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잘 흘러 간다.
간절히 기다리면 시간은 더디 가지만,
좀더 잡고 싶어할 때면 시간이 여지없이 물흐르듯 흐르곤 하지. 

민우랑 우리가 만난 것도 벌써 20년이 가까워 오는구나. 
오래오래 함께 살 수는 없는 일이니,
같이 사는 동안 즐겁게 살자. 

오늘은 좀 인생에 대한 자세를 한번 생각해 볼까 한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정지용, 그의 반>

처음부터 의문문을 씀으로써 호기심을 부른다.
그를 뭐라고 부를까?
영혼 안에 불을 피워 환하게 비춰주는 존재는 도대체 뭐라고 부를까.
내 눈보다 세상을 더 밝혀 볼 줄 아는 존재를 뭐라고 부를까?  

달, 금성, 고산식물... 이런 것들은 순수함, 멀리 있음의 의미를 담았다.

아마도 그런 존재는 하느님이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이일 것이다. 
'항상 머언 이'는 화자가 얼마나 하느님을 공경하는지 보여준다.
이렇게 멀리 대하면서 공경하는 것을 <경원>한다고 하지.
외경의 자세로 바라보는 것 같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할 존재가 못 된다.
오로지 수그릴 수 있을 뿐.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을 경건하면서도 겸손하게 감춘다. 
무조건적인 복종의 자세. 그것이 화자에겐 즐거움이겠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를 <그의 반>이라고 함으로써,
그가 있어야 상대적으로 나는 존재할 수 있음을 표현한 시로 보인다.

다음엔 황지우의 <출가하는 새>를 읽어 보자.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황지우, 출가하는 새>

이 시에서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 존재'인 반면,
인간인 화자는 '자취를 남기는 존재'임을 자각하며 시작하는 시란다. 

새는 앉았다 간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날아간 자리에도 기척이 남지 않았다.

그걸, <과거가 없는 탓>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반대로, 화자 자신은 살아온 과거를 보면
자랑스런 일보다 부끄러운 일, 감추고 싶은 과거가 많이 보였나 보다.
그래서 이런저런 부끄러운 과거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자취를 부끄러워하며, 새의 과거 없음을 부러워한다. 

체취도 남기지 않고, 눈물도 없이, 빈 몸뚱아리로 살아온 새.
그러나 그 새는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갈 줄 안다.
세상 삶의 바람에 휘둘리는 화자는
새가 자신의 의지대로 바람을 거슬러 가는 기상을 부러워한다.  

태어난 이후의 꿈으로 미래를 읽을 줄 아는 새.
그러나 거센 바람 속에서 미래를 잃어버린 화자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시.

사람이 어떻게 내일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으랴마는,
새처럼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화자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세속적인 가치에 붙들려 살다보면 온갖 추잡한 흔적만 가득 남기게 되고,
진정한 미래지향적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나는 <그의 반>인 존재이지만,
또 이렇게 현실에서 미약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화자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미래를 꿰뚫어보는 눈>을 간직하며 살고자 한다.
그 눈만이 미래지향적 삶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우야, 너의 삶을 네 스스로 설계하는 데 게으르지 않기 바란다.
우리 속에는 모두 <부처>를, <그의 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느냐.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삶의 집을 짓는 데 힘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그런 것이 아빠의 희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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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여지없는 봄인데도
기온은 제법 손바닥을 차게 만든다.
겉모습은 이쁘장한게 눈길을 끌지만
성격은 새초롬한 미인같은 쌀쌀한 날씨. 

오늘은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생각된 김광규 시인이
자신을 어떻게 재탄생시켰는지,
<르네쌍스>가 재탄생의 의미라는데, 그 과정을 한번 읽어 보자.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이 시는 대충 다섯 문장으로 되어 있어 부분별로 보자면,
첫부분에서 <자기 반성>을 하고 있다.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건, 바로 인생은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다.
어떨 때?
스스로 싸구려 일회용 물건처럼 가치없는 삶으로 느껴질 때.

그럴 때 화자는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대.
현대아파트는 말 그대로 <현대의 문명>이고
털보네대장간은 <전통적 삶의 양식>이겠지.
전통적 삶의 방식이 현대적으로 바뀌면서 잃어버린 인간성, 인간의 가치를
되찾고 싶다는 이야기야. 

풀무질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야.
무쇠를 불린 시우쇠를 달궈
모루(쇠받침대)위에서 두드려서 날을 만들고(벼리고)
숫돌에 간 '낫'처럼 변신하고 싶대.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모두들 똑같은 표준의 시계 속에서
똑같은 매뉴얼에 맞춰 사느라 가슴이 막힌 화자는
스스로 노동의 도구인 <낫>, 그것도 잘 드는 <시퍼런 무쇠낫>이 되고 싶다는구나. 

다음 부분에선 <꼬부랑 호미>로 변신하여
대장간 벽에 걸리고도 싶다고 하고. 

<무쇠낫>과 <호미>는 노동의 건강함을 대표하는 도구겠지.
농부들은 잔머리를 많이 굴릴 것도 없이,
그저 땀흘려 일하다 보면 결실을 얻던 시대를 살았잖아.
그런 시대가 그리운 화자겠지. 

