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주는 쉬었구나.
3월 한달 바쁘면 일이 좀 줄어들 줄 알았더니,
웬걸, 아직도 학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제 모의고사를 치고 나서 좀더 열심히 하려는 자세를 가지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더라. 
민우도 의욕을 좀더 가졌을 것 같다. 

아빠가 읽은 책 중에서 '꿈꾸는 다락방'이란 책이 있어.
뭐, 자기 계발서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생생하게 꿈꾸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주제야.
'시크릿'이란 책의 주제도 그런 것이지.
이끌림의 법칙이란 거.
될 것이라고 강하게 믿으면 이뤄지지만,
안 될 거라고 스스로 비웃으면 절대 이뤄지지 않는 다는 그런 말 말이지. 

세상 일이 그런 것 같아.
늘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웃으면서 살고,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하노라면, 정말 세상은 즐거운 곳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것.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고,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즐거운 곳 말이지.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고정희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한번 읽어 보자.
다시 매일 짧게라도 글을 적어 보도록 노력할게.
아무리 바쁘더라도 때를 놓치면 안 되는 일이 있으니 말이야.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작정하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이 시는 세 연이 비슷한 길이로 이뤄져 있지.
그 첫 번째 연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어는 <상한 갈대>구나.
제목이 <상한 영혼>이니 '상처받은 존재'란 뜻인가 보다.  

상한 갈대도 하늘 아래서 한 계절 흔들린다는 건,
고통스런 세상이라도 '좀 여유롭게' 살자는 의미겠지.
세상은 그렇게 고통스런 곳만은 아니란 거.
밑둥이 잘리는 고통을 겪어도 뿌리가 깊다면 새순이 난다는 것. 

그래서 흔들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을 너무 괴롭게만 생각지 말자는 것.
갈대처럼 흔들리고 시달리더라도 꿋꿋이 버티고 나면 지난 세월 이야기할 때가 온다는 것. 

2연도 마찬가지 이야기란다.
부평초는 '개구리밥'이라고 하는 뿌리도 제대로 없는 물위에 떠서 사는 풀이란다.
보잘것 없는 존재지.
그저 바람불면 부는대로 쏠려다니는 볼품없는 수생식물. 

그렇지만 물 조금 고이면 꽃도 피운대.
세상이 아무리 가물어 보여도, 어디나 개울도 흐르고 부평초 살 수 있지.
아무리 어두운 세상이래도,
거기 등불 켜는 사람은 있듯이,
고통을 피하려고만 말고, 살 맞대고 살아보재.  

힘든 것 이겨내는 법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든 상황에 살을 맞대고 적극적으로 견대는 거지.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든 갈 수 있고,
해가 져도 잘 갈 수 있다는구나.

그래서 드뎌 3연에서는
고통과 설움의 땅을 벗어난단다.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이 박을 수 있는 곳.
그래서 꿋꿋하게 상처를 이겨내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지만,
또 그 바람이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 눈물이 영원히 흐를 것도 아니란다.
그러니 <상한 영혼>이여, 너무 삶에 좌절하지 말자~ 이런 얘기겠지. 

마지막에서 <상한 영혼>에게 큰 희망을 준다.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도 좌절하지 말라!
하늘 아래서
너를 마주잡아줄 손 하나 오고 있단다. 이러고 말이야.
박지성을 인정해줄 히딩크의 손길처럼 따스한 손길이 말이지.

세상에는 이렇게 연대할 수 있는 집단이나 인물이 꼭 있게 마련이란다.
행복한 시절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고,
불운한 시절에는 자신을 업수이 여기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다보면,
마주잡아줄 손 하나 반드시 온다.
너무 마음상해 좌절하고 꺽이지 말라는 시지. 

요즘 카이스트에서 힘든 대학생활에 좌절한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일이 있었어. 
그야말로 자신이 '상한 갈대'처럼 느껴지고,
'부평초'처럼 가치없이 느껴졌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문학의 상상력일 수도 있단다.
언젠가 너를 마주잡아줄 손 하나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힘든 일도 충분히 이겨낼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현실은 쓰라리지만,
극복할 힘마저 잃어서는 안되겠다는 의지가 강한 시란다. 

전에 한번 읽었지만,
신석정의 시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오지.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신석정, 들길에 서서 부분)

이렇게 뼈에 저리도록 슬픈 상황에서도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이 거룩한 우리의 삶의 한 순간이라니 말이야.
힘들 때,
상처받은 영혼이라 생각할 때,
이런 시를 읽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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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14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셨던 거로군요~

상처받은 것과 상한 것과 다른 의미로 다가왔었어요.
왠지 상한 그러면 썪은 우유가 생각나는 것이...

