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1.

80년대쯤인가, 동네와 동네를 잇는 시내버스를 갈아타면서 1번 국도를 종주하면 재밌을 거라고 제안한 사람이 있었다. 개그맨 전유성이다. ...수원 - 병점 - 오산 - 송탄 - 서정리 - 평택 - 성환 - 천안.....이렇게 지역명을 나열했던 그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양반은 어디까지 가봤을까, 내내 궁금하다. 그래서 그런가. 낯선 버스를 보면 종점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덜컥 이사온 동네에 낯선 버스노선이 눈에 들어왔다. 찜통 더위에 하루종일 에어컨 틀고 앉아 있기가 미안한 어느 날, 000번 버스에 올랐다. 수많은 정류장 중에 <경기도자박물관>을 목적지로 정했다. 서쪽방향 생활권을 벗어나 평소에 갈 일이 없는 동쪽방향 지역으로 빠져나가니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전혀 낯선 길은 아니었다. 예전에 홍천을 드나들며 잠시 농사 흉내를 내던 시절에 뻔질나게 지나다니던 도로와 도로변 충전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가 난생 처음 가는 길로 접어들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형지물을 살폈다. 별 특이할 것도 없는 풍광이지만 처음 보는 풍경은 기분전환이 된다. 내겐 아무래도 이주형 유전자가 콕 박혀 있는 것 같다.


박물관 입구에서 하차. 동선을 따라 걷다보니 박물관보다 도자기판매업소가 가까워서 그곳부터 둘러보았다. 넓은 매장에 손님이 적은 탓인지 입사한 지 보름되었다는 판매원분이 이를 데 없이 상냥하다. 마침 도자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며 세 곳의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는 무료입장권을 건넸다. 아, 이 친절을 어쩌나.




셋째줄 세번째의 '불수감'이 낯설다. 설명에 따르면, "불수감은 모양이 부처의 손과 같은데다 '불佛'과 '복福'의 발음이 유사해 다복多福으로 이해된다." 이해가 되나? 불과 복이 발음이 유사한가? 지금도 어쩌다가 백화점 과일 매장에 등장한다는 과일이 조선시대에 그림 소재가 되었다는 게 흥미롭긴하다.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경기도 도자요 지도. 특히 김포를 보시라. 김포를 서울에 편입시킨다고? 차라리 대한민국을 서울공화국으로 바꾸는 게 나을 듯. 


경기도민으로 태어나서 경기도민으로 살고 있는 나는 다른 데는 이렇게저렇게 연결고리가 있어 다 가보았는데 유독 구리와 동두천과는 인연이 없다. 조만간 답사해보리라.


박물관을 벗어나 한 정거장을 걸어가니 소머리국밥 동네가 나온다. 유명한 배연정소머리국밥 말고 그 옆집인 시레기전문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사먹으니 오늘 소풍 완성!



소풍2.

역시 에어컨 켜기 미안한 날 밖으로 나갔다.

양평 두물머리와 수종사



뭔가 처연한, 

눈치, 염치도 없는 권력자는 당당,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


명절날 시댁에 간 아들과 며느리 같은,

아들은 소파에서 뒹굴고, 며느리는 주방에서 종종거리고.





수종사에서 바라본 양평 두물머리. 

남양주 운길산 중턱에 자리잡은 수종사. 시원한 전망보다도 저 높은 곳에 절을 짓느라 고생했을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당신은 즐기고 나는 일하고.




두물머리의 명물 연핫도그. 핫도그에 시니컬한 내 입맛에도 맛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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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기에서 읽은 내용이다. 조지아행 비행기에서 조지아어 알파벳을 공부하고 갔는데 현지에서 조지아어 글자가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이게 가능? 단 몇시간에 다른 나라 글자를 익힌다고? 실험삼아 해보았다. 




외국어는 초반이 중요한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배우려니 발음도 전혀 정확하지 않고, 알파벳 획을 긋는 순서도 모양도 그저 어렵기만 하다. 유아용 원서라도 볼까하고 주문했더니 절판되었다는 통보만 받았다. 애써 한글자 한글자 그려보았다. 떠뜸떠뜸 큰 소리로 읽을 땐 한글을 처음 배우는 할머니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설레임과 신기함, 민망함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한글보다 천 년은 앞섰다는 조지아어 문자. 인구 370만 명의 작은 나라가 유구한 언어를 유지해왔다는 사실도 놀랍기만 하다.


