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은 참 빨리 간다. ^^
시간은 얼마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인지,
즐거운 시간은 늘 금세 지나가고,
지겨운 시간은 죽으라고 안 가지. 

밥먹을 때 줄 서있는 시간은 지겹도록 안 가고,
맛있는 점심 먹는 시간은 금세 가듯 말이야.
좋아하는 선생님 시간은 왜 그리도 짧은지...
그리고 웬수같은 선생님 시간은 왜 빠지지도 않는지... ㅋ
삶이 즐거운 사람에겐 인생이 참 빨리 지나갔단 생각이 들 거고,
삶이 힘겨운 사람에겐 그 시간이 참 길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거.
이렇게 순간순간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오늘은 그 삶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선 김광규의 <나뭇잎 하나> 읽어 보렴.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김광규, 나뭇잎 하나>

네 연이 비슷한 길이로 구성되어있다. 이쁘지.
산 이름이 '크낙산'이다. 큰 산.
그 산이 온통 연록색으로 부푼 봄이겠지.
그 봄에 나는 미처 몰랐대.
봄은 인생의 젊은 시절이기도 하겠구나.  

그러다 그 길이 온통 단풍들고 낙엽지던 계절,
그 때도 나는 느끼지 못했단다.
가을은 인생의 중년이 되겠고 말이야.
그럼 언제나 알게 될까? 궁금하지?
시를 절반을 읽도록 아직도 모른다니 말이다. 

한 해 다 가고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이제 인생이 다 지나 낙이라곤 거의 없는 노년의 어느 순간.
대추나무 가지 끝의 나뭇잎 하나
문득 떨어지는 걸 보았어.
그걸 보면서,
그 <나뭇잎 하나>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인생의 <관조>를 얻게 된다. 

인생은
저마다 한 사람씩 태어나
여럿이 모여서 한 평생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사람식 죽고
그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나뭇잎 하나>의 관조의 힘.  

 

그 작은 자연 현상을 보면서 사색하고 성찰하는 화자의 눈이 날카롭다.
이 시의 주제는 <존재의 소멸을 통하여 바라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이 될 거야.
사라짐은 왠지 사람을 조금 겸손하게 만드니 말이야.

봄에는, 여름에는 <몰랐었다>라는 회고가 조금 가슴 쓰라리게 하는구나.
다음엔 재미있는 시를 한 편 보자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집니다.
해가 지는 아침에
유리산을 오르며
나는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산 아래 계곡에
햇살이 퍼지는 광경을.

해가 뜨는 저녁엔
유리산을 내려오며
나는 또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저 아래 계곡에
해가 지고 석양이 물든
소녀가 붉은 얼굴을
쳐드는 것을.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
나는 한 마리의 풍뎅이가 됩니다.
그리곤 당신들의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그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합니다.
창문을 열면 창문, 다시 열면
창문, 창문, 창문……
창문
밤새도록 창문을 여닫지만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산 아래 계곡엔 가득 잠들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닦아도 닦이지 않는 창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나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지는 곳
그 높은 곳에서 나는 당신들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고층빌딩 유리창닦이의 편지, 김혜순>

화자는 길거리를 가다가 고층빌딩 유리창닦이를 봤겠지.
고층빌딩의 유리창닦이는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란다.
창문 안에서는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움직이지만,
창밖에 매달려 유리를 닦는 사람들을 거기 있다는 인식도 하지 않으니 말이야.  

첫부분부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저녁에 해가 뜨고 아침에 진대. 말도 안 되지?
이렇게 모순되는, 말도 안 되는 걸 <역설법>이라고 한단 건 이제 알겠지?
반대되는 게 <반어>.
에이 뭐, 그건 말도 안돼. 이게 <역설>  

아침에 출근하려고 <유리산>을 올라가노라면,
사람이 올라가는 만큼 해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상대적인 거니깐.
반대로 퇴근무렵 <유리산>을 내려오다보면,
사람이 내려오는 만큼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질거야.
역시 상대적이지. 

유리창닦이가 오르내리면
마을에 햇살도 퍼지고, 소녀가 석양을 받으며 올려다 보기도 하겠지만,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부터가 조금 문제란다. 

