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國에 대해서 > 

Ⅰ. 美國의 역사
가) 들어가면서
美國은 유일하게 식민지 국가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종주국이 된 나라이다. 지난 20세기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수호자로서 Pax Americana를 이룩하였지만 이제는 그 자리를 아시아에 넘겨주어야 할 시기인 듯 보이며,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한 美國의 역사는 결코 평탄하거나 쉽지는 않았다. 또한 美國이라는 나라가 독립혁명을 계기로 탄생한 국가인지, 제국주의 백인국가에 의해 침략 받았을 때부터 시작하는 나라인지, 영국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한 나라인지, 아니면 그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원주민들의 문명부터 시작하는 나라인지를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美國의 역사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문명들이 멸망한 후부터를 미국 역사라고 보고, 그 이전의 역사를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혹은 美國 이전의 문명으로 다루겠다.
 
나) 美國 이전의 문명
최초의 아메리카 인디언은 갈색 피부에 거칠고 윤이 나는 검은머리,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몽골로이드계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학설에 의하면 시베리아 북동부의 초원지대에 살던 그들은 기후의 변화로 초원지대가 고갈되자 베링 해협을 지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인디언들이다. 인디언들은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로 나뉘어 각자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명으로는 코치스 문화, 모고욘 문화, 바구니 문화, 아나사지 문화, 푸에블로 문화, 우드랜드 문화가 있다. 그리고 중앙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명으로는 유명한 마야 문명과 아즈텍 문명이 존재했으며,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잉카 문명을 꽃피웠다.

다) 대륙의 발견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이 번영하고 있을 무렵인 15세기경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십여 차례의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은 중동지방과의 접촉이 빈번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상업의 부활'이 일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무역로의 개척이 유행처럼 번져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이 인도라고 믿었지만 1499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1513년 발보아에 의해 그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라) 원주민 문명의 멸망
① 아즈텍 문명의 멸망 : 1519년 4월, 스페인 귀족 헤르난도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공격하여 1521년 5월 왕국을 구하려뎐 아즈텍 최후의 왕인 쿠아우테목을 반역자로 교수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민족을 정벌하고 잔인하면서도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은 스페인에 의해 어이없게 멸망하고 말았다.
② 잉카 문명의 멸망 : 1533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는 잉카 제국의 내분을 이용하면서 비열한 수를 써서 잉카 제국의 통치권자인 아타후알파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잉카 제국은 스페인 인에 의해 멸망했다.
③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 : 스페인 인들은 인디언들이 가진 고도의 문명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학살하거나 문명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스페인 인들은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제물을 요구하는 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스페인이 차지한 아메리카 대륙의 땅들은 식민지가 아닌 본국의 직할지로 관리되었다. 
④ 영국의 식민지 : 美國은 17세기 초엽부터 약 170년 간 영국 식민지였다. 영국은 스페인과 경쟁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지방 및 기타 여러 광활한 대륙의 땅을 지배하게 된 영국은 식민지를 다스리기 위해 교육권의 박탈, 노예제도, 인두권제도 등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했으며, 아메리카 대륙을 영국의 시장으로 삼아 점점 식민지를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해고, 식민지 민들이 가진 영국에 대한 불만이 날로 커져갔다.

마) 美國혁명
美國혁명은 영국이 7년 전쟁(1756-1763)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종전의 방임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를 실시하여 본국과 식민지간의 관계가 악화함으로써 발생했다.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대부분의 식민지대표가 참여하는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으며, 1775년 4월 보스턴 근교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함으로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바로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 사건은 동인도 회사가 보스턴 항에서 차 하역작업을 하고 있던 1773년 12월 16일, 몇몇 보스턴 인들이 모호크 인디언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차를 바닷물에 빠뜨려서 발생했는데, 이 일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하였고, 독립혁명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1775년 5월 제2차 대륙회의를 열어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776년 7월4일 '독립선언'을 공포하여 자연권에 입각한 독립을 정당화했다. 식민지 군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1783년 파리 조약은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했다. 

바) 대륙국가 형성
독립전쟁 후, 워싱턴 행정부의 출범은 연방헌법의 인준과 더불어 13개 주가 모두 가입된 美합중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후 연방정부는 국가적 기틀을 확립하기 위하여 기구조직을 보완·개편하고 제도의 정비를 꾀했으며 국무성, 국방성, 재무성, 법무성 등을 설치하여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국가경영을 시도했다. 정치적 당파의 발생과 당파간의 대립으로 인한 시련 속에서도 애덤스 시대까지 꾸준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후 토머스 제퍼슨 행정부로부터 존 퀸시 애덤스 행정부로 이어지는 20여 년 동안 美國은 서부개척에 병행한 대외통상의 확대로 경제적 자립 기반을 다녀나가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의 통상관계 악화로 국내산업이 마비되고 해외무역이 손상되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를 美國의 국가적 단합과 애국심 강화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련 속에서도 성장을 이룩하며 잭슨 행정부가 출범하였고 이때부터 美國은 정치제도와 정당 구조상 평등주의적인 새로운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민선관리의 수적 팽창, 대통령후보 전국지명대회 및 대통령 특별고문제 등이 생겨났으며 양당제도가 뿌리를 내림으로써 어느 특정지역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독점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경제공황과 영토확장에 따른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연방이 분열될 위기가 시작되었다.

