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이다. 
성경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던 금기를 어기고 원죄를 지은 존재로 기록되어있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 <죄악>임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겠지. 

이런 인류의 죄를 대신 갚으려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간은 더이상 죄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인간은 죄없는 존재이니 과거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오지 않은 미래 걱정을 당겨서 하지 말라는 것.
그래서 지금 착하고 행복하게 어린아이처럼 현재를 누리며 살면,
천국이 곧 저의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란다. 

오늘은 인간 세상을 천국으로 여기지 못하고
모순 속에서 사는 인간의 한 사람인 시인이 바라본 천국의 상징인 <장미>를 통해
세상살이를 읽어본 오규원의 <개봉동과 장미>를 읽어 보자. 

제목은 '개봉동의 장미'가 아니야.
개봉동과 장미는 서로 다른 개념이란다.
개봉동은 서울의 외진 공장지역 이름이니, 인간의 문명을 대표할 거고,
장미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이겠지. 

그 모순된 공존의 현장을 한번 읽어 보렴.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오규원,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공장지대란다.
도시 문명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단어지. 
회색 도시로 기억되는 개봉동.
그 흑백사진 같은 골목길. 

거기 붉은 장미 덩굴(또는 넝쿨)이 뻗쳐 나왔어.
흑백사진에 겹쳐진 생명력의 정수, 장미 한 송이. 
개봉동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미. 

쪽바른 길, 도시의 길은
한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어 보인대.
직선의 이미지는 장미 넝쿨이 늘어진 그 작은 사건 덕에
휘어진 곡선의 이미지로 바뀌지.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장미는 길 밖에 늘어져 있어. 

2연에서, 콤마(,) 하나를 통해 세상은 둘로 나뉜단다.
앞에선 보라! 에 이어 장미의 생명력을 노래하지만,
콤마 뒤에서, 그대와 나의 '발자국에 고인 빗물'같은 신세를 노래하지. 

장미는 이곳 주민,
초라한 흑백 사진의 도시 서울의 주민이 아닌,
시간 밖의 서울,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존재야.
곧 원색의 자연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세계의 표상이지.
그러나, 이곳 개봉동에선 그대와 나, 일상적인 이야기, 사촌들의 이야기 토막 속에
고인 물처럼 살아가고 있어. 

마지막 연에서 '말해 보라'고 하면서 직접적으로 화자의 가치를 드러내려 하고 있어.
어떻게 장미와 닿을 수 있을까?
화자는 개봉동과 대조적인, 그러나 개봉동 안에 놓인 장미를 보면서,
장미와 <닿>기를 소망하고 있어. 

그러나,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어떻게 장미와 닿을 수 있을지,
불편한 의문을, 불편한 비밀을 느끼게 된대. 

그래서 개봉동 집들의 문을 두드려 보라고 해.
그러나,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 개봉동 집들의 문.
소통이 되지 않는 도시의 삶.
여전히 회색인 채, 생명력의 본질을 감춘 개봉동의 집들과 골목의 삶. 

이런 문명적 삶의 모순을 '장미'란 생명의 가치를 통해 밝히는 시가 '개봉동과 장미'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개봉동이란 가난한 공장지대에 핀 한 떨기 장미 넝쿨을 보면서,
"야, 참 이쁘네."
이렇게 평범한 한 마디를 던지고 일상으로 걸어갈 터인데,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은
장미가 삐죽 내어민 골목길이 왼쪽으로 굽어있는 것도 보고,
회색 도시 속의 생명력의 의미도 찾아내고 있어. 

우리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지.
그것을 뒤집어 볼 때,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는 법이거든.
불편한 의문,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
개봉동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인지도 몰라. 

세상 살면서 그저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하고,
돈만 모으려고 이전투구(진흙탕의 개싸움)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불편한 생각은 하지 않을지 모르지.
그렇지만, 삶이란 것은 이런 불편한 생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이란다. 

텔레비전의 <사이렌>이란 프로그램에서 되는대로 살아온 인생들을 보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하고,
인간의 소중함, 삶의 가치 같은 것엔 눈돌릴 틈이 없는 인생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단다.
그것은 꼭 경제적인 가난이나 환경의 불우함이 필연적으로 가는 길은 아니지.
불편한 의문을 가지면서,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삶.
이런 것이 사는 가치일 수도 있단다. 

물론, 그것이 쉽게 보이지 않아 <비밀의 꽃, 장미>라고 하곤 있지만 말이야.
이 시가 실린 시집이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란 제목이었어.
우리는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여서 좀 초라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
그렇지만, 우리 삶엔 늘 한 떨기 장미가 길앞에 늘어져 있단다.
그 장미를 보고 비밀을 알아채느냐, 그저 지나치느냐가 문제가 되겠지. 

