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뱅 테송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두 마디로 압축한 그의 가치관을 옮기면,


"모험은 꿈의 연장이고, 글쓰기는 모험의 지속입니다.'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때 무엇으로 제 갈망을 대신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묻는다면... 그 상황이 오기 전 죽음을 택할 것 같습니다."


며칠 동안 이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종종 떠오르는 질문이다.

'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고요히 고요히 잠는다 해도...'(모란동백) 조용남의 노래가 떠오르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빌려와 허겁지겁 읽는데 어떤 기시감이 스멀스멀, 이미 읽은 책이었다. 이미 읽은 내용을 까마득히 잊었는데 다시 읽은들 달라질까. 회갑을 넘기니 책도 회갑 치레를 한다. 읽다보면 읽은 책을 무의식적으로 다시 읽고 있다. 재독의 주기도 점점 짧아진다. 어쩔거나...


p.28 ' 다른 곳은 내일보다 더 아름다운 단어이다.' -폴 모랑(1888~1976) 프랑스 작가이자 외교관'



** 재독을 방지하기 위해 한 줄이라도 기록해야 싶은데 글쎄 제대로 지켜질라나...
















겉표지가 마음에 안들어서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고영란의 글을 보고 ... 읽기를 잘 했다. 공들여 지은 집 같다고나 할까.
















역시 겉표지로 판단해선 안 되는 책이다. 일본 문학에 한 발 가까이 들어가게 해주는 고마운 책.


<꿈꾸는 도서관>에서 꼭 하나만을 건진다면, 바로 이 문장.


'이때껏 갖가지 일을 해봤지만

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네.'  

- 아와시마 진가쿠(1823~1889) 일본의 유명한 풍류객


죽기 전에 쓰는 시, 절명시라고 한다나...


*** 홍콩에서 운이 좋으면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 영화배우 양조위와 마주칠 수도 있단다. 그래서 가끔씩 홍콩에 가보고 싶다고 노래부르는 사람이 있다. 누구? 



 












p.101

허우샤오시엔과 왕가위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묘비명에 새겨진 단 하나의 글자, '무(無)'. 세상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우주의 운동을 잠시나마 멈추게 하는 그 경지를, 우리는 양조위의 얼굴에서 보았다.


양조위에 대한 책은 무조건 소장.


****대학 때 읽다가 포기한 책을 읽어보니... 그땐 참 어리고 모자라고 어리석었구나 싶다. 
















p. 336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나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p.368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그래."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야만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설에서 만나는 셰익스피어의 문장들도 반갑다. 셰익스피어에게서 영감과 힌트를 얻어 작품의 세밀한 부분을 구현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글을 보증하거나 보충하는 자료로써 셰익스피어를 인용한 것인지, 읽다보면 그런 궁금증이 생긴다. 셰익스피어는 영원한 아날로그의 세계이자 작가들의 보물 창고.


***** 가까이 보아야 예쁘고, 이름을 알아야 가까워진다.

제미나이가 신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까치, 까마귀, 비둘기, 참새 정도만 구별하던 새 이름을 제미나이를 통해 새록새록 배우고 있다. 사진을 찍어서 "뭐야?" 하고 무례하게 물어도 친절하게 가르쳐주니 신통방통하다. 앞으로는 예의를 차려서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배우는 입장이므로.

그래서 알아낸 새는, 쇄백로, 중대백로, 왜가리, 흰뺨검둥오리 등. 청둥오리와 어울리는 흰뺨검둥오리를 처음에는 청둥오리 암컷으로 오인하여 청둥오리를 바람둥이로 생각하기도 하고, 흰뺨검둥오리 한 쌍을 보고 동성애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청둥오리는 암수의 외양이 판이하게 다르나 흰뺨검둥오리는 암수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왜가리. 이름을 알고나서 급관심이 생겼다.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는 중이다. 보기만해도 뿌듯해지는 우아한 새.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대에 나타나 먹이사냥에 나서니, 매일 왜가리의 출근을 기다린다. 근무지 이탈도 없고, 외부인 출입도 철저히 단속하고, 한눈 팔지 않고 먹이 사냥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존의 엄중함을 상기한다. 



까만 부리와 까만 다리, 까만 발톱. 머리 뒤에 있는 두 가닥 깃털. 흰색 몸통. 쇄백로라고 한다. 볼수록 아름답지 아니한가요?

