사) 남북전쟁
美國經濟는 산업혁명이 1860년대 일단락 되었지만, 이후 남북전쟁(1861-1865)을 계기로 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흑인의 '노예해방'이란 인도적·정치적 과제를 두고 남부와 북부가 치른 이 전쟁의 기반에는 서로 다른 경제체질로 인한 이해관계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남부는 면화생산을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서 노예노동을 이용하는 플랜테이션이 경제적 기반이었던 반면, 북부지역은 상공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질적인 경제체제로 인하여 남북 간에는 모순과 대립이 심화되었는데, 남부가 노예제의 확대를 요구한 반면 북부는 노예제를 반대했다. 북부의 주장이 역사적 진보라는 측면에서 정당성을 지닌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 이 대립은 노동력 확보라는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대립의 두 번째 원인은 관세문제였다. 남부는 농업체제였기 때문에 1차산품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을 도입하기 위하여 자유무역을 요구하였지만, 북부는 산업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여 보호무역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양측은 금융과 토지문제 등에서도 이해가 대립하였는데, 1850년대 말 서부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서부는 북부와의 경제적 유대관계가 밀접해진 반면 남부와의 관계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이리하여 1860년대에는 북부의 산업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링컨의 공화당 정권이 탄생하고, 공화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영국제품에 대한 관세인상이 실현되고 철도·농업기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중공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남부 11주가 연방을 탈퇴한 후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남부군이 우세했으나 앤티담 전투를 계기로 북부군이 세력을 회복하였고,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첫째, 연방이 유지되었고 둘째,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셋째, 공업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고, 끝으로 서부개척의 활력소가 제공되었다. 북부의 산업자본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美國의 공업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즉 산업자본의 발전을 제약하던 자유무역 및 노예제가 사라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의 산업발전에는 5대호 주변의 철광석, 풍부한 양질의 석탄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리하여 美國은 1880년대에는 세계 제 2위의 철강생산국이 되고, 1890년대에는 공업생산고가 세계 1위에 도달하였다. 요컨대 美國은 남북전쟁으로 동질적인 사회경제체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고 하겠다.