장미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삶.
소중한 삶의 가치를 눈감지 않고 찾아내는 것이 삶의 의미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 

다음엔 고통스런 세상을 고통스레 바라본 화가 뭉크에게 바치는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이승하의 '화가 뭉크와 함께'야.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동화(同化)야 도 동화(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이승하, 화가 뭉크와 함께>



화가 뭉크의 <절규>는 유명한 그림이지.
피할 수 없는 공간인 다리에서 한 인물이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단다.
저 멀리 바다를 보면 배는 한가롭게 떠있어.
세상은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주인공은 귀를 막고 '절규'를 내지르고 있단다.
뒤따르는 두 인물은 마치 괴물처럼 그를 억압하는 분위기로 느껴지고,
하늘은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차서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바다 역시 이유모를 움직임에 휘말린 것 같고. 

이 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하기는 <더듬기>야.
말더듬기를 통해 현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지. 

1연에선,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가 들려서,
화자는 토하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가 없대. 

2연에서, 공포스런 불안의 이유가 좀더 상세하게 드러나 있단다.
양팔을 벌리고 과녁에 선,
죽음을 앞둔 불안한 생김새들.
그 치욕스런 광경을 보면 화자는 소름끼쳐 달아나고 싶대. 

同化와 童話는 동음이의어지.
힘센 자들은 자신에게 동화시키려고 폭력을 쓰고,
아이들의 동화는 이치에 닿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 속의 세계겠지. 

세기말, 뭉크의 절규는 1893년(19세기말)의 작품이었다면,
화자의 세기말은 20세기말의 학살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울음소리, 학살극의 울음소리.
1980년 광주에서 벌어졌던 자국민을 향한 학살극은
1980년대를 장악했던 두려움의 소리였어.
1980년대는 광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 

도망가고 싶지만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데,
자백하라는 공포에 떨고 있는 화자.
꿈 속인지, 화자는 심문당하는 신세인 것 같구나.
얼마나 두려웠을까.
독재 시대의 고문과 공포 정치란.. 

텅 빈 도시는 소름끼치도록 비인간적인 곳이지.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도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단다.
그렇지만,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일상이겠지.
눈물없이 잠들 수 없는 밤들.
결코 잠들 수 없는 잠을 자는 사람들.
총소리의 환청,
죽어간 벗들의 피묻은 얼굴에 대한 환상. 

마지막 밤의 장갑차 캐터필러 굴러가는 소리와,
끝없이 갈겨지던 연발총 당기는 소리와,
소리도 없이 고꾸라졌을 죽음이 흘리던 신음 소리에 대한 악몽으로 차마 잠들 수 없었던 남도의 기억. 

그 텅 빈 도시를 직접 이야기할 수 없었던 화자는
멀쩡하게도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프로야구나 즐기라며 웃음소리를 흘리는 피묻은 손의 가해자들의 웃는 소리에,
끝내 미칠 지경이 된다. 

보트 피플은 베트남 전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바다에서 일렁이던 베트남 사람들이고,
화자는 텅 빈 세계 속에서 웃음 소리를 흘리는 이런 현실을 당하여,
부 부 부인할 것이다.
하면서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어. 

이 시에선 마침표가 단 하나 찍혀있단다.
마지막에 찍힌 마침표.
이 유일한 마침표의 의미는 화자의 단호한 선언의 심리가 반영되었겠지. 

성경에 예수님의 가장 훌륭한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아느냐고 묻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화자의
부 부 부인은 그런 강한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시인은 뭉크의 그림과 함께 세기말의 공포스럼을 다루면서도,
전쟁으로 일그러진 인류의 잔혹한 역사에 더 전면적으로 저항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어. 

같은 시인의 '이 사진 앞에서'란 유명한 시도 한번 읽어 보렴.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을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발견한 타임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승하, 이 사진 앞에서>

이 시는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는
현대인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시야. 

1연에선 점점 짧아지면서 '나를 향한' 비판이 날카롭게 집중되고,
2연에서 점점 길어지는 시행이 '반성과 참회'로 이어진단다. 

타임지란 미국 잡지에 실린 사진을 활용해 현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지.
시인이 직접 작품의 화자가 되어 반성하는 어조를 드러낸단다.
휴머니즘이 잘 드러난 시로,
화자의 양심이 시의 주제가 되고 있어. 

오체투지란 불교에서 온몸(머리, 두 팔, 두 다리의 5체, 오체불만족에서도 쓴 말이지)을 던진다는 예법인데,
오체투지하듯 절하는 굶주린 아이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인류의 호의호식과 증오심은 결국 인류를 이렇게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어.
화자는 자정 넘게 취하도록 뭔가를 위에 넣었고,
급기야 그걸 토할 지경이 되도록 엉망으로 살고 있었지.
그의 망막에 비친 저 사진 앞에서 화자는 망연자실...
자기를 잃고 말았던 거야. 

결국 화자는 절대 기아선상에서 고난을 겪는 고통을 외면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화자가 당장 유니세프 같은 곳에 기금을 냈다고 볼 순 없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거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도를 하고 '아멘'이나 외치는 사이비 '교인'과 인류의 '죄악'이 만든 결과물.
결국 가난과 기아 속에서 굶주리는 소말리아 사람들을 향한 화자의 반성이 드러난 시란다.
그런데, 과연 타임지라는 미국 잡지는
정의로운 잡지일까?
타임지는,
그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보여준 이 정도의 아픈 마음은,
소말리아의 오체투지 하는 아이가 폭탄 아래서 평화롭게 죽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아멘'과
같은 소망인 것이나 아닐까? 