스스로 부끄러워,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가던 길을 - 남들은 아직도 다들 가는 길을, 멈추고,
어딘가 멈춰선 채 걸려있고 싶대.
그 걸려있는 도구는 생활에 쓰임이 많은 낫이나 호미라면 더 좋겠단 것이고. 
해우소(解憂所)는 '근심을 푸는 곳'이란 뜻으로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변소(便所)란다. 

이 시의 화자는 좀더 가치있는 존재로 살고 싶은 소망을 반성과 함께 드러내고 있어.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질 때,
가치가 재창조되는 <털보네 대장간>에서
자신을 달구고 벼려 쓸모있는 <낫, 호미>로 바꾸고 싶어한단다.
가치있는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고 싶은 것이지. 

이런 삶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자아의 본질을 찾기 위한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읽는다. 

담엔, 오세영의 <열매>를 읽어 보자.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땀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러운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세영, 열매>


딱 읽어 보니 <열매를 관찰하고 쓴 시>지?
그럼 이제 <관조>란 말은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화자는 열매가 둥긂을 관찰했단다.
가시나무조차도... 그렇대. 

또 뿌리는 날카롭고, 가지도 뾰족하지만,
열매는 모나지 않고 둥글다는구나.
그러고 보니 그렇지?
그 이유를 뭐라고 가져다 붙이는지 화자의 관찰력을 보자.  

 

스스로 익어 떨어지는 열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열매지. 둥근 열매.
먹는자의 이빨은 예리한데, 열매는 둥글고 부드럽대. 

마지막에 주제를 드러내고 있어.
화자가 독자에게 <그대는 아는가?> 이러고 있지.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대.
먹힐 줄 아는, 희생하는 존재는 모가나지 않는대.

이 시에서 '열매'는 단순한 '결과물, 결실'은 아니지.
원만함, 가득한 충만감의 사랑을 느끼게하는 소재란다.
반대로 가시나무, 가지, 뿌리, 이빨은 해치고 날카로운 소재고. 공격적이고... 

자연을 관찰하면서 인생의 섭리를 깨닫는 거야.
자기 희생적이고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의 성격은 <모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공격적이고 남을 해치는 사람의 성격은 <둥글지 않다>는 것. 

그럼 독자는,
너 아니? 했으니 알아 들어야겠지.
마음을 모나지 않게 궁글려야겠단 것을 말이지. 

자연물 속의 '둥긂'과 '모남'의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면서
자연물 속에서 삶의 진리를 깨우치는 <관조>의 시. 열매... 

선생님들이 민우가 수업 잘 듣는단 말을 들으면 나도 기분이 좋단다.
성격이 모나다는 것은 사람들과 잘 부딪친다는 의미도 되지.
친구들과도 선생님들과도 둥글게 사는 민우의 모습을
오래오래 유지하기 바란다. 

간혹 스스로 좀 부족하다고 느끼면,
마음 속 <털보네 대장간>에 가서 좀 벼리기도 하고 말이다.
누구나 마음 속에
<털보네 대장간 하나쯤> 간직하고 살면 삶의 활력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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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1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께서는 오세영 시인의 좋은 시를 참 잘 골라내시네요.

글샘 2011-03-17 08:40   좋아요 0 | URL
제가 골라내는 게 아니라, 좋은 시가 많은 거죠. ㅎㅎ
 

일본 땅은 지금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가장 무서운 자연과의 전쟁.
인간의 오만은 높은 바벨탑을 쌓아 올려 하늘에 도전하지만,
하늘의 뜻은 그 바벨탑에 벼락을 떨어뜨리지. 

인간의 거만함은 자연의 흐름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그래서 인간이 정말 겸손해야 함을 일본 지진 사태를 보면서 느낀다. 

오늘은 한국 전쟁 중,
가난의 극심함을 심리적으로나마 이겨내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서정주의 시를 한 편 보자.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서정주, 무등을 보며>

'남루'는 '누더기'야.
가난은 '누더기'다. 이런 은유를 썼다.
그럼, 둘 사이에 유사점을 찾아야겠지. 

1연에서 또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는
<갈매빛(진녹색) 등성이를 드러내고 선 여름 산>같다고 했어.
우리들(전쟁으로 누더기를 입고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당당한 멋진 사람이란 거지.

누더기를 입고 있으면 사람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누더기가 그 사람의 본질, 멋진 본성을 가릴 수는 없는 것처럼,
가난도 그 사람의 본성을 가릴 수는 없단 이야기야.  

