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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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1907년~1914년에 걸쳐 각각 출판되었다가 한 권으로 출간된 것은 1915년이라고 한다. 딱 100년 전이다.

 

백 년 전이라고는 하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그리 다를 것 같지 않다. 학교 다니고, 졸업하면 직장 구하고, 직장을 구하면 결혼해서 애 낳고...방랑자 크눌프의 주변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이 대열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정착하지 못한 크눌프를 향해 훈수를 두는 것도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크눌프가 세상에 나온 지 백 년이 지난 지금, 크눌프의 인생은 그저 소박하게 보인다. 백 년 전에 비해 더욱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크눌프처럼 살아가는 일이 실제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집 밖을 벗어나면 온통 돈이 지배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아니다. 이 책이 나왔을 때도 아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이 백 년에 걸쳐 회자되는 걸 보면 그렇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니까 문학 속 인물로나 꿈을 꾸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보는 것일 터.

 

라틴어고 뭐고 간에 당시의 내겐 결국 특별히 중요할 게 하나도 없었다네. 자네도 아다시피, 난 언제나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뒤따라가게 되면 한동안은 이 세상에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었거든. 체조를 할 때도 그랬고, 그 다음에 송어 잡이를 할 때, 그리고 식물학을 공부할 때 그랬었지. 바로 그 당시에는 여자 문제가 그랬어. 거기서 따끔한 맛을 보고 직접 체험을 얻게 되기 전까지는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사실 전날 저녁에 소녀들이 목욕할 때 훔쳐본 것을 은밀하게 떠올리느라 정신없는 사람이, 학생이라고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동사변화를 연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니겠나.

 

이 부분이 처음에는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언가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해보며 사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가. 허나 문제는 '따끔한 맛'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내 눈 앞을 스쳐간 많은 아이들이 떠올랐다. 결국에 학교 생활을 접어야 했던 아이들도 있다. 따지고보면 그깟 학교 접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소설 말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네, 맞습니다. 사실은 저도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 한탄할 게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모든 게 좋으냐?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느냐?"

"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만히 나의 앞날을 생각해본다.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분명 짧은데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도 '제대로' 된 생활을 하려면 계속 일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내 마음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도대체 '제대로'된 삶이 무엇이고 무슨 소용인가. '이제 이 나이에'.

지금도 가끔씩 그리운 시절이 있다. 바로 대학 졸업 후 다년간의 백수 생활이다.

 

크눌프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그가 느꼈던 기쁨이 마치 먼 산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흐릿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고, 꿀과 포도주처럼 진하고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그러고는 이른 봄 밤의 따스한 바람과도 같이 나지막한 소리를 울리는 것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때는 아름다웠다. 기쁨도 아름답고 슬픔도 아름다웠다. 어느 하루라도 빠뜨리기가 무척 아쉬울 만큼!

"그래요,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피곤한 어린애처럼 심하게 울먹이며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죄와 슬픔도 이미 거기 함께 있었지요.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그 당시의 저만큼 좋은 술을 마시고 즐겁게 춤을 추고 멋진 사람의 밤을 지새웠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선 그 모든 게 끝나버려야 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행복 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어요. 그러고는 더 이상 그토록 좋은 시절은 오지 않았죠. 안 왔어요, 한번도요."

 

위에 인용한 크눌프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분명 백수시절이 있던 사람이리라. 내가 그러하므로. 비록 '행복 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크눌프을 읽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크눌프를 읽게 되리라. 헤세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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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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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아버지 말씀 ˝ 다 접고 혼자 산에 들어가 살고 싶다.˝ 장가드는 큰 오빠한테 하신 말씀 ˝자식은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라.˝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니 그 고뇌가 이해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빨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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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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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은 늙지도 않는다. 이제는 지겨워질법도 하련만 그는 아직도 사랑을 말하고 있다. 말한다기 보다는 사랑을 이리저리 손에서 자유자재로 놀리고 있다. 마치 공기돌처럼. 사랑타령도 이만하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다. 경외감마저 든다.

 

<너 없이 걸었다>, <마션>을 손에 잡았다가 박범신의 <당신>을 읽는 순간, 그 두 권을 손에서 놓아벼렸다. 전혀 서운하지 않고 그리 미련도 남지 않는다.

 

매화 나무 밑에 평생을 함께 살았던 주호백의 시신을 묻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매우 매혹적이면서 고혹적이다. 문장은 노회하면서도 물기가 촉촉하게 배어 있다.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나오곤 한다. 얼마만인가, 이런 느낌. 연애소설과는 다른 데 딱히 연애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난감함. 그저 인상 깊은 구절을 옮길 뿐이다.

