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전쟁(Ⅱ) - 크로노스(Cronos)와 제우스(Zeus)


  강보에 싸인 돌을 크로노스에게 주는 레아
아버지 우라노스(Uranus, 하늘)를 거세하여 천상의 왕위에 오른 크로노스(Cronos, 시간)는 누이인 레아(Rhea, 결실)와 결혼하여, 명계(冥界)의 신 하데스(Hades),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Hestia), 풍요(豊饒)와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 신들의 여왕 헤라(Hera), 이렇게 5남매를 차례로 낳았다.

그러나, 우라노스의 '아들에 의해 쫓겨날 것'이라는 저주(詛呪) 때문에 자식들을 낳는 대로 즉시 삼켜 버렸다.

제 자식을 삼켜버리는 매정한 남편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레아는 6째 제우스(Zeus)가 태어나자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의 조언대로 제우스를 크레타 섬에 숨기고, 남편에게 강보에 싸인 돌을 아기라고 속여 삼키게 했다.

후일 크레타 섬에서 님프들의 손에 키워져 장성한 제우스는 지혜의 여신 메티스(Metis)와 결혼했다. 제우스는 메티스가 알려준 대로 토제(吐劑), 즉 구토약이 섞인 음식을 크로노스에게 먹여 자신의 남매들을 토하게 했다.


  신들의 왕 제우스
이때 크로노스는 마지막으로 삼켰던 돌을 맨 먼저 토했는데 제우스는 이 돌을 '세계의 배꼽'이라 하고, 세계의 중심인 델포이(Delphoe) 신전이 있는 파르나소스(Parnassos) 산에 올려 놓아 자신의 승리의 증거로 삼았다.

크로노스는 시간, 즉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가 삼킨 것을 토해낸 것은 시간을 거슬렀다는 것이다.

크로노스는 힘을 잃고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Tartaros, 무한지옥)에 갇히게 되었다.

크로노스가 삼켰던 자식들은 실제로는 제우스의 형과 누나들이지만 크로노스가 토할 때 제우스는 장성한 청년이었고, 형과 누나들은 갓난아기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천상의 왕위 자리를 제우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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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전쟁(Ⅰ) - 우라노스(Uranus)와 크로노스(Cronos)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는 크로노스
우라노스(Uranus, 하늘)와 가이아(Gaia, 대지)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로는 티탄(Titan, 거대한) 12남매와 퀴클롭스(Cyclopes, 외눈박이 거인) 3형제, 헤카톤케이레스(Hecatoncheires, 백수거인) 3형제가 있었다.

이들 중 퀴클롭스 3형제와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는 저희들끼리 싸우는 것은 물론이고 형들과 누나들인 티탄 12남매에게도 행패를 부렸다.

우라노스는 행패를 부리고 말썽을 피우는 괴물 같은 자식들이 보기 싫어 이들을 모두 빛이 닿지 않는 가이아 몸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Tartaros, 무한지옥)에 가두었다.

가이아는 덩치 큰 자식들이 자신의 몸 안에서 요동 치는 바람에 견딜 수가 없었다. 원하지 않던 자식을 낳게 한 우라노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가이아는 몸속에 있는 아다마스라는 금속으로 큰 낫을 만들고, 막내 아들 크로노스(Cronos, 시간)에게 우라노스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버리라고 했다.

밤이 되어 우라노스가 가이아의 옆에 누웠을 때, 몰래 침실에 숨어있던 크로노스는 준비한 낫으로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바다에 던졌다. 성기가 잘린 우라노스는 크로노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에 의해 쫓겨날 것이라고 저주(詛呪)를 했다.
한편,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를 때 핏방울들은 가이아의 몸 위로 떨어졌고, 성기는 가이아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바다에 떨어졌다.

가이아의 몸 위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핏방울에서 복수의 여신들인 에리뉘에스(Erinyes) 자매, 거인족 기간테스(Gigantes) 형제가 태어났다.
또한, 바다위로 떨어진 성기는 바다를 떠돌아다니며 흰 거품을 만들어냈고, 이 거품에서 사랑과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거품에서 태어난 신)가 탄생했다.