청산이 난초를 기르듯,
인간은 제 새낄 기른다.
힘들다고 난초를 내쳐버리지 않는 청산처럼,
전쟁기 가난하다고 새끼를 버릴 순 없다. 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먹고 살 것이 없는 극빈의 시기.
너무 배고픔이 극심하지만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곡식.
목숨이 가다가 휘어지는 가지처럼 지친 때가 오면,
더러는 앉고, 누워서
서로 바라보며 의지하며 살 일이다.
마치 박재삼의 <흥부 부부상>을 읽는 것처럼,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부정적 현실(가시덤불, 쑥굴헝)에 놓이더라도
우리는 호젓이 묻힌 <옥돌>같은 존재다.
'청태(이끼)'가 끼었다고 옥돌을 버리지 않듯,
우리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전쟁 중의 극심한 궁핍도 의연하게 이겨내자는 <의지>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 자식을 잃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였지만,
제 자식을 고아원에 버리기도 하였다.
극심한 가난은 인간을 무심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절제된 감성으로 부정적 현실을 이기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시.
구체적인 대상(무등산)을 보면서 그 산처럼 의지의 한국인이 되려는 마음을 먹은 거겠지.   

 

<무등산 서석대 瑞石臺, 상서로운 돌이 있는 높은 곳>

'무등 無等'이란 뜻은 불경에서 자주 보이는 말이야.
대등한 것이 없는~ 이런 뜻이지.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그래서 <최상급>의 표현으로 쓰는 말이란다.
최고의 산, 최고의 명산. 무등산. 
사진의 서석대는 기둥 모양(주상)의 돌조각이 갈라져있다 해서 <주상절리>라고 부르는 지형이야.

그러나 30년 전 광주에서 군부의 쿠데타로 시민들이 죽어갈 때,
무등산은 '오르지 못할 산 無登'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어.
산으로 피할 길도 다 막아버리고 젊은이들을 학살했던 무서운 과거가 담긴 말이지.
지금도 광주의 상징은 무등이란다.
무등산 수박, 무등 양말, 무등 경기장...
무등이 <최고>란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면 멋진 이름이겠지.

간혹 서정주가 살아온 삶을 보면,
저항정신보다는 순응적 삶이 두드러지다 보니,
<정신적 승리>로 보이는 이 시도 <사치>가 아닌가? 하고 비판할 여지도 있긴 해.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살자. 그래 놓고는 자기는 그 독재자 전두환을 엄청 숭상했거든.

다음엔 박목월의 시 <가정>을 읽으면서 가난하던 시절의 아버지 마음을 한번 살펴 보자.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 박목월>

'지상'이란 말을 쓰니 왠지 화자가 지상 말고 다른 세계,
뭐, 하늘나라나 천국을 생각하며 쓴 시 같기도 하다. 
또는 아버지가 직장에서 퇴근해 보니
부엌이나 마루 밑 땅위(지상)에 아홉 켤레의 신발이 헝클어져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아이고, 아이가 아홉이나 되니 참 많기도 했다.
현관, 들깐(다용도실)에
시인의 가정에 저녘 무렵
치수가 다른 아이들 신발이 우루루 모인 풍경. 좀 정겹지만,
가난하던 시절, 배고픈 시인이 먹여살리기엔 너무 많다. 

아빠인 시인의 신발은 19.5문(요즘으로 치면 250센티쯤)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 시인의 길은 시련의 길, 배고픔의 길이겠다. 
그 아빠의 신발 옆에 6.3문의 막내둥이 신발.
고 귀여운 앙징맞은 크기는 아버지 신의 1/3 크기다. 참 귀엽다.
그 귀여운 신을 상상하면 아버지의 고달픈 삶도 금세 따스해 지는구나. 

검정 고무신이란 만화처럼 수십 년 전 한국은 최빈국 중의 하나였단다.
그 시절엔 정말 살찐 사람을 부러워하던 시대였어.
돼지라고 안 놀리고 '사장님'이라고 놀렸거든.
학교엔 살찐 아이들이 별로 없었고 말이야. 

미소하는, 웃는 얼굴을 보래.
여긴 <천상>이 아닌 <지상>이고
<얼음과 눈>의 시련이 가득한 세상이야. 

가엾은(연민한) 삶의 길은 시련투성이일 뿐이지. 

아홉 마리의 강아지, 강아지 같은 것들은 <귀여운 아이들>이겠지.
아버지는
<굴욕과 굶주림과 추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란다. 

여기는 천상이 아니라 지상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어설픈 존재>라는구나.
인생은 무엇이든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란 이야기 여러 번 했지? 

아이들을 제대로 벌어 먹이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어설픈 아버지>로 여긴다.
그렇지만... 

마지막에서 <미소하는 내 얼굴>은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모습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지.
가난하다고 아버지의 사랑까지 가난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야.

이 시와 흡사한 시로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도 있어. 읽어 보렴.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는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1연에서 <바쁘고 굳세고 바람같이 만나기 힘든> 속성을 가졌던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 곁에 있고, 마음 약하고, 부드러운> 아버지가 된다고 했다. 

바쁘고 굳세고 바람같던 아버지들은 열심히 일하느라 보여준 모습이었고,
집에서의 아버지는 그저
<어린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일 뿐이다.
아이들이 추울까 <저녁바람에 문을 닫고 /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대.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이 된대.
전쟁이 나거나 시위가 있으면 제 자식이 다칠까 걱정이 되잖아.
일본에서도 부모들이 얼마나 자식 걱정 많이 했겠나 생각해 보면 될 거야.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가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전부>란 이야기지.
함께 살아갈 장소, 사람이란 이야기. 