이 '두 개의 밤'은 뭘 뜻하는 걸까?
뒤의 이야기를 따져 보면,
빌딩 안과 빌딩 밖의 두 세상의 밤인 것 같다. 

유리창닦이인 화자는 <풍뎅이>가 된대.
풍뎅이가 유리창 밖에서 아무리 잉잉거리고 울어도,
유리창 안에서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지.
그렇게 소외당한 화자는 자신을 유리창닦이에 비유한 거란다. 

풍뎅이는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만
반복적으로 창문만을 만날 뿐이야.
끊임없이 소통을 원하는 화자에게 세상은
늘 유리창이란 방해물이자 장애물로만 맞선단다. 

유리창닦이가 밤새 창문을 여닫아도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 뿐.
<방 한 칸>이란 자신의 공간.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서로 쓰다듬는 소통의 공간은 없고,
그저 서로는 <창 밖의 존재>일 뿐인 냉혹한 세상. 

세상은 그런 이들로 가득하다는구나. 

밤새 닦아도 닦이지 않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은
소통이 불가능하고 단절이 심화되는 상황을 표현한 것 같지?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큰골은 '대뇌'야.
대뇌는 인간은 온갖 감각기관이 받아들인(수용한) 것들을
합쳐서(연합) 판단하는 기관이지.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게 되려면
인간의 대뇌 피질에서 활발하게 전기 신호가 지직거려야 하는 거겠지.
근데, 큰골은 잠을 자고 있단다.
갈수록 두꺼워지는 대뇌의 잠. 

인간과 인간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인 대뇌가 두껍게 되고 잠들게 되는
무감각한 세상. 

화자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살아.
그것은 곧 소통을 끝없이 추구하고 있단 소리겠지. 

사람들과 유리된 공간,
그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 공간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간절히 소망하는 화자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란다.

오늘은 시간의 상대성과 공간의 상대성을 다룬 시 두편을 읽었다.
시간은 20대때는 시속 20킬로미터의 속도처럼,
50대때는 50킬로미터의 속도처럼 느껴진대.
초등학교보다 중학교가 빨리 가고, 고등학교는 더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공간도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지만,
서로 나뉘어져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외감을 느낀다면,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지. 

다시 1주일이 시작된다.
새 아침을 맞는 기분이,
유리창닦이처럼 좌절스럽지만은 않길...
그리고 울상으로 새 한 주를 맞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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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힘든 1주일이 지났다.
다음 주도 바쁘겠지만, 그래도 개학 후 첫 주는 언제나 마음도 몸도 몹시 춥다. 
선생님들도 새로 오셔서 낯설고, 자리도 바꾸면 환경이 달라져서 마음도 설다. 

오늘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볼까?
도대체 인간이란 건 뭘까? 

어린 아이를 교육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가르침이 <도리도리>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중추 신경이 지나는 '목 운동'을 시키는 거래.
그 다음 교육과정은 <짝짜꿍>이야.
목을 움직일 줄 아는 아이에겐, 팔을 미세하게 맞출 줄 아는 운동을 시키는 거지.
발은 눈 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쭉쭉 늘여주는 마사지 정도면 된단다.
그런 다음엔 <죔죔>을 가르쳐. 너도 이 교육과정은 다 마스터 했단다. ㅎㅎ
주먹을 쥐게 함으로써 더 미세한 손가락 근육을 훈련하는 거래.
마지막 훈련이 <곤지곤지>래.
왼손바닥에 오른손 검지를 맞출 줄 아는 신경 운동. 

이렇게 가르쳐도 15년이 되어야 다 자라는 인간.
그렇지만 그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
그러나 또 생태계 속에서 온갖 파괴를 생성시키는 지구 공공의 적. 

조지훈의 <풀잎 단장>을 읽어보며 인간과 자연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보자.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조지훈, 풀잎 단장>

시인이 오래된 성터를 거닐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렴.
그 성터에는 오랜 세월 거치는 동안 무너져버린 축대에 오래된 바위가 널브러져 있겠지. 
좀 높다란 곳에 있는 성터에 올라 하늘을 보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풀잎을 보게 되었어. 

