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가 숨쉬는 아름다운 성-노이슈반타 

 

 


    
주의 고장 뮌헨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 유럽의 지붕 알프스의 거대한 산맥 북쪽 언저리 퓌센이라는 마을의 나지막한 산 중턱 위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성이 하나 놓여있는데 이름하여 노이슈반슈타인, 일명 '신(新)백조의 성'이라 불리는 성이다. 오늘도 전 세계로부터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 성은 외벽이 흰 색과 베이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날씬하며 우아한 자태로 건축된, 중세의 중후한 멋을 풍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밝은 색조를 띄며, 지붕 위에는 비대칭적인 여러 개의 푸른 원추들이 예술성을 더하고 유럽풍의 바탕에다 아랍의 특이한 문양을 가미한 듯한,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꿈꿀 수 있을 법한 신비한 모습의 성이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방문객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이 성을 지은 사람은 루드비히 2세. 그는 당시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왕으로서, 1845년 8월 25일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와 어머니 마리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유별나게 예민하고 특히 성장하면서부터는 시와 음악, 그리고 미술과 같은 예술분야에 심취하기 일쑤였고 일찍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 성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게 된 계기가 된다.

1861년 2월 2일 그가 16세 되던 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뒤부터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의 나머지 인생과 바그너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864년 타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약관 18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이제는 과거와 같은 절대군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유화와 자본주의 시대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하여 상황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체질적으로 워낙에 정치에는 소질이 없었고 음악과 시와 미술과 같은 예술세계속으로 빠져들기 좋아하는 심약하고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궁전이 있는 뮌헨을 가급적 피하려 들었고 오히려 궁전을 떠나 남부지방의 알프스 부근의 전원에 있을 때 더욱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1870년 초가 되자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이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러시아와 프랑스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충돌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는 더욱 더 성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정치에는 흥미와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예술가로 태어나 평생 성만 짓다가 죽었다고나 할까. 루드비히 2세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침실에서 자던 어느 날 새벽 왕은 정적에게 납치 당하여 슈탄베르크 호수의 요양소에 강제로 연금을 당하게 된다. 왕은 요양소에 갇힌지 사흘만에 자신의 주치의인 구텐박사와 함께 물에 빠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886년 6월 13일의 일이다. 이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우선 루드비히 2세는 1미터 90정도의 큰 키의 소유자인데다 어릴 때부터 선수에 버금 가는 수영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죽음은 두 가지로 추정되고 있는데 첫째는 왕의 무능을 보다 못한 정적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과 두 번째로는 강제 연금된 자신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그를 말리던 구텐박사는 실수 또는 고의로 물에 빠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살아 생전 성을 세 곳에 지었지만 그나마 완성된 곳은 신 백조의 성 하나뿐. 그러나 이 성 역시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년 동안 지었음에도 3분의 2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루드비히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인 재산을 모두 털어 지었으며 때로는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거나, 조금씩 돈이 생길 때마다 지었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가 죽을 무렵에는 축성에 따른 빛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무려 1천4백만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루드비히 2세가 이 성에 살았던 것은 겨우 6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왕은 매우 성격이 여성스러우며 동물들, 특히 오페라 '로엔그린'에 등장하는 백조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성 안의 문고리는 모두가 백조의 모양을 하고 있고 벽화와 커튼의 장식에도 역시 많은 백조가 그려져 있다. 이토록 왕이 백조를 좋아하자 사촌누이이자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소피 샤를로트는 루드비히 2세에게 백조모양의 커다란 화병을 선물했다. 흰색의 백조모양을 한 이 화병은 백조의 발을 잡아당기면 밑으로 물이 빠짐으로서 물을 갈아주는데 편리하도록 설계된, 왕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것이었다. 소피는 나중에 이 왕과 약혼을 하기에 이르지만 결혼식 직전에 파혼하게 된다.