<굳건해 보이는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박목월의 <가정>에서처럼,
<얼음과 눈의 벽>에 사는 사람,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걷는 사람,
<어설프>지만 꿋꿋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는,
그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외롭다.
겉으로는 올빽머리 근육빵빵 슈퍼맨처럼 보일지라도,
폭탄 제조자, 감옥 교정공무원, 술집 주인은 모두 터프해 보이는 이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바쁘고 굳세고 바람같은> 사람들이어야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순수한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의 깨끗한 피로 인하여
씻김을 받는다.
그들이 비록 아무리 험악한 일을 하는 존재라 하여도,
아버지로서 아이를 볼 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으로 변하게 됨을
<씻김>, 곧 <세례>를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자식들이 있어 극복할 수 있는 아버지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지.

늘 가족을 아끼고 책임지려는 아버지의 마음.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나라>나 <민족>만큼 소중하고 무게가 큰 존재다.
박목월과 김현승의 생각은 비슷하지.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로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표현한 시들이다. 

글쎄.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니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아빠의 직업으로도 먹고 살 만큼 벌 수 있으니 시대도 잘 타고 났고.
민우도 아빠가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 건지... 한번 생각하며 읽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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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16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시는 일을 하고 사니 행복한 일이라는 님이 좀 부러운 걸요.
오늘 페이퍼는 테드창이 떠오르네요~^^

글샘 2011-03-16 08:57   좋아요 1 | URL
저는 힘들다고 생각할 때, 저 아버지들을 생각합니다.
힘들게 지겨운 밥벌이를 하시는 아버지들을 말이죠. ^^
테드창은... ㅠㅜ 금시초문이라...

시간의안그림자 2011-04-01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고인다'는...
'아버지는 어슬픈 존재'라는...
마음이 시리고 여운이 흘러 내립니다^^ 이 지상에는 모성은 있지만, 부성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왜 부성이 없다고 했는지.. 누군가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살아 갈 수 있는 당신이기에 아버지의 존재는 어슬픈 존재라고 해도 위대하고 너무 크 보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희생이 있어 주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각자 자기의 자리에 안주하면서 살아 가고 있는 거 겠죠^^ 그런 것 같습니다. 많이 권위적이었고 엄했던 내 아버지와 지금의 내 남편이자 딸 아이의 아빠가 되어 버린 30, 40대 아버지를 들여다 봅니다. 아버지는 한결 같아 보입니다. 내 아버지가 왜 딸 자식한테 엄격했어야만 했는지, 30,40대 아버지란 이름 역시 그러하다는 시실과 현실을 보면서 아버지는 생명이 세상에 붙어 있는 한 가족들을, 자식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만 되는 자라는 사실을, 새대의 애환이 아버지들을 강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야만 되는 자이기에 눈물을 흘러서는 않된다는 것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스스로 패배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인내하고 걸어 가야 되는 자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으로 우는 사람이 아닐까요^^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사람답게도 만들어 주지만 사람에게 엄청난 댓가도 요구하는 곳이라니... 나이는 사람한테 지혜를 전해주지 않지만, 세월은 사람에게 지혜를 전해 주는 자 인 것 같습니다. 엄마의 죽음은 자식들한테 마음의 빈 자리를 만들어 주고 아버지의 죽음은 자식들한테 영혼의 빈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버지의 힘이 세상에서 큰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글샘 2011-04-03 10:56   좋아요 1 | URL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가시네요. ^^
반갑습니다.
 

지난 겨울 그렇게 춥더니 이제 완연한 봄날씨다.
누군가가 세상 이치를 '지나가리라'란 한 마디로 요약했다더니,
추운 겨울도 금세 지나가고,
따스한 봄도 또 지나갈 거야.
민우의 고3도 금방 지나갈 것이고, 젊음도 머지않아 다 지나간단다.
재미있게 사는 삶을 스스로 만들기 바란다.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시부터 한 편 읽고 시작하자.
오인태의 <냉이꽃>이란 시인데,
냉이꽃이 땅바닥에 납죽 엎드린 모습을 보고 거기서 의미를 찾고 있어. 

원래 인간의 언어는 부족해서 말로 뜻을 모두 표현하기 어렵대.
그래서 <모습> <상 象>을 내세워 뜻을 전달하려고 하지.
낮은 곳에 관심을... 이런말보다 <냉이꽃>이 보여주는 뜻이 더 강력함을 한번 느껴 보렴.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냉이꽃
엎드려 고개 숙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불러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질긴 사랑으로 어우러진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수렁처럼 절망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엎어지고 밟혀
마침내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손톱으로
파헤치다 보면 거기
하나의 절망이 수많은
절망의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는 봄
억센 희망으로 피어있는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오인태, 냉이꽃 3>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냉이는 땅바닥에 납죽 붙은 식물이야.
그 꽃은 아주 작고 보잘것 없단다.
그렇지만, 그 꽃의 존재가 없다면 냉이는 계속 번식할 수 없겠지. 

그 냉이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힘겹게 견뎌온 사람이래.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본 사람. 

