워담아 볼까?)'처럼 재미있게 쓰고 있다. 

장수산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다.
문학에서 '지명'은 화자의 마음 속에 담긴 공간이라고 봐야 한단다.
김승옥의 <무진 기행>의 안개 가득한 도시, 무진도 그렇고,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의 마음의 고향, 삼포 역시 그렇다.
그건 부산, 울산 같은 실제 지명이라 보면 안 되겠지. 

장수산은 '오래오래 사는 산'이란 의민데,
수백 년 사는 사람은 <신선>이지.
신선처럼 세속과 절연된 순수한 삶을 시적 화자는 그리고 있는 거란다.
장수산에는 사람도 없어. 그저 웃절 중이 가끔 와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가겠지.
그런데 눈이 많이 쌓여 종이보다 흰 세상. 보름달이 떴어. 

온 세상이 하얀 겨울...
신선처럼 산 속에 앉았는데, 마음이 편안하진 않구나.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이렇게 표현했으니 말이야.
그럼 해결책은?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이런 것이지. 견뎌 내라! 냉정하게, 곧고 바르게!!! 이런 의지가 드러나지.  

오늘은 정지용의 다양한 시를 다뤘다.
사람의 모습은 한 가지 면만으로 파악하면 안 되지.
정지용을 <향수>의 시인으로만 기억하는 건 그의 뒤통수만 보고 그를 잘 안다고 여기는 거나 마찬가지야.
사람을 볼 땐, 그 사람의 더 많은 면을 만나 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거겠지.
내일 또 쓰마. 잘 자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11-23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11-3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놓고 보니 정지용 시의 다양한 성격이 한눈에 보이네요.

글샘 2010-11-30 21:55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눈이 밝으시니 그렇죠. ㅎㅎ
 

지난 시간에 김수영의 시를 몇 편 읽었다. 
민중의 생명력을 쓴 <풀>이나
지식인의 의지를 쓴 <폭포> 등에서 힘들었던 군사독재 시대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도 함께 이야기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까지 나왔구나. 

오늘은 신동엽의 <봄은>을 먼저 읽으면서 시작하자꾸나.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신동엽, 봄은) 

이 시에서 대립되는 심상이 둘 나오지?
따뜻하고 밝은 계절, 봄과
춥고 어두운 계절, 겨울. 

신동엽이 저항하고 현실에 참여했다건 군사 독재 시대를 계절로 나타낸다면,
이육사가 <절정>에서 일제 강점기를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겨울이 될 거야.
겨울에 춥고 어두울 때,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 누구나 당연히 갖는 마음 말이야. 

자 1연에서 보면, 봄은 <남해>와 <북녘>에서 오지 않는다고 했단다.
일제에 강점당했던 조선이 해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결과였단다.
일본에게 승리해서 찾은 해방이 아니었기에,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다스리게 되었지.
당연히 이북은 소련의 공산주의를 내세운 김일성 정권이,
          이남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내세운 이승만 정권이 자리를 잡았단다. 
그런데, 처음에 이북의 정권은 토지개혁에 성공해서 지식인들의 인기를 얻은 반면,
                     이남의 정권은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해서 부패의 온상이 되었지.
그런 이념과 정책의 차이가 결국은 남북 분단과 전쟁까지 부르게 된 원인이 된 거란다.  

그래서, 봄은,
남쪽 건너 미국이나 북녘 하늘 너머 소련에서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붙였을 거야.
봄은 <좋은 미래>겠지.
그것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온 국토의 <아름다운 논밭> 곧, 풀뿌리같은 민중의 사이에서 움튼다는 기대겠지.
3연의 <바다>와 <대륙> 밖은 1연의 <남해>와 <북녘>과 같은 표현이고,
마지막에 <쇠붙이>를 흐물흐물 녹일 봄은,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했던 구절과 유사하구나.  

신동엽은 1960년대 독재 정권의 횡포와 국가의 혼란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외세>에 있었다고 본 것이지.
이런 시들은 그 어둡던 시대에 저항의 불꽃을 꺼지지 않도록 힘을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겠지. 

유사한 주제 의식을 가진 시, 이성부의 <봄>을 한번 읽어 보자꾸나.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봄)

여기서의 <봄>도 <행복을 기대하는 희망의 시절>이 될 것임은 당연하지.
봄을 '너'라고 불렀으니 <의인법>이 쓰였단 건 초딩도 일 거고. 