이 성은 산 중턱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규모가 큰 건축물은 예로부터 호숫가나 강가에 짓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마치 사람처럼 그 모습을 물에 비쳐본다는 그러한 의미이다.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3면이 각각 '반발트씨에' '알펜지' 그리고 '호프남제' 등 세 개의 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있어 성의 모습을 세 곳에서 비쳐볼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대 규모의 성의 설계는 건축가가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성은 루드비히 2세와 뮌헨의 국립극장의 무대작가가 설계하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시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보편적인 건축양식을 떠나 전혀 새로운 양식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성 내부의 모든 그림은 뮌헨 미술대의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그려졌다. 성의 건너편 계곡 너머에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생전에 지은 노란 색의 구 백조의 성이 저만치 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루드비히 2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분분한데, 첫째는 그가 바그너와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하지만 바그너는 당시 유명한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던 리스트의 딸과 결혼하기 전이나 그 후에도 여러 여자를 섭렵하는, 여자를 너무 밝히는 사람이었으므로 동성연애자라는 것은 당치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동성연애자도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한가지는 남자만 좋아하는 동성연애자가 있는 반면, 남자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동성연애자도 있다고 함으로서 왕이 총각으로 살다가 죽은 이유는 그가 죽음을 당한 이유만큼이나 베일에 쌓여있다.
성 내부에는 그가 죽기 전 까지 지냈던 여러 공간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오리지날한 형태의 모든 방과 집기들을 볼 수가 있다. 접견실에 옥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옥좌를 놓을 접견실이 완성되기 전에 왕이 사망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왕이 죽은 후 성 안의 미완성된 부분은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완성시키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키가 1미터 90센티였을 정도로 큰 왕이었으므로 침대의 길이는 2미터 10센티가 되었고, 문마다 손잡이는 보통 사람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있다. 콘서트 홀, 또는 가수의 방이라는 커다란 방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가운데 '영웅전'의 배경 그림으로 장식하였으며 1909년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된다. 이 성에는 왕의 초상이 어디에도 없는데, 이유는 왕이 자신의 초상이 남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 콘서트 홀에만 그나마 초상대신 왕가의 문장만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곳에는 또한 성모마리아의 그림과 조각이 있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어, 그가 생전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생전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성안의 거의 모든 벽화는 바그너의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배경으로 장식되었다. 마치 바그너를 위한, 아니, 바그너만을 위하여 지어진 성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강하게 들 정도이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치팔'과 '로엔그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운 회화로 그려져 둘러싸여 있고 창 쪽의 코너에는 사촌누이로부터 선물 받은 백조 모양의 화병이 놓여 있다.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는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동굴을 인공으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며, 나머지 방들에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를 비롯한 바그너의 주요 오페라의 회화들로 가득 차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바그너는 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에는 단 한 차례도 와보지 않았다. 루드비히를 만났던 곳은 이 성 건너편의 호숫가에 있는
호엔슈방가우 성으로서, 루드비히의 아버지 막시말리안 2세에 의해 세워진 노란색의 여름 별궁이다. 이 호수에는 많은 백조가 있어서 루드비히가 백조를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루드비히 2세가 이토록 바그너를 열광적으로 사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그너(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경찰서의 서기이며 아마추어 배우이기도 한 아버지와 빵집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나게 된다. 당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아버지는 그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가이어라는 유태계 남자와 재혼하였는데 그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으며 화가이자 가수이기도 한 예능분야에 다재 다능한 인물로서 어린 바그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그너는 극도의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타고났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본능적으로 계부의 예술적 성향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모차르트와 같이 아버지로부터 집중적인 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서 출세를 해야만 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베토벤, 베버 등 당시의 기라성 같은 음악가와 그들의 오페라에 심취하였고 급기야는 자신이 직접 오페라의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21세 때 유랑극단의 악단장이 되었던 바그너는 먹고 살기 위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연주활동과 소규모의 오페라를 공연하였지만 벌이는 그다지 신통치 못하여, 끊임없이 친구와 친척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구걸하다시피 돈을 빌려쓰게 되고 그 빚은 나날이 늘어만 가게 되었다. 1832년 첫 오페라 '결혼'을 필두로 1842년 10월 드레스덴에서 공연한 '리엔치, 최후의 호민관'이 성공을 거두면서 바그너는 마침내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당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과 교제하게 되었지만 형편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음악적 이해에 대한 편견으로 자꾸만 궁지로 몰리게 된 바그너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대표작 '탄호이저'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많은 부채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많은 부채와 약속어음을 어긴 것 때문에 여기저기 끊임없이 도망 다니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1864년 5월 3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바이에른 국왕의 명을 받은 왕실 자문관이 찾아온 뒤 그 해 3월 10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2세를 만나게 됨으로서 바그너의 인생은 이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국왕은 그야말로 기적처럼 나타난 구세주였으며, 바그너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찬 군주로서 문자그대로 천사와도 같이 바그너의 앞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자신의 재산으로 바그너의 부채를 모두 탕감 해주었는데, 이것은 바그너로 하여금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고 자신이 꿈꾸던 음악활동에 몰두하여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왕이 열렬한 지지자이자 팬인 것처럼 바그너도 그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가 루드비히 2세에게 1864년 5월 3일자 편지를 보면,
'오, 은혜로 충만하신 왕이시여! 천상의 감동에서 솟아난 눈물을 당신께 바침으로써, 그리도 비천하고 애정에 굶주려왔던 제 가련한 인생이 품고 있던 시적 경이감이 드디어 지고한 현실이 되었음을 당신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이 인생의 마지막 한 단어까지. 마지막 한 음계까지. 저의 인생은 당신께 속해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왕의 바그너에 대한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 성의 대부분 벽화를 바그너의 작품들로 장식하게 된다. 바그너는 이후에 왕과 더욱 친해져 왕의 친구가 되었으며,  때로는 왕의 신임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시인음악가에 대한 젊은 왕의 심취에는 처음부터 어린아이다운 면이 있었다. 그는 바그너를 조언자이자 친구로 대우했으며 이에 대해 바그너는 마치 부성에 넘치는 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바그너가 왕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마침내 루트비히 2세와 함께 공동으로 왕국을 다스리는 왕처럼 되어버렸다. 바그너는 특유의 격렬한 어조와 강렬한 시로 젊은 루드비히 2세를 매료했다.