상처받는 것은 상처가 아물면 더 단단해지지만,
상한 것은 어쩔 수 없어 진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상처받은 영혼이다 싶을 때, 상한 영혼이 되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로 읽어보려구요~^^

글샘 2011-04-14 14:35   좋아요 0 | URL
傷한 갈대... '상하다'에는 썩다와 다치다, 헐다의 뜻이 다 있습니다.
그렇네요. 많이 다치면 썩을 수도 있겠군요.^^

마립간 2011-04-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질문이 있는데요. TV만화 손오공에서 근두운을 대신하는 스케이트보드를 탑니다. 사오정이 이것을 보고 날틀이라고 비행기라는 의미에서 말합니다. (제가 가끔 사용하는 단어,) 날틀은 동사 어간에 명사를 합친 것으로 우리나라 정통 조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 조어업에 관해 책 추천 좀 부탁드립니다.

글샘 2011-04-14 17:11   좋아요 0 | URL
통사적 구조(일반적 문장 구조)에 일반적인 경우가 있고, 그것을 벗어난 경우도 있는데요.
동사 어간에 명사가 붙은 '먹-거리'나 '날-틀'은 그런 예가 되죠.
조어법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구요. ^^
문법책이래도 일부분에 불과할 겁니다. 필요할 때마다 네이버 지식에서 검색하는 게 빠를 듯. ㅋ

마립간 2011-04-15 12:02   좋아요 0 | URL
답변 댓글 감사합니다.

글샘 2011-04-17 23:32   좋아요 0 | URL
우리말에 관심을 많이 가지셔서 제가 괜히 부끄럽습니다. &&
 

역사는 발전하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던 주제였단다.
역사 속에서 경제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역사가 풍족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올바른 배분의 역사가 있었던 적은 인류 역사상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한국은 1인당 국민 소득이 20,000달러가 되니 마니 하는 나라지만,
1인당 2만 달러면, 한국 돈으로 2천만원 이상 되고,
4인 가족 기준으로 연간 8천만원 이상을 벌어야 한다는 소린데,
글쎄, 부가 편중되어서 그렇게 버는 가족이 그닥 많을 것 같지는 않구나. 

오늘은 1970~80년대의 노동자들의 노래를 한번 보자.
1988년에 올림픽이 열리고, 그 전후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하여 임금인상이 상당히 많이 되었어.
그렇지만, 사장들이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넘겨주기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
더군다나, 정경유착이라고,
정치인들은 경제인들과 짝짜꿍이 맞아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동운동을 경찰의 힘을 빌려서 막곤 했단다. 

그러니 아직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적으로 많이 뒤떨어진 편에 속한다고 봐야겠지.
앞으로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더 많아지고,
한 사람이 몇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사는 시대가 점점 오고 있다고 봐야해.
그런 것이 세계화의 원리이자 결과물이지.
FTA의 결과로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부가 편중되는 것이 심화되는 일은 어쩜 당연한 거란다.
국가 전체의 이익이 많아진다고 해도, 부가 편중되는 것이 심화되면, 가난한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결과를 낳게되 되겠지. 

오늘 소개할 시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시들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반복된단다.
이런 슬픈 노동의 노래들을 다시 부를 시대가 올는지 모를 일이야.
우선 <노동 해방>의 앞자를 따서 이름을 '노해'라고 지은 '박노해'의 '손 무덤'을 읽어 보자.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박노해, 손 무덤>

이 시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있어.
그런 시를 '서사적'인 시라고 했지? 

화자는 손목을 잃은 사람을 '정형'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런 걸로 보면, 같은 노동자인 처지라고 봐야겠지.
정형은 올해 어린이날은 어린이대공원에라도 가겠다는 꿈을 꾸는,
싸구려 은하수 담배를 피우던(빨던) 소박한 노동자였단다. 

지금은 공정이 많이 자동화 되었지만,
아직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영세한 공장들은 위험천만이란다.
프레스 기계로 냄비같은 것을 만드는 공장에선 손목 날아가는 일도 흔한 일이었대. 

빨리 병원으로 후송해야 하는데,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론 사장님의 고급 승용차도 탈 수 없고,
짐차 트럭의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간대. 