낮게 흐느끼다
엎드려 고개 숙여 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부르고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사랑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냉이꽃.

이렇게 낮은 시선이 서로 사랑으로 손잡게 하는 깨우침을 준단다.
냉이꽃 그 보잘것 없는 식물이 말이야. 

그 뒤엔 비슷한 말이 등장하지. 

수렁은 물구덩이지.
수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절망해본 사람은,
엎어지고 밟히고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좌절해본 사람은,
절망은 절망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절망들이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그래서 봄이 되면,
절망한 존재들, 납죽 엎드린 존재들도,
서로 부축하면서 <억센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냉이꽃 보잘것없는 꽃과 뿌리를 통해서,
보잘것 없는 존재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깨우침을 보게 되는 거야. 

관조라고 했지?
지난 시간에 주역이란 책에서 <혁명>이란 말이 나온다고 했는데,
아까 한 이야기,
인간이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어 <상>을 쓴다고 했던 것도 주역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글은 말의 내용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가 없고,
말은 뜻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없다...
성인은 상을 세워 뜻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계사전)
 
   

관조적 시를 쓰는 시인도 상(象)을 세워 뜻을 표현하는 사람이라 보면 되겠지? 



냉이꽃이란 시는 낮은 곳에서 바라본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려는 시였단다.

다음엔 곽재구의 <20년 후의 가을>이란 시를 한번 감상해 보자.
민우가 20년 후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직장도 잡았을 거고, 결혼해서 아빠도 되어 있을까?
기술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회사원이나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한번 읽어 보면서 20년 후,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의 심정으로 삶을 느껴 보렴.

내 어릴 적 산골 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가을 산꽃이 지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곽재구, 20년 후의 가을>

처음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미술 시간을 이야기해.
우리나라 지도를 그린 화자.
산골학교라 산머루 향이 날아들던 소박한 교실에
처녀 선생이 있었는데, 웬 일인지 눈물을 훔치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대.
충혈된 눈동자와 함께 말이야. 

세월이 흘러 화자는 이제 선생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술 시간이야. 

아이들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분단된 조국에 단풍잎도 그리고 시냇물도 그리겠지.
아~
화자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는구나.
그러면서 예전에 그 처녀 선생이 왜 화자의 그림을 보며 눈물지었던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눈을 번히 뜨고도 굳이 모른체 하려 애쓰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을 후비는 날.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관심갖지 않고 무심히 살아오려던 날들.  

그러나 아이들이 그 반토막난 땅에만 이쁘게 단풍잎 고운 색을 칠하는 걸 보고
화자는 눈물이 어린다.
눈물방울조차 동강나버려 마음이 아프다. 

분단된 조국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단풍잎 하나 제대로 그리는 것을 거부하면서,
어찌 통일을 꿈에나 그릴 수 있겠는가.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난 그날,
20년 전의 가을이 되살아난 그날.
아이들에게 20년 후의 가을에는 어쩌면 동강난 국토가 이어져 있으려나?
아이들의 천진난만 웃는 얼굴에
조선 천지 온 산과 온 바다에
화자의 아픈 눈물방울만 동강나 가득찬다. 

<받들어 꽃>이란 시집에 수록된 이 시는
<받들어 총>이란 군인식 경례를 비꼰 것처럼,
통일에 대하여 무심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시야.

"언젠가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들을 부끄럽게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진실로 아름다운 그날의 시 한 편을 꼭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는 곽재구 시인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삶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해 내어 새롭게 일깨워 준다는
평을 받고 있단다.

시인이 바라는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이 통일의 날이기도 하겠지?
20년 후의 가을이면, 정말 통일이 되고, 한국이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사라지고,
<유나이티드 코리아>나 <코리아>로 새로 날 수 있을까?
이 시를 읽으면 그런 기대가 살살 피어오른단다.

다음엔 오세영의 시, <겨울 노래>를 읽어 보자.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이제는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지금은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릴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오세영, 겨울 노래>

이 시를 읽으면 성철 스님의 '화두'가 생각나.
첨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어.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사물을 세상을 <바로 보마> 하는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과 같은 거지. 

그 담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하셨대.
인간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거야. 

그런데 돌아가실 때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어.
어찌 보면 말장난인 것 같지만,
산은 산으로 거기 있고, 물은 물로 거기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는 무상한 존재라고 가르치신 건지도 모르지. 

산이 저기 있어.
눈에 산이 뻔히 보이지.
화자는 '산자락을 덮고 자'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산이 되진 않지.
산과 동화되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일까? 

또 화자는 '산그늘을 지고 사'는 사람이기도 해.
그렇지만 산과 동화될 수 없어.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저기 산이 있는데, 화자는 그 산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 존재임을 절절히 깨닫는다.
여기까지만 다시 읽어 보렴.
동화되길 원하지만 동화되지 못하는 화자가 느껴지는지.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는 분명 시끄럽게 재재거렸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분명 소란스레 달가닥거렸는데,
이제 오간데 없어. 

화자가 가던 길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산까치나 다람쥐는 과연 있었던 것일까?
인간 세계의 길이 끝나, 산문의 길로 접어들었는데도 왜 진리는 보이지 않는 걸까? 