외국어는 꼭 써먹어야만 배우나...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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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네 아버지 방에서 운다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백가흠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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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읽으니 마치 스스로 발굴한 느낌이 들었다. 백가흠...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던가. 


책 제목에 나와있는 것처럼 '느네 아버지'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옮겨본다. '어렸을 적 가장 좋은 친구'로 아버지를 두었다는 부분에선 부러움과 한숨, 그리움이 밀려왔다. 아버지....



아버지는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다. 아버지의 문학적 비애가 조금 위안받은 순간은 내가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내가 소설 쓸 줄 몰랐으니까, 등단할 줄 몰랐으니 조금 기뻤을까. 아버지는 실제로 내게 기쁨을 직접 표현한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소설을 쓰면서 정말 기뻤던 적은 당선 통보를 받았던 날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날, 오후에 통화하던 일이 생각이 난다. 학교로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는데, 금방 다시 전화를 하니 이미 학교에 없었다.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야, 느네 아버지, 학교 조퇴하고 와서, 방에서 운다." - P44

어렸을 적 잊지 못할 소꿉친구 하나는 있기 마련이건만, 우리 삼형제는 그런 친구 기억이 없다. 어렸을 적 가장 좋은 친구는 아버지였다. 세상에서 아버지가 가장 재미있었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하고 놀았다. 아버지가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게 가장 웃겼고, 읽어주는 동화책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나란히 턱을 괴고 엎드려 흑백 TV와 주말 영화를 보던 일이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 P46

옛날, 푸세식 화장실이 마당에 있을 때, 아버지는 볼일 보러 가서, 웬만해선 나오지 않았다. <옛날의 금잔디>나 <옛동산에 올라>같은 가곡에서 헨델이나 바흐, 독일 가곡, 찬송가까지 화장실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형제는 화장실 앞에 쭈그려 앉아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신청곡을 부탁하곤 했다. 얼기설기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 형제가 클래식광이 된 연유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간 것인지, 노래를 부르러 간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던 시절이 있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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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2023-08-3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렸을 적 가장 좋은 친구는 엄마였지요

nama 2023-09-01 09:32   좋아요 0 | URL
고마운 말씀이지요.
 
우리말의 발견
박영수 지음 / 사람in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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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짐'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기 위해 다져 놓은 봉숭아 꽃잎을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여름이 되면 손톱 가장자리에 밀가루 반죽을 붙이고, 손톱 위에 꽃다짐을 올려서 봉숭아물을 들이곤 했다. 봉숭아물을 진하게 들이고 싶을 때는 꽃보다 잎을 더 많이 넣어서 꽃다짐을 만들었다.'



꽃다짐이라는 단어도, 

밀가루 반죽을 붙이는 것도, 

잎을 넣어야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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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32년을 주기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처음 32년은 부모님 밑에서 살았다. 몸은 날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늘 어딘가로 떠나있었던 시절이다. 다음 32년은 일인4역을 하며 살았다. 직장인, 아내, 엄마, 며느리의 삶이었다. 이제 세 번째, 자식의 뒤를 봐주는 은퇴의 삶을 위해 이사를 단행하려고 한다. 마지막 거주지의 삶이 32년이 되면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겠지, 아마.


시간이 수제비 뜨 듯 뭉텅이로 뜯겨나가는 기분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집어들었는데 알고보니 8년 전에 읽었던 책이다. 8년이라는 시간이 맴돌다 다시 머무는 느낌이다. 지지부진. 한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보다.


나를 아연케 한 책은 바로 이 책.
















책보다 경험이 진짜라는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는데 그 근원이 이 책에 있었나..내 생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책에서 읽은 것? 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이라는 부처님 손바닥에서 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책상물림의 비애.


경험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보이는 책마다 저자의 경험 여부와 경중을 따지게 되는데...
















p.136....'나에게 실패란 아픔이 아니다. 실패를 하면 할수록 다만 내 사전의 어휘가 늘어날 뿐이다. '큰 일이다', '끝이다'라고 생각되는 일에 부딪혀도 마음을 다잡고 죽을 요량으로 해보면 어떻게든 된다. 당시에는 '아아,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이제 어쩌지'하고 난감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실패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경험이다, 전부.