루드비히 2세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시인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격정적인 언어로 수많은 전설을 뒤섞어 놓았고 루드비히 2세는 이 전설들을 항상 믿을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로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들 역시 언제나 바그너의 시와 음악처럼 격렬한 언어로 쓰여있었다. 바그너를 첫 대면한 직후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사촌누이이자 오스트리아 여제(女帝)의 동생인 약혼녀 소피 샤를로트에게 '나와 바그너가 때때로 입장과 역할이 서로 바뀌어 버린 듯 한 인상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아마도 그가 지닌 극도의 여성스러움이 격정적이고 호탕한 성격의 바그너에게 깊이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원래 결혼날짜는 1867년 10월 12일로 정해놓고 황금마차와 기념주화까지 준비를 해놓았지만 결혼식을 이틀 앞둔 10월 10일 갑자기 파혼이 선언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바그너와의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가 이 결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바그너는 오늘날 가장 주목해야 할 음악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가 생전에 만들었던 주옥같은 오페라들은 끊임없이 전세계의 크고 작은 무대 위에 올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를 열렬하게 후원하고 사랑했던 루드비히 2세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면 아마도 바그너라는 이름은 한낮 가난하고 불쌍한 무명의 음악가로서 기억의 저편으로 오래 전에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드비히 2세는 비록 비운의 왕이었지만 자신의 예술에 대한 헌신과 열정으로 후세에 기억될 아름다운 건축물과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오늘도 이 성을 보기 위해, 그리고 루드비히 2세와 바그너의 열정과 그들의 숨결을 만져보기 위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음악과와 예술가들이 경건하고 호기심 어린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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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불가사의, 카주라호의 사원들


  
주라호의 새벽은 구름 한점없는 하늘 저편을 뜨겁게 달구며 떠오르는 붉은 태양과 함께 열리고 있었다. 멀지 않은 숲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원숭이의 기지개 소리와 이따금 씩 들리는 새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조용한 시골 마을의 아침 풍경을 연상시킨다. 거의 말라 버린 호숫가에는 인근 마을에서 걸어 온 일단의 식구들이 선잠을 깨고는 촛불을 켜고 신에게 경건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도로 변의 약간 후미진 곳에서는 웅크리고 앉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신성한 배설의식(?)을 거행하는 이곳 사람들의 의심 어린 시선이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붉은 빛을 머금은 아침 햇살이 비칠 때가 사원의 조각들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 아침식사도 거른 채 서쪽 사원군(群)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쪽은 12개의 사원이 밀집되어있는데, 그중 한 곳은 현지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사원이고 나머지는 박물관처럼 보존되어 관람객만을 유료로 입장시키고 있었다.