이 시의 '타임지'는 그런 의문도 강하게 지닌 소재로 보인다.
결국 화자는 무엇을... 이라는 말을 잇지 못하는 자세로 시를 마치고 만다. 

기아를 방치하는 인류에 대한 일갈은 아래 사진에서도 볼 수 있어.
케빈 카터라는 사진가가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1994년 찍은 사진이지.

세계에는 1년에 수백 수천만의 인간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지만,
또한 쇠고기를 위하여 농장에서 사료로 쓰이는 옥수수 등의 곡물은,
그들 모두를 배터져 죽게 하고도 남는다는 통계 자료가 있단다.
결국, 생산의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불균등과 독재 정치의 어두운 그늘이 문제임을 잘 보여주지.

세계에서 가장 다이아몬드가 많이 나는 라이베리아, 짐바브웨 등의 국가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래.
결국 그 비싼 다이아몬드를 팔아 버는 이윤을 군인 독재자들이 독점하는 이유 때문이지.


이 사진은 아요드의 식량 센터로 식량을 얻으러 가는 도중에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사진이란다.
그 뒤로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가 있지.
이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한편, 사진 작가의 윤리에 대한 논란도 일었대.  

소녀를 촬영하기보다는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했다는 비판과,
사진이 가진 사회적인 영향력에 관한 거였지.  
촬영 이후에 곧 독수리를 쫓아보냈고, 소녀를 구했다곤 하더구나.

항상 강렬한 감정에 몰려 극한의 세계를 취재해 온 카터는
자신이 찍은 다양한 현실의 공포를 가슴 밑바닥에 담고 33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 

가뭄과 전염병까지 겹쳐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백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국제적인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 프로그램도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거의 제 기능을 못하고,
구조식량은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에게는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다더구나.  

이제 음식 먹을 때도,
아껴먹고 소중함도 생각하며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지?
다시 새로운 한 주 시작이다.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마음으로 한 주를 열자.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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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25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봉동이 이젠 가산디지털단지라는 이름으로 각종 할인 매장이 들어선 걸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져요...
맨 아래 사진을 보니 문득 김기택 시인의 시가 떠오르는데요. 바로 저 사진을 보고 쓴 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찾아봐야겠네요^^

글샘 2011-04-25 09:26   좋아요 1 | URL
구로공단역이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었더군요. ^^
역사 속에 묻힌 '87년 구로구청 선거부정'이 문득 떠오르네요. 비참했던 진압과정까지... 광주의 연속이었죠.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김기택의 시는 글쎄요. 찾아봐 주세요. ^^

2011-04-25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5 18:12   좋아요 1 | URL
전혀 실례가 아닙니다. ^^ 이렇게 댓글 달아주시면 고맙죠.
완전히 믿고 살 수 있는 세상...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저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시를 몇 편 보자.
우선, 이동순의 개밥풀을 한번 읽어 보렴.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 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럼을 푸는 일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 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 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이동순, 개밥풀>

개밥풀은 '부평초. 개구리밥'을 일컫는 말이란다. 민중을 상징하는 말이라 보면 되겠지. 

화자는 개밥풀을 보고 있어.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밥풀.
개밥풀은 뿌리도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 
수면에 뜬채로 되는대로 떠다니다가 스러지는 볼품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개밥풀을 관찰하노라니 화자의 머리를 찌릿하게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지. 

밤중에 일어나 논귀퉁이에 맴도는 개밥풀을 보고 있어.
가벼운 바람에도 밀리는 개밥풀은 방게 물장군같이 작은 생물들이 지나갈 때,
결코 굳게 겯은 어깨(스크럼)를 푸는 일 없이 적군을 타고 앉아 여유있게 휘파람도 부는 것처럼 보인대.
방게(민물게)나 물장군은 억압자겠지.
민중은 억압자가 짓밟으면 움츠러들고 꼼짝 못하지만,
개밥풀은 느긋한 걸 보고 <관조>의 마음을 찾는 거지. 

미약한 개밥풀은 강한 연대의식으로 어깨를 꽉 잡고 산단다.

음력 사월이면 양력으로 오월인데,
개밥풀은 몸을 <버리>고 <자유>를 소중히 여긴대.
민중의 희생 정신과 <자유>를 향한 의지가 드러나는 것 같구나. 

그러다 어느 날 큰비가 내린대. 이제 시간은 여름으로 흐른다.
이 시에서는 봄부터 계절이 변화하는 것이 보여.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보렴.
큰비와 장강은 험난한 세상살이를 뜻하겠지.
장마 끝에 개밥풀은 그림자도 없는 미약한 존재감으로 시련을 이겨낸단다.

가을이 되면 다시 추풍이란 시련이 닥치지.
숨죽이고 우는 개밥풀. 