그러다가 풀잎과 자신의 <공통점,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 거야.
자연이나 사물을 바라보다가 깨달음을 얻는 일, 바로 관조의 순간을 맛보게 되지.  

풀잎이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듯,
나의 존재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이구나.
내가 이렇게 약하고 작은 존재구나. 아~ 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잰체하는 바보였구나~ 이런 생각을. 

그래서 풀잎을 보고 화자는 마음 속으로 외쳤단다.

   
  아, 너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분신>이구나.  
   

그래서 인생사에 찌들린 화자는 고달픈 얼굴로 풀잎에게 이야기한다.
낮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그렇지만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시간이 쏜살같이 흐를 땐 인간은 자연의 법칙, 섭리를 생각할 틈도 없어.
그렇지만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때'가 되면,
한 줄기 풀잎을 만나도 <그윽히 피어오르는 풀잎의 영혼>을 깨닫게 되는 것임을 화자는 발견하고 있어.

'무너진 성터' 같은 시어에서는 <인생 무상>이 느껴진다.
불교에서 <무상 無常>이란 말뜻은 '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이 변함'이란다.
금강경에서도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다>고 한 것도 그런 거야.
한계가 있어서 유한하고, 변하고 사라지고 죽는다는 것. 

<풀잎 단장>이란 제목은 풀잎을 보고 느낀 짧은 생각(단상) 또는 풀잎을 보고 지은 짧은 글(단장)이 되겠지.

풀잎에 화자가 <동화>되면서 풀잎의 생명력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시였다. 
다음엔 한용운 시인의 <알 수 없어요>를 읽어 보자.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제목이 벌써 좀 신비롭지 않냐? ㅋ
알 수 없어요. 

이 시에서는 총 여섯 번의 의문이 던져진다.
그 의문의 내용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질문의 답은 한결같다는 거야. <알 수 없어요>
인간 존재의 모든 의문은 <인간의 지식 한계> 너머 있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질문할 수 있을 뿐.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를 뿐>이란 대답이었다는구나.
참 겸손한 표현이지 않니?

가을이 되어 오동잎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어.
왜 지구는 오동잎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런 것이 바로 뉴턴이 궁금해 했던 거야. 

장마철에 바람이 부는 검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대. 
아무리 비바람이 강해도, 그 위엔 눈부신 태양과 푸른 하늘이 그대로 있는 거지.
참 신비로운 자연의 현상 아닐까? 

비가 내린 뒤, 수천 년 해묵은 나무와 이끼, 그 옆의 탑이나 부도(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돌무덤) 사이를
걷노라면 어디선가 흙냄새와 나무의 향, 축축한 풍만함이 가득한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온다.
아, 이런 고마운 향을 느끼는 우리는 어찌하여 여기를 걷고 있는 걸까?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도 어디선가부터 흘러나온 작은 시냇물.
비가 오면 조금 커지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쉬이 메마르지 않는 시냇물도 참 신비로운 자연의 노래다. 

바다부터 하늘까지 가득한 저녁놀을 의인화하고 있어.
연꽃(불교적 완성의 의미) 같은 발꿈치로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하늘을 만지고,
떨어지는 해를 단장하는 저녁놀~ 아, 이런 아름다운 장면은 한 편의 시 같잖아.
도대체 누가 이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니? 

마지막 부분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란다. 

나뭇가지가 타고 남은 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오래 묵혀진 것이 바로 <석유>거든.
기름이 다시 타오르고 <무 無>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돈단다. 그것이 윤회의 섭리야.  

반야심경이란 <불경>에 짱구네 집 가훈이 나온단다.
짱구네 집 벽엔 <색즉시공> 넉 자가 붙어 있어.
색 色은 곧 존재하는 것, 있는 것 이런 말이야.
공 空은  없는 것, 사라지는 것 이런 말이지.
오나전 역설 아니니?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다.(한자로 是는 영어의 Be 동사야. ~이다는 뜻이지) 

아무리 뭐가 있어 보여도 다 없어지게 마련이고,
아무 것도 없어 보여도 가득 차게 마련인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이다. 

