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시인의 시들은 조용하다.
그렇지만, 시를 읽고 나며 왠지 마음 속에 아련한 여운이 남는단다.
그래서 나는 장석남의 시를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그의 '번짐'부터 읽어 보자꾸나.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수묵정원 9 - 번짐> 

처음에 '목련꽃이 번져 사라지고'라는 구절이 있다.
목련꽃이 물감 번지듯 번지는 것이 아니지.
목련은 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인데, 그 바뀜을 화자는 <번짐>이란 멋진 말로 치환했구나.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좀 우스운 말이지.
어제까지는 <봄>이고 오늘부터는 <여름>이다.
이런 사고를 바뀜이라고 한다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계절이 바뀌었구나... 이런 생각을 <번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구나. 

계절보다도 더 <번짐>이 적절한 표현이 바로 인간관계라 볼 수 있지.
내가 너에게 영향을 미치고, 네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명확한 관계라면 세상 참 편하겠지만,
사실 인간 관계는 그렇지않지.
옷깃이 스치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그 사람들과 감정이 얽혀 있는데, 그걸 '번짐'이라고 표현하니 참 아름답구나.

화자는 <번져야 살지>라고 말한다.
꽃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어야 생명이 진행되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 또 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음악과 그림 역시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야.
음악을 들으면 마음 속에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풍경'하나 떠오를 수 있고,
그림을 봐도 멋진 음률이 마음 속에 자리할 수 있단다.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도,
여기까지는 삶이고, 이제부터는 죽음이다. 이렇게 경계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삶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 뒤에도, 그 사람의 삶은 환하게 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이름은 출세한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아름답게 사람들에게 추억되는 이름일 수도 있고, 또 욕을 퍼먹는 이름일 수도 있겠지.

시간이 흐르는 것도 번짐과 같다.
어떨 때는 또렷하게 시간의 구분이 지어지지만,
어떨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뒤바뀌어 있기도 하지. 

화자는 세상의 이치를 '번짐'이란 단어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란다.
주제는 <번짐을 통하여 살핀 세상의 이치>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
세상의 이치, 세상의 사랑이란 언제나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번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시를 한 편 보자.
복효근의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이라는 시다.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복효근, 토란 잎에 궁구는 물방울 같이는> 
 

 하트 모양으로 생긴 토란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아름다운 언어들과
사랑을 거기 밀어 넣었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를 어렵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힘이아닐까 한다.
문학을 가르칠 필요 있을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떨 때는 철학적인 생각과, 역사를 한 편에 담고 있는 것이 문학일 수도 있단다. 

그의 <시론>을 읽어 보자.
장석남의 '시론'은 잔잔한 물과 같다.
낮고, 고요하면서, 샘물이면서 갈증 그자체인... 시인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

시에도 자원이란 게 있다면 그건 물
맛있는 물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한번 더 낮게
조용히

시에도…… <시법(詩法) - 샘물이며 갈증인>

 

시를 쓰는 일은 그만큼 절실한 표현의 '갈증'이 있을 때이다.
그리고, 맛있는 물처럼 그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시>의 효용이기도 하다.
철학자의 웅변처럼, 역사가의 사변처럼 명확한 교훈을 드러내주지 않지만...
문학은
이끼 낀 돌처럼 조용히,
그리고 낮게
조용히
사람의 갈증을 채워주는 힘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일은
사람을 읽는 일이고, 세상을 읽는 일이다.
사람과 세상을 읽는 일을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세상 살이를 <문화>라고 부르니 말이다. 

사람과 세상살이를 읽는 문학을 읽는 일도 그래서 때론 의미가 깊숙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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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날이 유난히 차구나.
겨울이 추우면 그해 풍년이 든다니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는 법인 모양이다. 