화자는 기계 사이에 끼어있는 정형의 '손'을 장갑 속에서 꺼내고,
비닐봉지에 싸서 정형의 집으로 가.
봉천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산동네였는데,
거기서 정형의 아내와 아들을 보면서 손을 전하지 못했대.

하릴없이 소주나 한 잔 마시고,
산업재해(산재) 관련 서적을 찾아보는데,
큰 서점에도, 산더미같은 책 중에도, 노동관련법은 찬밥이야.
변호사들도 '노동법'은 모른대.
판사들도 '노동법'은 모르면서 되는대로 판결을 내린다더구나. 

책을 찾으러 종로엘 간 화자는 마치 미국이라도 온 듯,
세련된 남녀들의 멋진 모습에,
작업화 신은 스스로를 '탈출한 죄수'처럼 이물감 느끼며 쫄아들었대. 

한 노동자는 오늘 손을 잃었는데,
세상에선 멀쩡하게 사우나, 술집, 백화점, 야구장에서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해.
노동자들이 일할 시간에 즐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자는 비속어를 막 내뱉지.
노랫말 속에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 아, 아, 대한민국, 아, 아, 우리 조국, 아, 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이런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있었는데,
어느 재벌 총수의 첩이 되어 무슨 백화점을 하나 얻었다는 소문이 있더구나.
웃기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데, ㅋㅋ
그건 할아버지의 첩이 되어야 하는 일이라니 말이지.

화자는 자신이 <탈출한 죄수>같다가, 이번엔 <이티>같대.
그리고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와서 연장노동을 시작한대. 

아직 화자의 품 속에 있는 '손'은 식었는데,
그래서 그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담벼락 밑에 정성스레 묻어.
그 싹둑 잘린 노동자의 손을 보면서,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백수),
그들에 대한 원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대.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 화자는
노동자가 일한 만큼 대접받는 세상, 그 기쁜 세상이 될 때를 바라며,
손을 묻는다는구나. 

이런 사회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박노해는 감옥살이를 하게 돼. 한 일도 별로 없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지.
뭐, 나중에 풀려나지만.
무슨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사노맹)'이란 단체를 만들었다는구나.
그렇지만, 그 단체가 한 일은 기껏 이런 시 몇 편 노동자에게 읽히고,
파업해야할 때 파업하는 것의 정당함을 이야기한 것 뿐이지. 

5월 1일은 세계 노동절이란다.
메이데이라고 하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 중에 많이 희생된 날을 기념하는 날인데,
한국에선 '노동절'이란 말을 엄청 싫어해.
자꾸 '근로자의 날이란 말을 쓰지.
'노동자'는 '사용자'와 반대입장에서 싸우는 의미가 강하거든.
'근로자'는 시키는 대로 온순하게 일하는 의미가 강하고.  

이런 단어 하나에서도 화자의 의도는 그대로 드러난단다. 

박노해는 1958년 개띠야.
58년 개띠란 말을 많이 쓴단다.
그 해에 태어난 사람도 많고, 아주  가난하던 시절이라,
너무 흔하고 귀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를 일컫는 용어로 쓰여.
또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란 사람이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입시도 없어지고,
그래서 공부를 안 했겠지? 58년 개띠들이?
그래서 열공해서 명문고 들어갔던 선배들이 무시하는 뜻으로 썼겠지. 58년 개띠. 이러고 말야.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섬유 · 금속 · 정비 노동자로 일했대.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고,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노동시들은 바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시쓰기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어.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간행하여 완전 베스트셀러가 되었지. 



그의 시 <노동의 새벽>을 한번 읽어 보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박노해, 노동의 새벽>

화자는 몇 살이지? 
3연에서 나오지. 29세.
그 젊은 나인데, 어투는 마치 49세쯤은 되어 보이는구나.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찬 소주나 마시는 노동자의 싸구려 인생. 

그러나 그 인생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해.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에서 보이잖아.
그러나 그들에게 절망만 있는 건 아니야.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단다. 좀 억지 희망이긴 하지만,
그들은 <차가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 동지들이 있어. 

그러노라면, 노동자에게도 <햇새벽>이 밝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이지.
노동자들이 1988년 노동자 대투쟁때 내세웠던 이슈가 뭐였는지 알아?
'두발 자율화'였대.
머리도 제대로 기르지 못하던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삶이 잘 드러나 있지.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들의 마음을 드러낸 신경림의 <파장>도 한번 읽어 보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신경림, 파장>

'못난 놈들'에서 농민들의 동류의식이 잘 보인다.
'참외, 막걸리'같이 서민적인 음식을 나누면서,
'가뭄 걱정, 빚 걱정'을 이야기하지. 