축구할 때면 부르짖는 '대~한 민국'도 사실 얼마 뒤면 사라질 거야.
남북이 통일되면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사라지겠지.
그러면 <통일 조선>이 되든, <통일 한국>이 되든, <유나이티드 코리아>가 되든 새 이름이 붙을 거 아니니?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고, 또 전혀 아닌 것도 없단다.
세상은 돌고 돌지. 변하고 변한다. 바뀌고 바뀌고...
이게 <인생 무상>이고 <색즉시공>의 의미야.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화자의 구도 정신일 거야.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곳인지... 일제 강점기의 시. 

부처는 4성제라는 것을 이야기했잖아.
고,집,멸,도...의 네 가지.
세상은 고통스러움의 연속인데, 이건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소멸시키고 싶은 자는,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달아 '도'를 이루라. 이런 거지. 

이렇게 말로 듣는다고 깨달아지면 그건 진리가 아니란다.
언어의 경지를 뛰어넘는 가르침이 있어야 되지.
혼자서 마음으로 곱씹고 곱씹어야 진리의 한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화자가 마지막 행에서 외치고 있어.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정진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 되겠습니까?
'밤'은 시련의 시대, 일제 강점기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등불이 되고 싶대.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지.  

만해 시에서 '임'의 의미는 참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 '군말'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대.  

"'임'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사랑한, 그립고 애틋한) 것은 다 임이다.
중생이 석가의 임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임이다.
장미화의 임이 봄비라면, 맛티니의 임은 이태리이다.
임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임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장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임이 있느냐. 있다면 임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처럼, 한용운에 있어서 '임'은 이 세상 모든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다.
그러한 것들은 개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즉, '임'은 애인인 동시에 조국, 조국인 동시에 부처, 아니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추상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는 <신비한 자연 현상>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구도 정신을 드러내고 있단다.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 가득한 곳인가?
어쩌면 풀잎 단장과 유사한 신비로움이 느껴지기도 하지?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단어로 <관심>을 꼽는단다.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똑바로 볼 수 있고,
기회도 잡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사람도 얻을 수 있고,
인기도 생길 수 있고,
대학도 갈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약장사의 만병 통치약이 바로 <관심>이라고 말이야.
늘 생각하는 것이 관심이지. 그런 걸 좀 수준높은 말로 하면 '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스님, 기독교적 수도자 들은 늘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소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존재야.
삐뚤어진 세상과 올바른 인간의 삶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가지고 말이지.
그러니 이런 종교적인 이야기도 가끔 들어 봐야 할 게다. 

오늘 첫 토요일 자습을 하고 왔구나.
고3때는 역시 대학 입시에 관심을 가지고,
다음 주 목요일에 치를 모의고사에 관심을 가지고,
네 성적과 실력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필요하겠다. 

삶은 늘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의 연속이야.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지혜롭게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또 인생의 묘미란다.
이제껏 편하게 살아온 민우야.
올해 더 지혜로워지는 한 해를 보내길 바랄게.
주말 즐겁고 힘차게 보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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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날이 차다.
오늘은 아빠도 바쁘고 하니 시 한 편만 읽고 자자~.
오규원의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란 시다.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잔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오규원,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이 시에서 '죽음'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다의 어간 '살-'에 명사형 전성어미 '암'이 붙어 '사람'이 된 거지.
그러니깐 살아있지 않은 것은 '시체'거나 '미라'지 사람이 아닌 거란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모순되게,
이런 것을 <역설>이라고 했지?
<미스터 죽음>이 살아가는 하루를 상상하고 있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징으로서 한 사람의 이름을 <Mr. Dead>로 쓴 거지.

이 시에 나오는 <죽음>이라는 사나이 혹은 그녀는
참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같구나.
정말 재미 하나도 없고 무기력한 사람. 

버스를 타려다가 귀찮아서 택시를 타고,
자신은 할 일이 많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리고 그 또는 그녀는 일보다 우선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대.
생각할 일도 많지만
우선 한잔 하고 취하면 내일 생각하기로 한다.
자신은 충신도 아니니 회사에 충성을 다할 필요 없다고 합리화 했다.
자신이 오늘 일하지 않고 내일로 미룬 것을... 