아) 제 2차 세계대전까지
남북전쟁 후 좀더 활기를 띠기 시작한 서부 개척은 광부, 목축업자, 농민들의 대이주에 따른 인구증가 및 국토개발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고, 1890년대에 이르러 프런티어가 소멸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에 추진된 정부의 친기업정책 및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의 영향으로 등장한 대기업가들의 활동으로 美國은 이제 유럽 열강들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산업국가로 변하게 되었다. 이 때 등장한 대기업가들이 존 데이비슨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단체의 활동, 농민운동, 언론·문학작품 등을 통하여 제기된 항변에도 불구하고 부패는 더욱 만연하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이 때 등장한 '혁신주의 운동'은 빈곤 및 부정부패 추방을 통한 사회정의운동과 정치개혁운동으로 확산되어,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美國을 변화시켰다. 美國 내에서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동안 유럽에서는 전면전의 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1914년에 마침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에 美國은 중립을 고수한 채 교전국과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독일의 미국상선 공격을 계기로 1917년에 연합국 측에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美國經濟는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전쟁은 1918년 독일이 연합국의 휴전조건을 수락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美國이 내세운 이상이 국제정치의 정세에 어긋나자 美國은 고립주의를 택했고, 내부적으로 급진적인 물결이 이는 가운데 번영을 누렸다. 그러한 번영도 잠시, 1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배상금을 물던 독일경제의 문제점과 美國 내의 거품이 꺼지면서 1929년의 주식시장 붕괴와 더불어 마침내 대공황으로 확대되었고 美國은 물론 세계가 경기 침체의 몸살을 앓게 되었다. 이에 따라 美國인들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을 선택했다. 뉴딜의 목표인 구호·복구·개혁의 추진으로 수년간 경기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반부터 또다시 불황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유럽과 아시아를 무대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초기에 美國은 1차 대전 때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다가 1941년에 참전하였고, 군수물자 자원을 위한 산업생산의 증가로 경기침체의 암운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경제 전반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자) 그 이후의 역사
2차 세계대전 후 美國은 평시체제로의 전환을 통한 경제부흥과 공산 세력의 팽창 억제라는 두 가지 중대한 과제에 직면했다. 이를 위해 트루먼 행정부는 '페어딜 정책'과 '마셜 플랜'을 추진했다. 이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국제적 협조체제의 강화와 반공태세 강화를 위한 대내외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경제·사회 그리고 외교부문에서 보다 발전된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발전과정에서 도시문제, 경기후퇴, 달러화의 불안정, 그리고 자연자원의 낭비 등과 같은 문제들이 새롭게 또는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네디는 '뉴프런티어 정책'의 실현을 통해 대내적으로는 사회정비, 경기회복을 시도했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경쟁에서 자존심을 지키려 하였다. 또한 존슨은 위대한 사회 건설을 표방하면서 빈곤추방과 교육발전에 주력했다. 전후 20여 년간의 변화·발전을 통해 美國은 세계강국으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계속된 대립과 경쟁 속에서 국제적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긴장상태는 닉슨시대의 닉슨-브레즈네프 선언을 계기로 완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긴장완화 무드의 토대 마련에 불과했고 포드·카터 시대에 이르는 1970년대 말까지도 냉전이 종식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건 시대에 이르러 핵 감축시대가 열림으로써 보다 급격하게 긴장완화 무드가 조성되었고 부시 시대에 소련의 붕괴에 이은 美國·러시아간의 전격적인 합의로 마침내 냉전의 시대가 청산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라는 극적인 상황 발생 이후 美國은 경쟁자 없이 세계무대에서 독주하게 되었다. 92년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 B. 클린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는 경제도 침체에서 벗어나 건실하게 성장해 나아갔다. 美國經濟에서 첨단기술 특히 컴퓨터 관련 기업들은 역동적으로 세계경제를 이끌었다. 그 후 2001년 9월11일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의한 뉴욕세계무역센터 여객기 충돌테러를 계기로 부시 대통령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 테러용의자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세력의 소탕을 위해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전쟁대상으로 설정, 그 해 10월 7일 전폭기와 미사일 등을 동원해 아프간 공습을 개시, 12월에 들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사실상 전쟁을 마무리한다. 2002년 들어서도 부시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한 추적을 계속하는 한편 이라크가 불법대량살상무기를 생산·판매하고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고 있다며 전선의 확대의지를 천명하고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어 10월 의회에서 대 이라크 무력사용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사실상 선전포고에 돌입한다. 2003년 3월 20일 美軍 25만을 중심으로 韓美英연합군(영국군 4만 5000명)은 이라크를 공격, 3주만에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같은 해 5월 1일 공식적인 전투종결을 선언했다. 또 12월 14일에는 피신했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美國에 체포되면서 테러와의 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Ⅱ. 패권국 美國 (경과. 현황. 전망)
가) 경과
독립 당시 美國은 대륙의 동쪽 끝에 산재하는 작은 농촌의 연합체로, 유럽경제의 변경이었다. 상업은 내륙과의 거래보다 유럽과의 거래가 많고 수출품은 대부분 농산물이었으며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美國經濟는 크게 발전하여 19세기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농업국이 되었으며 19세기 말에는 세계 최대의 공업국이 되었다.
▶1929년의 대공황 : 세계대공황은 먼저 美國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당시 美國은 이미 소비수요가 포화상태에 다다르고 있었다. 각 공장마다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으며, 생산의 축소현상이 일어나 불황이 심화되기 시작했으며, 美國의 대외무역도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경기하강과는 달리 주식투자에 대해서는 정도가 지나쳐 투기 붐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 투기 붐은 자본수출의 감소를 가져왔고, 美國시장 내로 해외자본을 끌어들여 美國으로부터의 자본유입에 의존하는 국가에 큰 타격을 입혔다. 유럽 특히 독일의 경기는 1928년 말 경부터 하강국면에 들어갔고, 후진농업국의 경제상태도 궁핍의 도를 더하였는데 먼저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과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가 금본위제를 정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의 붕괴를 계기로 美國이 유럽에 대부했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공황은 일시에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뉴딜정책 : 1933년3월 금융공황의 와중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시행했던 일련의 공황대책이 뉴딜이다. 그것은 美國의 공황극복을 위해서는 경제기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불가결의 조건이라고 한 케인즈 이론을 전제로 시행되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루즈벨트는 긴급은행법,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경기회복정책의 기반을 형성하고, 농산물가격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며, 그 후에 긴급구제지출법, 사업촉진법을 설치하여 공공사업을 경기진흥정책의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적인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에 '테네시계곡개발공사법'이 제정되어 초기 뉴딜정책 중에서 정부가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뉴딜은 경기회복목표를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채 전시체제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자연히 종료되었다.
▶IMF-GATT 체제(브레튼우즈체제) 출범 :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자본주의국가들이 취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IMF-GATT 체제의 출범이다. IMF는 통화금융면에서 중단기자금공급기관으로서 설립되었고, 통상면에서 GATT는 1947년 제네바에서 성립되었다. 이 브레튼우즈체제가 가지는 의미는 美國이 드디어 팍스 브리태니카를 팍스 아메리카나로 대체해나가는, 美國의 헤게머니가 수립되는 세계자본주의의 재편과정이라는 것이다.
▶마셜플랜 : 1947년 6월 국무장관 마샬이 유럽부흥계획을 제안하였다. 유럽부흥계획의 원조제안 이른바 '마셜플랜'은 경제부흥을 통하여 자본주의 체질을 강화함으로써 서유럽이 직면한 잠재적 위험을 제거한다는 목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美國의 경제원조는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 결과였다. 즉 美國은 경제원조를 통해 경제부흥에 깊숙이 관련하여 영향력을 확대하고 교역상대국을 재건함으로써 수출시장을 개척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서방세계는 1950년대 중반 경까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레이거노믹스 :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8년 간의 임기 중에 실행했던 일련의 경제정책을 일반적으로 '레이거노믹스'라 표현한다. 레이거노믹스는 흔히 '공급 측 경제학'이라 불린다. 공급 측 경제학이란 수요를 중시하는 케인스적 정책과는 반대로 공급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즉 대폭적인 감세 및 규제완화, 그리고 정부의 세출 규모 축소와 과도한 복지정책의 지양 등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국민의 근로의욕을 고취하며 저축성향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의 정책은 원래 설정했던 취지와 비교해 볼 때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금리와 고달러는 감세조치에도 불구하고 국내투자를 그다지 자극하지 못하였고, 국제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오히려 이러한 정책기조는 생산시설의 해외이전을 촉진하여 美國 내 산업의 공동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대소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우주무기개발(SDI의 추진)을 비롯한 군비지출을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연방정부의 채무를 누적케 하여 1982년부터는 경상수지도 만성적 적자로 반전되어 美國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레이건의 경제정책으로 계층간의 소득분배는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레이거노믹스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해소하고, 이후의 장기호황을 실현하는 전제를 만들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정책적 성과를 거두었다.  