오늘은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같이 읽어 보자.
시인은 신경림의 '농무'가 노래하던 1970년대, 노동자의 삶을 이 시에서 이야기하고 있단다.
독재시대의 산업화는 농촌의 몰락을 예고하였던 것이었고,
도시로 도시로 몰려나온 농민들은 도시 빈민의 하층민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삶의 팍팍함 뿐이었을 것이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는 고된 노동자의 삶의 모습을 한번 느껴보기 바란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처음 시작이 좀 슬프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물뿐이 아니란 이야기지.
그럼 물뿐 아니라 무엇이 더 흐를까?
시간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인생도 흐른다.
바로 <우리>가 저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지.
늙어버린 노동자, 노가다 인생의 삶이 휘리릭 흘러갔는데,
남은 것이라곤 한숨 뿐인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일이 끝났는데, 강물은 어둠 속에서 깊이를 알 수 없게 놓여 흐르는데,
무기력한 노동자는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라고 했다.
참 무능력해 보이는 모습이잖니? 

노동자의 생애가 저물고 저물어, 흐르고 흘러 늙어버렸다.
하루가 저물고 저물어, 이제 샛강 바닥 썩은 물에도 달이 비친다. 
샛강은 강이 섬을 지날 때 좁아진 '사이'에 흐르는 물을 뜻한다.
얕은 물이겠지.
썩은 물에도 달이 비친다는 것은,
한편 희망적인 빛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물이 썩어버렸는데 달이 비친들 무엇하냐는 자조의 씁쓸함도 묻어난다. 

슬픈 노동자는 저와 같아서,
바로 썩은 강물과 같고,
거기 비친 슬픈 달빛과 같이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다시 가난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은 어두운 길이다. 부정적 현실이 어두움으로 표현되었구나. 

소외받은 도시 빈민의 삶을 담담한 어조로 풀고 있는 시다.
강물에 고뇌를 퍼다 버리려고 했으니 무언가 고뇌를 해소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썩은 강에 비치는 달빛처럼 무기력한 현실은
노동자의 비애를 해소하지 못함을 반영하기도 한다.
무기력하게 '돌아갈 뿐'인 소극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힘겨운 인생들...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다.

이 시가 담고 있는 주된 정서는 무력감(우울감, 실의) 같은 것이다.
주제는 <도시 빈민의 삶의 비애>를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지.

다음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라는 시를 한번 보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골목길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 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이 시는 '만남'을 간절히 희망하는 시다.
그 간절한 바람의 주체는 '한 그리움'이라고 했고, 바람의 대상은 '다른 그리움'이라고 했다.
간절한 바람의 내용은 <만남>이니
분단되어있는 <남북의 만남>으로 읽어도 좋겠고,
서로 단절되어 있는 <계급적 갈등의 해소>로 읽어도 좋겠다.
아니면 <세대간 갈등의 해소>로 읽어도 문제가 없다.
암튼, 지금은 헤어진 대상들의 '만남'을 희구하는 시라보면 되겠다. 

날과 씨는 베틀에서 나온 용어란다.
베틀에는 '날실'이라는 줄을 세로로 죽 묶어 두고는
그 날실에 엇갈리게 '씨실'을 건 것을 기본으로 하여 시작한다.
베틀을 움직이면 '씨실'이 압축되고 그 사이로 실꾸리인 <북>을 통과시켜 다시 '씨실'을 압축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베올에 북 지나듯' 하는 구절은 (규원가)에서 세월이 훌쩍 빨리 흘렀음을 형용한 것이었지. 
씨줄을 한자로 '위'라고 하고, 날줄을 한자고 '경'이라고 한다.
지도의 '위도'와 '경도', '위선'과 '경선'이 거기서 나온 용어지.