한 잔 하다가 내일 생각하려던 것도 작파하고 만다.
미스터 데드는 술이 조금 취해서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내일은 주말 여행을 꿈꾼다. 

속되게 '건강'이나 챙기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고?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어...
이러고 또 자기 합리화를 한다. 

이 시는 <이 시대의 삶>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주제로 쓴 시야.
그런데 <이 시대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역설법으로 봐야 한단다.
삶의 무기력함, 현대인의 자기합리화의 부조리함을
<미스터 죽음>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우화처럼 빗대서 이야기를 지어내 풍자하는 시>가 된 거란다. 

현대인은 늘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해야할 일을 미루면서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세상 탓이고, 그들의 탓이고, 너희들 탓이라고,
합리화하는 부조리한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세상은 참 불합리하단다.
그런 것을 부조리라고 그래.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살아야 하잖아?
올바로 산 사람이 잘 살아야 하잖아?
정의는 항상 승리해야 하잖아?
그게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고 조리있는 이야기지.
근데, 실상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니,
비합리적이고, 이치에 어긋나고,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말한단다. 

이런 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시가 되지 않지.
어긋나게,
역설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죽음 씨>라고 붙인 다음,
그 사람이 합리화하는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생각들을 나열한단다. 

텔레비전과 신문의 의견을
마치 자기의 의견인 것처럼 내세우고 아는 체 하지.
이런 비주체적인 사람은 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야.
미스터 죽음.

오규원의 시집들 이름을 보면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희망 만들며 살기>,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하늘 아래의 생> 뭐, 이렇다.
수필집은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잠시만 머문다> 이런 제목이었대.  

작품집의 제목들만 훑어보더라도,
큰 것, 위대한 것, 유명하고 소문난 것, 남들이 알아주는 것보담은,
작고 남들이 안 알아주는 구석진 곳에 있고 좀 후져보이는 그런 것에 애착을 보인단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인간적이고 사람냄새 나는 거잖아.
오늘의 시도 인간은 그렇고 그런 존재잖냐?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좀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죽음 씨>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인생이란 부조리한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어쩌면, 인생은 원래 부조리한 것이니,
네 인생이 보잘것 없고, 낮고, 작고, 초라해 보여 쪽팔려 보이더라도,
너무 자신감잃고 비실거릴 것 없어.
이 죽음 씨야!
세상 뭐 있어?
인간은 뭐, 다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존재고, 누구나 다 죽음씨라구!!!
그러니 비실거리는 네 인생을 비관하지만 말고,
세상을 향해 <높고 힘차게> 하이킥 한 판 날리는 건 어떻냐고!!!
이런 외침을 속에서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죽음 씨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멋지지 않니?
내가 너무 멋지게만 이야기했나? ㅋ
그렇지만 이런 모순 속의 진실,
역설법을 통해 삶의 숨은 속살을 읽는 것도 시의 재미란다.
내일도 즐거운 하루를 보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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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다.
오랜만에 열 시까지 자습을 하고 오려니 좀 힘들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이제 적응해야 하는 생활이니, 그러려니 하기 바란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도 뭐, 모두 좋을 수야 있겠냐마는,
거기도 적응 잘 하기 바란다. 

오늘은 좀 쉬운 시를 몇 편 보자.
맨날 사회에 불평 많거나 문제점 제기하는 시들을 들이밀면 마음이 무겁겠지.
또는 인생에 쌓인 고뇌를 더듬노라면 아빠의 수업도 쉽지만은 않단다. 

<왜 사냐건, 웃지요>로 유명한 시를 우선 보자.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화자 김상용(金尙鎔,1902~1930)은 스물 아홉에 죽은 아까운 시인이다.
화자의 시는 자신과 자연의 동일성을 보여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나와 자연의 어떠한 대립도 있을 수 없고,
나와 자연의 화해,자연의 품에 안긴 삶,
어떠한 인위적인 삶도 극복하면서 남으로 창을 내어 푸르고 고요한 안식처인
자연의 품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조명하고 달관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동경한다.   