나) 현황
2003년 세계경제는 美國經濟를 중심으로 지난 2001-2002년의 침체에서 벗어나 회복세를 나타냈다. 美國經濟의 회복세는 감세로 인한 가처분소득의 증대로 민간소비가 대폭 증가했고 기업의 설비투자도 눈에 보이게 회복된 데 따른다. 나아가 이라크전을 계기로 증가한 군사비지출도 내수 진작에 도움이 되었다. 美國경기는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에 더욱 호조를 보여 1/4분기의 2.0% 성장에서 2/4분기에는 3.1%로, 그리고 3/4분기에는 8.2%로 성장률이 급속히 상승했다.

다) 전망
2004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6%, 재정적자는 GDP의 5% 수준으로 전망된다. 현재까지는 美國이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아시아에서 中國이 맹렬하게 추격해오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팍스 아메리카나 팍스 차이나 혹은 팍스 아시아나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현재 美國經濟의 회복이 세계경제 회복을 견인하고 있지만 달러화 가치 하락, 국제자금의 유럽, 日本, 신흥시장 등으로의 이동 등이 점점 美國經濟의 세계 속 위치를 격하시켜가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美國은 이라크전 등 국제사회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 이미 경제 이외의 美國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反美 현상이 세계 각 국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세계 속 美國의 위치가 로마의 쇠망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Ⅲ. 美國의 강점 및 약점(경제 포함)
가) 강점
미국은 앙시엥 레짐이 없어서 사회 해체 및 변화를 겪지 않고 오히려 기회의 나라가 되어 자유분방한 듯 하면서도 프로테스탄트적인 성향을 깊이 간직한 나라이다. 유럽에 비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고, 아직까지 미국 대통령 중 카톨릭 신자는 한 명도 없다. 이미 고대, 중세, 근대의 일부를 경험한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일자리를 찾아서 등의 이유로 신대륙을 찾아 미국을 세웠기 때문에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개척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성향이 있으며, 과거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앞만 보고 가는 혁신적인 면도 있다. 경제적으로도 과학혁명을 주도한 나라인 만큼 신기술이 발전해 있으며, 세계경제가 아직은 달러 중심이기 때문에 자본조달에 용이하며, 현재의 경제주류는 시카고 학파이며, 시카고 학파 이전의 미국은 케인즈, 프리드먼 등 유명한 경제학자들도 배출했다. 개발과 혁신, 창조를 자신들의 모토로 삼고 있으며, 세계의 거대한 기업들이나 CEO등도 미국에 많이 있다.

나) 약점
위와 같은 수많은 장점들이 존재하지만 현재의 美國은 국제적 만행을 서슴지 않게 자행하고 있어 국제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라크전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그 이전에도 베트남전, 걸프전 등 많은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양민을 살육하고, 고엽제 등으로 각종 자연환경을 파괴시켰으며, 테러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목 하에 전쟁이라는 테러를 일으켜 전세계에서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쌍둥이 적자의 심화, 美國의 강한 달러 정책 후퇴, 美國 대통령 선거 실시 등으로 달러화 약세가 초래되었고, 美國,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간에 환율 갈등이 심화되고 달러와의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또한 2003년 OPEC 회원국들은 원유거래 결제통화를 유러화로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해 달러화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아직까지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학생이 기관총을 난사해 사람들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등 사회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더 이상 美國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美國은 번영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전망이다.

 Ⅳ. 韓·美 관계(역사, 현 상황, 전망)
가) 역사
韓·美 양국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사건'과 71년의 '신미양요'를 통해서였다. 美國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 뒤 강화도조약으로 日本에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美國과의 수교에도 응하여 82년 5월 '朝美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905년 러·日전쟁의 중재를 맡은 美國은 식민지 필리핀의 안전을 日本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하여 그 해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에 대한 日本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45년 8월 日本이 패망하자 美國과 소련은 韓國의 38°선 분단점령을 발표하고, 이어 R. 하지 중장 휘하 美軍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향후 3년 동안 南韓에서의 군정이 시작되었으며, 48년 8월 15일 大韓民國정부가 수립되자 폐지되었다. 정부가 출범하자 美國은 韓國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美國대사로 J.J. 무초를 임명하고 韓國에서도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을 임명함으로써 두 나라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韓國은 건국 초기부터 北韓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對美일변도의 외교를 폈으며 6.25 이후 정치·군사·경제면에서 韓美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美國은 53년 10월 <韓·美상호방위조약> 체결 뒤 꾸준히 군사원조를 제공하여 韓國군의 현대화를 도왔고, 해마다 韓·美합동군사훈련 등을 통하여 두 나라의 실전능력을 높여 왔다. 또한 71년 이후 연례 韓·美안보협의회가 개최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현안문제를 협의하여 왔다. 90년대 美國의 방위비분담 요구가 커지고 주한미군 일부 철수 문제가 대두되었다. 국교 수립이래 韓國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美國을 방문했고, 美國에서는 아이젠하워·존슨·포드·카터·레이건·부시·클린턴 대통령이 韓國을 방문하여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협의하였다. 美國의 對韓 경제원조는 6·25 뒤 61년 초까지 韓國經濟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노근리 학살 사건 등 駐韓美軍의 만행이 끊이지 않고 있어 국내 反美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다.