 

누구는 물처럼 가슴으로 스며드는 경우도 있다 하겠지만, 단 한 번의 채찍질로 이쪽 편의 심지를 쪼개며 들이치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나의 확신이었다.   ...나의 중심을 꿰뚫고 다가왔던 김가인.....그리고 나는 그 이후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심지어 평생을 함께헤온 그(주호백)에게조차 그러했다. (89쪽)

 

달빛에 젖은 흰 꽃이 뚝,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나뭇가지를 투과한 달빛의 포말이 그이의 얼굴에 어른어른 닿는다. 그이의 입술은 볼륨이 얇아 마른 꽃잎처럼 구겨진다. 슬프게 생긴 입술이다. 나는 그이 입술을 섬세히 적시고, 어느새 덥혀진 그의 혀가 나의 혀를 가볍게 달빛 속으로 끌어낸다. 부드럽지만 날카롭고 숨어 있지만 최상의 보배이며 형태가 있지만 정형이 없는 혀는, 나의 사랑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당신을 적시는 달빛이 될게요, 라고 나는 소리쳐 말하고 싶다. (169)

 

90년대 어느 시기를 뜨겁게 달구던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잠시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왜 그 책이 마녀사냥감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새파란 젊은 작가가 아닌 노련한 노작가의 이런 달짝지근한 문장을 읽는 맛은 생각보다 각별하다. 섬세하지만 간지러운, 작가의 장난기가 재밌다.

 

인혜와 내가 공통으로 가진 회한이 있다면 사랑이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그 점일 터였다. (193)

 

이 소설의 주제쯤 되는 구절이다. 다음 구절 역시.

 

"네 아빠가 치매에 걸려 나를 힘들게 한 건 소소해....병이 깊어지면서 아빠가 오히려 나를 행복하게 한 순간이 더 많았다는 걸 네가 이해하면 좋겠어.....아빠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행복이었단다. 네 아빠의 병은 내게 참된 각성을 불러 일으켰어. 사랑은 단지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게 아니라 생명 자체를 함께하는 거라는 사실을 배운 거지. 나는 그의 숨결이 되었고 아빠 역시 나의 숨결이었어." (216)

 

그래도 역시 이 소설의 키워드는 '당신'이다.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게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267)

치매를 인지한 후 그는 나를 당신, 이라고 자주 불렀다. 당신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나는 눈물겨웠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우리가 절실하게 가닿고 싶었던 수평적 관계가 완성되는 느낌이 그 호칭에 깃들어 있었다.....내가 그와의 관계를 수평적이라고 느낀 건 당신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였다. 눈물겹고 따뜻하고 또 공평한 낱말이었다. (348)

 

치매 얘기를 바닥에 깔아서인지 돌아가신 부모님이 언뜻언뜻 생각났다. 우리 부모님은 인생의 끝까지 수평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한 분들이다.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셨다면 달라졌을까?

 

인생의 종점에서, 설사 치매에 걸려 그 삶이 어긋나고 초라해질지라도 이 소설속의 등장인물처럼 '당신'이라는 수평적 관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란 여간해서는 달라지기 힘든 종족이므로.

 

최백호의 '길 위에서'라는 노래를 함께 들어볼 일이다. 소설에도 계절이 있다면 이 소설은 단연 겨울에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아니면 매화꽃 흩날이는 계절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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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16: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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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0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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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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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 2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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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1>을 읽다가 하마터면 <발원2>를 안 읽을 뻔했다. 1권 끝 부분에서 잠시 첨성대 설명이 나오는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서 이내 시큰둥해지고  정신도 약간 다른 곳에 쏠려 있어서 읽을까 말까를 망설였었다.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로 이 책을 계속 읽어야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2권을 집어들었다.

 

1권을 지지부진하게 읽었다면 2권은 단숨에 읽었다. 그러면서 나의 좁았던 시야가 확대되는 기분이 들었다. 제목 '발원'이 의미하는 바가 확실하게 다가왔다.

