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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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베토벤 같은 아고타 크리스토프. 직설적인 펀치 같은 문장, 빠르고 거친 호흡. 찡한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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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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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쓰기가 겁나는 소설인데, 완독 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기도 어려운 소설이다. 단숨에 몰아쳐 읽는 소설이 아니어서 완독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으나,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감흥이나 느낌을 몇 문장으로나마 적어둬야 할 것 같다. 이런 소설은 도저히 안 읽은 체하며 넘어갈 그저 그런 소설이 아니다. 나 이런 책 읽었어, 하며 꼭 홍보를 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은 책, 다른 많은 책을 읽지 않아도 배가 불러오는 책. 자꾸 칭찬이 과해진다.

 

줄거리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이 책의 묘미는 갈피마다 박혀있는 보석같은 짧고 간결한 문장을 읽는 맛이다. 순간 순간 심호흡을 가다듬게 되는, 읽고 또 읽게 되는, 정곡을 파고드는 정확한 표현들을 대하는 맛이다. 학교 교사의 능력을 교실(수업)장악 여부로 따진다면 소설가의 능력은 소설장악이 될 텐데 이 소설이 바로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독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바쁜 일상에서 한가롭게 읽기는 더욱 어려운 소설이지만, 이 소설을 읽고나니 무언가 세상이 달라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읽기 전과 읽은 후, 내 주변의 공기의 흐름이 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밑줄 그은 문장들이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51쪽)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67)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속으로 들어오듯. (238~239)

 

그는 그런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바로 그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세상이 갑자기 더 아름다워 보이고 특별한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지붕과 벽의 모든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고, 비 오기 전 나뭇잎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까지 보이는 그런 나이. 세상은 자신을 허락하듯이 몸을 여는 거였다. 이제 남은 인생이 길지 않으니 한번 길고 절실하게 세상을 보라고, 그래서 그동안 잡고 있던 것들을 세상이 놓아주는 것이었다. (291)

 

"맞아요, 하지만 당신과 비리든, 누가 됐든 헤어질 때는 통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아요. 그 잘라진 조각이 똑같지 않은 거죠. 둘 중 한 명이 그 중심부를 가져가죠."(351~352)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녀의 삶은 잘 보낸 한 시간 같았다. 그 비결은 그녀가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화된 자신을 느꼈다. 날들은 바닥나지 않는 채석장에서 캐내는 돌 같았다. 그 안에는 책과 사소한 볼일들, 해변, 그리고 가끔씩 오는 우편물이 있었다. 그녀는 볕에 앉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우편물들을 읽었다. 마치 해외에서 날아오는 신문을 읽듯. (353)

 

"나는 언제나 중요한 것들은 어떻게든 남을 거라 생각했어." 네드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더라고." (374)

 

 

신형철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 역시 신형철의 평은 '정확하다'.

 

'...'정확하다'라는 평가는 우리가 소설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 중 하나일 것이다. 설터가 어떤 감정을 묘사하면 그것에서 불명확한 것은 별로 남지 않는데, 그럴 때 그는 마치 다른 작가들이 같은 것에 대해 달리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매끄러운 번역 덕분에 문장을 잘근잘근 씹는 맛을 느낄 수 있었으니 번역하신 분에게도 감사하는 마음 가득하다. 덕분에 잘 읽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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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오늘 신간소식에 설터의 산문집이 보여서 간만에 다시 설터의 소설들을 읽어보자 했는데 이런 리뷰 만나니 반가워요. ^^
설터의 소설은 줄거리보다는 분위기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정말로~

nama 2018-11-09 15:41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분위기와 곱씹는 문장이지요. 신간 소식, 저도 반갑네요.
 
그래도, 우리 젊은날
시바타 쇼 지음, 김성연 옮김 / 한마음사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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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 인생 베스트 5 중의 하나로 꼽았던 책이다. 신형철이 읽은 책은 1993년에 나왔던 이 책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0년에 출간된, 세로줄로 된 책이다.

아래 포스팅한 글에 사진을 올렸지만 다시 한번 올리련다.

 

             

 

먼저 제호. 초판본은 <그래도 우리들의 나날>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제호가 <그래도, 우리 젊은 날>로 바뀌었고,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란 이름으로 문학동네에서 올해 나올 모양이다. 흠, '그래도' 란 이름 덕분에 '그래도'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가보다.