그러면,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이촌향도라고 촌을 버리고 도시로 향하던 시대였잖아.
시골에선 먹고 살기도 힘들고,
도시 위주의 개발을 하니 죽을 맛이겠지. 

농무의 시인이잖아.
답답하고 울분이 터지던 농민의 춤사위. 

마지막에서 사든 것은 '고무신 한 켤레'임을 볼 때,
장터에 온 것은 꼭 물건 구입은 아닌 모양이지.
삶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나온 거지.
<절뚝이는> 장터는 농촌 현실의 <파행(절뚝걸음)>을 보여주는 시어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듯, 엉망으로 망가진 농촌 말이지.

이 시는 낮시간부터 파장 무렵까지 <시간 경과>에 따라 시상이 흐르고 있어.
이러던 시절에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썼지.
간절히 민주주의와 자유를 원하던 노래 말이야.
그 시의 원류가 된 폴 엘뤼아르의 시를 한편 읽어 보렴.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 켜진 램프 위에
불 꺼진 램프 위에
모여 있는 내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위에
그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 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엘뤼아르, 자유>

세상 만물의 자유를 갈구하는 의지의 목소리로 외치는 이 시는,
김지하 시인에게 같은 열망을 표현하는 시를 쓰게 했지.

22개의 연에서 모두 단 하나의 초점(포커스)를 위하여 달려오고 있어.
바로 그것은 간절하게 <자유>를 원하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지. 

이 시는 엘뤼아르가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표한 저항시래. 

시인은 시간적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공간적으로는 지상의 미세한 사물에서 저 하늘에까지
모든 것에 자유를 쓰고 있지.  

그러한 `자유'라는 이름을 쓰는 행위가 무려 20연에 걸쳐 행해지고 있어.
게다가 모든 연의 마지막 행은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고 말야.
그러나 이러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이름을 쓰는 그 구체적 사물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어서
오히려 상승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단다.
시인이 모든 사물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곧 모든 사물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는 뜻이고,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갈망하고,
아울러 자유라는 깃발을 들고 자유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야.

이 시의 원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
주제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고 그래.
어찌 보면 `님'에 대한 절실한 사랑은 한용운 스님의 시와 비슷하단다.
인류의 공동 가치에 대한 절실한 애정과 일맥 상통하는 법이라,
자유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나,
애인에 대한 '단 하나의 생각'이나 한줄기로 통하기도 하지. 

유사한 시, 김지하를 읽어 보자.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2연의 <소리>들은 억압받던 현실을 감각적으로(청각) 잘 살리고 있지.
<푸르른 자유의 추억>도 자유 민주주의 실현 열망이 감각적으로(시각) 잘 나타난 표현이고 말이야.

2연의 <외로운> <눈부심>은 역설적 표현이지?
외로움, 괴로움, 답답함과
눈부심, 환함, 희망, 기대감은 상반되고 모순된 표현이니 말이지.
투쟁하는 이의 앞길은 <외로운 감옥의 길>이기도 하고 심하면 <죽음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 길은 옳은 일을 행하는 <눈부신> 길이기도 하고, 희망을 추구하는 <삶>의 길이기도 하니 말이야. 

이런 저항시들로 인하여 김지하는 박정희의 하수인인 법원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게 돼.
전두환 때의 박노해보다 더 무섭던 시절이지.

민주화를 의인화시켜 표현한 이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많이 불리우곤 했단다.
아빠가 대학생이던 시절엔 지하 주점에 앉아 이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곤 했지. 

이런 <손무덤>이나 <노동의 새벽> 그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시들을 읽으면서,
불의와 부정에 맞서려는 의지를 가지던 사람들이,
1987년 드디어 6월 항쟁을 통해서 군사독재에 이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단다.
물론, 미국의 개입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긴 했지만,
상당히 민주화된 국가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지.  

 

 

1980년 광주에서 총과 탱크로 짓밟힌 국민이
7년만에 권력자를 무릎꿇게 한 일은 대단한 것이란다.
1953년 전쟁을 마친 국민이 7년만에 독재자 이승만을 하와이로 보낸 일도 대단한 일이었고. 