결국 겨울 논바닥에 말라 붙는 개밥풀.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절망을 외치지는 않아.
오히려, <봄의 번성을 위하여>라는 구절 하나로,
개밥풀의 미약함과 시련의 고난함을 모두 감싸안아 준단다. 

억압당하는 삶은 늘 피곤하고 <상처받은 갈대>같은 존재가 되지.
그렇지만, 개밥풀, 곧 부평초처럼 가벼운 인생살이라도,
<봄의 번성>을 꿈꾸며 말라감을 슬퍼하지 말자는 주제를 담고 있는 시란다. 

이 시의 시점은 두 가지야.
앞부분에선 화자가 관찰하지만,
중간 부분부턴 개밥풀이 <우리>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지. 

그들은 단지 헌신과 희생의 속성만 연결되는 게 아니라
자잘한 생태적 순환들까지도  살펴보는 화자를 통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모두 긴밀하게 연결된 삶이라는 주제를 밀어내고 있는 거야.

관조란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생의 이치를 배우는 행위를 의미하는 거란다.
다음엔 또 나무를 관조하는 시를 한편 보자.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경림, 나목(裸木)>

나목은 발가벗은 나무, 겨울 나무를 뜻하는 말이야.
하늘을 향해 발가벗은 나무가 팔을 뻗고 서있어.
마치 밤에 별빛을 그 나뭇가지(나무의 손끝)로 받아서,
몸통과 뿌리까지 씻어내려는 듯이 말이야. 

때론 살갗이 터지는 시련도 겪게 돼.
나무 허리가 뒤틀리는 고달프고 구질구질한 삶이기도 하지만,
나무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대.
한밤에 눈이 몸을 덮으면 시원스레 털어내곤 한대.
감추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지. 

마지막 부분이 화자가 찾아낸 삶의 이치야.
나무들이 때로 <깊은 울음>을 터뜨리며 오열할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나무들은 알고 있을까?
삶은 근원적으로 슬픈 것이지.
누구나 슬픈 법이야.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슬플 때,
세상의 슬픔은 자기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착각하곤 하거든.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거야.
세상의 슬픔은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음을 인식할 때, 위로받을 수도 있을 거란다. 

벌거숭이 나무를 보고,
외로운 사람과
또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을 상상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보렴.
삶은 근원적으로 다 외롭다는 마음이 바탕에 깔린 것 같단다.
다음엔 박목월의 '나무'를 보자.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나무>

화자는 유성에서 출발해, 조치원, 공주, 온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여행길에서 계속 나무를 만난다.
한 그루 늙은 나무를 통해 묵중한 수도승을,
떼를 지어 선 나무들을 통해 어설픈 과객을,
멀리선 나무들을 통해 외로운 파수병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나무들은 멀리있는 타인이었다. 

그러나, 그 묵중하고 어설프며 외로운 나무들은
서울로 <회귀>한 화자의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외로움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단다.
실존은 여기 살아있는 <나>를 뜻하고, 본질은 인간은 일반적으로 이러이러하다는 뜻이란다.
인간은 원래 이런 저런 존재다...하는 설명보다,
여기의 <나>의 삶이 어떤지가 중요하단 것이지.
인간은 원래 고독한 건지, 어울려 살면서 즐거운 건지,
인간은 이러이러하다는 일반론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란다.
<나>의 현실을 살피는 일이 중요한 거지.  

다음엔 최두석의 <성에꽃>을 통해 독재시대의 민중과 저항 정신을 생각해 보자.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깁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최두석, 성에꽃>

이 시는 앞부분에서 민중들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어.
버스 차창에 성에가 끼어있는 모습을 <꽃>이라고 미화하여 표현하였지. 

엄동혹한일수록 성에꽃은 더 선명하게 핀다고 해서,
시련을 겪을수록 꿋꿋한 존재도 있음을 드러내고 있어. 

화자는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삶을 생각하면서,
자리를 옮겨다니며 성에꽃을 감상한단다. 

민중이 피워낸 아름다운 예술을 말이지.
버스는 민중의 발이잖아. 
<차가운 아름다움>은 역설적인 표현이겠다.
차가운 것, 엄동혹한에 피어난 시련의 꽃이면서
그 민중의 숨결이 피워낸 삶이 아름답다는 역설적 표현.

성에꽃은 <한숨>과 <열정>의 숨이 얼어붙은 것임을 생각하다가,
문득 유리창 너머로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 

동지였던,
그러나 감옥에 가서 이젠 면회조차 금지된 친구.
독재 시대의 감옥행은 일상적인 일이었어.
대학생은 툭하면 감옥엘 가곤 했지. 

이 시는 암울하고 막막한 시대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각자의 일터나 집으로 가는
이름 없는 서민들의 숨결이
버스 유리창에 ‘성에꽃’으로 피어났다는 발상에서 씌어진 시란다.

그러나 그 성에꽃 핀 창 속에서 문득 발견하게 된
‘푸석한 얼굴’이 군사 독재 세력에 저항하다 옥에 갇힌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감성의 울림만이 아니라 지성의 울림까지 느끼게 해.

