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얘기를 듣고 찾아간 노추산 모정탑. 강릉 시내에서 한참 들어가는 산골마을에 노추산이 있고 그 산속에 모정탑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노추산 모정탑길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하나 서있다.


"차순옥 여사는 강릉으로 시집와서 슬하에 4남매를 두고 지냈으나, 언제부턴가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노추산 계곡에 돌탑 3,000개를 쌓으면 집안에 우환이 없어진다는 신비한 꿈을 꾸게 되었다.


돌탑을 쌓을 장소를 찾던 중 율곡 이이 선생의 정기가 서려 있는 이곳에 26년간 돌탑 3,000개를 쌓았다.


돌탑이 늘어날수록 집안은 평온을 되찾았고 돌탑을 완성한 그즈음 차순옥 여사는 2011년 9월 향년 6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노추산 모정탑길은 율곡 구도장원비와 함께 소원성취 기원의 명소로 알려지며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곧이어 장정같은 탑이 우뚝우뚝 솟아있지만 이건 마을사람과 여행객들이 쌓은 것이고, 다음 사진의 안내석이 나와야 본격적인 차순옥 여사의 돌탑길이 시작된다.

















이 분이 차순옥 여사이다.



어떤 우환이기에, 어떤 심정이었기에 저렇게 탑을 쌓았을까. 저 위에 옮겨 적은 내용으로는 알 수가 없어서 검색을 해봤는데, 몇년 전의 안내판에는 좀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굳이 밝힐 일은 아닌 것 같다. 더 이상 알겠다고 검색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마음만 무겁게 가라앉을 뿐이다. 그저 가족의 우환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탑을 쌓아야했을까 하는 심정을 헤아릴 뿐이다. 탑을 쌓는 일은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이고 무너지는 몸과 마음을 곧추 세우기 위해서였겠구나 그저 짐작할 뿐이다. 3,000개의 탑을 쌓았다는 위대함보다 돌멩이 하나하나에 서렸을 눈물과 한숨 그리고 꿈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광경이었다. 






겉껍질을 벗긴 자작나무의 속살. 새하얀색 수피와 손톱으로 긁은 것 같은 갈색 가로줄무늬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노추산 모정탑을 보고 온 여운이 남아서인지 저 가로줄무늬 하나하나가 마음을 할퀴는 것 같다. 찌릿찌릿 아프다. 그림 이상의 그림이다.





머잖아 화목난로 속으로 들어갈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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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ma > 다시 읽어봐도 맞는 말씀

9년 전에 올린 글을 작년에도 올렸는데 올해 또 올린다.
엿도 아깝다. 엿 고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인데. 나라를 거저 먹으려는 자들은 엿부터 고아봐라.
고만큼이라도 땀 흘려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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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통해 인생을 한 바퀴 더 살듯,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춰보니 역시 그와 비슷한 감상에 젖는다. 새록새록 나오는 신간서적의 다양성에 정신을 잃을 정도지만 잊고지냈던 옛 서적을 무시할 일은 아니다. 잠시 옛 친구를 만나는 기분도 든다.


윤정모. 1946년생. 소설가. 80, 9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 현재 제21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고삐>는 확실히 기억하지만 나머지 두 권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삐, '소의 코뚜레나 말의 재갈에 잡아매어, 몰거나 부릴 때 손에 잡고 끄는 줄'. 이 제목에서 단박에 유추되는 것은 고삐에 묶여 끌려가는 상황에서 '가열차게'(80년대에 애용된 단어) 고삐를 끊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뭔가 80년대 민주화를 상징하는 듯한 단어이다. 더 들어가본다.





'매춘과 윤락은 외세와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는 것'.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낯설고 좀 억지스럽게 보이지만 80년대 민주화열기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책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러면 땅덩이도 크고 부자 나라인 미국이 왜 끝없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을 종속국으로 만들어야만 하는가. 그 첫째는 미국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열량을 소비하고 있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함에도 큰 원이이 있읍니다. 어느 학자의 통계를 보면 미국인 1인당 에너지소비량이 유럽인의 2인분, 인도인 55인, 탄자니아인의 168인, 네팔인의 9백 명의 소비량과 맞먹고 미국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6%에 해당하는데 이 6%의 인구가 세계 전체에너지 1/4 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은 보다 효과적으로 지구의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군수산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세상 곳곳에 군인을 주둔시켜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p. 101