시대가 얼마나 어두우냐면,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라고 했어.
도무지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참혹하게 춥고 어두운 시대겠지.
그렇지만 2행에서 <너는 온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아마 너는 올 거야... 이런 추측이 아닌, 단정. 

근데 <희망>인 <너>는 빨리 오지 않고 자꾸 게으름을 부려.
뻘밭,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한눈 팔고, 싸움도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대. 

그러다 보면, 혹독한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지.
4.19때 마산에서 고1이었던 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오르기도 했고,
1987년 민주화 투쟁때는 경찰의 고문에 의해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고 박종철 군이 희생되기도 했어.
6월 9일에는 연세대 앞에서 고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지.
이렇게 다급한 사연을 들고 바람이 달려가서 <희망>의 <봄>을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온대. 

그렇지만, 금세 오진 않아.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더디게 오긴 하지만 <마침내> 올 것은 온다는 것이지. 그것이 자연의 섭리고, 세상 이치란 거야.
사필귀정. 모든 일은 올바른 쪽으로 귀결된다는 것. 

만약에, 만약에... 더디게 더디게 올 희망의 <봄>, <민주화>를 맞게 된다면 말이야.
눈부셔서 바로 쳐다보며 맞을 수도 없을 거고,
뭐라고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지도 않을 거래.
그래서 겨우 두 팔로 껴안아 볼 거라고... 간절한 기다림을 나타내고 있는 시란다.
주제라면 <희망의 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정도가 되겠지.  

아빠가 아는 <기다림>의 최고봉은 역시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야.
한번 읽어보고 설명을 좀 읽고, 다시 시를 읽어보기 바란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화자는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하고 기다려.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니까.
그런데, 그 기다림은, 마음의 조바심을 동반해.

시에서 가장 흔히 쓰는 게 시각이라는 감각이지.
이 시에서 기다림을 어떤 감각을 사용해서 표현했는지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가슴이 '애리는', 가슴 속이 알싸하게 뒤집혀지는 듯한 통증을 호소해.
기다림의 간절한 조바심을 촉각적으로 표현한 거지.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아, 얼마나 간절한지, 몇 글자로 다 보이지 않니?
어려서 부모님 오시길 간절히 기다리다보면, 형제들끼리 이제 정류소 왔다, 전봇대 돌았다, 슈퍼 앞이다...
이러고 기다리잖아.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너였다가, 너였다가... 다 너로 보이는 경지.

'사랑하는 이여'란 부름을 기점으로 화자의 태도는 '기다림에 조바심내는' 수동적 태도를 버려.
이제 화자도 그대에게 가기 시작하지.
적극적 태도와 능동적 자세로 그대에게 다가서는 거야.

아직 너와의 거리는 멀겠지만, 그 아주 먼 데서 부터 나는 너에게 가기 시작하고
아주 오랜 세월 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고 그래.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이런 거.

우리의 만남은 <금세>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거리는 <아주 먼 데>기 때문에, 아주 먼 데서부터 서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아주 오랜 세월>동안 <천천히> 다가서는 기다림의 자세를 마치 마음공부하듯 스스로를 잡도리하고 있어.
네가 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일은 못견디게 힘든 일이지만,
내가 천천히 먼 훗날을 내다보며 다가가는 일은 힘겹지만은 않은 일이 되겠지.  



자, 여기서 퀴즈, 하나! 
위의 시를 쳐다보지 말고, 이 시에서 '문'이 몇 번 나왔을까?
퀴즈, 둘!
그 문은 어떤 어떤 문이었을까? 

정답은 퀴즈 1번.
     세 번.  

퀴즈 2번의 답은,
      문을 열고,  
      문이 닫힌다,
      문을 통해... 이런 문이야.  

기다림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작가는 '문'을 등장시킨 거야.
그 세 번의 문은, 처음엔 자꾸 열려.
아, 미치겠어.
저 문이 열리면 우리 임이 오시려나.
아냐, 다음 문이 열리면 오실거야... 조바심, 심하면 쓰러지지. ㅎㅎ 

두번째 문, 이제 닫힌대. 으--윽, 좌절하지. 닫힌 문 앞에서.
님은 갔슙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슙니다...
기다리던 문이 닫혔을 때, 아, 그 기분은 얼마나 참담하겠니. 