시대의 아픔은 1980년대의 광주에 이은 독재시대뿐 아니었단다.
조선 시대의 아픔도 한번 읽어 보렴.

말에 내려 인가를 찾아가 보니
아낙네 문간에 나와 맞이하네.
띠집 처마 아래 손을 앉게 하고
나를 위해 밥과 반찬 내어 오네.
남편은 어디에 나가 있냐 하니
아침에 따비를 메고 산에 올라
산밭을 일구느라 고생을 하며
저물도록 돌아오지 못한다네.
사방을 둘러봐도 이웃은 없고
개와 닭도 산기슭에 의지해 사네.
숲 속에는 사나운 호랑이 많아
나물도 마음대로 못 뜯는다네.
슬프다 외딴 살이 어찌 좋으리
험하고 험한 산골짝에서…….
평지에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가고 싶어도 벼슬아치 두렵다네.
<김창협, 산민>

이 시에서의 ‘산민’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지에서 살고 싶지만
벼슬아치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험한 산골짝에서 살게 된 사람이야.
이런 점에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라는 한자성어가 생각나지.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못했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가곤 한단다. 

산골 사람들은 나물을 뜯어 연명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충분치 못해 가난함을 면하기도 어려워.
그래서 그들은 늘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면서
손님을 위한 대접도 쉽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 

이 작품에서 ‘산’은 관리들의 횡포를 피할 수 있는 도피처로 그려져 있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이웃도 없고 사나운 호랑이가 많은 산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지.  

당시 백성들의 힘든 삶이 가슴아프게 울려 온다.
이처럼 당시 관리들의 횡포가 산 속에까지 이를 정도로 가혹했음을 잘 보여주는 시야. 

내가 표시한 것처럼,
한시는 넉줄씩 읽어 나가면 뜻을 쉽게 풀 수 있단다. 

오늘은 민중의 삶을 이런저런 면에서 관조적으로 살펴본 시들을 다뤘다. 

요즘 나무들은 파릇파릇한 신록을 가득 피워내고 있어.
공부하러 다니면서도 나무의 새싹들을 한번씩 바라보렴.
그럼, 마음도 훨씬 시원해질 거야.
답답한 마음도 올해 지나면 사라질 거라 믿고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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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림 님의 나목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혼자라서 고립된 존재지만, 다들 혼자이기에 그 슬픔을 알고 함께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을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 한 부분입니다. 그저 실존이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는 것이지 라고 생각했지요.

뒤늦게 글샘님의 시 강의에 빠져있네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글샘 2011-04-24 22:5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갈대'의 실존이 '나목'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
슬퍼 봐야 보이는 거죠. 타인의 슬픔이 말입니다. ^^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 했지만, 같은 이유로 '타인은 천국'일 수도 있는 셈이죠.
나와 다른 타인은 지옥이지만, 나와 같은 타인은 반대인 것처럼 말입니다.
동병상련이란 한자 성어를 만든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분위기 있는 봄빈데, 요즘엔 방사능이 어쩌고 황사가 어쩌고 해서 좀 찜찜하지.
사람의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시간은 흐른다.  

오늘도 엊그제 읽었던 이해인 수녀님 시를 한편 볼게.
한번 읽어 보렴.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이해인, 꽃멀미) 

멀미는 보통 배를 탔을 때, 배가 앞뒤 방향으로 일렁거리고 흔들리면 속이 역겨워지는 현상을 말하지.
그런데 육지멀미라는 말도 있단다.
배타는 사람은 몸이 배의 일렁거림에 적응해 있기 때문에,
육지에 올라서면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여겨진대. 

꽃멀미는... 꽃을 보면서 어떤 감각을 신체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겠지. 

처음에 사람멀미를 이야기했어.
사람멀미.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면 피곤하고 정신이 없대.
사람은 제각기 기준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게 마련인데,
또 자기 고집을 부리곤 하니까 사람멀미도 날 만 하지.  

2연에서 꽃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라도
너무 흔하면 멀미가 난다는구나.
그렇겠지.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이 산처럼 쌓여있는 부페엘 가도,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나면 음식이 당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사람과 꽃에서 느낀 '멀미'란 의미를 이제 3연에서 확장시킨단다.
살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좋은 일도 없고,
이쁜 꽃을 만나는 것처럼 좋은 일도 없어.
그런데, 그 일은 가끔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한단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수녀님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이라고 표현했어. 

사노라면, 아픈 일을 당하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좋아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지어 가지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런 불경 구절도 있지. 

그렇다고 수녀님의 시에선 '혼자서 가라', '혼자서 도를 닦아라'처럼 표현하지 않아.
꽃은 아무리 많아도 싫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긍정적 자세를 가지려 한단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멀미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경우도 있는 법임을,
사람을 만나면서 배워나가는 것이겠지. 

세상엔 자기 취향에 적합한 사람도 있지만,
정말 에너지가 상반되어서 툭하면 부딪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야.
그렇다고 사람을 미워하는 일에 마음을 쏟기 보다는,
사람의 향기를 찾는 일로,
마음의 긍정적 에너지를 쓰고 싶다는 소망으로 시를 맺는는구나. 