나) 현 상황
2002년 對韓수출액 189억 8900만 달러, 對韓수입액 268억 700만 달러로 대폭 흑자를 기록하면서도, 자동차·식품 등 韓國시장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0년 韓國교민 177만 명, 체류자 16만 1983명이다. 2003년 對美 수출액은 197억4,510만불 (기계류, 전자제품, 피혁, 화학제품), 對美 수입액은 300억950만불 (전자·전기제품, 신발류, 자동차, 의류)이다. 경제면에서는 美國과 韓國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고, 의존적이지만 駐韓美軍이 국내에서 일으키는 갖가지 문제들이 韓國人의 反美감정을 불러 일으켜 美國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 전망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아직 世界經濟는 美國 중심이지만 점점 아시아로 경제의 축이 넘어오고 있으며, 통합된 유럽 역시 만만치 않은 시장이며, 中國의 발전과 日本의 경기회복이 世界經濟 발전에 영향을 주고 있어 앞으로의 世界經濟가 유럽과 美國, 아시아 등 블록화된 경제구조에 의해 이끌어져 갈 전망이다. 특히 각 국이 FTA 협정 체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 통합 경제가 주요 경제구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美國이 계속 전쟁을 일으킨다면 北韓이 언젠가는 목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양국간의 마찰이 예상된다. 그러나 만약 北韓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美國과의 관계는 여전히 우호적일 것이다. 그리고 駐韓美軍의 문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동등한 입장에서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Ⅴ. 南北韓과 美國
제 2차 '6자 회담'이 2월 25∼28일간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핵심 쟁점은 北韓의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 가동 여부, 북한핵 폐기 방식 등이었으며, 막판까지 공동발표문을 작성하기 위해 조율을 했으나 구속력이 떨어지는 의장성명문을 발표하는데 그침으로써 南北韓, 美國, 中國, 日本, 러시아의 6개국은 핵심 쟁점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번 2차 회담은 1차 회담(2003년 8월 개최)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참가국들은 회담 성과에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역사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영향을 미쳐 온 美國, 中國, 日本, 러시아 등 주변 4강이 본격적으로 南北韓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美國은 '악의 축' 발언 등을 통하여 北韓을 적으로 간주, 제2의 이라크전을 일으킬 의도마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회담에서 北韓은 美國 측이 증거를 제시하면 해명을 하겠다고 하면서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를 부정했고, 美國은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이라크전 직전에 대량학살무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美國은 회담 초반부터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법으로 핵을 완전 폐기한다는 원칙)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北韓은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을 구분하여 군사적 핵무기 계획만을 폐기하겠다고 언급하였다. 이렇듯 계속 美國과 北韓은 서로 입장 차이가 크며, 특히 美國의 군사력으로 볼 때 北韓을 제압할 능력이 충분하며, 명분 역시 美國이 만들어낸다면 전쟁마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한반도 내에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다. 핵무기가 인류를 파괴시킬 만한 힘을 가지고는 있지만, 핵무기가 아닌 그것의 개발여부가 인류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듯해서 매우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Ⅵ. 기타 - 미국 문학 中
▶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1-5) 
에인 랜드 (지은이), 신예리, 정명진, 조은묵 (옮긴이)

미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에인 랜드의 장편소설이다. 1957년에 출간된 이래, 여전히 미국의 독자들에게 사랑 받는 작품으로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서평을 써 보겠다.
《신문에서 이 책을 극찬하는 것을 보고 읽게 되었다. 사실 난 미국이 너무나 싫어서 이 책 읽는 것을 기꺼워했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고 했던가.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미국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는 책.. 그래서 그네들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였다.
꽤 두꺼웠다. 한 권당 500페이지 정도이니 읽는데도 이틀 밤을 새워야만 했다. 소설 형식을 빌어 기업가 정신을 표현했는데, 내용은 재밌었다. 미국에서는 이 책이 지적 스릴러로 분류된다는데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대학의 강의실에서, 더러운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가들의 연회에서 그리고 침대에서까지 철학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철학은 단 하나 '인간의 이성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다.' 이 명제를 위하여 온갖 상황이 다 발생한다.
이 책은 미래의 뉴욕에서 출발한다. 얼치기 도덕주의자들, 인류애를 주장하는 위선자들의 집권으로 진정한 기업가들은 모두 파업을 선언하고 그들만의 아틀란티스로 숨어버린다. 그러자 그들에게 빌붙어 살아가던 다수의 어리석은 대중 및 집권자들은 멸망하고 기업가들은 세상으로 돌아와 세상을 재건한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한창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미국 정부의 제재에 못 견뎌 캐나다로 이전한다고 소동을 피웠을 때 이 책의 기업가 정신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정부의 제재는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시장경제의 침체를 가져온다. 그리고 너무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기업가들의 이윤을 떨어트리고 판단할 줄 모르는 대중들은 그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그들을 옥죄어간다고 했다. 즉,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캐나다 이전 소동이 이 책의 상황과 비슷하거나 혹은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어이가 없었다.
이 세상의 기업가들 중 이 책에 나오는 프란시스코나 대그니, 리어든처럼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만을 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모든 정치가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노리는 무뇌충같다 하더라도 대중들은 생각할 줄 안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활동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즉 이 책에 나오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또한 사회는 진보하는 법인데 이 책에 따르면 사회는 퇴보한다는 것인가.
예부터 동양에서는 상업을 천시하였고, 덕분에 상인들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 책은 그러한 상황을 타개할만한 구실을 주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산업혁명기에 빨리빨리 어서어서 발전하자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미국과 다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고 미국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는지, 왜 세계의 경찰 행세를 하며 온갖 나라에 간섭을 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나라 안의 치안에는 부실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다.
그들에게 A는 A이다. 영원히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한 번 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했다면 영원히 그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 책에 나오는 대로 제임스나 오런 보일과 같이 남을 등쳐먹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자신은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한다면서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착취한다. 대그니와 같은 도덕률로 무장한 이성적인 인간은 그들의 이상향이다. 남의 눈을 가리기 위한. 이상향으로 가는 행세를 하면서 마음껏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
나는 이 책에서 그것을 보았다. 이 책이 50년도에 출판되어 아직까지 읽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로맨스에 집중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사랑마저도 이성의 영역에서 통제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 모성애라는 감정마저도 이성에 포함시킨 이성의 영역에서 행동하는 자들의 사회가 현재의 미국과 같은 사회일까?》