우라노스에게 통치권을 주었던 가이아는 이렇게 하여 그를 권좌에서 내쫓았고, 크로노스가 천상의 최고의 신이 되었다. 이후로 부부였던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영원히 갈라서게 되어, 하늘과 땅은 멀리 떨어져 있어 더 이상 섞이는 일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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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Chaos)로 부터 신들의 탄생


 대지의 여신 가이아
태초에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고 '카오스(Chaos,혼돈)'만이 존재했다. 카오스는 무질서하고 정형이 없는 덩어리로 모든 물질의 원형과 에너지로 꽉 찬 공간이었다.
물질들과 에너지가 아직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뒤엉켜 있는 상태가 바로 카오스였다.

카오스에서 어둠의 신 에레보스(Erebus, 땅속의 칠흙 같은 어둠)와 밤의 여신 뉙스(Nyx, 밤하늘의 맑은 어둠)가 태어났다. 이때까지는 온 세상이 어둠뿐이었다.
어둠(에레보스)과 밤(뉙스)이 교합하기를 거듭하더니 이 둘 사이에 낮의 신 헤메라(Hemera, 낮)와 대기의 여신 아이테르(Aither, 맑은 대기)가 태어났다. 이로써 모든 천체가 운행할 우주의 드넓은 어둠과 낮과 밤의 세계가 생겨났다.

곧 이어 밤의 여신 뉙스는 검은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거대한 알을 낳았다. 이 알에서 모든 물질을 서로 결합하여 생성하게 하는 생산의 신 에로스(Eros, 사랑-후대의 사랑과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장난꾸러기 아들 에로스와는 다른 신)가 태어났다.

이에 하늘과 땅이 나뉘고, 땅과 물이 나뉘더니 땅에서 스스로 생명을 얻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 대지)가 생겨났다. 가이아는 대지에 산맥의 신 오레(Ore, 산맥)을 만들고, 자신을 두를 수 있을 바다의 신 폰토스(Pontus, 바다)와 자신을 덮어줄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 하늘)를 낳았다.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교합하여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낳았는데 이들이 바로 '티탄(Titan, 거대한)족 12남매'이다. 그리고, 다시 두 차례 세 쌍둥이 괴물인 퀴클롭스(Cyclopes, 외눈박이 거인) 3형제, 헤카톤케이레스(Hecatoncheires, 백수거인) 3형제를 낳았다.

티탄 12 남매

  남신 :

오케아노스(Oceanus, 대양), 코이오스(Coeus, 하늘 덮개), 휘페리온(Hyperion, 높은 곳을 달리는 자), 크리오스(Crius), 이아페토스(Iapetus), 크로노스(Cronos, 시간)
  여신 :

테이아(Thia), 레아(Rhea, 결실), 므네모쉬네(Mnemosyne, 기억), 포이베(Phoebe, 황금의 관), 테튀스(Tethys, 아름다운 자), 테미스(Themis, 이치)

퀴클롭스 3형제 : 브론테스(Brontes, 천둥), 스테로페스(Steropes, 번개), 아르게스(Arges, 벼락)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 :

코토스(Cottus, 돌진하는 자), 브리아레오스(Briareus, 강한 자), 기에스(Gyes, 손을 함부로 놀리는 자)


 모이라이 3여신
한편, 밤의 여신인 뉙스는 혼자의 힘으로 가이아 못지않게 많은 자식을 낳았다.
뉙스의 자식으로는 게라스(Geras, 노쇠), 타나토스(Thanatos, 죽음), 휘프로스(Hypnos, 잠), 모르페(악몽), 모모스(Momos, 비난), 오이튀스(고뇌), 필로테스(Philotes, 애욕), 에리스(Eris, 불화), 아바테(Apatis, 거짓말), 네메시스(Nemesis, 복수)가 있다.

우리가 죽음, 노쇠, 악몽, 고뇌…… 등을 두려워 하는 것도 이들이 밤의 여신의 자식인 까닭이다. 또한, 모이라이(Moerae, 운명)의 3여신도 뉙스의 여식들이다.

모이라이 3여신 :
클로토(베 짜는 여신), 라케시스(나눠 주는 여신), 아트로포스(거역 할 수 없는 여신)

모이라이 3여신 중에 아트로포스 여신은 그 어떤 신이라도 거스를 수 없는 신으로서 명계를 흐르는 강의 여신 스튁스와 더불어 무서운 여신 중에 하나다.
이 뉙스의 자식들 중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에게서 다시 전쟁, 논쟁, 기근, 싸움, 망각, 불법, 거짓말, 남자살해, 살인, 맹세, 불평, 폐허, 슬픔, 고생이 태어났다.