날과 씨가 만나 옷감이 되듯,
그렇게 너와 내가 만나기를 바라는 노래다.
우리의 만남이 '비단'처럼 가치있는 것이 된다면 나는 기다릴 것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서로 마음을 나눈다면 추위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는 화자.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 있다면> 이렇게 가정법으로 마친다.
그것은 곧,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희망의 간절한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이 시는 별로 어렵지 않지?
<아름다운 사랑의 승화>를 위하여 지금 <인고>의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지'도 드러나 있어.
<추운 겨울>이니깐, 고통의 계절을 지나고 있음도 알 수 있고 말이다.

이 시의 주제는 '고통의 인내와 재회를 위한 기다림' 정도로 보면 되겠다.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사람'이든 시련을 견뎌야 하는 것인 모양이구나.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정희성은 이렇게 험한 세상을 조금 다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시선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부정적 현실에 대한 시를 썼다고 해서 '참여시인'으로 보기도 한단다. 

날이 요즘 제법 차다. 감기 조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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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1-2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외우고 읽고 하던 시들을 오늘 다시 보니,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샘 2011-01-26 16:4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문학 소년, 소녀 아니던 시절이 있었나요. ㅎㅎ
옛날 것을 우연히 만나면 좋죠.
저야 뭐, 밥줄이라 맨날 만나는 것들이지만 말이죠.
방학 잘 보내고 계시죠?

순오기 2011-01-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시인이 반갑네요~~
추운 날에도 열강중이신 글샘님도 평안하신가요?^^

글샘 2011-02-01 23:10   좋아요 0 | URL
저야 맨날 시를 가르치니깐 만나지만 일반인들이야 시인들 만나기 쉽지 않죠?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님도 설 잘 쇠시길...
 

오늘은 80년대를 풍미했던 최승호의 시들을 살펴 보자.
최승호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가 '대설 주의보'일 것이다.
한번 읽어 보렴.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대설주의보)

1979년에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80년에 민주화 기운이 무르익던 시절,
광주에서 총칼로 민중을 제압하고 다시 군인 독재 시대가 열렸다.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내세운 '민주 정의당'이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그 시대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고 민주주의가 퇴보한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대설' 곧, 큰눈은 그런 무시무시한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큰눈이 올 것을 예보하는 대설주의보.
결국 시련의 계절이 앞으로 닥칠 것을 예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는 것이 시임을 드러내고 있다. 

백색의 산들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친다.
제설차가 와서 눈을 치워준다면 좀 나아질 텐데...
눈보라 속에 '쪼끄마한 굴뚝새'가 하나 날아간다.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을 비유한 것 같다. 

산 속엔 길 잃은 등산객들도 있을 것 같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는데... 등산객들은 고립되고, 외딴 마을도 고립된다.
힘찬 눈보라를 '군단'이란 군사 용어로 표현했다. 군사 독재의 냉혹함이 드러난다.
'백색의 계엄령'에서 눈의 본질이 그려졌다.
계엄령은 당시에 툭하면 내려지던 것으로,
국가가 혼란스러워지면 계엄령을 내릴 수 있다.
대신에 국민의 모든 권리는 제지당할 수 있지.
아무나 감옥에 처넣고 고문하는 시대가 계엄령이 내려진 시대다.

쪼그마한 굴뚝새가 솔개라도 있는지, 몸을 감춘다.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도 민중과 같다.
소나무도 눈더미의 무게를 못이겨 부러진다.(이렇게 눈의 무게로 부러진 나무를 설해목이라 한다.)
시련은 계속 되는 것이다.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집은 '때'라는 발음이 반복된 언어 유희에 해당한다.
한 때 먹으려고 밥이라도 안쳤는지 굴뚝에 연기나는데,
그 배경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보라는 계엄령처럼 냉혹하다. 