한국인은 7년만 열받으면 100도씨까지 끓어서 보그르르 넘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어. ^^ 

오늘은 민중의 노래, 저항시 몇 편을 읽었다.
역사는 오락가락 순서가 없는 것 같아.
좋은 일도 일어나고 나쁜 일도 함께 벌어지고 말이야.
과거의 역사를 아는 일은 그래서 힘들 때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란다.
거기서 미래에 희망을 가지는 힘도 생기는 것이고.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책도 읽고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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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가 지나가는데도 아빠는 몹시 정신이 없이 산다.
지난 주에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니 더 바쁜 것 같아.
리듬을 잃어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 바쁜 건지...
바쁘다는 핑계 속에서 하루하루가 가고,
집에 오면 픽 쓰러져 자고 그랬구나. 

아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겠지만,
아빠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힘을 덜어주는 활력소가 되면 좋겠다. 

요즘엔 수업 시간에 '정체성' 이야기를 하게 돼.
윤동주의 시 비평문을 가르치는데, 정체성이란 말이 나오거든.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알려고 노력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존재인 거 같아.
그렇지만, 그 정체, 자신의 본모습을 알긴 참 어렵지.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의 본모습을 알라. 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존재 아니냐?" 이러고 물었을까.
자기 점수를 보면 20점 같고, 옆사람 점수를 보면 100점 같아 보여.
내 재산을 보면 100원 같은데 옆사람 재산은 수십 억원 같아 보여.
그렇지만, 아빠는 이런 비유를 쓴단다.
20점과 100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120이고,
100점과 수십 억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100,000,100인 거라고. 
아랫 사람이 과연 훨씬 더 가치있는 사람일까?
과연 인간의 정체성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 낫고 모자람을? 

성경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부끄럼을 알고 스스로의 몸을 가렸다고 그래.
과연 '선악과'를 먹은 것이 왜 잘못됐을까?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서?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이 무슨 잘못이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분별이나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일 거야. 

인간의 불완전하고 미흡한 구별. 차별. 그런 시를 한 편 읽어 볼게.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 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노령노래 : 러시아 노래, 생활을 위해 러시아 영토로 떠나가는 참담한 실정을 노래한 함경도 민요. 조선 말기 함경도 남자들은 생활이 어려워 흔히 러시아 지방으로 품팔이를 나갔는데, 이 민요에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 즉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떠나야만 하는 애달픔, 남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의 슬픔, 조국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가야 하는 현실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어.
첫 부분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바라본 세상.
다음은 <속초에 내려와> 본 세상.
그리고 <잘못보는 인간>에 대한 비판 내지 반성. 이렇게... 

높은 관점에서 잘난 체하면서 보면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를 다 알 것 같기도 하지.
그렇지만 또 낮은 곳에서 인간의 땀냄새 고름냄새를 맡노라면,
인간에 대해 다 알 것 같던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마지막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혹은 너무 가까이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비판을 하고 있어. 

인생을 멀리서만 보고,
"인생, 까짓거 뭐 있어~ 즐기다 가는 거지."하고 까부는 것도 우습고,
인생을 너무 좁게 보고,
"아이고, 공부 끝나니 취직 걱정이고, 취직 끝나면 결혼 걱정이고,
다시 진급 시험봐야 하고, 아이고, 세상은 걱정 투성일세."
이렇게 비관하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그 중간의 관점을 유지하는 일.
이런 일을 '중용'을 지킨다고 하겠지. 

제목이 '장자를 빌려'인 이유는,
[장자] '추수편'에 '큰 앎은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핀다.'는 글귀가 있대.
진정한 앎은 먼 곳에서도 보고, 가까운 곳에서도 보는 지혜가 있다는 거지. 

아들아.
네 삶을 너는 어디서 보고 있니?
하루하루의 삶의 반복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쉽게 지치고 있나,
아니면, 긴 삶 속의 좁은 지점이라 쉽게 생각하고 있나,
하루를 백년처럼 지겹게나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안심도 한단다.
아들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엄마와 아빠는 너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야.
최선을 다해서 사는 아들을 응원하는 일은 당연한 거지.

세상은 이렇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고, 거꾸로이기도 한 거야.
암튼, 아빠는 영원히 아들의 편이고 팬이기때문에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단다.
잘 되는 건,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재미있는 일 찾아서 즐겁게 살고,
이쁜 아내 귀여운 아기들과 즐겁게 사는 그런 일이겠지. 

물론 멀리서 보면,
세상이 험악한데 혼자서 즐겁게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가까이서 보면,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일의 소중함도 결코 가볍지 않단다. 