  다음은 문화식민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읍니다. 저는 사십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라는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미국식교육을 받았고, OX나 흑백논리와 더불어 대중우상에 혼곤히 빠져든 세대입니다. 물론 왜정 때도 우리의 지식인들은 찻집에서 커피도 아닌 '고히'를 마시면서 일본 인기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고, 그것이 소위 식자의 멋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있었읍니다만 우리 역시 째즈나 팝송가수를 흠모하고 미국 상업영화를 즐기고 영어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만 지식인 냄새가 나는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읍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땽을 접수하고 이승만과 조약을 맺을 때 이미 일주일에 몇 개 이상의 미국 노래를 들어야 한다고 문서로 조인을 했고, 이 땅에서 가장 좋은 네트워크를 차지해 AFKN 방송망으로 저질프로만 흘려보내서 우리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의도된 정책의 일환이었으므로 우리는 그 문화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지금도 아이들은 팝송 뿐만 아니라 옷, 신발, 연필, 지우개까지 영어가 씌어 있는 상품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국민의 순수한 정서를 짓밟고 그들의 저질적인 대중문화를 이 땅에 자꾸만 풀어먹여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 국민들이 건강한 비판력이나 각성을 흐리게 해야만 지배가 용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45년 9월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이 오늘날까지 숱한 강간, 총살, 교살, 강도, 방화, 사기, 뺑소니 등 10만 명이 넘는 범죄자들이 이 땅의 민중을 짓밟고 있어도, 우리 남한이 미군 범죄의 소굴이 되어가도 우리는 그저 파리약을 먹은 듯 눈만 꿈벅이고 있을 뿐입니다.   p. 102~103



길게 인용했지만 이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민족해방가이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또 싸워서 찾은 이 나라

쪽발이 양키놈이 남북을 갈라

매판팟쇼 앞세운 수탈의 나라

이 땅의 민중들은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해방을 위해

손잡고 광화문에 해방기 휘날리자.                          -p.70~71



<고삐>는 80년대 후반 대학 문창과 같은 곳에서는 교과서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누구나 운동권이었던 그 시절에 저 영향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소시민, 부르주아, 매판자본주의...'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사고가 경직된 답답한 분위기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같이 시대에 부응하는 눈부신 소설을 쓰신 분이 2001년에는 다음의 책을 냈다.


















특급열차?


  나는 여태 딸에게 특급열차만 타라고 강요했다. 그 열차의 이름은 '좋은 대학'이었다. p. 21



국내 특급열차 승차에 연거푸 실패한 딸을 영국으로 보내며 자신도 뛰따라가 영국에서 3년을 보낸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다고 성공담 따위는 아니다. 오히려 삶의 고비마다 겪어야했던 처절한 시련, 고통 등을 써내려간 실패담에 가깝다. 때론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는. 특히 첫단추부터 틀어진 결혼생활 등. 픽션같은 이야기를 읽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여러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살아오셨구나.....하고.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사람도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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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장면 보러 김포 가고 싶다고 했더니 김포에 사는 친구가 사진 찍어서 보내주었다. 아직도 멀쩡하게 붙어 있다고. 암, 그래야 맞다. 나는 선생 시절 눈 앞에 있는 학생한테서 이런 말도 들었다. "좆나", "시팔" 이 말을 듣고 어떡했냐고? 그냥 없던 일로 해버렸다.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았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부모에게 욕할 수도 있고, 학생이 선생한테 쌍욕을 던질 수도 있다. 애건 어른이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방 염장지르는 말을 하고 싶은 법. 저걸 강제로 철거하고 처벌하면 그건 아주 졸렬하고 볼품없는 얕은 수가 된다. 그냥 견디는 수밖에. 저게 민심이구나, 내가 욕 먹고 있구나...잠시 반성하며 견디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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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2003년에 나온 걸 몰랐다. 그때쯤은 이미 홍신자 열병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홍신자 열병?




인생은 선배, 나이는 후배였던 동료교사가 어느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 결혼할 때 되게 미웠어. 실망했었어."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엉? 왜? 무슨 말이야?" "언니, 홍신자 좋아했잖아....." 물어보니 그분처럼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나 어쨌다나. 그러면 그때 적극적으로 말렸어야지. 설득도 하고 호소도 하고. 제대로 잡아줬어야지. 이 말은 못했다. 실망했다는 말이 가슴에 턱 걸려서 대응할 말을 못찾고 있었다. 흠, 자네도 홍신자 열병을 앓았었구먼. 몰랐네.








<나도 너에게....> 이 책을 끝으로 홍신자를 졸업했다. 그러나 지금도 이따금 거울에 비친 내 알몸을 보게 되면 여전히 홍신자가 떠오른다. 바로 제1회 죽산예술제 때문이다.






저 사진 밑의 작은 글씨, '1회 죽산예술제의 오프닝 작품은 카와무라 나미코의 누드 워킹 퍼포먼스였다.' 저 장면을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이렇게 평생 기억에 남을 줄은 몰랐다. 1995년쯤인가?

초여름, 밤바람 살랑거리는 초저녁에 야외에서 개최된 공연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카와무라 나미코는 당시 60세 정도였는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균형잡힌 몸매였는데 60세에 저런 몸매가 가능할까 싶었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자연스런 모습이 될까? 그 이후로 거울에 비친 내 몸을 볼 때마다 저 누드 워킹이 떠오르곤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야 카와무라 나미코의 이름을 <나는 춤추듯...>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홍신자를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지만 그분의 열정과 도전,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를 조금은 닮고 싶다. 나는 어떤 순간을 살아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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