수녀님들끼리 생활한다고 갈등이 없겠니?
그렇지만, 인간을 밉다밉다하고 바라보면 정이 안 드는 법이니,
꽃의 향기에 취하듯, 인간의 향기에 취하는 일도 마음 먹기 달린 거라 생각하자는 이야기겠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에 관심을 갖고 읽어 봤어.
사람이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했듯이,
꼭 필요한 말을 가려서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4월도 가고있구나.
이 봄비가 그치면,
가로수들도 더 파랗게 싹에 힘이 돋아날거야.
민우도 힘차게 따뜻한 봄을 즐기는 마음을 갖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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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저는 정말 멀었나봐요.
마지막 구절인 사람에게서도 꽃처럼 향기가 난다는 부분에서,
저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부터 했거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샘 2011-04-24 21:53   좋아요 0 | URL
수녀님도 첨엔 사람멀미가 난다고 했잖아요. ㅋ
이 시처럼 꽃을 보면서, 자연을 통해서 사람 멀미를 꽃향기로 바꿔나가는 마음가짐.
그런 게 바로 수도자의 마음일지도 몰라요.
우리같은 일반인은 모르고 살아가는...
 

오늘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두어 편 읽어 보자. 

수녀...
수도자의 길에도 몇 종류가 있지만,
가톨릭에서 여성은 신부가 되지 못하는 모양이야.
이름이야 신부든 목사든 하느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하느님이 이 땅에 뿌리신 선한 마음의 씨앗을 싹틔우겠다는 마음으로 산다면,
그곳이 곳 수도원이겠지. 

우리와 가까운 광안리에서 매일을 하느님께 바치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는 시를 써오신 수녀님의 시를 읽어 보자.
아빠가 고딩때 좋아하던 시야. 살아 있는 날은...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이해인, 살아 있는 날은>

제목부터 딱 보면, 긍정적이지.
살아 있는 날은... 엉망으로 살자... 이런 건 말이 안 되잖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엔 향기롭게 맑고 투명하게
정말 인간답게 살자.  

사랑하며 살고, 나쁜 짓 하는 사람 꾸짖으며 살자는 이야기가 등장하겠지.
물론 수녀님의 삶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는 겸손까지 가미해서 말이야. 

마른 향내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서,
화자는 경건하고 반성적인 삶을 떠올리게 된단다.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이게 화자가 추구하는 인간상이야.
이 시에서 당신은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
운명이랄까. 하느님이랄까.
암튼 우리 삶을 건방지게 살지 말고,
겸손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살자는 태도가 아주 역력하단다. 

오늘이 4.19 기념일이야.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해 싸우던 51년 전의 이야기.
삶은 늘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단다.
많은 것을 가지면,
더 넉넉하고 행복하게 살 것 같지만,
소유하는 것과 행복하게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겠지? 

꼿꼿하게 살겠다는 다짐.
한번쯤 깊이 생각하며 읽어볼 만한 시란다.
다음엔 기~인 산문시를 한편 마음을 비우고 읽어 보렴.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대며

                                         이해인

1

하늘은 구름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세월을 안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날엔 항상 하늘이 열려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늘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2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3

아아 하늘, 하늘에다 나를 맡기고 싶다. 구름처럼 안기고 싶다. 서러울 때는 하늘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순하게 흑흑 느껴 울고 싶다.

4

하늘에 노을이 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온통 피로 물들이듯 타오르는 노을. 나의 아픈 그리움도 일제히 일어서서 가슴 속에 노을로 타고 있다.

5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다. 타다가 타다가 검붉은 재로 남은 나의 그리움이 숨어서 숨어서 노을로 지고 있다.

6

‘하늘’이란 말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하늘빛 향기. 하늘의 향기에 나는 늘 취하고 싶어 ‘하늘’, ‘하늘’ 하고 수없이 뇌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또 하늘을 생각했다.

7

하늘을 생각하다 잠이 들면 나는 하늘을 나는 한 마리 새, 연두색 부리로 꿈을 쪼으며 하늘을 집으로 삼은 따뜻하고 즐거운 새.

8

하늘은 환희의 바다. 날마다 구름으로 닻을 올리고 당신과 함께 내가 떠나는 무한의 바다. 하늘은 이별의 강. 울어도 젖지 않고, 흐르지 않는 늘 푸른, 말이 없는 강.

9

하늘은 속일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울. 당신이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나의 얼굴. 내가 하늘을 볼 때 보이는 당신 얼굴. 하늘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어도 흔들림이 없다. 깨어지지 않는다. 자주 들여다보기가 갈수록 두려워지는 너무 크고 투명한 나의 거울.

10

지구 위에 살다가 사라져 간 이들의 숱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하늘.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든 이야기를 또한 기억하는 하늘. 하늘은 그래서 죽음과 삶을 지켜보는 역사의 증인.

11

하늘이 내려 준 하늘의 진리―

하늘은 단순한 자에게 열린다는 것.