이렇게 하여 하늘과 땅이 정비되고 바야흐로 신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최초에 열린 세계를 지배하였던 신들은 티탄이었고, 신들의 절대자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가이아에게 통치권을 물려 받은 우라노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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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트라의 보물 니아스(NIAS)

 


   
시적인 바다, 울창한 열대림, 적적하리만치 조용한 해변, 아주 가끔 씩 해변의 울창한 야자수 사이로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망중한을 즐기려는 듯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만을 응시한 채 모닥불 옆에 앉아있는 이방인, 그리고 그 뒤로 높은 파도 위를 미끄러지며 환호하는 써퍼들의 구릿빛 얼굴과 하얗게 드러난 이...
일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한가로운 여유와 원시적인 낭만을 갖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더 없이 완벽한 조건을 지닌 곳.  그런가 하면 매년 여름 세계 최고수준의 파도타기 대회가 열려 세계각국의 선수들이 이곳의 원시적인 바다와 자연적인 환경에 매료되어 방문을 거듭하는 곳.
니아스는 인도네시아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수마트라의 북서쪽에 위치한 제주도 크기의 2.7배에 해당하는 조그만 섬으로서, 수마트라 주변의 섬들 중 가장 사랑 받는 이곳은 이미 발전 할대로 발전해버려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 발리섬이나 다른 알려진 많은 곳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원시에 가까울 정도로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형태가 많이 남아있다.
 
이곳은 과거에 농경사회로 안착한 타 지역과 달리 전통적으로 사냥과 부족간의 전쟁, 그리고 외국과의 무역에 의해 유지, 발전되어왔으며 철저한 계급사회로서 각 마을은 원칙적으로 원로회의에 의해 다스려져 왔다. 계급은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계급, 그리고 노예계급으로 나뉘어지며 때로는 전쟁에 패한 부족을 노예로 삼기도 하고 이들을 타 부족이나 외국으로까지 상품으로서 매매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한때는 이곳이 노예매매의 중심지로서 인기가 높아 17세기 중엽에는 포르투갈로 추정되는 유럽의 노예 구매기지가 설치되었고 화란 인들도 노예를 사기 위해 이곳에 빈번히 왕래하였던 기록도 아직 남아있다. 이들은 원래 매우 호전(好戰)적이라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며 한번 싸움에 접어들면 후퇴라는 것을 몰랐다.과거에는 전통적으로 마을과 마을단위, 또는 마을의 연합단위별로 수시로 전쟁을 벌여, 인간의 머리 사냥과 복수, 노예의 확보를 위한 끝없는 갈등을 빚으며 살아왔는데 당시 죽은 적들의 머리는 건물을 신축할 때 하나의 부적으로서 사용하기도 하고, 마을의 지도자를 사후(死後) 매장할 때 부장품으로서, 또한 처녀가 시집 갈 때 일종의 지참물로서 필수품처럼 사용되었던 웃지 못할 관습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관습은 19세기 초 네덜란드인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가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차츰 사라져 오늘날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나, 지금도 이들 마을에서는
그 당시 전쟁 때 사용했던 철로된 투구와 칼, 창과 방패 등이 방문자의 눈길을 끄는데 특히 칼은 그 생김새가 인간의 머리를 사냥하기에 알맞도록,  목을 자르기에 적합하도록 고안이 되어있어 느낌이 섬뜩할 정도다.
이에 맞서 목이 잘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야자나무로 만든 굵은 목걸이를 착용하고 싸웠는데 이 목걸이의 생김새는 그저 둥글고 굵은 커다란 링처럼 생겼다. 야자나무는 원체 질기고 돌멩이처럼 단단한 나무라서, 아무리 예리한 칼로 내리쳐도 칼이 나무에 박힐망정 목에 상처는 내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일반적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에 비해 이곳 니아스인들은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소 사납게 생긴 것이 사실이다. 이들의 종교는 원래 돌, 나무, 동물 등을 신봉하는 애니미즘과 조상숭배가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었으나, 이후 인도로부터 유입된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이들의 전통을 서서히 무너뜨리기 시작하였고, 19세기에 들어서 유럽 선교사들에 의해 강력하게 전해진 기독교 때문에 원주민의 생활양식이 일대 변혁이 일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은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북쪽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기독교를 믿으며 순화되고 있으나, 본래 성격이 과격하고 급한 탓에 금방 열을 올리는가 하면, 다음순간 서로 화해하는 것이 마치 한국사람(?)인 우리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니아스에서는 원주민들의 전통부락의 가옥형태가 대단히 특이하고 흥미로우며 과거에 있었던 부족간의 전투와 전통무용, 그리고 지도자의 담력과 능력을 가늠하거나 용맹스러운 전사를 선발하기 위해 시험대로 사용하였던 돌담 뛰어넘기 등의 관습이 방문객의 요청에 의해 실연되기도 하는데 반드시 볼 만하다.
 특히 돌담 뛰어 넘기는 높이가 2미터나 되고 위 부분의 너비가 50-60센티미터나 되는 돌담을 40미터 전방에서 달려오며 디딤돌을 한번 굴러 몸을 비틀면서 단 한번에 뛰어넘는데  이 멋진 장면은 인도네시아의 1000 루피아 짜리 지폐에도 나와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러한 관습을 지닌 전통마을들은 주로 중부와 남부의 여러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중 바오마탈루오, 헬리메타등 몇 개의 부락은 예전의 모습대로 비교적 잘 보존 되어있다.