그렇지만, 거기서 끝이면, 시가 아니지.
일기고, 낙서고, 절망의 기록일 뿐이겠지.
여기서 세 번째 문, 통하는 문이 등장하는 거야.
네가 닫혀있지만, 내가 가려고 맘먹고 달려들면, 너는 통할 거야! 이런 희망이 보일까? 

황지우가 이 시를 쓰던 시절은 서정주가 좋아하던 전두환이 독재를 하던 때였어.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 그걸 닫힌 문으로 형상화했을 수도 있단다.
그러나, 닫힌 문을 보고 그저 눌러앉아버리면 슬프지.
희망이 없으니까.
그 문을 통해 이성부의<봄>에서 더디게 더디게 오던 속도로,
<아주 먼 데서>, <아주 오랜 세월을>, <천천히> 오고 있는 민주화라면, 열린 세상이라면,
그 세상을 기다리는 일에도 마음 조급해 하기만 해선 안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

오늘은 신동엽의 <봄은>, 이성부의 <봄> 그리고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통해서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 봤단다.
시를 읽으면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고 느껴도 전혀 문제는 없어.
그렇지만, 그 시가 어떤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탄생한 것인지를 알고 읽으면
또 다른 굵직한 의미가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어서 이렇게 풀이를 달았단다. 

민우가 기다리는 <봄>은 어떤 걸까?
너희 청소년기를 <사춘기>라고 하잖아.
<청춘을 생각하는 시기>
곧 봄을 기다리는 시기란 말이지.
그저 겨울만은 아니고, 그렇지만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시절.
이런 시들을 통해서
더디게 더디게 오는 봄,
그렇지만 꼭 오고야 말 봄에게
민우도 조금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게도 되는구나.  

가을이 가고 봄이 오는 시절의 반복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나무의 속에는 여름에 부쩍 자라고 겨울에 느리게 자라서,
여름엔 성글고 밝은 조직을 만들고 겨울엔 조밀하고 어두운 조직을 만드는 원리가 자연의 섭리잖아.
나이를 먹고 어린이가 <성장>하고
청소년기의 <성숙>을 넘어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기.
겉으로는 모두 같아 보이지만,
저저마다 속으로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이테. 한자로 연륜(年輪)을 생각해 보자.
마음의 나이테,
생각의 나이테를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딧불이 2010-11-30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수업에서는 모든 시가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수렴되는 느낌이 듭니다. 시를 먹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민우를 생각해보게 되네요.

글샘 2010-11-30 21:54   좋아요 1 | URL
성숙의 밑거름이 조금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쓰고 있답니다. &^^
 

어휴 =3=3 
내일이면 드디어 올해 수능날이구나.
한국이란 특수한 사회에서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들어가는 가장 큰 관문이란다. 

민우가 다음 차례인 건 알고 있겠지?
공부는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게 아니야.
제일 중요한 건,
공부를 왜 하는지... 그걸 아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려고 공부하는 것.
좋은 대학을 가서 돈을 남들보다 많이 벌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필요하기도 하지만, 욕심이 지나치면 끝이 없는 것이란다.
민우가 네 앞길을 즐겁게 살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필요하면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경험을 얻는 것도 중요한 것 같거든. 

아빠가 수능 준비로 바쁘다 보니 며칠 쉬었구나.
오늘부터 며칠간은 '김수영, 신동엽'과 같은 1960년대 '독재에 저항한 시인'들과
'신경림'처럼 민중의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 시인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 시인들은 서로 뒤섞이면서 설명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우선 김수영의 '풀'을 한번 읽어 보자.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아주 유명한 시다.
간단한 3연의 시이고, <풀과 바람>의 대결을 보여주는 시다.
바람(동풍)은 당연히 억압하는 세력이고,
풀(풀뿌리)은 당연히 억압당하는 민중을 상징하는 시다. 
바람의 억압과 풀의 수난이 계속 <반복>되는 표현을 쓰고 있지. 

이 시에서 <풀>과 <바람> 중에서 더 능동적인 존재는 누구일까?
즉, 시적 화자가 <주인공>으로 상정한 것은 풀일까? 바람일까? 