이곳의 사원들은 대부분 황갈색이나 분홍빛을 띤 사암으로 지어져 있다. 사암은 카주라호에서 20여 km 떨어진 켄강 부근에서 캐 온 것이라고 한다. 찬델라 왕조의 전성기에는 80여개의 사원들이 있었지만, 후에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는 동서남군을 통틀어 20여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카주라호 사원은 198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암은 대리석처럼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므로 원하는 형태의 모습으로 사원을 짓는데 용이했을 것이다. 사원들은 하나같이 시바나 비슈누 등 힌두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당시 이곳의 장인들 조각솜씨를 모두 동원하여 지어진 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하고 장중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멋이 곳곳에 깃들어져 있었다. 사원의 외벽은 하나같이 시바와 비슈누신, 요정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그리고 동물들의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있어 사원이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조각작품을 연상시켰다.
12개의 사원 중 특히 시선을 끄는 곳은 락슈마나 사원과 칸다리야 마야데브 사원으로서, 이 건축물들의 외벽에는 900여개가 넘는 조각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 압권은 미투나상으로서, 여인들의 풍만한 곡선미는 물론 남녀의 곡예사와 같은 성행위 모습이 너무나도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조각되어있어 처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풍만하고 둥근 가슴은 마치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만 같은 토마토를 연상케 한다. 입술만 갖다 대도 발 등까지 그냥 흘러내릴 것만 같은 어깨와 허리, 그리고 다리의 유연하면서도 매끈한 곡선미, 그리고 용수철처럼 탄력감이 넘치는 엉덩이부분은 농염하다 못해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 이태리의 조각가 도나텔로의 조각을 연상케 한다. 얇은 옷을 막 벗을 자세로 서있는 요정의 시선은 망설임과 흥분으로 가늘게 떨고 있고, 줄무늬가 있는 속옷을 걸친 육감적인 여인의 조각은 수줍은 듯 요염하게 돌아서 있다. 곡예사와 같은 성행위의 자세들 또한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어, 보면 볼수록 호기심이 점점 증폭될 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원에 있는 조각들의 차이점이다. 락슈마나 사원은 925년에서 950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은 이보다 100년 쯤 뒤에 지어진 것인데, 두 사원의 조각에서 뚜렷한 세대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락슈마나 사원의 에로틱한 조각들 중 여인들의 모습은 매우 과장되고 풍만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반해 마하데브 사원의 조각들은 매우 날씬하고 보다 세련된 모습과 자세를 묘사하고 있었다. 카주라호의 사원에는 모두 80여가지의 남녀교합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4세기 경 밧샤야에 의해 쓰여진 인도의 성교지침서인 카마수트라에 묘사된 성행위의 자세를 조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실은 보다 심오한 힌두이즘의 종교적 철학에 기인한다는 점과, 당시 북인도에서 강하게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불교에 대항하여 힌두교도들을 사원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사원에 감각적인 조각들을 해 놓았다는 나이든 이곳 주민들이 이야기가 오히려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사암의 또다른 특징은 물기를 쉽게 흡수한다는 점인데, 다시말하면 비가 억수처럼 내려도 부딪히는 대신 물기를 흡수함으로서 마찰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려 왔는데도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원형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은 사암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아무튼 천년 전에 이 신성한 사원에 이토록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조각들이 무슨 이유로 조각되었던 것일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종교적 분위기는 어떠하였을까. 이토록 파격적인 발상은 누구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필이면 이곳에 사원들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정교한 조각기술을 지닌 장인들은 어디서 나타나게 되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한꺼번에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카주라호의 사원과 조각은 인도 예술만의 독창성과 신성을 지니고 있다. 유연하고 풍만한 젊은 육체를 매끈하고 부드러운 사암과 대리석에 정확히 재현해놓은 것은 전형적인 인도의 조형예술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점이기도 하다. 동적이면서 영감이 넘치는 인도의 조형예술에는 또한 아름다운 육체의 재현이라는 힌두교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성행위의 묘사는 '둘이 곧 하나'인 감각적인 행복과 함께 정신적인 행복의 최고형태를 상징하고 있다. 진정한 힌두교도 들에게 있어 세속(世俗)은 신성한 것이며, 소멸(消滅)역시 불멸의 구원에 이르는 열쇠가 된다. 요컨대 '사랑이 곧 신'이다. 그리고 항상 추구하기는 하지만, 상상이 불가능한 신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오직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수면'이나, 성교를 나누며 서로 절
정에 도달했을 때의 모든 '소멸'의 순간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만족스러우며, 가장 완벽하고, 가장 해탈에 가까운 것이다. 이와같이 힌두교에서 세속적인 인간의 쾌락을 묘사한 예술은 힌두교 사원의 정신성을 능가한다.