오늘은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는 관점들이 보여주는 모순,
그리고 그 모순 사이의 진실을 느껴보는 시를 한 수 읊었어.
바빠도 한 수씩 읊으려 노력할게.

설악산 대청봉을 읽노라니 오세영의 <강물>이 떠오르는구나.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오세영, 강물>
 

너무 전진만을 위한 삶을 살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는 삶을 살지도 말라는 이야기야.
무심하고 텅 빈 마음이 목표에 도달하게 할 때도 있다는 거지. 

신경림의 시나 오세영의 시나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자사자 뛰는 삶'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통념 속의 정답>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답>이거나 <답과 거리가 먼 답>일 수도 있는 거야.
이런 시를 통해 마음도 좀 너그럽게 가지고 그러자.
그럴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시를 읊어야지. ^^
동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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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는 지진으로 깊은 시름에 빠진 이 시각에도,
열사의 중동에선 유럽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범하는 포성이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왜 저렇게도 피흘리며 싸워서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하는지... 

리비아라는 작은 나라는 카다피라는 독재자가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었는데,
2월 중순에 민주화 시위를 카다피가 진압하면서 민간인을 살상했던 모양이야.
그런 틈을 타서 국제사회의 돈많은 나라들은 리비아를 이라크처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있단다. 

맨날 '세계 평화를 위해서 폭탄을 쏘는 미국'은 '민간인을 위해서 폭격'을 감행한단다.
미국 폭탄은 민간인은 안 죽이는 모양이야. 훌륭한 폭탄이지.
왜 세상은 늘 똑같은 식으로 돌아가는지...
어쩌면 미국은 이렇게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나란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대나 힘 가진 자는 더 먹으려 하고,
자기가 <질서>라고 외치지.
못 가진 자는 그 <질서>가 맘에 안 들고, 대들면 다치고...
그 와중에 산중에 들어가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조국을 위하여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하고 아부하는 사람도 있어. 

전자처럼 조용히 살면서 술이나 마시려던 시인 '이백'은 시선으로 떠받들고,
후자처럼 우국충정의 시를 쓰던 시인 '두보'는 시성으로 존경하지만,
막상 조선이라는 나라는 '두보의 시'는 엄청 번역해서 뿌렸지만, 이백의 시는 괄시했단다. 

조선은 왕국이라고 했지?
오로지 왕의 행복만이 중요한 나라.
그러니, 조용히 술마시고 즐기는 삶은 널리 가르칠 <유교>적 질서와 무관한 거야.
오히려 유교적 질서처럼 '말 좀 잘 들어라~'하는 것과는 다르지.
그래서 '두시언해'는 엄청 번역해서 돌린 거란다.  

조지훈의 산중문답을 한 편 보자.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가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태고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맘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맛은 알만합니더)

청산 백운아
할 말이 없다. <조지훈, 산중문답(山中問答)>


이 시는 두보보다는 이백의 시에 가깝겠지?
이백의 '산중문답'이란 시도 있으니 패러디한 거나 마찬가질거야. 

이 시에서 괄호의 역할은 따옴표 " "와 같은 구실일거야.
대화를 말하는 거지. 

앞부분에서 '노인'이 다섯 마디를 했어.
1. 조용히 농사짓는 맛, 자네는 아는가?
2. 그저 조용히 먹고 자는 맛, 자네는 아는가?
3. 늙은 아내와 아이와 조용히 사는 맛, 비웃겠는가?
4. 출세보다 소원은 평화로이 추수하는 거야.
5. 마음 편하게 살도록 정치가가 잘 하길 바래. 이 마음 아는가? 

노인은 '입신양명'하려는 사대부들의 욕망따위는 '그들'의 것으로 치부하고 있단다.
사실 누구나 잘 살고 귀하게 되는 일은 바라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만, 누구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없는 거고 말이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즐겁게 사는 일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 지혜로운 것이지,
굳이 애써 네잎 클로버처럼 '행운'만을 좇는 일은 드문 확률에 기대는 어리석은 일임을 조용히 말하는 거겠지. 

노인과 손님은 막걸리 한 잔만을 권할 뿐.
예, 이 맛은 알 만 합니다.
그 맛이 막걸리 맛인지,
아니면, 산중에서 고요히 사는 삶의 맛인지... 

그런 것을 구태여 밝혀야 쓰겄는가?
청산에 졸고 있는 뜬 구름아. 무어라 꼭 말해야 알겠느냐? 

