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32년을 주기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처음 32년은 부모님 밑에서 살았다. 몸은 날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늘 어딘가로 떠나있었던 시절이다. 다음 32년은 일인4역을 하며 살았다. 직장인, 아내, 엄마, 며느리의 삶이었다. 이제 세 번째, 자식의 뒤를 봐주는 은퇴의 삶을 위해 이사를 단행하려고 한다. 마지막 거주지의 삶이 32년이 되면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겠지, 아마.
시간이 수제비 뜨 듯 뭉텅이로 뜯겨나가는 기분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집어들었는데 알고보니 8년 전에 읽었던 책이다. 8년이라는 시간이 맴돌다 다시 머무는 느낌이다. 지지부진. 한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보다.
나를 아연케 한 책은 바로 이 책.
책보다 경험이 진짜라는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는데 그 근원이 이 책에 있었나..내 생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책에서 읽은 것? 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이라는 부처님 손바닥에서 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책상물림의 비애.
경험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보이는 책마다 저자의 경험 여부와 경중을 따지게 되는데...
p.136....'나에게 실패란 아픔이 아니다. 실패를 하면 할수록 다만 내 사전의 어휘가 늘어날 뿐이다. '큰 일이다', '끝이다'라고 생각되는 일에 부딪혀도 마음을 다잡고 죽을 요량으로 해보면 어떻게든 된다. 당시에는 '아아,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이제 어쩌지'하고 난감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실패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경험이다, 전부.
수시로 상처받고 추락하고 구르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딱지는 점점 딱딱하게 굳어간다. 딱지가 두꺼워지면 피부도 두꺼워지고 더욱 단단해진다. 기특한 딱지. 만들 수 있을 만큼 만들어보자. 그렇게 딱딱해지 딱지는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떨어져 버린다.
'아아, 그동안 나는 잘난 척만 하며 살았구나.'
p. 137...'박피가 한 장 한 장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쓸데없는 것들이 벗겨지면 그제야 '아아, 어떤 것이든 실패도 좋은 경험이었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려면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괜찮아, 분명히 길이 보일 거야."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인데, 정말 그런 것 같다. 당시에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점이 모여서 선이 되는 것처럼 '아아, 그런 뜻이었구나'하고 내 안에서 딱지가 떨어지는 날이 온다. 그때까지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딱지가 덕지덕지 앉아서 두꺼워지도록 내 안의 어휘를 늘려가면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어쩌다가 임신을 하게 되어 미혼모가 될 상황인데, 아이의 아빠가 잘 생겨서 아이도 인물이 좋을거라 생각하며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다. 이 무대책의 솔직함이라니....이 책의 저자 미야자키 마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속초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지방의 책방 나들이도 재밌지만 각 지역마다 있는 도서관에 가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기린을 좋아해서 기린 연구를 하고 있어요.'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를 생각하게 한 책이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쥐어박히는 느낌.
인상적인 부분.
'...어머니는 약간 특이하신 분입니다. 마음이 안 통한다며 유치원을 중퇴했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비가 내릴 것 같으니까 집에 간다며 조퇴해 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직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말이죠. 딸인 제가 봐도 평범한 분은 아닙닌다. 미야자와 겐지(...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동화 작가가 되고 싶어 가출한다거나 빈곤에 허덕이는 농민을 돕기 위해 직접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는 등 비범한 삶을 살았다)를 약간 닮았다고 할까요? ' (인용 페이지 못찾음)
미야자키 마리, 군지 메구...두 분 모두 어머니가 영혼이 살아있는 분? 같다.
도서관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발견한 책. 1950년대 후반, 소련 휘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며 쓴, 마르케스의 기행문. 현재의 동유럽이 아닌 과거의 동유럽을 접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으스스한 분위기도 좋고.
p. 106 (폴란드 부분)..'상점은 동독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다. 그러나 서점은 예외다. 그곳은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화려하며 깨끗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다. 바르샤바는 책으로 가득하고, 가격은 놀라울 정도로 싸다. 가장 인기있는 작가는 잭 런던이다.
김 빠진 맥주 같은 맛.
경험이 학구열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학구열을 못따라가서 읽다만 책.
책 속 한마디.
'내자응지 거자망지' 來者應之 去者忘之
'오는 자는 응해주고, 가는 자는 잊어준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올린....하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도서관에 아이들 데리고 오는 부모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
위의 책 모두를 압도하는 김진해 교수의 글을 음미해보시길...(출처: 한겨레21)
'글 쓰는 목적을 '순수하게' 가지기 바랍니다. 자랑과 연민, 이 두 가지 감정을 분출하는 걸 글 쓰는 목적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내 진실에 다가가기. 내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백하게 쓰기.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써서 내가 다른 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려고 쓰면 됩니다.'
'글은 보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의 삶과 경험이 갖는 유일성 때문입니다. 유일성을 옹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윤리는 우리 경험의 유일성을 마치 거기서 거기인 걸로 만들어버립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선 모릅니다. 제 어머니 '이의기의 사랑'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것만 쓰면 됩니다.'
다시 미야자키 마리와 군지 메구.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였지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다.
좋은 글은 이렇게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