새를 기다리는 사람, 내 마음이 그 마음. 제목에 끌려서 대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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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03-2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관심사가 이렇게 다방면이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일까요, 특수한 경우일까요?

nama 2026-03-29 10:5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세상에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볼 게 많고, 갈 데 많고, 할 일도 많지 않을까요?
 

마음을 다잡고 도서관에 다녀왔다. 왕복 1만 보. 예전보다 걷는 속도가 한없이 느려졌다. 읽을 책은 무한하고 체력은 떨어져가고...잘 안배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나...그렇게 계획적인 인간은 못 되니 그냥 되는대로 살고 되는대로 읽기로 한다. 그러나 여행은 계획대로. 




 











중고로 구하기 힘든 건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러나...





14쪽까지는 어찌된 일인지 복사물이 대체하고 있다. 게다가 책 왼편, 두 군데를 통째로 구멍을 뚫어 철끈으로 묶었다. 이런 책을 본 적이 있던가 없던가...내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나...머잖아 스러져갈 생명체를 부둥켜 안고 있는 심정이랄까.
















p.226

<고도>는 한국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너무나 일본적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작심하고 일본미에 바치는 기획 소설을 쓴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이 소설은 실패하지는 않았다. 읽는 내내 교토에 가고 싶어지니 말이다.


작가 허연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읽는 내내 교토에 가고 싶'게 하는 것은 맞지만 '한국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저 책의 상태를 보면 우리나라 독자의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양가적 감정이 드러난다. '너무나 일본적'인 것이지만 너무나 사랑하는 게 느껴지지 않나?


그나저나 <고도>는 교토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한마디로 교토 홍보 소설이다. 소설<꿈꾸는 도서관>의 주인공이 도서관이었듯이 말이다. 흥미로운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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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23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저 정도 상태의 책을 폐기하지 않은 것은 아마 지금도 꽤 읽히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네요.

nama 2026-03-23 20:13   좋아요 0 | URL
절판으로 더 이상 구하기 어려우니 아쉽지만 저마저도 고맙지요.
 

자신의 글이 실린 생애 첫 책을 버릴 수 있다? 없다?


버린 얘기 먼저.



고1 때의 교지에 내가 쓴 독후감이 실렸었다. 여름방학 과제로 <사씨남정기>를 읽고는, 숙제라는 게 그렇듯 마지못해 썼는데 덜컥 상을 받고 교지에도 실렸다. 당시 국어선생님이 가르치던 고전소설의 특징 같은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아마도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가르친 요점을 내가 쓴 글에서 한두 문장쯤 발견하고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 선생님의 조용한 미소가 떠오른다.


4년 후, 당시 절친이었던 친구가 재수 끝에 법학과에 들어갔는데 교양국어 과제물로 독후감이 필요하다며 내가 썼던 글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던 저 교지를 빌려주었는데 결국 돌려받지는 못했다. 유달리 약골이었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잘 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신문 광고로 찾고 싶은 마음도 있다.) 





문체라고 할 것도 없는 글. 50년 전의 글이 고전적(?)이다 못해 고루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세로줄 쓰기까지 한몫 한다.


잊고 있었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이렇게 복원한 것은 또 한 명의 절친 덕분이다. 이 친구는 가족을 따라서 남미로 이민을 가게 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했었다. 그곳에서 5년을 살고 다시 역이민으로 돌아왔는데 그 와중에도 저 교지를 잘 간직했다. 이유는, 그 친구의 수필 한 편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리라. 재활용에 관한 관제(?)성 글이었지만(학교에서 글쓰기의 문제점) 글이 정갈하고 여운이 있는 수작이었다.


발간된 지 50년이나 된 고등학교 시절 교지를 간직했던 친구는 이제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쌓기보다 버려야 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망설이고 있다.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책의 흔적을 이렇게 남기는 건, 책을 버리는 것일까, 남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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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3-1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마님 연세가....ㅎㄷㄷ

nama 2026-03-18 19:46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노닥거린 지도 20년이 되어가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은 같은데...믿기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네요.