하~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으랴만,
화자도 <정치가들에게 잘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세상은 늘 어지러운 곳이란다.
일본처럼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인간 만사 정치와 얽히는데, 그것에 너무 마음쏟다보면 참 허무하고 더럽지. 

오늘은 일요일 밤이니, 간단하게 이백의 원시 <산중문답>을 한번 읽자.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왜 푸른 산중에 사느냐고 물어봐도
대답 없이 빙그레 웃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아꽃 흐르는 물 따라 묘연히 떠나가니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에 있다네.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전에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가 나온 적 있지.
그 원 작품이 이백의 이 시다.  

왜 이렇게 사느냐?
남자라면, 공맹을 본받아 입신양명하여야하거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교를 공부한 선비들의 이야기지.
그런데, 화자는 그저 웃는대. 

산중에 사는 것이 마음이 한가로우니 말이지.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인간세계처럼 추하지 않은 별천지가 있다는구나. 

이렇게 7자로 짝이 맞은 정형시를 7언절구라고 한단다.
넉 줄이니 기승전결의 형식을 이루고 있지. 

탈속적인 시의 대표자로 이백을 꼽는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가 체계를 왕조체계로 만드는 자들 이야기고,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은 두보따위를 술집에서 읊진 않았겠지.  

고3이라고 맨날 공부만 하라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시기니만큼 성실성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최선입니까?
하는 물음에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 

암튼, 우리 최선으로 살자.
최고...보다는 최선을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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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2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백의 '월하독작'이 생각난다는~^^

글샘 2011-03-21 01:02   좋아요 0 | URL
자작하지 마시고, 수작합시다. ㅎㅎ

pjy 2011-03-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중문답 좋습니다..그렇죠~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면 되는게 제 맘인거죠^^; 근데 왜 전 여자 팔자는 뒤웅박으로 들리는지ㅋ
 

내년부터는 토요일이 모두 쉬는 날이 된다던데,
올해까진 아무래도 토요일이 좀 어정쩡한 날이구나.
제대로 공부하기에도 좀 어색한 날.
날씨까지도 하늘이 찌푸렸다.
오늘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난 사람들의 시를 몇 편 보자꾸나.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비, 바람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즘생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쏘냐. <유치환, 일월>

이 시의 제목은 <일월>이다.
해와 달, 이것은 인류 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자로는 날 일(日)과 달 월(月)을 합친 ‘바뀔 역(易)’을 제법 오래 생각해왔어.

인간에게는 늘 바뀌는 환경이 문제였지.
더워졌다가 추워지고, 다시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고,
그 환경에 적응하는 모양이 곧 인류의 역사였단다.
그래서 주(周)나라때 생긴 역(易)을 주역(周易)이라고 부른단다.
주역이란 책에는 ‘막힐 때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 간다’는 말이 나와.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그래야 오래 견딜 수 있다는 인류의 지혜가 담긴 상징적 책이 주역이란다.  

화자는 어딘가를 찾아가는구나.
그 어디에나 태양이 뜬대.
어느 곳에서든 광명의 세계를 기대하는 화자.

‘미개적 유풍’이 남아있는 곳은 낙후된 곳이라기보다는
화자가 어떠한 곳에 살아도 좋다는 열린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비, 바람, 별들과 잠자고, 근심하고, 열애하는 삶을 살고자하는 화자.
고난, 고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이 드러난다.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생명이 사는 땅)을 사랑하되
애련(불쌍하게 생각함)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일은 치욕이기 때문이래.
일제 강점기에 만주 벌판으로 쫓겨가 사는 사람의 마음치곤
독한 구석이 있어 보이지.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
곧, 일제 강점기와 친일파가 존재하던 시대임을 보여주지.
화자는 증오를 예비하고 있어.
그리고 마지막 날,
일본놈들에게 짐승처럼 죽음을 당한대도,
두 눈동자에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우러르며 죽어가기에
살아온 세상에 아무 후회가 없을 거라는구나.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와 대결 정신이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 말기(1939년)의 작품이니 그럴만도 해.
아빠도 대학생 시절, 군사독재 하에거 이런 비장한 일기 제법 썼거든.  



치열한 내면의식이 돋보이는 시, 일월.
이 시의 후편으로 불리는 ‘광야에 와서’를 한번 읽어 보렴.

