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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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거칠게 말하면, 사랑을 떠나보낸 여인의 자기비판적인 반성문. 이 책의 마지막 글자까지 읽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사랑에 대한 고찰을 소설이라는 형식에 담아낸 이 소설은 독특하다. 한 권의 철학서 같기도 하고, 예술이론서 같기도 하고, 길고 긴 반성문 같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동어반복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결말엔 시치미 뚝 떼는, 장난기 가득하고 배짱 두둑한 한바탕의 회오리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쨌냐고? 학구적이고 철학적인 세계를 넘나드는 경험에 감탄하다가, 술 취해서 같은 말 되풀이 하는 주사꾼의 기나긴 넋두리 같은 동어반복에 질리기도 하다가, 애틋한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곱씹기도 하는, 블록버스터의 세계....작가가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말을 온통 쏟아놓은 작품에 그저 허우적거렸다고나 할까. 풍경에 압도 당하면서도 진저리를 내며 끝까지 고지를 향해 걸을 수밖에 없는 등반이라고나 할까. 한번 풍덩 빠져서 며칠 허우적거리는 맛이 각별하다.


마음에 착착 달라붙는 표현들이 적잖은데 그중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기면...


p. 272~273

" 철학에 주제라는 건 없어. 철학이 우리에게 뭔가 삶의 윤리적인 지침을 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웃기는 거야. 물론 어떤 지침인가를 주긴 하지. 그것은 지침이 없다는 지침이야. 사람들은 철학이 무엇인가 적극적인 것을 말해 주기를 바라. 철학은 그러한 것을 내재하고 있지 않아. 철학은 이를테면 텅 빈 거야. 양파를 벗겨 나가면 거기에 핵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철학도 벗겨 나가면 그 안에 무엇도 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양파가 단지 여러 겹의 표층만으로 의미 있듯이 철학도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식에 의해서 유의미한 거야. 그것은 주제를 지니지 않지만 주제들을 명석하게 만들지. 그러고는 그 주제들을 증발시켜 버리지. 단지 그거야. 이제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 등을 포기해야 해. 멋진 말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

  사람들은 철학에는 무슨 좋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철학은 내게는 좋은 것이었어. 단지 무슨 좋은 것들이 없었을 뿐이야 그러니 내가 너한테 이리저리 말해 줄 수 없는 이유를 알겠지? 철학 하는 첫 번째 마음가짐은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 있어. 철학은 그저 현존하는 사건의 명료화를 기할 뿐이야. 철학은 명료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잘난 소리를 하기 위해 철학을 해서는 안 될 거야. 과학은 단지 현상의 포착이야. 소위 사태의 발생과 비발생의 총합이지. 그리고 철학은 거기에 방어선을 치는 철책이야. 다른 헛소리들이 그 안에 못 들어오도록.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누누이 말하는 한계야."

  이것이 그가 철학뿐만 아니라 삶에 부여하는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우리 이별 전에 듣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말 자체가 우리 이별의 내재적 동기였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그의 선고.

  "삶은 무의미하다는 의미밖에는 없어."



이렇게 읽어도 저렇게 읽어도 의미가 샘솟는 듯한 작품을 이렇게 거칠게 마무리하다니... 

얼마전 별세하신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오듯, 이 책에 대한 잔상 역시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불시에 떠오를 것이다. 일단은 완독에 의미를 두며 작가님의 친절에 대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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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a 2024-01-01 11: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도 책탑을 쌓아봤다, 일괄 구매한 헌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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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정찬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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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를 몇 번 보아야, 장국영의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생각해야,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가볍게 읽기 시작해서 묵직하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뒷표지에 실린 소설가 김연수의 명문을 뛰어넘는 리뷰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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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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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와 장마, 시름과 무기력, 걱정과 불안...이 모두를 멎게 하는 최고의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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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재밌게 읽고 있다. 레이먼드 카버, 페소아, 페르메이르, 아리스토텔레스, 카뮈,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을 완독했거나 읽고 있는 중이다.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이 되거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을 때 제격인 시리즈이다. 한 인물에 빠진 저자를 따라 책에 몰입하다보면 이 유명하신 분들의 인생에 좀 더 밀착된 느낌이랄까. 진한 국물맛 같은 거.

 

 

 

 

 

 

 

 

 

 

 

 

 

 

 

 

 

여름이면 떠오르는 <설국>. 이 소설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 책을 읽고서야 내가 <설국>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다시 읽어보고 싶지만 내 마음 나도 모를 일.

 

 

 

 

 

 

 

 

 

 

 

 

 

 

 

 

 

<설국> 대신 읽은 <이즈의 무희>. 위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쓰인 줄거리를 옮겨보면,

 

  스무 살의 주인공 '나'는 이즈반도로 여행을 떠난다. 고아 기질 때문에 뒤틀린 성격을 고치고, 태생적인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떠난 여행이었다. 이 여행에서 '나'는 우연히 유랑 극단 일행을 만나 동행하게 된다.

  가족 중심으로 구성된 유랑 극단에는 열네 살 무희 가오루가 있었다. '나'는 가오루를 지켜보면서 자신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이 소녀가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닌지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소녀의 티 없이 맑은 성정을 느끼면서 '나'의 의심과 우울감도 사라진다.

   순간순간 가오루가 보여주는 '나'에 대한 작은 관심은 '나'의 일그러진 성격을 밝게 만들어주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가오루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네"라고 '나'를 평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둘 사이의 애틋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나'가 도쿄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행이 시모다 항구에 도착한 날 '나'는 도쿄행 배에 오른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면서 서 있고 '나'는 선실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168~169쪽

 

이런 줄거리 때문에 '일본판 소나기'로 부르기도 한단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나기>에서는 주인공들이 죽어서 이별을 하고, <이즈의 무희>에서는 살아서 이별을 한다는 것.

 

누구나 일생에서 한번쯤 이 <소나기> 같은 시절이 있지 않을까. 내 눈 빛과 내 마음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어 분노와 우울로 버무려진 절박했던 시절의 강물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던 경험 같은 거 말이다. 이 단편을 읽고나면 한동안 잠자고 있던 옛 일이 떠올라 며칠 밤 잠을 뒤척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내 얘기도 소설감인데....엉뚱한 상상에 빠져서... 한달 넘게 이어지는 장맛비도 일조를 하고 있다.

 

그래도 소설이니 어떤 맛인지 맛은 봐야겠지요?

 

 잠시 동안 낮은 목소리가 계속되고 나서 무희의 말소리가 들렸다.

"좋은 사람이야."

"그래 맞아. 좋은 사람 같아."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라서 좋겠어."

이 말투는 단순하고도 솔직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감정의 치우침을 휙 하고 순진하게 담아 던진 목소리였다. 나 스스로도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순순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상쾌하게 눈을 들어 밝은 산들을 바라보았다. 눈꺼풀 속이 희미하게 아팠다. 스무 살의 나는 자신의 성질이 고아 근성으로 비뚤어져 있다고 심한 반성을 거듭한 끝에, 그 숨 막히는 우울을 견디지 못하고 이즈로 여행을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의 보편적인 의미로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것이었다.                  -37~38쪽

 

'눈꺼풀 속이 희미하게 아팠다.' 내 심장이 희미하게 아파오는 문장이었다. 원문으로 읽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번역문으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섬세한 글맛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인상 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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