니아스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은 써핑으로 유명한 라군드리(Lagundri)와 소라케(Sorake)비치로서 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울창한 야자 수림과 깨끗한 바닷물,조그만 카누를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들과 천진한 원주민 아이들의 노는 모습, 그리고 한적한 해변을 석양을 담뿍 안으며 연인과 함께 걷는 여행자의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계최고수준의 써핑 장소 중 하나로서 매년 6월 국제 써핑 대회가 열릴 정도로 풍부한 파도를 자랑하는 라군드리 비치에서는 대회가 끝나면 니아스의 전통적인 축제가 뒤를 잇는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 국으로부터 여기에 참여하려고 몰려들지만 이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싱그러운 파도소리만이 진정으로 때묻지 않은 곳을 경험하려는 이방인들을 조용히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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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향기에 취하는 도시 짤즈부르크


 
즈부르크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 대부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아니면 음악가 모차르트를 떠올릴 것이다. 이토록 낭만과 음악의 도시로서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도시는 과연 어떤 곳일까.
알프스의 맨 북쪽 끝자락, 오목한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짤즈부르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선 만년설 산을 배경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자그마한 이 도시의 아름다운 도시미에 반하게 된다. 도심에서 개울처럼 자그마한 짤자흐 강을 건너 구 시가지의 남쪽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엔짤즈부르크성은 중세의 향기를 풍기고 있고, 성당을 끼고 있는 광장의 노천 카페에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이중주가 생음악으로 연주되며 분수 옆에 앉아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의 가슴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여준다. 여행자들이 바쁘디 바쁜 도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편히 쉬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을 휴양지로 생각하는 이유는 이 도시의 차분하고 고전적이며, 음악적인 향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이 중부유럽에서는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도도하고 고집 세며 자존심 강한 도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지금도 '짤즈부르크 사람' 하면 비엔나를 비롯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한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전 유럽을 지배할 때도 이곳만은 마음대로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이곳을 다스리던 대주교는 당시, 군주대주교라고도 불리였을 정도로 종교상의 권위자일뿐만 아니라, 한 지역의 정치상의 군주이기도 했다. 대주교는 문자그대로 이곳의 수장으로서, 교회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다스려왔다. 수도인 비엔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짤즈부르크. 오죽하면 한 때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하려고 까지 했을까.