화자가 살아간 시대는 이 땅의 민중에게 가장 척박한 역사를 던져주었던 시절이다.
그렇지만, 그는 햇볕 잘 드는 남으로 창을 내고,
웃으며 산단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사는 건 무의미 하잖아.
일제 강점기인데, 독립운동이라도 해야 하지않겠어? 넌 도대체 뭘 위해 사니?
이러고 물으면, 그저 웃겠대. 

아빠는 저 웃음이 가슴아프게 이해가 간단다.
아빠가 대학다니던 시절엔 누구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곤 했어.
아빠도 광주에서 학살을 일으킨 정권에 저항하는 집회엔 매번 참가했지.
그렇지만, 지식인의 길을 버리고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사회 변혁을 꿈꾸지 않겠니? 이런 풍토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아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단다.
그것 역시 내 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거든. 

넌, 왜 그따위로 사니? 이렇게 묻는 사람은 암튼간에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잖아.
화내거나 짜증낸다고 이해해 주지도 않을 거잖아.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겠지. 딴 데 쳐다보고...

화자는 일제 강점기 친일파나 부역자가 아니란다.
그저 자신의 나날을 평온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야.
욕심도 없다. 구름이 꼬여도 갈 리가 없다.
그저 자연의 노래를 공짜로 들으며 살아갈 따름이래.
그런 사람더러,
너 일제 강점긴데 이따위로 살아서 되겠냐, 도대체 넌 뭔 생각으로 사냐?
이렇게 묻는다면, 글쎄. 아빠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구나. 

세상은 반대와 투쟁으로 이뤄져 있어.
가진 자들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못 가진 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힘을 합치고 말이지.
그렇지만, 그 반대와 투쟁의 길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가진 건 아니란다.
맨 앞에서 주먹쥐고 목숨걸고 나서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뒤에서 눈치보며 소리나 질러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어찌 보면 싸우지 않는 듯이, 세상 일에 무관한 듯이
한눈 감고 세상을 관망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란다.
한 편에서 다른 편을 무조건 욕할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해. 

다음의 <사슴>도 마찬가지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사슴>

화자는 사슴을 관찰하고 있어.
사슴은 슬프고 점잖게 말이 없고, 좀 고상하지.
뜻이 높고 우아해 보이는 사람을 고상하다, 고고하다 이렇게 말하잖아. 

물 속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낸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은?
나르시소소지.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인물.
이 시의 주제는 그런 <자기애> 또는 <나르시시즘>과 관련 깊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단'것은 이상이 높단 이야기 일거야.
'슬픈 짐승'은 감정 이입으로 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독한 화자를 반영하고 있단다.
1연에선 사슴의 외면이, 2연에선 사슴의 내면이 표현되고 있어.
주제라면 <이상향에 대한 동경, 이상적 생명에의 향수> 같은 것이 되겠지.

이 시는 노천명을 문단에서 중요한 시인으로 확정시킨 유명한 시란다.
사슴과 고독의 시인, 노천명.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사슴처럼 고고하게 살다간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숙명적으로 결정지어진 여자로서의 슬픈 운명을 수용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이상적 향수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사슴'은 고고함과 귀족성을 상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시에선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단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시인의 고독한 내면을 '사슴'을 통해 형상화 한 시가 되겠지. 

다음엔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는 관조의 시 한 편 보고 마치자꾸나.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박성룡, 과목>

과목은 과일 나무고, 과물은 과일이다.
나는 '과일이 열린 것'을 보면 깜놀한다.(경악) 

뿌리는 비옥하지 않은 땅(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시련(비바람) 속에 놓여있는 과목과 과물. 

모든 것이 소멸하는 가을에,
과일은 홀로
황홀한 빛깔을 띠고, 황홀한 무게의 은총을 보여주는구나. 
4연에서 수미상관으로 일단락이 된다.  

마지막 연.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무기력하게 보내버린 부정적인 현실을 돌아보지만,
화자는 이 과목의 과물 앞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있단다. 

이렇게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경탄을 드러낸 시들은 참 많단다.
그렇지만 이 과목에서 보여주는 직접적인 경이와 경탄의 소리는 독자에게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얻게 되지. 