이 시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군사 독재, 계엄의 시대)를 대설주의보와 눈보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해설가 조남현은 이 시를 통하여 그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겨울에 눈 내리는 현상은 당연한 자연적인 현상이자 우주의 섭리이다.
따라서 눈이 내리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눈은 평범한 일상적 현상으로서의 눈이 아니다.
여기서의 눈은 해일처럼 굵은 눈발을 휘두르며 천지를 삼킬 듯이 내리는 눈이다.
그것은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온 산을 백색으로 물들일 듯 거칠게 내린다.
이러한 흉폭성은 자연을 파괴하고 그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동식물들의 삶들을 제압하고 위협하기 시작한다.
굴뚝새를 '쬐그마한 숯덩이'같이 초라하게 만들고 서둘러 뒷간에 몸을 숨게 만드는가 하면,
삶과 삶을 연결시키는 '길'을 끊어 놓기도 한다.
또한 온갖 산짐승을 굶주리게 하고 소나무 가지를 부러뜨릴 정도의 위험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비록 이 시는 시대적 상황을 눈 내리는 일상적 현상에서 읽어 내며 그 비극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에서 보듯
이 시대를 이겨내려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다음엔 시험에 잘 나오는 같은 작가의 '북어'를 읽어 보자.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북어(北魚))

밤의 식료품 가게에서 '밤'은 곧 부정적인 시대를 상징하곤 한다.
김수영의 <폭포>에서도 '밤'은 어두운 시대였다. 

북어는 말린 명태를 일컫는다.
위의 사진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마치 그렇게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북어를 통해 대변하고 있다. 

그 북어들이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 있다.(1쾌는 20마리란다.)
분대는 군대에서 쓰는 용어다. 분대가 모여 소대가 되고, 중대, 대대, 연대, 사단 이렇게 커진단다.
군대에서는 창의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도 마찬가지란다.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은 억압당하고,
모두들 굳어버린 북어처럼 획일적으로(나란히) 살 수밖에 없던 현실을 비판한 것이지.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는 주체적 삶을 상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보인다.
그 대가리들의 '혀'는 자갈처럼 딱딱하다.
언론의 자유가 없던 시절...
그래서 '말의 변비', '무덤 속 벙어리' 처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이며,
'빳빳한 지느러미'로는 주체적으로 헤엄칠 수 없는 몸이다.
'막대기 같은 생각' 역시 비판적인 사고력을 무시당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게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 상념에 빠진 화자는 갑자기 주체가 자신에게 돌아선다.
그 전까지는 '독재 시대에 사람들이 다들 획일적으로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반성해 보니 '나도 역시 그들과 같은 북어'일 따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느닷없이>에서 시상이 전환되고 있다.
시적 관심이 북어와 사람들에게서 <자신, 화자>에게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당혹스럽게도 환청이 들린다.
북어들이 '너도 마찬가지지?'하는 고함을 치는 것처럼 말이다. 

획일적인 군사 독재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북어'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 비판적 내용이 자기 반성적인 부분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지.

시적 화자의 진지한 모색이 독특한 발상을 통해 드러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우리도 늘 남들을 비평적 시선으로 보기 쉽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그 비평은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1980년대 어두웠던 시절의 시들을 두편 보았다.
지금이라도 그 시절보다 무척 밝아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도 같다는 말이 있단다.
민주주의는 여러 사람의 주체적인 인식과 실천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이겠다.
민우도 시를 읽으며 시대를 읽는 눈도 키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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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1-01-2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감상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_()_

글샘 2011-01-25 14:23   좋아요 0 | URL
좋은 시야 뭐, 애들 문제집 들쳐보면 가득한걸요. ^^
애들은 그걸 문제라고 읽으니 문제지만 말입니다.
 

김기림의 시는 요즘 사람들의 감각으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시 감각에 경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갔던 감각을 가졌던 시인이니, 그 당시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자기 성씨를 바꾸고 연예인들이 예명을 쓰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1930년대에 김해경이란 사람이 자기 이름을 '이상'으로 불렀던 것은,
요즘 어떤 사람이 자기 예명을 '싸이(미친 놈)'라고 부르는 것과는 천지차이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감각적인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저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가을이,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길)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소년 시절을 되돌아 보는 일은 새로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이처럼 감각적으로 도드라져 보이기도 어려운 일이다.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언덕길'은 정말 상상화로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런데 거기 '어머니의 상여'가 놓여 있으니,
슬프고 좌절스런 어두운 그늘의 소년 시절을 금세 떠올릴 수 있겠다. 