짤즈부르크는 직역하면 '소금의 성'이라는 뜻이다. 알프스는 수 천 만년 전 바다 밑바닥이 융기작용에 의해 위로 솟구쳐서 형성된 산악지대. 솟구칠 때 바닷물이 같이 따라 올라와 고인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굳어져 암염이 되었다. 짤즈부르크의 북쪽에는 거대한 암염이 존재하고 있었다. 짤즈부르크의 기원은 아이러니 하게도 소금을 채취해서 짤자흐 강을 따라 오는 배들을 해적 질 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룸으로서 형성되었다. 그 후 중세의 봉건시대에 들어 이웃 지방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소금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었고 이곳의 영주이자 대주교는 소금을 채취하여 나가는 상인들에게 염세(鹽稅)를 부과해 많은 부가 축적됨으로서  높은 곳에 요새처럼 성을 만들고는 귀족들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며 이곳을 다스려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곳 사람들은 그래서 지금도 바위소금을 먹는다. 맛은 바다 소금과 같지만 성분이 달라 몸에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서 별도로 진짜소금을 따로 섭취한다고 한다. 또한 해발 500미터의 높은 고도에 위치한 도시라서 기압이 낮기 때문에 혈압이 높은 사람이 살기에는 좋다고 한다. 고도로 인해 자주 현기증이 발생하므로 이곳 사람들은 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음식을 짜게 먹는다.
이 성은 호엔짤즈부르크라고 부르며 1070년경에 처음 건설되었고 그 후 1500년 초와 1700년대 후반의 두 번으로 나뉘어 개축, 확장되어, 중부 유럽에서는 가장 큰 성으로서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다. 당시에는 주교보다 높은 곳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성내의 옛날 집들에는 아직까지도 오리지널 짤즈부르크인 들이 실제 생활하고 있으며, 중세에 사용되었던 고문실과 고문도구, 그리고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성의 가운데의 조그만 광장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두 그루 있고 그 앞에 우물이 하나있는데, 후에 슈베르트는 이곳을 방문한 다음 비엔나로 돌아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작곡했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보았네..."
이 성은 밑에서 보기보다 꽤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위에 올라가면 짤즈부르크의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옴은 물론 뒤로는 알프스의 지붕들이 가슴에 몽땅 안길 듯이 다가온다. 짤자흐 강 건너 신시가지의 뒤에는 숲으로 우거진 높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 조그만 성당과 마을이 눈에 잡힌다. 이곳은 현재 성지로 보존되었는데, 중세 때 화재로 인해 마을의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으나, 마을 한 쪽에 세웠던 성모 마리아상만은 불에 그을리지도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성지로 보존하게 되었는데, 이 성당은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고, 나중에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게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짤즈부르크는 유네스코에 의해 유럽의 민속촌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바로 대주교의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 1756년 1월 27일 아버지 레오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의 사이에서 여섯 번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볼프강 아마데 모차르트'라고 자기 스스로 불리길 좋아했던 그의 두 번째 이름을 오늘날 우리는
'아마데우스'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 쪽이 리듬이 좋고 '볼프강'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말은 '신의 은총을 입어'라는 뜻인데, 과연 신은 그에게 은총과 천직을 내려주셨다. 아버지 레오폴트 역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자질이 돋보여 수도원의 성가대원이 되었고, 바이올린과 클라비어, 그리고 파이프오르간을 배웠다.  
모차르트의 집은 요즈음 '간판의 거리'라는 별명을 지닌 가장 번화한 거리 '게트라이데' 가 9번지 건물의 4층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레오폴트는 이곳에서 날마다 대성당의 소년들에게 바이올린을 교습하였다. 이것 역시 궁정의 악단으로서 하루의 일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들과 딸을 열심히 가르쳤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체력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자질의 두 아이(아마데우스와 누나인 마리아 안나)를 데리고 나가면 조그만 도시인 이곳에서는 대단한 평판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 마음은 레오폴트에게는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볼프강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녔고 1781년 비엔나에 정착하여 정신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기까지 19년 가운데 9년이라는 기간을 여행에 소비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내몰리고, 기대와 환멸을 번갈아 가며 맛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 넓은 세계의 예술을 익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고와 접하게 되었다. 그 동안 볼프강은 음악에 관계된 일일뿐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지시를 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들의 마음속에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하느님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아마데우스의 소년시절의 생각이었으며 레오폴트는 아마데우스의 생애를 지배하는 주인공이었다. 그는 여행 안내원, 흥행주 그리고 공연자와 매니저의 역할을 혼자서 담당했다. 항상 가까이 에서 아들의 발전을 지켜보며 오직 하나의 목적과 사명에만 전념했다.