잉크냄새 2026-03-1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겨두심이 나중에 이불킥하지 않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네요. 버리기엔 너무 애틋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nama 2026-03-19 12:53   좋아요 0 | URL
몸은 아파오고... 언젠가는 생이 끝나고...누군가는 치워야하고...뭐 그런 생각이 들면 하나씩 처분하게 되지요. 내 손을 떠나더라도 어디엔가 존재할 곳을 생각해보니 모교에 기증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네요. 앗! 제 책이 아니네요.
 
인도네시아 Etc. - 남들 가는 대로 안 가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인도네시아 여행기
엘리자베스 피사니 지음, 박소현 옮김 / 눌민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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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자카르타 여행을 앞두고 여행서적을 찾아봤는데 유독 발리 관련 서적만 많았다. 인도네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여행 안내책자로는 론리 플래닛에서 나온 영문책자를 구입했었다. 인도네시아에 관한 국내 저작으로는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는 어학책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이하다고 생각했었다. 12박 14일동안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솔로를 대충 돌다가 왔는데 그것으로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입을 벌릴 수준이 못 된다는 것만 뼈저리게 깨닫고 왔다. 그보다 훨씬 전에 다녀왔던 발리를 보태봐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향신료 전쟁>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대항해시대 책을 섭렵하다가 그 정점에 있던 곳이 인도네시아여서 한동안 인도네시아에 대한 관심을 거둘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대물을 만났다. 바로 이 책.


2024년 2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인도네시아의 오늘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 여섯 권을 선정, 그중에서 단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이 책 엘리자베스 파사니의 <인도네시아 Etc.>를 읽으라고 권했다고 한다.


사진 한 장 없이 빽빽한 글자만 있는 여행기를 읽는 괴로움과 즐거움이라고 할까. 넓디 넓은 인도네시아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여행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3년 전 12박 14일간의 뒤죽박죽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건, 인도네시아를 기사가 딸린 차량으로 여행하지 않는 한 고생은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접했던 국내 저자의 인도네시아 기행문도 대부분 승용차를 이용한 여행으로 알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감히 생각해보지도 않을 여행(내 친구의 친구가 자카르타에 살고 있다,)을 만날 수 있는 책으로, 책을 통해 용기를 내보시면 어떨까 싶다.


13장으로 구성된 목차를 잠시 살펴보면,

*인도네시아가 탄생하기까지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식 근대화의 공과를 돌아보다.

*숨바에서 아닷의 원형을 마주하다.

*플로레스에서 인도네시아인의 이주를 생각한다.

*누사퉁가라와 말루쿠에세 탈중앙화의 현실을 둘러보다.

*방가이섬과 케이제도에서 관료제의 명암을 살펴보다.

*술라웨시와 말루쿠에서 천연자원의 축복과 저주를 목격하다.

*북술라웨시에서 인프라 문제를 지켜보다.

*북수마트라에서 분리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하다.

*수마트라에서 두 세계 사이에 걸친 존재들을 만나다.

*칼리만탄에서 인종 문제를 고민하다.

*자바와 롬복에서 종교적 극단주의를 들여다보다.

*자바에서 봉건주의 청산을 낙관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는 거다. 인도네시아의 역사, 정치, 종교, 이주문제, 인종문제, 경제, 관료제 등을 두 발로 걸으면서 체험하고 취재한 다큐에 가깝다. 인도네시아를 통으로 접합 수 있는 흔치 않은 책이다.


내 얄팍한 경험으로 더 다가왔던 부분이 있는데,


p. 294

경제전문가들은 노동 가능한 젊은 층이 불룩 튀어나온 인도네시아의 "인구 분포"에 열광했다. 그런 분포도는 자카르타나 홍콩의 컴퓨터 모니터로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이론적으로는 젊은 가구가 은행에 저축을 하고 은행은 그 저축액을 새로 사업을 하려는 이들에게 빌려준다. 젊은 노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더 많은 부가 창출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인도네시아 젊은이의 3분의 1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성인 인구의 5명 중 4명은 은행계좌가 없으며 은행은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다.