그것은 이 시의 동사를 보면 일 수 있단다.

눕는다 - 운다 - 일어난다 - 웃는다 

이 시의 <풀>은 이런 네 가지 서술어로 상황을 그려내고 있지.
곧, 바람의 억압에 눌려 <눕는> 상황,
그래서 고통스럽게 <우는> 상황.
그러나 거기서 꺽이고 마는 풀이 아니라, 굳세게 의지를 가지고 <일어나는> 상황과
마침내 승리하고 <웃는> 상황까지 상징하려 한 시겠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독재를 시작한 박정희 군사 정권의 억압은 무서운 것이었단다.
그 아래 짓밟힌 민중의 <생명력>을 드러내려고 한 시가 이 '풀'이란 시야.
군사 독재에 반항하는 시를 쓸 수 있었던 시인은 소수였단다.
대부분의 문인들은 <순수>한 글을 쓰겠다고 하면서 도피하고 말았지만,
몇몇 시인들은 현실에 <참여>하는 시를 썼지.
(현실 참여를 영어로 engagement라고 하고 불어로는 앙가주망이라고 읽는단다.) 

물론 군사 독재 정권은 이런 <참여 시인>들을 억압했지만...
문인들 중에서도 큰 상을 주고 유명한 언론사에 글을 싣는 사람들은 역시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쪽이었다.
<참여>시인들은 몇몇 잡지들에 글을 싣곤 했지.
전쟁 이후의 어두운 한국 현대사가 시 안에도 가득 들어있단다.
그 어둡던 시대, 그래도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했던 시인, 그의 눈빛은 참으로 형형했지.
이 시에서 생명의 <끈질김>을 가장 강조한 시어가 뭐였을까?
바로 <풀뿌리>야.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였을까...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 폭포) 

앞의 시 '풀'이 민중의 생명력과 저항을 그린 시라면,
이 시 '폭포'는 민중보다는 <곧은 정신>을 가진 '지식인'을 그린 시에 가깝겠구나. 

이 시에서도 '떨어진다'는 표현이 계속 반복되고 있지.
지식인은 <줄기차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는 강조겠지? 

<순수>란 이름으로 <소심한 지식인>의 굴레에 갇혀있던 사람들에게 큰 울림은 준 시겠지.
<저항>하지 않고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면 평화롭게 먹고사는 나날을 유지할 수 있지만,
독재 정권에 맞서는 순간,
큰 수레바퀴에 맞서려는 사마귀처럼(한자로 이런 걸 '당랑거철'이라고 하지) 박살나기 쉬웠다. 

그렇지만, 폭포처럼...
그 높은 데서 떨어져서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르짖는 <곧은 소리>의 중요함을 시인은 알았다. 
나쁜 놈들은 상대가 <무서워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지.
그렇지만, 약한 상대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저항>하면 강한자도 두려울 수밖에 없단다. 

2연의 <고매한 정신>이 그런 <저항의 정신>이겠다.
3연의 <밤>은 <독재 시대, 어두운 시대>의 상징이겠지?
4연에서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지식인의 외침은 다른 사람들도 '곧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이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말이지.

독재 시대일수록 권력에 아부하면서 세상을 왜곡하는(곡학아세) 지식인들은 높은 자리까지 오르기 쉬웠단다.
그래서 <나태(게으름)>해지고,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었지.
그렇지만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나타와 안정을 뒤집>고 사는 것이라고 시인은 외치고 있단다.
그 높은 곳에서 두려움없이 아래를 향하여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보고 말이야.
<폭포>와 <지식인> 사이의 유사점이 떠오르지? 그런 것을 <은유>라고 그래.
지식인은 폭포와도 같다... 이런 것.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이 시도 역시 '참여' 시인으로 불리는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다.
이 시에서도 반복법이 등장하지?
강렬하게 바라는 마음이 강조되는 수법이란다. 반복법. 

껍데기는 뭐고 알맹이는 뭘까?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의 독재, 전쟁과 분단, 외세의 정치 개입, 정치적 혼란...
이런 부정적인 사회적 상황들이 '껍데기'가 되겠지...
그럼 알맹이는?
독재가 아닌 '국민을 위한 공화국의 운영', 평화로운 나라, 외국 간섭없는 '자치적 국가', 정치적 안정... 이런 것. 