과목, 과물, 경악, 박질 같은 시어들은 보드라운 시어들이 아니지.
투박하고 생경한 한자어의 사용을 통해서 화자는 강인한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사태', '경악' 같은 용어도 독자에게 신선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단다.
시에서 늘상 쓰는 용어들이 아닌 말들이 오히려 신선할 수도 있지. 

오늘 다룬 시들은,
시대의 핵심에서 조금은 어긋난 듯한 시들이다.
그렇지만,
삶의 핵심은 무엇인지,
<남으로 낸 창>을 통해서 타협하지 않으면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사슴>을 관찰함으로써 자기애를 확인하는 삶을,
<과물>의 익어감을 보면서, 힘빠지는 시의 힘을 회복하는 시인의 삶을 읽을 수 있었단다. 

삶은 그런 것 같아.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누구나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똑같은 월급을 들고도 누구는 불평하고 누구는 감사할 줄 아는 것.
똑같은 성적표를 보고도 우는 아이도 있고 웃는 아이도 있는 것.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살 줄 아는 지혜를 얻는 것. 그런 것 말이야. 

열 시까지 자습이 힘들더라도 힘내서 하자.
누구나 다르지만, 또 남들 다 하는 걸 못하는 것처럼 힘빠지는 일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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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려는지
날씨가 몹시 변덕스럽다.
꽃이 피는 일을 시샘하여 추위가 온다는 의인법을 쓴
꽃샘추위는 말은 예쁘지만,
고 성깔은 꼬마 마녀가 부리는 성질머리같다. 

날이 며칠 추울 모양이니 따뜻하게 입고 다니렴.
오늘은 얼마 전 기형도의 '안개'와 함께 다뤘던  '그날'의 시인 이성복 작품을 몇 편 살펴 보자.
우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대표작, '남해금산'을 읽어 보자.

한 여자 돌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해금산>

남해대교로 유명한 남해섬에 가면 비단 금 錦자를 쓰는 멋진 산이 있다.
바로 남해 금산이다. 
남해 금산은 바위가 멋지게 튀어나와 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데,
이성계가 임금이 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는 전설도 있고,
특히 금산의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은 유명하다.

금산의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에서는 호남지방과 생활권을 같이 했던 남해의 옛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여수 돌산에 사는 한 총각이 남해에 고기잡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과수댁을 사모한 끝에 상사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있었다
이를 안 과수댁은 상사병을 고칠수 있다는 이 바위에서
총각과 만나 사랑을 나눈 뒤 백년해로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상사바위>는 잊지못해 상사병에 걸린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바위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전설을 떠올리면서 이성복의 남해금산을 읽어 보자. 

이 시는 전설 한 토막을 듣는 듯 하다.
한 여자가 바위 속에 있었고, 그 여자를 사랑한 나도 돌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랑은 순탄치 않아 그 여자 울면서 떠나갔다.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 주었고,
나 혼자 남은 남해 금산,
나는 바닷물 속에 잠긴 섬이 되었다는 이야기... 

남해섬 앞바다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다도해 절경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단다.
그래서 남해금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노라면 이런저런 전설이 떠오르기도 하겠지. 

화자는 돌 속에 묻힌 한 여자를 사랑했대.
돌 속에 묻힌 여자란 건, 그 여자가 쉽사리 사랑해선 안될 존재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다 그 여자가 떠나가고, 나 혼자 남아 오른 남해 금산.
거기서는 <상사 바위>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들을 이어준다는 전설을 품고 서있어.
화자는 떠나간 그 여자를 해와 달이 잘 끌어 주었기를 빌었나봐.
이별했다고, "에잇, 고얀 년, 고만 가다가 확 자빠져서 다리라도 부러져라~"
이런 심술을 부린 건 아니고,
"해님, 달님, 그 여자 앞길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빌어 주세요~" 이런 순정한 마음이겠지.
혼자 남은 화자는 하늘 가까운 남해 금산에 올라 푸른 바닷물을 바라보며
혼자서 잠잠히 침묵에 잠겨 시를 쓰겠지. 