브라만 들에게는 카주라호가 하나의 정신적 시험무대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조각상을 보고 흥분하거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실로 헌신적인 힌두 교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르마 요가란 이러한 자극적인 장면 앞에서 침착을 유지하는 방법을 수행자들에게 가르쳐주는 요가이다. 마하트마 간디도 만년의 나이에 카르마 요가를 행한 적이 있다. 이처럼 힌두교는 모든 극단을 포용하고 있다. 카주라호 사원의 에로틱하고 관능적이며, 성적인 호소력이 짙게 배인 젊은 남녀들이 현실감 넘치게 묘사되어있는 조각들이 유치한 포르노그라피가 아닌 순수예술로 느껴지는 것은 인도 예술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신성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카주라호의 사원들은 인도의 중세기인 950년부터 1050년 사이에 달의 신 찬드라의 자손이 세웠다는 찬델라 왕조의 초기 수도로 정착되면서 집중적으로 건축되었다. 대부분이 힌두 사원인데 반해 동쪽에 자이나 사원을 건립한 이유는 당시의 재무 장관 격을 맡았던 사람이 권력을 가진 자이나 교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소유와 아힘사를 궁극적인 목표로 살아가는 자이나 교도들이 금전과 재물 관리에 능했던가 보다. 이곳에는 파르스바나트, 산티나트, 아디나트 등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볼 만한 곳은 파르스바나트 사원이다. 외관상으로는 서군의 힌두 사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나 조각의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몽골리안 얼굴의 여인상은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원의 전경을 촬영하기 위해 단 위로 올라서자 비쩍 마
른 개 두 마리가 자기네 보금자리를 빼앗기는 줄 알고 화를 낸다. 이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1 km 정도를 내려가면 마지막으로 조성된 두라데오 사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원은 동 틀 무렵 특히 신비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카주라호의 에로틱한 조각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시기를 미적 타락과 감각에 호소하는 매춘적 요소를 도덕적 타락으로 물들게 했던 시기라고 하지만 이곳의 조각들은 바로 그 에로틱한 주제를 예술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어느덧 해는 기울고 사원들의 어깨가 노을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카주라호 사원의 조각상들을 모두 감상하기엔 하루 해로는 너무 부족했다. 카주라호의 어둠은 절정의 환희 후에 다가오는 소멸감과 고요함처럼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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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JUNE CAREY 의 그림들


Monterey Vineyard  

 

 



Fall Vineyard  

 

 



A Taste of Heaven  

 

 



Lost in a View

 

 

  


Vigna Del Sole  

 

 

 



The Vineyard Floor

 

 

 


 

  



Mission Gate
  

 

 

 



The Mission Courtyard
  

 

 

 



The Mission at San Juan Capistrano
  

 

 

 




Eucalyptus Mea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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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JUNE CAREY 의 바다 그림들



Rocky Shoreline  

 

 

 

 



Timber Cove
  

 

 

 

 



Above Side Ranch
  

 

 

 

 



Greenwood C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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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에 비친 샤자한의 사랑이야기


 
 
밤중, 샤자한은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샹들리에의 촛불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누군가 물이 가득 찬 황금그릇을 코앞에 내밀었다. 왕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목이 말라서 잠을 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뭄타즈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지. 샤자한은 왕비가 황제에 대한 걱정으로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과 한숨 짓는 것을 그동안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뭄타즈 마할이 두 번째의 왕비로서 아그라성에 들어온 것은 17년 전이었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키도 작고 피부도 까만 전형적인 드라비다 여인이었다. 첫 번째 왕비나 세 번째 왕비의 미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여인.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맑은 목소리와 넘치는 애교, 그리고 꾸밈없는 밝은 성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입궐 후에도 다른 왕비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왕비의 품위를 잃지도 않으면서도 늘 밝게 웃으며 매사를 솔선 수범함으로서 대신들과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샤자한의 마음을 읽는데도 탁월해서, 언제나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술처럼 알아 맞추고는 그를 대신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언제나 황제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사는 그런 여인이었다.