<참고자료>


1. 이야기 미국사. 청아출판사. 이구한 엮음. (개정4쇄 2004.2.7)
2. 서양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배영수 편. (개정판10쇄 2004.2.28)
3. 교양. 들녘.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외 옮김. (초판23쇄 2002.3.15)
4. 신경제사개설. 박영사. 이해주·김호범 공저. (1999.8.30)
5. 다음 백과사전 中 미국.
http://100.daum.net/DIC/detail?id=1356750&sname=미국&ty=1 (2003년)
6. 국정원. 세계각국소개 中 美國 (2003년)
http://www.nis.go.kr/servlet/Board.dbWorldMain?cmd=view&sub_id=5&seq_no=12158&cr_tp=&cr_pg=7&cr_ptp=1&v_sub_id=0
7. 삼성경제연구소. World Report 제101호 2003.12.29. 박번순 수석연구원
8. 삼성경제연CEO Information. 2004년 해외 10대 트렌드. (2004.1.14) 박번순 수석연구원 
9. 삼성경제연구소. CEO Information. '6자 회담' 이후의 남북관계 전망. (2004.3.3) 이정철 수석연구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플레져 > 웃지마요....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공리주의에 대해서 >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가 경제학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담 스미스 이래 리카도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투여된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 가치론을 주장했지만,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느냐는 질문에는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 때 마르크스가 노동의 양을 통해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론을 주장했고, 이 이론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로 인해 자본가들은 당황했다. 산업 혁명 이후 산업 자본가들은 기업 운영으로 많은 돈을 버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빈곤에 시달렸는데,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자본가에게는 남는 것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해줄 경제학이 필요했다. 이 때 경제학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공리주의 이론이었다.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벤담과 밀의 쾌락과 고통의 개념을 효용이라는 말로 바꾸었고, 효용을 측정하면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는 한계 효용 이론을 발전시킨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현대에 와서 철학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바로 근대 철학 사상 중 하나인 공리주의였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마지막 고전학파의 학자임과 동시에 공리주의자였던 그의 사상을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당연한 귀결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정직이 보편적으로 실천되기를 의욕할 수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최상의 정책'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추론 방식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관점을 취했다고 주장할 수가 없지 않는가? 칸트는 그러한 의지가 도덕적 관점의 일부라고 생각한 점에서 옳기는 하나 도덕적 관점이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공리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8세기말과 19세기는 놀랄만한 변혁의 시대이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근대 민족 국가가 출현하고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하고 있었다. 미국의 유혈적 시민전쟁은 급기야 서구 문명 사회에서 노예제도의 종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산업혁명이 전반적인 사회의 재편성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때의 공리주의 도덕 실천가들은 이전의 낡은 가치들에 진부함을 느끼고 도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쾌락 그 자체를 유일한 선으로 여기고, 행위의 유쾌한 결과를 도덕률의 기준으로 여기면서 결정론에 도덕 이론의 기초를 두고자 하였다. 흄은 영국의 사상사에서 도덕 의식의 이론으로부터 기본적인 공리주의적 전제에로의 길을 열어 주었으므로 그를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보통 공리주의 철학과 관련되는 두 인물은 벤담과 밀이다. 처음 벤담에 의해 공리주의가 널리 알려져 영국의 사회적·정치적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벤담에 의하면 도덕은 신을 기쁘게 하는 문제가 아니며, 추상적인 규칙들에 매달리는 문제도 아니다. 도덕은 이 세계에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가져오게 하려는 의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벤담은 하나의 궁극적인 도덕 원리, 즉 "유용성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용성의 원리란,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들의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경향성에 따라, 다시 말해 행복을 증진시키느냐 감소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행동을 시인하거나 비난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는 이익이 없는데 남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에게 봉사하는 일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는 상황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자가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이익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편애(self-preference)는 자신의 이익이 어떤 사람 혹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롭지 못할 때조차도 언제나 작용한다. 이것은 늘 인간을 형성시켰고 앞으로도 항상 인간을 형성시켜 줄 것이며, 도덕 이론은 이러한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벤담은 영국의 법률과 제도를 공리주의 노선에 따라 개혁하려는 목표를 가진 일단의 철학적 급진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추종자 중 한사람인 제임스 밀은 탁월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요, 역사학자이며 경제학자였다. 제임스 밀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공리주의적 윤리설의 지도적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최대 행복의 원리에 의하면 그것에 관하여, 그것에 의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바람직한 것이 되는(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아니면 타인들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간에) 그 궁극적 목적은 가능한 한 고통이 면제되고, 즐거운 일이 풍성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근본 법칙은 아주 간단하게 가능한 한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 등 일곱 가지 기준을 가지고 쾌락과 고통에 대한 쾌락 계산법을 제시하고자 한 벤담에 비해 밀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쾌락의 평가에 있어서 양뿐만 아니라 질도 도입하고자 했다. 