하늘은 날마다 노래를 들려 준다. 티없는 목소리로 그가 부르는 노래. 나 같은 음치도 따라할 수 있는 맑고 푸른 노래. 온몸으로 그가 노래를 하면 나는 그의 노래가 되어 하늘로 오르고 싶다.

12

오늘도 하늘을 안고 잠을 잔다. 내일도 하늘을 안고 깨어나리라. 나의 모든 것, 유일한 기쁨인 사랑. 사랑엔 말이 소용없음을 하늘이 알려 주도다. 살아 있는 동안은 오직 사랑하는 일뿐임을 하늘이 알려 주도다.

13

오늘, 당신은 몹시 울고 있군요. 나의 모든 이를 위해서 통곡하고 있군요. 그래요, 실컷 쏟아 버리세요. 눈물 비를 쏟아 버리세요. 세차게, 아주 세차게.

당신이 울고 있는 날은 나도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 함께 울고 있어요.

14

하늘의 파도 소리. 나를 부르는 소리. 오늘의 내 슬픔 위에 빛으로 떨어지는 당신의 푸른 소리. 당신의 파도 소리.

15

나는 늘 구름이 되어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 “나의 집이 하늘인 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높이 떠도는 외로움도 어느 날 비 되어 당신께 가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요. 멀리 멀리 있어도 부르면 가까운 구름인 것을.”

16

꼭 말하고 싶었어요. 지나가는 세상 것에 너무 마음 붙이지 말고 좀더 자유로워지라고. 날마다 자라는 욕심의 키를 아주 조금씩 줄여 가며 가볍게 사는 법을 구름에게 배우라고―

구름처럼 쉬임 없이 흘러가며 쉬임 없이 사라지는 연습을 하라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의 구름이라면.

17

하늘은 희망이 고인 푸른 호수. 나는 날마다 희망을 긷고 싶어 땅에서 긴 두레박을 하늘에 댄다. 내가 물을 많이 퍼 가도 늘 말이 없는 하늘.

18

내가 소리로 말을 걸면 침묵으로 대답하는 당신. 당신을 부르도록 나를 지으셨으며 나의 첫 그리움인 동시에 마지막 그리움이기도 한 당신. 당신은 산보다도 더 높은 내 욕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세상에서 치닫는 나의 허영의 불길을 단숨에 꺼 버리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일체의 그리움도 당신이 거두어 가신 뒤에 나는 세상에서의 자유를 잃었으나 당신 안에서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당신의 가슴에서 희망을 날리는 노란 새가 되었습니다.

19

하늘색 연필을 깎아 하늘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글을 쓰는 아침. 행복은 이런 것일까. 향나무 연필 한 자루에도 온 세상을 얻은 듯 가득 찬 마음. 내 하얀 종이 위에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빛 바다. 나에겐 왜 이리 하늘도 많고, 바다도 많을까. 어쩌다 기도도 할 수 없는 우울한 날은 색연필을 깎아서 그림을 그렸지. 그러노라면 봉숭아 꽃물 들여 주시던 엄마의 얼굴이 보이고, 소꿉친구의 웃음소리도 들렸지. 오늘도 나는 하늘을 본다. 하늘을 생각한다. 하늘을 기다린다. 하늘에 안겨 꿈을 꾸는 동시인(童詩人)이 된다. 끝없이 탄생하는 내 푸른 생명의 시를 하늘 위에 그대로 펼쳐두는 시인이 된다.

이 시는 풀이를 하지 않을래.
어떤 연이 가장 맘에 드니?  

아빠는 10번 연이 가장 맘에 든다. 맘이 뜨끔하지. ㅋ

지구 위에 살다가 사라져 간 이들의 숱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하늘.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든 이야기를 또한 기억하는 하늘. 하늘은 그래서 죽음과 삶을 지켜보는 역사의 증인.

그래서 하루를 살더라고 거짓되지 않게, 올바로 살려고 노력하며 산단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누구나 평가받게 되거든. 



화자는 연약하고, 그리움에 애태우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어.
절대자 앞에선 왜소한,
그러면서도 절대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화자.
절대자는, 하느님은 화자가 아무리 두레박으로 우물물 긷듯 욕심을 내도
모든 것을 허락하는 존재로 상정되어 있구나.  

절대자 안에서 마음의 안식과 평강을 얻는 이는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
모든 것을 그이 앞에다 내려놓고,
그야말로 진인사 대천명의 마음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하느님의 운명이 내려온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말이야.
교회를 다닌다고 되는 건 아니고,
이런 건,
스스로를 믿으며 삶의 철학을 가다듬는 일이 더 중요하겠지.
이런 시를 읽으면서, 겸허하게 삶을 돌아보는 일도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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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0 0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0 08:42   좋아요 0 | URL
어제도 읽었는데... 새벽 4시 40분에 깨어있는 인간이... 기자군요. ㅎㅎ
 

오늘 엄마랑 경주엘 갔다 왔어.
지난 주엔 하동 쌍계사 벚꽃길을 보고 왔는데,
경주 보문단지엔 벚꽃이 다 졌더라.
참 금세 지지.
사람도 금세 늙는단다.
믿을 수 없겠지만. 