 

나이를 따져보면, 1980년에 나온 책이니 이미 한 세대(약 30년)가 지났고 새로운 세대로 진입한지도 9년 가까이 된 셈이다. 번역본이 그렇다는 얘기고 일본 원작은 1964년에 나왔다. 일본 현대 소설의 고전 중 하나라고 한다. 신형철이 소개했으니 머잖아 떠오르는 소설로 널리 읽혀질지도 모른다.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으니 기분은 삼삼하나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스무 살의 내게 도착했고, 삶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과 '언어'를 건네주었다.'라고 신형철은 썼는데, 스무 살에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거의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어쩌면 읽었을 지도 모르는 이 책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20대에 이 책을 왜 제대로 읽지 못했을까. 이유를 추측해본다. 1980년은 5.18 이 일어난 해이다. 특별히 운동권이 아니어도 그 당시 대학생이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일본 전후 학생운동 세대를 다루는 이 소설이 잘 먹혀들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나 였다면, '피곤함'이 앞섰을 것 같다. 우리와 일본을 비교해보자는 호기심이 작동할 만도 한데 너무나 친숙한 주제로 다가와 이내 호기심을 거둬들였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등장 인물을 계속 괴롭히는 질문, "죽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이 질문이 가슴에 다가왔을까? 당시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국문학을 수강했던 나는 '죽음'에 대해 집요하게 천착했던 어떤 교수의 수업에서 '죽음'에 대한 공부를 '강제로' 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죽음이란 주제는 다룰 성질이 못된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피상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부의 피로감. 그러니 "죽는 순간에..."라는 질문을 거부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었더라도 등장 인물들을 지배하는 어떤 정신적인 공허감이나 허무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것이다. 대학 때는 특히 그런 정신세계에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읽었더라도 눈으로만 읽었을 확률이 높다. 학창시절 국어책에 나오는 아무리 좋은 글도 단지 시험 대비용 글로 읽었을 뿐 가슴으로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배움에 대한 개념이 있었을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읽은 것도 같고 안 읽은 것도 같다는 얘기. 이제라도 책을 읽을 때 밑줄 긋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정신적인 흔적은 둘째치더라도 물질적인 흔적이라도 남겨야 읽었다는 증거가 되니까.

 

 

 

이제는 이 책이 잘 읽힌다. 재밌다. 마치 이제야 <장자>를 읽게 된 것처럼. 그렇다고 <장자>와 같은 깊이를 요구하는 소설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다음에 옮기는 구절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구닥다리 표현으로 보이겠으나 내게는 20대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번역된 책들을 읽었으므로. 다소 틀린 맞춤법도 그대로 옮긴다.

 

제가 언제나 상대방의 사람과 그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싶다, 두 사람의 생활 속에 그 어떤 공통의 의미를 갖고 싶다고 원한 것도 이 망막한 세계 속에 확실한 말뚝을 뿌리박고 싶다, 그것을 한 개 한 개씩 뿌리박음으로써 거기에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 역사라고 부를만 한 것을 생성하고 싶다고 원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주위에 펼쳐져 있는 이 무한한 공간, 우리들을 이윽고 죽음 속으로 소멸시켜 갈 이 무한한 시간에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추구하기에 곤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추구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이었읍니다. (117쪽)

 

이윽고 우리들이 정말로 나이들었을 때 젊은이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시절엔 어땠었느냐고. 그때 우리들은 대답하리라. 우리들 시절에도 똑같은 곤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니까 다른 곤란이었겠지만, 곤란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똑 같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과 친숙해지면서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도 시대의 곤란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생활로 용감히 진출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을 젊은이들 중의 누군가 한 사람이 그런 것이 옛날에도 있었던 이상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용기를 갖는다는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갔던 우리들의 생에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이런 번역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글이 명료하고 분명해야 생각도 명료하고 분명해지고 생각을 거치는 표현도 정확해진다. '정확성'이란 표현을 정확하게 좋아하게 되는 이유다.

 

새로 번역된 책이 나오면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또 헷갈리려나? 과연 이 책을 읽었나, 안 읽었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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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2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적인 흔적은 물질적인 흔적으로 표해야겠네요 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선배님~

nama 2018-10-26 17:43   좋아요 0 | URL
불질적인 흔적을 남겨도 나중에 보면 낯설게 다가오지요. ˝내가 읽은 게 맞아?˝하면서요. 그런 경험 때문에 언젠가부터 밑줄을 긋지 않았거든요. 하기야 늘 새로운 것도 나쁘진 않아요.^^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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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놓고 그만 읽으려고 마음 먹어도 끝까지 읽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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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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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긴하나 그래도 위안을 받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촉촉해진다.
때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장의 원문이 궁금해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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