 수시로 상처받고 추락하고 구르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딱지는 점점 딱딱하게 굳어간다. 딱지가 두꺼워지면 피부도 두꺼워지고 더욱 단단해진다. 기특한 딱지. 만들 수 있을 만큼 만들어보자. 그렇게 딱딱해지 딱지는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떨어져 버린다.

 '아아, 그동안 나는 잘난 척만 하며 살았구나.'


p. 137...'박피가 한 장 한 장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쓸데없는 것들이 벗겨지면 그제야 '아아, 어떤 것이든 실패도 좋은 경험이었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려면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괜찮아, 분명히 길이 보일 거야."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인데, 정말 그런 것 같다. 당시에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점이 모여서 선이 되는 것처럼 '아아, 그런 뜻이었구나'하고 내 안에서 딱지가 떨어지는 날이 온다. 그때까지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딱지가 덕지덕지 앉아서 두꺼워지도록 내 안의 어휘를 늘려가면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어쩌다가 임신을 하게 되어 미혼모가 될 상황인데, 아이의 아빠가 잘 생겨서 아이도 인물이 좋을거라 생각하며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다. 이 무대책의 솔직함이라니....이 책의 저자 미야자키 마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속초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지방의 책방 나들이도 재밌지만 각 지역마다 있는 도서관에 가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기린을 좋아해서 기린 연구를 하고 있어요.'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를 생각하게 한 책이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쥐어박히는 느낌.


인상적인 부분.


'...어머니는 약간 특이하신 분입니다. 마음이 안 통한다며 유치원을 중퇴했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비가 내릴 것 같으니까 집에 간다며 조퇴해 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직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말이죠. 딸인 제가 봐도 평범한 분은 아닙닌다. 미야자와 겐지(...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동화 작가가 되고 싶어 가출한다거나 빈곤에 허덕이는 농민을 돕기 위해 직접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는 등 비범한 삶을 살았다)를 약간 닮았다고 할까요? ' (인용 페이지 못찾음)


미야자키 마리, 군지 메구...두 분 모두 어머니가 영혼이 살아있는 분? 같다.

















도서관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발견한 책. 1950년대 후반, 소련 휘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며 쓴, 마르케스의 기행문. 현재의 동유럽이 아닌 과거의 동유럽을 접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으스스한 분위기도 좋고.


p. 106 (폴란드 부분)..'상점은 동독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다. 그러나 서점은 예외다. 그곳은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화려하며 깨끗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다. 바르샤바는 책으로 가득하고, 가격은 놀라울 정도로 싸다. 가장 인기있는 작가는 잭 런던이다.
















김 빠진 맥주 같은 맛.
















경험이 학구열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학구열을 못따라가서 읽다만 책.

















책 속 한마디.


'내자응지 거자망지'  來者應之 去者忘之

'오는 자는 응해주고, 가는 자는 잊어준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올린....하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도서관에 아이들 데리고 오는 부모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



위의 책 모두를 압도하는 김진해 교수의 글을 음미해보시길...(출처: 한겨레21)


'글 쓰는 목적을 '순수하게' 가지기 바랍니다. 자랑과 연민, 이 두 가지 감정을 분출하는 걸 글 쓰는 목적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내 진실에 다가가기. 내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쓰기.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써서 내가 다른 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려고 쓰면 됩니다.'


'글은 보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의 삶과 경험이 갖는 유일성 때문입니다. 유일성을 옹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윤리는 우리 경험의 유일성을 마치 거기서 거기인 걸로 만들어버립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선 모릅니다. 제 어머니 '이의기의 사랑'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것만 쓰면 됩니다.'



다시 미야자키 마리와 군지 메구.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였지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다.

좋은 글은 이렇게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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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 2023-08-3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난 32년간 모두를 도왔으니, 남은 32년+a에는 도움을 받아야지요

nama 2023-09-01 09:33   좋아요 0 | URL
도왔다기보다는 함께 살았던거지요.

라로 2023-09-04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양으로 완전히 이사가시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곳? 이래저래 정신이 없으시겠어요… 그래도 화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2023-09-04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