엄마랑 돌아오는 길에 카이스트 학생들 이야기가 나왔어.
영어로 수업한다는 이야기 끝에,
과연 영어로 수업을 해야 실력이 느는 건지...
외국인 교수라면 당연히 영어로 수업을 하겠지만, 특히 카이스트야 특별한 아이들이 모여있으니 말이지.
한국인 교수라도 영어로 수업을 한다는 건, 글쎄 수업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일이겠지. 

오늘은 엄마의 사랑을 가득 담은 시를 한 편 읽어 볼게.
나희덕의 '허공 한 줌'이야. 우선 한번 읽어 보렴.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나희덕, 허공 한 줌> 

보통 액자 소설이란 말을 많이 쓴다. 소설의 서술자가 다른 이야기를 하나 꺼내는 경우를 말하지.
이 시에선 액자 시처럼 시가 전개돼. 

처음엔 '이런 얘기를 들었어~'로 시작하지.
그리고 마지막엔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화자는 이 시 속의 이야기를 곰곰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비어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어.
화자는 손아귀에 아무 것도 없을 때조차도 욕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모양이지.
텅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있곤 했다는 걸 보면 그렇게 보여. 

화자는 버스 안에서,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자신이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려 욕심을 부렸구나.
어리석게도 집착에 눈이 멀었구나... 반성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려 노력했나봐. 

'허공 한 줌' 까지도 자기 소유로 가지려 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그 허공 쯤이야 허공 속으로 돌려주려고 했던 거겠지. 

허공 한 줌.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할 필요도 그다지 없는 것을 뜻하는 말이겠구나.
그렇지만, 화자는 그걸 소유하려고 했던 일을 돌아보고 헛됨을 느끼는 거야.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시 속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 보자.  

이야기 속엔 우선 <엄마>가 등장해.
엄마가 깜박 잠든 사이 아기가 난간 위에 올라갔지.
난간 밖은 허공이었고,
잠깬 엄마는 깜놀했고, 이름도 못 부르고... 안타까이 아가를 바라보았단다. 

엄마가 아기에게 다가가 끌어안았어.
그런데 엄마는 아기를 잡지 못했단다.
엄마는 그 뒤에 나오지만, 이미 죽은 엄마였기 때문이야. 
엄마가 아기를 받으려 내민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 줌> 뿐이었지. 

그래서 엄마는 그만 <숨이 멎어> 버렸단다.
이미 죽은 엄마지만 숨이 멎을 정도로 긴장했단다.
다행히 아기는 난간 밖으로 떨어지지 않고, 이쪽으로 떨어졌대.  

 

아기가 놀라서 울자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대.
아까는 죽은 엄마 손에 아기가 받아지지 않았지만,
얼마나 간절했는지,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달린단다.
오로지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만 가득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결국 이 이야기는,
이미 죽은 엄마지만 아기의 안위를 걱정하려 차마 죽지 못하고 눈감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지.
아기가 안전하게 자라는 것을 믿게 되어서야 죽은 엄마는 마음놓고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겠지. 

엄마는 죽어서도 아기만을 위해서 자신을 잊고 애쓰는데,
화자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을 위해서 애쓰고 살았던지를 되돌아 보았단다.
그러자 자그마한 손아귀 안에 참으로 많은 것을, 많은 지위와 많은 재물과 많은 상들을 얻으려 애썼겠지.
허공 한 줌처럼 손에 잡을 수 없는 것들을 말이야.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 허공 한 줌까지도 놓아준다는 화자의 목소리가 쟁쟁 울린다.  

 

국어교과서의 '어느 날 심장이 말했다'가 생각나는구나.
여친을 위해서 해도달도 다 따다주던 머저리가 여친의 꾐에 빠져 '니 애비의 심장'도 빼오란 말을 듣고 실행하지.
여친을 위해 달려가던 머저리는 그만 엎어져서 심장을 땅에 떨구었는데,
그 땅의 심장이 말했다잖아. "얘야, 어디 다친 데는 없니?"하고. 

민우를 바라보며 기르던 엄마의 심장이 그런 심장이었을 거야.
하마나 엎어질까, 깨질까 조심조심 기르던 엄마 말이야.
민우가 그렇게 좋아하던 엄마도 언젠가는... 민우 곁을 떠나가겠지. 

그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 즐겁게 잘 지내자. ^^
엄마 아빠는 네 옆에 있지 않더라도, 저 시 속의 죽은 엄마처럼 민우의 행복을 위해 힘쓰고 있을 거야.
멀리 떨어져 살든,
오랜 뒤에 세상을 떠나서든,
우리 아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저렇게 너를 안아주고 있다는 걸 잊지 말기 바래.
그러면, 삶이 조금 팍팍해도,
폭신한 구석이 있음을 느끼게 될 거야. 

폭신한 주말 밤이다. 
일 주일간 고생 많았어.
푹 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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