젊은 층으로 넘쳐나는 자카르타 거리를 걷다보면 '발전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쉽게 떠오른다. 부럽기까지 하다. 우리나라 어떤 교수가 쓴 책에서도 그랬다. ' 대학시절 교수님이 인도네시아는 젊은 나라여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교수가 된 나도 학생들에게 같은 말을 한다. 인도네시아는 젊은 나라여서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한 세대가 흘러도 여전히 발전가능성을 논하는 나라. 달리 말하면 '발전가능성'만을 말하는 나라에 대해서 위의 대목은 현실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이다.


p.313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면서 도시 사이를 오가는 미니버스들이 시동을 켜놓고 연료를 태워 없애고,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바로 가지 않고 손님을 더 태우려고 한두 시간씩 시내를 빙빙 도느라 수백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보조금 덕분에 휘발유값이 리터당 4,500루피아에 불과하기 때문에 버스기사들을 연료비는 걱정하지 않고 요금을 더 받을 궁리만 한다.


3년 전에 갔을 때도 그랬다. 족자카르타에서 오후 8시에 출발한다는 미니버스가 10시 넘어서 출발, 자카르타의 예약한 호텔까지는 20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그 비효율성의 저변에는 저런 내막이 있을 줄 몰랐다.


이런 굉장한 책을 만나면 계속 횡설수설하게 된다.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과부하 상태가 된다. 여행 중반에 접어든 저자의 울음에 동참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고나 할까.


p. 383

아직도 배를 긁고 있던 경찰은 계속 나를 못 본 척했다. 이 무정한 동네에서 훌쩍이면서 길거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중략) 잽싸게 어두침침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나니, 습기 차고 창문 없는 방에서 보낸 일곱 달, 모스크의 기도 소리에 네 시에 깨고 닭 울음소리에 다섯 시에 깨고 다시 여섯 시에 학교 가는 아이들 소리에 깨즌 아침들, 왜 아이가 없는지, 왜 친구 없이 혼자 다니는지 묻는 말에 나를 방어하고, 젊었을 때는 예뻤을 것이란 소리를 들어온 일곱 달, 화장실 휴지도 술도 영어 대화도 없는 일곱 달, 끝없이 짐을 풀고 싸고, 발에 알 수 없는 반점 같은 염증을 달고 산 일곱 달, 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 애써온 일곱 달, 무엇보다도 내 것이 아닌 세상에 나를 끼워 맞춰보려 애쓴 일곱 달의 고난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진짜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 etc. 라는 단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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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매장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중고서적은 어디로 가야하나? 폐휴지로 버리는 건 책에 대한 예의,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빨강색 코스트코 장바구니에 꽉 채워서 숙고 끝에 인천 아벨서점으로 향했다. (참고로 32년 동안 살았던 인천을 떠나온 지 만 2년이 지났다.) 팔지 말고 그냥 기증하자는 남편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두 자매분은 여전히 단아했다. 곱게 나이들어 가는 모습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희는 기증을 받지 않습니다."


기증을 받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말씀에 우리는 뭔가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동생분이 한권 한권 찬찬히 점검을 하는 동안, 새로 말끔하게 단장한 1층 매장과 2층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어쩌다가 마음 먹고 가보는 정도지만, 서점은 아련한 추억과 감상에 젖게 한다. 켜켜이 쌓인 세월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마음 한편이 죄송스러웠다. 알라딘에서 받아주는 책은 다 팔아버리고 남은 책을 들고 온 게 송구스러웠다. 감히 '기증'이라니.


민망해서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지만 대강 2/3는 서가에 꽂히고 나머지 1/3은 폐지로 처리될 듯했다. 책 값으로 2만 원을 받았다. 얼굴은 계속 화끈거렸다. 그사이 눈여겨 본 괴테의 여행기를 서가에서 꺼내 가격을 물었다. 2만 5천 원. 5천 원짜리 지폐를 가방에서 꺼내 보탰다. 잠시 망설이던 동생분이 "더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편이 거든다.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괴테의 여행기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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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2-26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처리, 정말 고민인 분들 많을 겁니다. 알라딘은 재판매가 어려운 도서는 중고로 매입하지 않는 긋해요.

nama 2026-02-27 15:03   좋아요 0 | URL
알라딘중고서점은 돈 버는 게 목적이지 헌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지요. 돈 되는 헌책을 좋아할 뿐.
공공도서관에 기증하는 것도 번거롭고 그리 반기지도 않아요. 일이잖아요. 그다음은 당근>>폐휴지로 처리. 허나 책을 쉽게 버릴 수 있나요. 마음 한구석에 남긴 한구절 때문에 차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