세상 이치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경지가 있다.
<언어 도단>이라고 한다.
언어가 끊겨 말로 할 수 없는 경지.
그럴 때, 성인은 <상>을 그려 보여준다고 한다. 
그 상을 한번 만나 보렴.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

어제 오늘 진눈깨비와 폭설이 가득 내려 세상은 흰색으로 꽉 찼다.
아니 꽉 차서 텅 비어 보인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다람쥐와 까치는 그쳐있지만, 또한 다람쥐와 까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  

불교에서 언어로 전달되기 힘든 것을 
언어를 세우지 않고 <불립문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도 한다. <이심전심> 

빈 하늘 빈 가지에 홍시 하나 떨고 있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거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어제는 종일 난초를 그리고(난을 치고)
오늘은 종일 물소리를 듣는 화자. 

그런다고 세상 사는 이치를 깨우칠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조용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줄 아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 하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판단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생각하는 것 같다. 

화자는 난을 치고 물소리를 들으면서 자연과 동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뭔가 세상으로 난 길을 뛰어넘어서 <높으면서도 좀 외로운 정신 세계>
즉, 고상한 마음 상태를 얻은 것 같지?
이렇게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놓여난 상태를 <달관>이라고 한단다.
세상 일을 뛰어넘어 보게 되는 경지를 일컬음이지.

동양화에는 가득 차는 맛보다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하잖아.
이 시도 의미를 모두 이해하려는 '채움의 미덕'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세상 만사 너무 지적으로 알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은 어떠냐?는 식의
'비움의 미덕'을 가지고 감상하는 맛도 특별할 거다.   

더 나이가 들면, 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가 있을 거야.
종교적인 시는 많이 다루지 않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종교인 만큼,
종교의 기본 의미 정도는 자꾸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도록 할게. 

오늘은 낮은 곳에서 보는 일과 깨달음을 나타낸 오인태의 냉이꽃과,
통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미래의 눈으로 읽는 곽재구의 20년 후의 가을,
그리고 종교적 관조의 세계를 달관의 눈으로 쓰는 오세영의 겨울 노래를 이야기했다.

한 주일 시작이야.
힘 내서 또 재밌게 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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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을 읽었는데,
글쎄 요즘 생활난을 겪어보지 않은 너희로서는 생활난에 대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전쟁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단다. 

'홀트 아동 복지 재단'은 전쟁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탄생한 기관이었고,
1960년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워낙 돈이 없어서 사업을 벌일 수 없자,
독일에 돈을 빌리려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기도 했어. 

거지같은 식민지는 오히려 부담이 되기에
한국전쟁때 일본을 부흥시켜준 것처럼
베트남전쟁을 기회로 한국을 부흥시켜준 미국의 힘도 작용했을 것이다.

거기에 조선시대부터 지식인이 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던 전통을
아니 배우지 못하면 설움을 받던 전통을 이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열기가 대단했던 덕택에
한국은 <근대 공업 사회>로 들어서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농촌은 파괴되고,
대도시의 삶은 빈민층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부동산 투기'와 '도시 개발'로 인한 땅부자가 생기게 되었지.
지금도 한국 땅의 55%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구의 1%라고 하더구나.
한국 땅의 82%를 가진 사람은 5%밖에 안 되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아파트 열풍>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유는 이런 데 있을 거야.
뭐, 땅이 있어야 집을 짓지.
그러니 위로 위로 오를 수밖에. 

겉으로는 먹고 살 만하게 변해가는 것 같았던 한국 사회는,
속으로는 군사 독재가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단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대한 늬우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희가
모내기를 하고 농부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이 홍보되었으나,
사실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양주를 마시는 파티가 맨날 연출되었다더구나. 

이런 시절, 군사 독재를 그만두고 민간에게 정치를 이양하라고 싸우던 이들은
법률 위반으로 감옥행이었고,
툭하면 사형 선고를 해버리곤 하였단다. 심한 경우엔 정말 죽이기까지 했어.
이런 시절, 저항이란 것은 곧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었을 거야.
김수영이 바라던 <푸른 하늘을> 한번 읽어 보자.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이 시는 1960년 4.19 직후에 씌어진 시야.
1961년 5.16에 박정희가 탱크를 몰고 국회를 해산하고 독재를 시작하기 전이겠지.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른단다.
혁명이란 것은 말이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부르는 걸 뜻한단다. 

혁명(革命)이라는 한자어의 출전은 주역이래.

天地而四時成 湯武 革命 順乎天而應乎人
: 하늘과 땅이 바뀌어 사철을 이루듯 탕, 무의 혁명은 하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의 요청에 응한 것이다. 

바꾼다는 뜻으로 쓰였지. 

혁명에 해당하는 영어 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가 어원으로 "회전하다" 또는 "반전하다"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란다.
암튼 뭐가 크게 바뀐다, 뒤집힌다는 뜻이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시구에
반박을 가하는 것으로 시는 시작된단다. 