어느덧,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이 있거나 언제나 뭄타즈를 동반했다. 그녀는 심지어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두말 없이 따라 나섰다. 사랑이란 외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뭄타즈마할의 헌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두 왕비의 따가운 눈초리와 질투를 감수하며 뭄타즈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샤자한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따르는 착한 그녀를 혼신을 다해 아끼고 사랑했다. 다른 왕비들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뭄타즈는 또한 샤자한에게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 그 이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런 왕비가 또다시 임신한 채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이전과 달리 점점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은 샤자한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창백한 달빛이 아그라 성의 테라스에 걸친 어느 날 밤, 결국 뭄타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곁에 앉아있는 샤자한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 뭄타즈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을 황제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죽어 가는 왕비의 손을 잡으며 굳게 약속했다. 1631년 6월 7일의 일이다. 뭄타즈는 14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황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황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장례를 치르는 기간동안 흰 상복을 입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했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 사후 곧바로 그녀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이로서 아그라의 야무나 강 남쪽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름은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왕관모습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2만 명의 노예들이 건축가의 지시를 받아 무려 22년간의 대 공사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무굴 제국의 영광과 샤자한의 명예에 걸 맞는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되었다. 놀랄 정도의 섬세한 조각과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상감 처리한 정교한 기술은 더 이상의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그 세심함은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은 중앙운하에 한가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본관의 맞은편에 열려있으며, 건축의 균형과 세련미를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는 그 반대쪽에는 모스크와 외형이 똑 같은 건물을 세운 그 치밀함이여. 가히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타지마할이 건설되면서 죽은 후 2년 동안 그 앞뜰에 임시로 묻혔던 뭄타즈마할은 바닥 공사가 끝나면서 바로 타지마할의 지하에 옮겨졌다.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날, 샤자한은 성대한 행사를 갖고 뭄타즈마할의 영혼을 다시 위로했다. 죽은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전의 왕비를 사랑하는 샤자한의 눈에 뭄타즈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있었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후 오히려 더 괴로워했다.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움은 다시 고통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타지마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대신들의 조언을 받아, 조부인 악바르 대제 시절의 한때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로 6개월간의 휴가를 떠난다. 샤자한이 대리석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병적이다시피 했으므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 성내에 자리하고 있었던 성자 시크리의 초라한 무덤을 대규모의 대리석으로 증축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은 이곳을 순례하도록 하였다.
그는 뭄타즈마할이 없는 아그라에 머물기보다는 외부에 출타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윽고 조부 후마윤의 수도였던 델리에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샤자한은 장차 이슬람세계의 끝까지 그 명성을 떨칠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붉은 사암의 거대한 성, 이른바 '랄킬라'를 짓기 시작했다. 성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마마스지드이다.


샤자한이 제국을 통치하던 30년간, 제국의 확장에 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타지마할의 건설로 국고가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게 되었다. 말년에는 중병에 들어 국사를 돌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고, 왕비 뭄타즈마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무나 강 북쪽 타지마할의 반대쪽에, 이번에는 검정대리석으로 타지마할과 같은 거대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의 임종과 국고의 탕진을 염려한 네 아들이 서로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 군인기질이 가장 풍부한 야심가 아우랑제브가 장남과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재빨리 아그라를 차지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성채의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아버지가 진행시키던 샤자한의 묘의 건축을 중지시켰다.
무려 8년이라는 기간을 이곳에 갇혀 살던 샤자한은 75세의 나이로 멀리 야무나강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사후 그의 묘는 타지마할 지하의 뭄타즈마할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뭄타즈마할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타지마할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네 번씩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의 자태는 고요한 달빛에 비칠 때면 보라 빛을 띤 상아색으로 바뀌고, 그 고운 모습은 마치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아그라 성채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 멀리 떨어진 타지마할을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8년 동안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샤자한의 애절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을 논하려면 아그라를 먼저 가 보라. 사랑과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 아그라는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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ㅙㅗ무ㅑ 2012-02-0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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