즉 쾌락, 즐거움, 건강, 만족 등의 많고 적음이 행위 결과에 대한 평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 쾌락의 고상함과 저열함 또는 탁월함과 비열함까지도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밀은 좋은 인생에 대한 공리주의적 견해에서 인간의 고귀한 능력들이 가져오는 만족들에 최우선적인 역할을 할당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본능의 만족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밀은 이타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윤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며 그래서 인간의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일 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의 행복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자기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밀의 최대 행복의 원칙에서 행복이란 많은 일상적인 쾌락과 순간적인 쾌감, 미세한 고통과 불합리한 기대를 가지지 않는 데서 오는 전면적인 만족으로 가득 찬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질적으로 최상의 것이어야 하며, 최상의 것으로 생각되는 행복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행위가 창출해 내는 행복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원칙의 진술에서 사용되는 행위의 의미와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의무의 근거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밀은 비난받을 만한 행위가 칭찬 받을 만한 성질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데서가 아니라 행위자를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사람이 호감이 가고 용감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의 행위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또 잘 이행되었을 때도 불구하고 악한 행위가 되는 경우도 있다. 덕망 있는 성격은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유익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공헌하기 때문에 바람직하며 숭고한 동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윤리적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행위자의 성격이나 동기가 아니라, 행위 자체의 결과이다. 밀은 의무가 윤리상의 제재에서 나오며 어떤 다른 도덕률의 체계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도덕률을 당연히 지키도록 하는 중요한 궁극적인 제재, 양심의 제재를 밀은 어떻게 생각할까? 밀에게 있어서 양심은 동정심이나 상호 이해심, 동료와 함께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특징지어지는 감정 또는 '집단 감정'이다. 처음에는 이런 감정이 이기주의적인 감정보다 약하지만, 사회 조직과 교육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발달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게끔 만들어 준다. 일단 이런 감정이 형성되면, 이를 위반하는 행위는 양심의 가책을 낳게된다. 밀은 양심을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행위의 궁극적인 제재가 되고 의무를 최종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발달된 동정심으로부터 나오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양심적인 감정인 것이다.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했던 이론인 공리주의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행위들은 오직 그 결과에 의해서만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야 한다. 옳은 행위란 단지 최선의 결과들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둘째, 결과들을 평가하는 데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은 행위들에 의해 생겨나게 될 행복과 불행의 양이다. 옳은 행위들이란 불행에 대한 행복의 최대 잉여를 낳게 하는 행위들이다. 셋째, 초래되어질 행복 또는 불행을 계산함에 있어서 어떤 사람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계산되어져서는 안 된다. 각 개인의 행복은 똑같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주장은 많은 반공리주의 논증을 발생시켰는데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 철학의 몇 가지 근본 문제들을 추가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인가? 공리주의는 옳은 행위란 최대의 선을 낳게 하는 행위들이라고 말한다.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이란 오직 하나, 행복이다. 밀의 주장에 의하면 '공리주의 이론은, 행복은 바랄 만한 것이고 더욱이 목적으로서 바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바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 하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사상은 일반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쾌락주의 이론을 조금만 검토해 보면 그 이론이 담고 있는 심각한 결점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장래가 유망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교통사고로 손에 부상을 입어 더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피아니스트에게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쾌락주의자들은 그에게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가 자신이 마땅히 어떠했어야 되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좌절과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의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반대로 현재 불행한 상황에 대한 이성적 대응이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수도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 바로 불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쾌락주의는 행복의 본질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행복이란, 다른 것들은 오직 행복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만 여겨지지만 그 자체로서 선하고 그 자체로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이란 우리가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권리에 의해 선한 것들로서 인정하는 사물들을 얻었을 때 그것에 수반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대응물이다.
     결과만이 중요한 것인가? 공리주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상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다른 문제 역시 행위의 옳음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이 판명된다면, 공리주의는 근거가 흔들리게 된다. 예를 들어 한 공리주의자가 어떤 지역을 방문하던 중, 한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한 결과로 인종간의 폭동이 일어나 백인 폭도들이 경찰의 묵인 하에 흑인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치자. 그때 공리주의자가 그 범죄 현장에 있었는데, 그의 증언이 특정한 흑인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신속한 범인 체포가 그 참상과 린치를 그치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공리주의자로서 그 사람은 틀림없이 무죄한 사람에게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거짓말은 그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죄한 사람의 처형을 초래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함축을 지닌 공리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압력과 교육이 내적인 힘과 더불어 힘과 더불어 밀이 생각하는 바처럼 우리의 행위를 결정한다면(밀은 어떠한 선택의 자유나 자기 결정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말하는 의미를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에도 불구하고 밀의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와 19세기의 정치경제학자들 중에서 밀이야말로, 경제적 생산이 정체되는 '침체' 상태를 적어도 산업화 된 국가들에서는 위기 신호와 사회적 파국의 전조로 해석하지 않고 더욱 정의롭고 더욱 태연하고 더욱 개화된 사회적 삶의 가능성으로 해석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후진국들에서나 생산의 증가는 의미있는 일이 된다. 최고의 선진국들의 경우 경제적 관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개선된 분배이다. 그 분배를 이루기 위한 불가결의 수단은 인구 증가의 더욱 강력한 제한이다. 부와 인구가 무제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경우 지구에서 사라질 어떤 그런 것들에 힘입고 있는 지구의 쾌적함이라는 저 위대한 환경을 지구가 잃는다면, 그것도 더욱 개선되고 행복해진 주민들이 아닌, 그저 숫자상 엄청나게 증가된 주민들을 부양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잃는다면, 이러한 세태가 불가항력적으로 닥치기 훨씬 이전 에 사람들이 침체 상태에 만족하고 살기를 바람이다.'