첫사랑도 금세 떠올랐다 사라지는데, 그것도 시각적으로 감각화하는구나.
'조약돌처럼 집어들었다가 잃어버린 첫사랑.'

그래서 화자는 혼자서(호저) 시도때도 없이 그 길을 넘어간다.
강가로 내려갔다 돌아오는데, 또 감각적으로 노을에 함빡 자줏빛으로 젖어서 왔단다. 
'노을'과 '놀'은 함께 쓰일 수 있는 복수 표준어란다.
그리고 여기서 '노을'에 '젖은' 것은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제 세월이 많이많이 흘러갔다.
그렇지만...
화자의 마음은 아직도 '어두움'이 남았다. 그래서 몸서리치며 자랐다.
마치 몸이 '감기'를 앓았던 것처럼, 마음도 '감기'를 앓았다.

고향의 버드나무, 오래오래된 그 버드나무,
밑에서
화자는 '어두움'의 근원인
어머니와
계집애를
멍하니 기다린다. 

화자에게 '어둠'은 소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어둠이 화자의 슬픔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이제 세월이 지난 뒤,
그 어둠이 뺨의 얼룩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건... 화자의 생에 낙인처럼 각인된 그 어두움이
어린시절의 가장 깊은 추억으로 남아,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마음 속 아련한 추억으로 살아나면서 삶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것이기도 하단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시에서 화자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뭘까?
화자의 '길' 위에는
어린 시절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와 '소녀'에 대한 추억이 깔려있다는 것이고,
그 '어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좀 슬프고 가슴이 싸한 애상이란 것이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를 지나 살아온 시인의 삶에는
왠지 서러운 삶이 가득했을 것 같구나.
그래서 화자는 그 서러운 길을 걸어온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길'로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 '바다와 나비'는 그 험한 세상에 대한 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세상은 '의지'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자는 멋도 모르고 세상으로 뛰어든 '공주'와 같은 존재였지. 

아무도 바닷속의 수심을 일러주지 않아서,
흰나비인 화자는 세상으로 뛰어들었던 거다.
푸른 무(옛날엔 '무우'로 표기)밭인 줄 알고 뛰어든 곳에선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곤 했던 것이고,
공주같은 나비는 지쳐서 돌아온다.  

꽃이 필 듯이 봄이 오는 3월달인데,
바다엔 꽃이 피긴 커녕 찬 파도만 일렁인다.
그래서 서글퍼진 나비 허리에 초생달이 걸렸는데, 마음은 시리고 시리다. 

여기서도 감각이 아주 날카롭게 살아있구나.
'새파란 초생달'은 시각적 표현인데, '시리다'고 했으니 촉각적으로 표현했다.
시각의 촉각화. 역시 공감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이렇게 화자의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 1930년대 시인들의 특징 중 하나란다.
김광균처럼 '공감각'을 많이 사용한 시대이기도 했지. 
모더니즘이란 것이 이렇게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려한 특징을 가졌단 것을 기억해 두자꾸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우리 집처럼 평온하리라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는
깜짝 놀라는 공주처럼 당황스럽게 만나는 곳이 세상이기도 하다.
민우가 기억하는 '길'이 김기림의 시처럼 '어둠'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민우가 '나비'처럼 깜놀~하는 세상을 놀라움으로 만나지 않기도 역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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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분단에 대한 노래를 하나 불러 보자꾸나.
한국은 참 슬픈 나라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지냈고,
해방 이후에도 오히려 미군의 식민지가 되어 아직껏 분단의 한을 품고 있는 한국. 