1연에서 '4월'을, 2연에서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이 '알맹이'였단다.
4월 혁명(1960. 4.19)의 반독재, 민주 회복의 정신
동학 혁명(1894년)의 반외세, 반봉건, 인간 평등의 인내천 정신
양반이나 귀족만의 세상이 아니라 신분없이 계급없이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정신. 

원시 시대처럼 '문명'과 '문화'의 이름을 걸치지 않은
순수한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듯,
<국가>나 <이념>의 이름으로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껍데기를 벗어 버리자는 정신.
너희 나라, 우리 나라, 이렇게 편가르지 말고,
자본주의, 공산주의 이렇게 나뉘지도 말고,
<중립>의 초례청에서 맞절하는 신랑신부처럼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기를 바르는 마음. 

그 강렬한 마음이 마지막에서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길게 늘이고 있지! 강조!! 

4. 19는 그렇게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잠시 승리했던 <뜨거운 첫 키스>의 추억과도 같은 것이었단다.
4. 19때 초등학생이 쓴 시가 있다. 한 번 읽어 보렴.

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

                                             서을 수송국민학교 제4학년 5반 강 명 희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 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 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 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 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 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 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19일
그리고 25일과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 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초등학생도 마음 아프게 세상을 노래하던 무서운 시대였지.
그러니 <폭포>처럼 목소리를 내야 했던 지식인도 억압을 받았고,
<풀>은 바람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단다. 

4.19는 계속되던 이승만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독재의 종식을 요구하던 혁명이었다.
마산에서 고등학교 1학년 고 김주열 군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시신이 떠오른 이후
전국적으로 더 번져갔던 혁명은 4.26 이승만의 도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라던 좋은 세상이 오기엔 아직도 세상이 어두웠단다. 

전에 유치환의 <깃발>을 하면서 '달려갈 수 없는 마음'을 깃발에 비유했다고 했지?
유치환이 좋아했던 시조시인 이영도의 '진달래' 역시
4. 19에 희생되었던 학생들, 젊은이들에 대한 추모 시였단다. 한번 읽어 보렴.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진달래, 이영도) 

 

좋은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단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도 같다는 말이 있어.
고 노무현 대통령 묘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는구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왜 국민이라고 안 하고 시민이라고 했을까?
국민은 또 너희나라, 우리나라 하고 싸우는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민은... 평범한 민중을 표현한 말인 것 같아.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풀뿌리처럼 굳세게 저항하고 싸워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란다. 

내일은 수능날이라 글쓸 시간이 없을 것 같고, 모레쯤 시간 내서 다시 김수영과 신동엽 2탄을 이야기할게.
날이 차다.
건강 조심하고,
귀한 휴일에 공부를 왜하는지 곰곰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0-11-18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들도 같은 2학년이라 주시는 말씀을 먹게 해야겠어요.
술술 읽히고 공부도 잘 되네요. 고맙습니다~
하루 쉰다고 클림트의 500피스 퍼즐을 갖고 제방으로 들어갔어요.^^

글샘 2010-11-21 21:01   좋아요 0 | URL
우리 아들은 친구랑 찜질방 간다고 갔다더군여. ㅎㅎ

turk182s 2010-11-23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벌써 아드님이 고2신가요? 수험생 아들두신 기분이 좀 복잡미묘하시겠어요,,
전 아직 장가도 못가 앞으로도 자식둘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대입말고도 인생은 긴데..딱히 사회가 그 이후에 삶을 얘기해주지않아서 문제인것 같아요.

글샘 2010-11-24 21:05   좋아요 0 | URL
네. 헐~ 입니다. ^^
복잡하진 않습니다. 공부는 제가 하는 거니깐요. ㅎㅎ
그 이후의 삶은 그때 가봐야 아는 거구요.
제가 후회하지 않게 변명하려고 글을 남기는 겁니다.

반딧불이 2010-11-2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신동엽-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의미있는 수업입니다. 글샘님께서는 수능때문에 바쁘신 동안 저는 하는일 없이 바빠서 공부가 많이 밀렸네요.

글샘 2010-11-24 21:05   좋아요 0 | URL
의미있는... 수업이라니 감사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그런 사람이 많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을 기르기 참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