흥안령 가까운 북변의
이 광막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함이러뇨
이미 온갖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의 길에
내 열번 패망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할 사념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차장도 이백 리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 <유치환, 광야에 와서> 

이 작품은 유치환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족과 만주로 탈출해서 생활할 때의 경험을 노래한 시래.
'흥안령 가까운 북변의 광막한 벌판 끝'은 '만주'로 볼 수 있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탈출할 때의 심정을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이 시에선 조국을 등지고 새로운 각오로 찾아온 만주 땅이 암울한 곳임을 깨닫고 절망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단다.

'자학·패망·회오'와 같은 관념어가 많이 쓰여서 구체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다시 조국에 돌아가고자 하나 돌아갈 수 없는 처지와
조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기도 해.
'망나니'는 조국을 등진 행위가 아니라
'광야'에서의 순탄치 못한 자신의 삶을 표현한 말로,
무기력한 화자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시어야.
'자학의 길'로 연결되어 새로운 삶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절망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시어지.
조국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회오의 삶', '탈주할 사념'에서 보이지.

'미개적 유풍'을 따르며 '성신'과 '비바람'과 더불어 사는
자연적 삶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노래한
그의 '일월'이라는 작품의 후편에 해당하는데,
새로운 삶의 근거지에서 느끼는 생의 절망감을 잘 표현했어.

만주에 가서 미개적 유풍을 따르며 자연적 삶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작가의 믿음과 달리
이 시에서는 '패망의 인생', '절망의 광야' 등에서 보이듯 현재의 삶에 대한 좌절감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단다.
1~9 행에서는 ‘만주에서 겪는 고달픈 생활’을,
10~17 행에서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좌절감과 회한을 쓰고 있지.

유치환의 이 시들은 그의 만주에서의 삶이 잘 반영된 시들이라고 보면 돼.
힘들지만 의지를 가지고 살려는 화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지.
다음엔 화암사란 절에 가서 깨달음을 얻는 연탄재의 시인 안도현의 시를 만나 보자.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화자는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3연에서 <마음의 흙먼지>란 말로 표현했어.
마음에 흙먼지를 피해서 화자는 ‘화암사’로 떠난단다.
그런데, 그 절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화자는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어.

그건 바로,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 때문이었다는구나.
세상 살이가 참 힘들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지만,
또 거기엔 화안한 햇빛이 내리쬐이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 



우리가 찾는 행복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현실에서 도피하여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려고도 하지만,
우리 삶의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이 시는 1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회의’를 느낀 화자가,
2,3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하고,
4,5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단다.

화암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해준 소중한 곳이기에
‘내 사랑, 화암사’란 말로 표현했겠지.
화자가 창작 노트를 남겼다면 이렇게 남길 수도 있었을 거야.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란 자는 먼 데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 무엇일까 궁금해져 행복이란 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자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더군요.
그 자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묵묵히 가다 보니 조금씩 실체가 보이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정체를 보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우리 현실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 대답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음엔 죽도란 섬에 가서 자신을 만나는 화자를 한번 만나 보렴.

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
뼈가 있는 연체 동물인 것을
죽도에 가서 알았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어스름의 해변가
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듯 썰 수 있을까
옛날 떡장수 어머니와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
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
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
나의 시는 어떤가?
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
뼈 있는 물음 한마디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이 작품의 화자는 죽도에 갔어.
가서 회를 먹으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해 보는 거지.
화자는 척박한 현실에서도 삶의 완숙성을 보여 주는 횟집 할머니의 모습과
안락한 삶 속에서 기술자처럼 시를 써 내고 있는 자신을 대조하여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시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시란다.  



앞부분에선 오징어 회치는 할머니를 보면서,
오징어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뒷부분에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지.

연체동물은 뼈가 없는데, 오징어엔 뭔가 딱딱한 뼈같은 것이 있는 걸 보고
호기심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어.
그러면서 ‘오징어의 뼈’와 ‘뼈 있는 물음’이 맞물리면서,
무언가 오징어보다 못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내용이 드러나 있지.

'어스름의 해변가'와 '환한 조명'은 대조가 되어
화자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를 시각적으로 불러내고 있어.
환한 조명 아래,
마치 홀딱 벗은 것처럼 화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는 '옛날 떡장수 어머니'로 연결되어
화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써는 이야기와 연관지어서,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이 '나의 시'에 대한
화자의 반성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고 말이야.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할 줄 아는 존재라서
다른 동물에 비하면 조금은 고귀한 존재일 거야.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는 거지.
자, 다시 주말이다.
지난 주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주를 계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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