독일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를 뒤집어써 분단되었지만 이미 20년 전에 통일이 되었건만,
조선은 어디가서 전쟁 한 번 제대로 일으킨 힘이 없던 나라인데, 아직도 분단의 슬픔을 안고있다.
분단이 우리에게 주는 피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사는 모든 곳에 속속들이 피해가 사무쳐 있단다. 

국가가 못사는 것도 다 국방비 때문이고,
학교가 팍팍한 것도 다 분단으로 인한 섬나라이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고 좀더 자유로운 나라가 된다면...
그렇지만, 미국이나 일본이나 강대국들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단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한족과 56개의 소수부족으로 이뤄진 나라인데,
한국이 통일이 되고, 조선족이 독립을 선언한다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무너질 가능성이 크지. 

그래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나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자,
통일을 대비해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통합하려고 난리를 친 거지.
사실, 고구려 땅은 중국과 한국에 걸쳐 있는 것이니,
근대 국가가 세워지기 전의 역사 정도야
그 역사를 어느 쪽에 넣어도 큰 잘못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통일로 인한 중국의 흔들림은 파장이 컸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암튼, 통일과 분단의 문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같다.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직녀(織女)에게)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서 더 유명해진 노래다.
나중에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들어 봤겠지? 
천상의 견우는 목동, 직녀는 베짜는 처녀였대.
둘이 너무도 일을 잘하는 모범생이어서 옥황상제가 둘을 짝지어 줬단다.
근데... 이것들이 짝을 지어두고 나니 도무지 일을 안 하더란다. ㅋ
둘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짝 달라 붙었던 거야.
그래서 옥황상제가 은하수 건너 견우와 직녀를 떼어 두고는
1년에 한 번. 7월7석날 만날 수 있게 했단다.
그런데 그날이면 은하수가 너무 멀어서 만날 수가 없었는데,
까치와 까마귀가 다리를 놓아, 오작교라 부르는 다리를 건너,
곧, 까치와 까마귀 뒤통수를 밟고 만나서 눈물을 흘렸다는구나.
그래서 음력 7월 7일은 그들이 만나서 흘린 눈물로 비가 많이 온대.
그리고 그 무렵 까막 까치들은 뒤꼭지에 털이 숭숭 빠져 있대. ㅋ
그리고 그들이 흘린 눈물로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단다. 

이 전설의 주제는 뭘까?
사랑을 해도 결코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이런 거 아닐까? 

은하수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장애물이지.
곧 남북의 분단을 뜻한단다.
남북은 분단되어 있지만, 만날 가능성이 있어. 뭐를 건너서?
바로 오작교지.
노둣돌은 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에 발돋움하기 위하여 대문 앞에 놓은 큰 돌이야.
(하마석이랑은 달라. 조선이 하도 불교를 멸시하자,
절간의 입구에 '하마비'를 세워두고, 거기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고 만든 게 하마비란다.)  

긴 기다림으로 가슴이 아픈 이별을 한 두 사람. 두 나라는..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가슴 딛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이 노래의 희망이란다. 

시의 어조는 강렬한 호소력이 강한 목소리지.
이렇게 현실적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노래를 '참여시'라고도 한다.

주제는 뭐겠니?
남녀의 만남, 남북의 만남, 곧 통일의 희망이 되겠지?
지금은 이별해 있지만,
그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 작품이야.

은하수라는 '장애물'을 건너,
'노둣돌', '오작교' 같은 희망을 딛고 통일이여 오라~ 이런 노래겠지.
김원중의 노래로 노래도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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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1-1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한국전쟁 수업할 차례인데 더 아리게 들려요. 어휴.....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글샘 2011-01-20 02:07   좋아요 0 | URL
아우~ 한국전쟁 같이 무서운 걸 수업을 하시다니... ^^
팩트,라도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아이들은 워낙 무식해서, 제가 뭘 좀 얘기하면 빨갱이처럼 쳐다보곤 한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