이성복은 개인적 삶을 통해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면서,
시대적 아픔을 치유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시인이란 평을 받고 있어.
먼저 이야기한 <그날>이 그런 시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이런 구절은 시대의 아픔을 드러낸 구절이었단다. 
다음엔 어머니의 사랑을 드러낸 시를 한 편 보자.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 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또 비가 오면>

이 시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
마치 <아버지의 사진>이 중의성을 띠듯.
이 사진은 아버지를 찍은 사진, 아버지가 찍으신 사진, 아버지가 사들인 사진, 아버지가 빌린 사진,
아버지가 소유한 사진, 아버지가 소지한 사진, 아버지가 훔쳐온 사진, 아버지가 주웠다 버린 사진... 등
무한하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
<사랑하는 어머니>도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 또는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 등으로 볼 수 있지. 

그 어머니가 비에 젖고, 물에 잠기신대.
이 얘기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니?
평소엔 늘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 자식이 죽은 어미가 "강가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해서
그대로 말을 듣곤, 비가 오면 어미 무덤이 떠내려갈까 슬피 운다던 이야기. 

이 시에서 어머니는 무덤 속에 계신 것 같아.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슬픔이 되어 애상적 분위기를 심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유사한 구조가 반복되어 운율을 형성하고 있지.

다음은 이성복의 <꽃 피는 시절>을 읽어 보자.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꽃피는 시절>

아빤 이 시를 첨 읽고, 이별하는 상황을 떠올렸어.

1연 : 당신은 멀리 있어요.
2연 : 자꾸 당신이 고개를 들어요.
3연 : 내 안의 당신은 나를 벗어나려 하지만
4연 : 내게서 당신이 떠나면 내 몸 다 찢어져요.
5연 : 온몸이 당신과의 이별을 아파해요.
6연 : 어떻게 당신을 보낼까요.
7연 : 당신을 어떻게 보낼까요...

뭐, 하는 이야기는 이런 것 같구나.

나는 울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5연)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7연)

히야~ 민우는 사랑하다 이별하는 심정이 어떤 건지 겪어 봤니?
이렇게, 울다가 웃다가 토할 지경이 되고, 벌컥벌컥 물 마시고 길길이 날뛸 지경,
이별해 본 사람은 알 거야. 이렇게 육신이 아픈 지경을...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아, 얼마나 애절한 이별의 메시지인지~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을 보렴. 제목은 '꽃피는 시절~'이야.
꽃피는 시절에 이별을 한 걸까?
이 시를 다시 읽어보자. 



이제 나는 <나무>로 변신을 할 거야. 

나는 뻣뻣한 나무입니다.
내 안에서 봄이 오면, 꽃이 피어나려 움트고 있겠지요.
다시 1연 : 겨울에도 나는 꽃이 올 것을 알아요.
2연 : 봄이면 당신은 당연히 올 거예요.
3연 : 내 안에 너 있다~
4연 : 꽃이 피려면 내 몸으 갈라지는 고통을 겪어야 해요.
5연 : 희고 고운 꽃이 잎잎이 피어날 거예요.
6연 : 그러나, 어떻게 꽃잎을 떨굴까요? 미치겠네~
7연 : 내게 매달린 조그만 꽃잎과 어떻게 이별할까~

이런 노래야.
꽃이 피었다 떨어지는 것을.
나무에서 꽃이 솟아나고, 이별하는 것을,
남녀간의 이별의 상황과 유사한 점들을 추출해서,
<이별>이란 추상을 <낙화>란 구체로 비유한 것!

이런 것이 비유의 짜릿한 전율이 아닐까 해.
어쩜 이렇게 감쪽같이 이별하는 사람처럼 시를 써 놓고는
제목을 <꽃 피는 시절>이라고 붙일 수 있을까. 

시인은 늘 삶의 장면들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지를 가다듬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겠지.
삶의 어떤 면과 언어의 어떤 것을 연관지어서 표현하면 멋진 작품이 될지를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삶의 어떠한 단면을 발견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단다.
시를 읽으면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지.
삶은 혼자서 살 수 없으니,
늘 사회를 이야기하고, 사회는 늘 변하니깐,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런 거야.
자, 새학기다.
부디 건강하게 힘내서 잘 보내라~
힘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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