푸른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종달새.
그 새는 자유로울 거라는 의미는 뭐, 크게 어렵지 않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은 이것저것에 구속되지 않잖아.
국민할매가 머리를 길게 기른다든지,
노홍철이 노랑머리를 한다든지 말이야. 

그 시인의 말은 <겉으로 드러난 자유>에만 주목해서 맘에 안 든대.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를 부러워할 거 없단 말이겠지.
그럼, 화자는 뭐가 문제란 걸까?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求)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공자의 생활난 중 일부> 

화자는 '발산한 형상'을 구한다고 했던 기억 나니?
자유롭게 살고 싶다던 화자의 희망 사항.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은
바로 '발산한 형상을 구하>는 사람일 거야. 

세상은 '자유로운 인간'을 구속하는 경향이 있단다.
전에 한번 이야기했지. 엔트로피란 말이 있다고.
사물은 질서정연한 쪽에서 흐트러지는 쪽으로 바뀌게 마련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권력자는 <치안>을 통해서 <질서>를 잡으려고 하게 마련이고 말이야. 

이 사이에서 뭔가가 부딪히지 않겠어?
권력자는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잡으려 하고,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는 사람은 <자유를 누리려> 하고 말이야.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단다.
프랑스의 유명한 '랑시에르'란 정치학자였어. 

<자유를 찾는 사람>은 안대. 뭘 아냐면 말이지.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은 알아.
노고지리가 그저 푸른 하늘을 보고 아름답다고 노래하지는 않음을 말이야.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피의 냄새'가 섞인 투쟁을 하여야 함을 말이지. 

그래서 랑시에르는
권력자의 <치안>과 자유인의 <권리 주장> 사이에서
<정치적인 것>이 발생한다고 했고, 그 정치적인 것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있는 것이겠지.
권력자는 <여기엔 볼 것이 없어. 그냥 지나가시오.> 이렇게 말하지만,
자유인은 <여긴 우리가 보고 말할 것이 있어. 좀 모입시다.>이렇게 외치지.
결국 그 사이의 갈등이 <정치적인 것>이 될 거고 말이다. 

그 피의 냄새 때문에 혁명은 늘 <고독>한 것이어야 한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민주주의라고 한 시인의 구절도 있듯이,
혁명은 고독한 것임도 마찬가지 성찰에서 나온 시구란다. 

<알지> <~를> <~를> <~를>
이렇게 ~를 알지의 의미를 도치시킴으로서 시에 여운을 남기기도 한단다.
자유에는 <투쟁>이 있어야 하고,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4.19 직후란 시대에 넣어 보면,
희생 없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야. 

율리우스 푸치크란 사람이 쓴 <교수대로부터의 리포트>란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단다.

내가 마지막 투사가 될 지언정, 싸움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 나를 쏴라. 

이런 정신이라야 혁명 투사가 될 것이란 생각을 김수영도 했던 것 같아. 

이 시에서 '어느 시인'과 화자의 노고지리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정리해 보면 이래.

'어느 시인' - 노고지리의 비상에만 주목하여 자유의 이미지 발견(노고지리는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

'화자' - 그 자유를 획득하기까지의 고난의 과정에서 자유의 의미를 포착(투쟁하지 않으면 자유는 없다.)

다음엔 수능에도 났던 시, 김수영의 <사령>을 읽어 보자.
사령은 '죽은 혼령'이란 의미야.
독재 시대의 '살았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이 무기력한 영혼'이란 의미겠지.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들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김수영, 사령(死靈)>

1연에서 벌써 화자는 주제를 이야기해버렸어.
'활자'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죽어 있다.
이렇게 <자유를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성찰, 자기 반성> 이것이 주제지.
마지막 연에서 똑같이 <우스워라> 하면서, 자조적으로 자기 반성을 하는 시.  

<활자>는 글자로 찍혀있기만 한 <자유, 정의> 이런 것이겠지.
이승만이란 조선왕조의 후예이자 왕이라 착각했던 초대 대통령이 속했던 당이 <자유당>이었어. 헐~
독재하기로 유명했지.
그러다 군사 독재로 유명한 박정희의 당은 <민주 공화당>이었어.
'민주'는 쉬운데,
'공화'란 republic의 번역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이런 뜻이야.
독재자 이름치곤 죽이지?
광주에서 수백 내지 수천의 동포를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당은 <민주 정의당>이었지.
무슨 독수리 오형제도 아니고, '정의'를 내세우다니, 참 헐~ 일수 밖에... 

글자로는 온갖 자유를 논하지만, 자유가 없는 세상.
화자는 간혹 <글>을 발표하면서,
<시>를 쓰면서, 활자화된 자유를 이야기했나봐.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글자>만의 자유. 

뭐,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았더니 <나 그이를 사랑했어요>할 때의 <사랑>같은 의미랄까? 

<~ 않어라!>와 같은 발음은 서울 사투리야.
서울 방언 중에서는 <않아>를 <않어>로 쓰기도 하고,
<~~하고>를 <~~허구>라고 하기도 한대. '너허구 나허구 이러구 저러구' 이렇게 말이지.
좀 간지럽지? ㅋ 

벗에게 화자는 말하고 있어.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데 나는 고개 숙이고 듣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야.
그게 맘에 들지 않겠지?
그래 맘에 들지 않아 해! 이런 의미기도 하고, 자신의 맘에 안 든다, 이런 의미기도 하고. 