 

발원:원(願)은 서원(誓願)이라고 한다. 하나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기어코 달성하겠다고 하는 서약적인 결의를 말한다. 발원은 어리석고 나쁜 마음을 모두 버리고 부처님처럼 크고 넓고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다짐하는 불자의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자에게는 누구나 원이 있다. 원은 우리의 삶에 목표를 두고 중심을 이루며, 지혜와 용기가 나오는 것이다. 먼저 불자가 갖는 대표적인 근본 원이 4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가엾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둘째, 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셋째,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넷째,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라고 하는 사호서원(四弘誓願)이 그것이다. 불자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이 원을 여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온갖 어리석음 속에서 한없이 어려운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맑고 밝은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이 서원력으로 인하여 모든 불자는 번뇌에서 벗어나며 악도를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며 불국 정토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원은 자신의 이익만을 얻으려는 욕심이 아니라, 남도 이롭게 하려는 생활 태도다. 원(願)은 곧 희망(希望)이며 이상이다. 사람이란 참된 희망과 영원한 이상을 지님으로써 전진이 있고 향상이 있게 된다. 참된 보리 열반의 불과(佛果)를 성취하려는 불자로서 어찌 넓고 큰 희망과 이상을 지니지 않겠는가. 그 이상과 희망이 크면 클수록 그 활동과 노력도 큰 것이요, 그 노력이 클수록 그 결과도 클 것이니 불자로서 넓고 큰 서원을 세워 굳게 그 원을 닦아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행이라고 하겠다. 우리 불자들은 이 땅에 태어난 다행스러움과 부처님 법문을 만난 경사스러움에 큰 감사와 용기를 일으켜 발원을 하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굳게 맹세하여야 겠다. 원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십년, 이십 년은 자기가 세운 원대로 행할 수 있는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세운 원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 그 원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출처: Daum 백과사전)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원효일까? '발원'이 뜻하는 바를 곰곰 생각해보면 인간사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늘 '발원'할 수밖에 없고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인물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그 인물이 있어 위로가 되고 다시 삶을 새롭게 정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작가가 살려낸 원효를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괜찮지 않은가?

 

작가가 자신의 언어로 빚어낸 불교의 세계에 깊이 빠져보는 것도 이 책의 묘미다. 눈 앞이 환해지는 느낌에 자족적인 미소가 떠오를지도...내가 그랬다.

 

밑줄긋기에 어울릴 부분이 많은데 딱 하나만 골랐다. 이 시대의 누군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원효를 만나고 싶다.

"잘 들어라, 원효! 정치란 백성의 삶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성이란 그냥 있는 것이다. 누가 백성의 지배자가 되는가. 이것이 중요할 뿐, 백성에겐 정의가 없다. 백성에겐 국가가 없다. 그들은 어디에서건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너희들의 그 한심한 아미타림처럼 말이다."(김춘추의 말.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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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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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올곧으며 단정하다. 내가 느끼는 김선우의 글이 이렇다. 그중 나는 그의 '올곧음'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도 나는 단연 그의 올곧은 모습을 보고 그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면모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물론 독자로서 이 책의 단점 같은 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밥 먹다가 입가에 밥풀이 붙었는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정도라고나 할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 여기면서 그의 상상력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 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날이 밝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라. 이 새벽을 나는 견디지 못하겠으나, 너는 반드시 견뎌 내겨라."(19쪽)

조국, 충, 용맹. 임전무퇴. 이 모든 관념은 한 줌 지배 귀족의 권력 욕망에 소모되는 가여운 희생을 낳을 뿐이다. 헛된 망상을 조장할 뿐이다. 어떤 것도 생명 앞에서는 모두 삿되다. 나는 있는 그대로 보겠다. 있는 그대로 고통의 실상과 대면하겠다. 신라는 보이지 않으나, 저 소년은 보인다. 신라의 맥박은 뛰지 않으나, 저 소년의 맥박은 뛰고 있다. 내게 조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경꼐 지어 놓은 삿된 국경보다 더 큰 조국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아낼 것이다. 조국의 이름으로 살생하지 않아도 되는 조국을.(115)

"탁류 속에서 승자가 된들, 탁류를 맑게 만들 수 없습니다. 어찌해야 탁류를 다시금 본래의 감로수로 되돌릴 수 있을지, 소승이 궁구하는 바는 그것입니다."(157)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길을 찾는지도요."(336)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부처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 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먹장구름을 쪼개는 뇌우처럼 들이닥쳤다. 부처를 사랑하는 것과 부처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불일불이로 현현하고 종내는 서로 통하여 어우러질 것이라는 생각 역시 순식간에 지나갔다. 부처가 돼야 한다는 일념이 집착에 기인한 허욕임을 인정하자 마음의 안팎을 연결하는 굴 같은 것이 삽시간에 뻥 뚫리는 듯했다. 순수한 공기의 파동이 쏴아 밀려들면서 가슴속이 시원해지고 너털웃음이 터졌다.(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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