볼프강은  다섯 살 때 짤즈부르크에서 가장 가까운 바이에른의 도시 뮌헨을 필두로 비엔나와 체코의 프라하, 파리와 이탈리아 등지로의 많은 연주여행을 시작한다. 그의 천재성은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뇌에서 나타나듯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열 살 때 이미 피아노 작곡을 시작했으며 열 세살 때 첫 오페라를 썼을 정도였다. 그는 당시의 음악장르를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했으며 생애의 모든 시기에 걸쳐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의 창작에 몰두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련되며 깊은 맛을 내는 그의 오페라는 중량감과 형식적 완성감이 더해져 간다. 그는 쉴 새없이 대본을 쓰고 곡을 붙여갔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형식에만 치우쳐 살았던 인물들에 극적인 독자성을 부여했으며 로렌초 다 폰테가 쓴 대본으로는 '코지 판 투테'와 '돈 지오반니'를 원작의 의도 이상으로 완성시킨다. 원래 '돈 지오반니'의 주제는 모든 한계를 무시하고 신비한 사랑을 파괴하는 방탕아의 잡스런 쾌락으로서, 기존의 '돈 환(돈 지오반니)'이 색마와 범죄자로 그려진 반면 모차르트는 그를 한 남자의 사랑을 구도의 절대성으로까지 상승시킨다. 이 '돈 지오반니'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프라하시민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된다.
모차르트는 또한 9살 때 이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생전에 그는 무려 53개의 완전한 교향곡과 11개의 단편을 남겼다. 이외에도 많은 교회음악과 미사곡, 그리고 장송곡을 남겼고, 주옥같은 피아노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모차르트에게 시련은 끝없이 찾아왔다. 자신을 아껴주고 음악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주교 지기스문트 대주교가 서거한 후 후임으로 짤즈부르크를 다스리게 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주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인색하고 고집스러우며 형식적인 사람이었다. 후에 결국 모차르트와 대주교는 결별하게 된다. 1782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버가의 둘째 딸 코스탄체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언니인 알로이지아를 사랑했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바램이기도 했던, 부자로 한평생 살고 싶어했던 뜻마저 이루지 못한 채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 비엔나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35세였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아내인 콘스탄체와 친구 3, 4명이 고작이었다. 12월 6일 오후, 그의 주검은 콘스탄체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발인하여 콘스탄체와 혼례를 거행했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최후의 성수를 맞은 뒤 공동묘지로 향했다. 모진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묘지까지 운구마차를 따라간 것은 개 한 마리뿐이었다고 한다. 불운한 천재 모차르트는 결국 천민들이 한꺼번에 묻히는 공동묘지에서 최후의 안식처를 찾았다. 오히려, 남의 나라인 체코의 프라하 시민들이 모차르트의 죽음을 더 슬퍼하여 12월 8일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인파가 프라하 시내의 성 니콜라스 성당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미사를 거행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어쨌든 콘스탄체는 그로부터 7년 후 동거했던 남자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망부의 묘에 참배하려고 했지만 묻힌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그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게트라이데의 좁은 골목은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로 넘쳐 난다. 골목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골목이 중첩되어 중간 중간에 성문처럼 통로가 연결되어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오히려 생동감 넘치고 구 시가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게트라이데 거리는 호엔짤즈부르크 성으로 이어지며 성채가 있는 언덕 바로 밑에 카피텔 광장이 있고 한쪽에 대성당이 놓여있다. 광장 주위에는 많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데, 어떤 카페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아련한 추억의 그 날로 되돌린다. 그 옆에는 움직이는 대리석 조각이 하나 서있었다. 이것은 사실은 석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하얀 분칠을 하고 마치 조각처럼 꿈쩍 않고 서 있다가 앞에 놓은 동전바구니에 동전 몇 닢을 떨어뜨리면 그 답례로 포즈를 다르게 바꾸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흥미롭게 쳐다보며 즐거워한다. 광장의 가운데는 모차르트의 동상이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서있는데 아마도 건너편의 카페에서 연주하는 자신의 음악이 반음 높은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것 같았다.

짤즈부르크의 메인 콘서트홀인 '축제극장'에서는 매년 7,8월이 되면 음악제가 열리며 하루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음악회와 오페라 등 공연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슈타츠라는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들어 서게 되면 미라벨 정원이 나타난다.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 무대이기도 했던 이 정원에는 현재의 주교가 살고 있는 건물과 기하학적으로 가꾸어놓은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면 호엔짤즈부르크성의 모습이 정원과 잘 조화된다. 오늘 저녁도 카피텔 광장의 카페에서는 어김없이 스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과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지크'가 연주될 것이다. 짤즈부르크는 비운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빛나는 음악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영원한 음악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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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6-2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꼭 가고 싶은 곳입니다...... 미라벨 궁, 사운드 오브 뮤직......

꼬마요정 2004-06-2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고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