암튼 자신의 모든 게 맘에 안 든대.
황혼, 잡초, 페인트 빛, 고요함... 이 모든 것이 다.
<푸른 하늘을> 날으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종달새>처럼 투쟁하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맘에 안 들고 부끄럽대. 

벗이 외치는 말뿐인 <정의>, 활자 속에만 있는 <정의>도
섬세하게 세상 이치를 따지는 우리의 <논리>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죽음>에 잠겨버린 젊은이들의 모든 토론도, 하소연도, 넋두리도...
모두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 

아마, 교외로 몇몇 친구가 야유회라도 갔는지 모른다.
서로 벗들끼리 문서를 읽고 토의를 하고 술이라도 마셨는지 모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힘찬 투쟁의 희망은 없는 토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토론은 <죽음에서 나오는 행동>처럼 보이나보다. 

벗이거나, 문서이거나,
간간이 자유를 말하지만,
우습게도,
화자의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부끄럽게도...
부끄럽게 스스로 비웃는 것을 '자조적'이라고 하지. 

<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고요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요함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지. 
<불의의 현실, 부정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자기 반성>
지식인에게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일깨우는 작품으로 김수영의 시가 많이 읽혔던 것도,
이런 자기 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일거야. 

이렇게 시대 속에서 자기 반성을 하는 지식인의 시는 참 많았단다.
일제 강점기,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란 시를 썼던 시인.
영랑 김윤식의 시에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시어들이 갈고 닦은 옥처럼 등장했었지?
그 영랑조차도 일제 강점기에 '독한 시'를 쓴 일이 있어.
그 독한 시 한번 볼까?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아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독을 차고>

1연에서 <가슴에 독을 찬> 영랑이 등장해.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긴 하지만, 새로 뽑은 독은 엄청 독성이 셀 거야.
'벗'이 등장하는데, 벗은
'야, 너하고 독은 안 어울려, 그만 흩어 버려.'
이렇게 충고했대.
근데 영랑은 독한 한 마디 날려 줬어.
"야, 이 독이 너도 해칠지 몰라. 까불지 마. 장난 아냐." 이러고. 

보드레한 에메랄드 곱게 흐르는 /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 은결을 돋우네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런 게 김영랑 시지.
매끄럽고 조금 여성스럽고 부드럽고 순수한 그런 시 말이야.
이런 시인이 독을 품는다니,
어쩌면 더 무서워 보이기도 하는구나. 

영랑의 <독(毒)>은 부정한 현실에 대한 대결 의지, 저항의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벗>은 현실에 순응하는 인간이고 말이야. 

2연에서 다시 <벗>이 회유하고 있어. 

"야, 영랑. 임마.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죽고  나마저 죽어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 버릴 거고
나중에 땅덩이도 닳고 닳아서 모래알이 될 거잖아. 
얌마. 세상은 이렇게 허무한 거야!
근데 니까짓 쪼끄만 게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그냥 나랑 술이나 한 잔 하고 독한 맘 풀어라이~" 

이 친구는 진심으로 영랑을 위해주는 친구였는지도 몰라.
이 친구와 헤어진 영랑은 혼자 돌아와 일기에 3, 4연처럼 썼어.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하다!'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삶은 어차피 허무한 거야.
그런데 <이리 승냥이>가 나의 마음을 해치는 부정적인 존재가 있으니,
곧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의 고통을 겪고 있으니,
산 채로 일제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고
먹히게 될 존재임을 생각하면, 

나는 독을 품고 살아 가겠다.
내가 죽는 날,
나의 외로운 혼이
"그래, 나는 허무한 인생을 허무하게만은 살지 않았다."
이렇게 위로할 수 있도록...

이런 저항 정신이 드러난 시가 되겠지.
영랑의 시로는 드물게 직설적으로 저항정신이 드러난 시란다.
다른 시들의 화자가 비교적 여성스럽다면, 이 시의 화자는 남성스런 역할이지.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의 대오에 들어서겠다던 김수영의 <피의 냄새>와도 통하지 않니? 

그렇게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던 이들의 글에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단다. 

시를 읽는 일은 다른 삶을 통하여 나의 삶을 비춰보는 맛이 있는 것 같아.
아빠는 아빠 나름의 삶을 비춰 보고,
아빠와 읽는 시들이 나중에 민우의 삶에서도 비춰보는 기회가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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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이 2011-05-2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렇게 짜임새 있게 시를 설명하시는지..ㅠㅠ 감동이에요!

글샘 2011-05-23 08:43   좋아요 0 | URL
짜임새 있게 읽었다니 고맙네요. ^^

명수명수 2013-05-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대학생인데 수업 과제로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이란 시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과제를 하고 있었는데
시의 내용도 어렵고 잘 이해가 안되서 길을 해매고 있었는데 글샘님의 자세한 설명덕에 지금 너무 잘되가고 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