<참고자료>

1.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 D. Hume.

2. 도덕철학. 제임스 레이첼즈 지음. 서광사.

3. 도덕과 입법의 원리들. 벤담. 1789.

4. 현대윤리사상. J.V. 맥글린, J.J 토너 지음. 서광사.

5. 공리주의. J.S. 밀. 1861.

6. 윤리학. 윌리엄 K. 프랑케나 지음.

7. 철학의 거장들 중 J.S. 밀. 디터 비른바허 지음.

8. 탐구. H.J. 맥클로스키 지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98, 갑자기 다가온 IMF 여파로 직장을 잃으신 부모님으로부터 요즘 들어 부쩍 살기 어려워졌다는 말을 듣는 횟수가 증가하였다. 50, 노후 대책은 커녕 현재의 생활을 감당하기 위해 무언가 일은 하지만 들어오는 돈 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 현실은 암울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늘 잊지 않으시고 말씀하신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에 머무르기에는 내가 너무 아깝다고. 얌전히 직장생활을 하시던 지난 날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중산층 이상의 삶을 물려주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우리는 뉴스에서 계층간의 양극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IMF 로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할 때 부유층의 자제들은 지금이 더 좋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고도 하던데, 지금과 같은 흐름이라면 머지 않아 그들만을 위한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한 뉴스 기사에서는 강북에 살기 때문에 미팅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어떤 대학생의 철없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었다. 참 어이없는 세상이구나 라며 그냥 넘기긴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겪는 소외감은 아마 앞으로 더욱 커질 듯 싶다. 그런데 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닌가 보다. 미국의 한 모녀가 저술한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이라는 부제 앞에서 나는 이유 모르게 숙연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말이다.

여권의 신장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직장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하나의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가부장적 무게에 짓눌렸을 남성들에게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난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직장 생활의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물론 과거 전업 주부보다 오늘날 일하는 여성들이 가계의 수입을 증대시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체 가계 소득의 증대와 동시에 매달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고정비용 역시도 증가했고 이로 인해 실질적인 여유자금은 더욱 감소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또한, 저자들은 과거 전업 주부로서의 여성은 남편의 실직 등으로 인한 소득 상실시 언제라도 노동할 수 있는 예비 근로자로서, 가족 구성원 중 아픈 사람이 존재한다면 무료로 그를 간호할 수 있는 예비 간호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과거 전업주부에 의해 무료로 제공되던 이러한 서비스들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을 버리고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한 가정은 고정비용 조차 감당하지 못해 경제고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여성의 노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맞벌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그 많고 많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파산하는 이들이 그리도 많단 말인가? 저자는 교육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오늘날 교육은 중산층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길 바라고, 이를 위해 부모는 좋은 학교가 존재하는 좋은 학군으로,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이사를 감행한다. 매달 감당해야 되는 집세와 자신의 직장생활을 위한 차량 유지비 등으로 인해 오늘날의 중산층들은 굳이 과소비를 하지 않아도 파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한가지 더, 대출조건의 완화 등 보다 시장 질서에 부합하는 정책이라며 정부가 내세우는 정책들이 중산층의 파산을 독촉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거에는 집값의 30%에 해당하는 돈을 갖고 있어야 모기지 대출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3% 정도의 돈만 있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NCBC 가 내세운 소비자 파산신청 권리 제한이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파산의 늪으로 몰아넣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지금 당장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이에게 카드 융자를 통해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만, 그 유혹은 실로 달콤하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금융회사들이 이러한 비윤리적인 방법을 통해 많은 이윤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사회복지제도는 여전히 많은 논란을 끌고 다닌다. 한 개인의 경제적 어려움은 그 사람의 나태, 과소비 등으로부터 비롯되며 복지에의 집착은 개인으로 하여금 노동에 대한 동기를 저하시킨다고 많은 이들은 주장해왔다. 그렇기에 많은 사회는 정말 빈곤한, 그냥 놔두면 우리 사회의 안전에 위협이 될 정도의 빈곤층에 대한 복지제도를 운영하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노라고 말한다. 과거와 같았으면 이는 문제될 리가 없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현실이 지속되는 속에서 이는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기존의 중산층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체 신 빈곤층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계층을 형성할 뿐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 저자는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논조로 이야기한다.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통한 이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전제되어야만 지금의 파산 경쟁(!)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또한, 직접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는 속에서만이 지금의 맞벌이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는 단지 미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자가 책의 말미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을 찬찬히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panda78 > 슈렉 2의 반데라스 고양이 눈 총총 버전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