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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장이 스머프에 대한 고찰


"개구장이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두 번째 계획은 스머프를 잡아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을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이상으로 우리들의 어린시절에 즐겨보았던 "개구장이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를 짧게 분석해 보았다. 그렇다면 스머프를 창조해낸 사람은 사회주의자였나...?


스머프는 피에르 컬리포드 (Pierre Culliford), 일명 페요 (Peyo) 라는 벨기에 작가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페요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이것은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고 볼 수 있다.


만화영화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 외에도 스머페트와 관련된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수 있고, 또한 유일한 여자였던 스머페트와 사세트를 제외하고는 스머프 마을의 구성원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에 근거한 "동성애"적인 고찰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도록 하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Peyo는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만화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출처: 한겨례 하니유머 베스트 유머(?)란.(왕 추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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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유산 앙코르(ANGKOR)의 유적을 찾아


  
코르의 유적을 보기 위해 시엠립 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하는 여행자는 이곳이 과연 연간 백만의 관광객을 수용하는 국제공항일까 할 정도로 작고 초라한 청사의 모습에 다소 의아하게 된다. 일년 내내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공항 내에는 단 한 개의 작은 에어컨조차 찾아볼 수 없고 커다란 선풍기 두어대 정도만이 붕붕 소리 내며 무더운 바람을 되새김 질 할 뿐이다. 자국 내 캄보디아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여행자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소위 어라이벌비자(Arrival Visa)라 불리는 입국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데, 따라서 비자가 발급되는 반 시간 동안은 별수 없이 공항의 무더움을 인내하는 훈련부터 감수해야 한다. 물론 그 흔한 컴퓨터 한 대 갖추지 않은 공항인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캄보디아의 경제적인 현주소는 공항에서부터 웅변해준다.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를 연상케 한다.


시엠립은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약 330km 떨어진 작은 도시이다. 이곳의 원주민은 약 6만명 정도.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연간 백만이상이 된다고 한다. 시엠립이라는 말은 100여년 전 현재 태국의 시암족이 앙코르를 침공했을 때 용감히 싸워 이민족을 물리친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것으로서, 시엠립은 '시암족을 물리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곳의 주민들은 원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관광이 개방된 1993년도 이후부터는 80%가량이 관광업에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앙코르 유적군이 있는 지역은 완전한 평지처럼 보이는 거대한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는 지역으로서, 해발 150미터 정도되는 언덕 위에 조성된 프놈바껭 사원 이외의 모든 유적은 평지에 조성되어있다. 앙코르는 800년경 자야바르만 왕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기 전, 그러니까 6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현재 라오스의 남부지역 참파삭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그곳에는 그 옛날 크메르인들이 힌두교를 받아들여 시바신을 숭앙하며 둥지를 틀고 도시국가를 건설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크메르인들은 이곳으로부터 남하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현재의 앙코르 유적이 있는 곳에서 왕성한 왕국을 이루게 된다.
이곳은 또한 800년대 초부터 이곳은 무역의 인도차이나 반도의 무역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있으면서 많은 상인들이 오가다 장시간 머물게 되었고, 상업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앙코르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근에 동남아에서 가장 큰 호수 '톤레삽'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앙코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도읍을 뜻한다. 앙코르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앙코르톰'이라는 지역을 들어가야 하는데, 앙코르는 도읍(都邑)을 뜻하고 '톰'은 '크다'는 뜻을 나타내므로 직역하면 대도시 혹은 대왕도(大王都)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도읍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 경 왕국의 수도로서 조성한 것으로서 각 변의 길이가 3km에 달하는 정사각형의 모양을 성벽이 둘러싸고 그 중앙에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바이욘 사원을 높이 건축하였으며 동서남북으로는 2개의 추축대로가 도시를 4분하게 하도록 하였다. 두 추축이 성벽과 만나는 지점에는 왕도의 문이 4개, 그리고 왕궁에서 동쪽으로 뻗은 대로 위에 1개로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 5개의  문은 앞면에 커다란 뱀을 껴안은 거인 석상의 열을 난간으로 한 다리를 끼고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탑문으로 되어있는데, 중앙의 바이욘 사원은 그보다 반세기 전에 조성된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문화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돋보인다.


앙코르 왕국의 초기인 8세기에는 앞서 받아들인 힌두교를 중심으로 사원과 주요 건축물들이 조성되었으나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앙코르의 역사상 이 자야바르만 7세가 통치하던 12세기와 13세기가 가장 전성기로서 번영과 풍요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인구는 100만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숫자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닐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암족, 참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하고, 더구나 왕실 내에 현재의 나병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 때문에 크메르인들은 이곳을 버리고 타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사실, 그토록 융성했던 앙코르 왕국이 왜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갑자기 정글 속으로 몇 백년동안이나 사라져 잊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확실한 해답이 없는 상태이지만, 시암(Siam)족 등 외세의 침입에 의한 멸망이라기 보다는 앞서 언급한 전염병의 창궐 때문이라는 설이 한층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프랑스의 탐험가에 의해 1860년 발견될 때까지 이 거대한 유적군은 수 백년간 정글에 파묻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1856년부터 1953년까지 거의 100년간 프랑스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게 됨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수 백년간 숲속에 파묻혔었다는 증거는 타쁘롬이라는 사원에 가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마치 석조의 유적들이 거대한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 감기고 덮여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모든 영화가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또한 느끼게 한다.

아무튼, 앙코르 문화의 초기인 9세기와 10세기의 건축물에는 벽돌문화가 도입되었고 11세기 초기에 이르러 석조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주로 사용된 돌로는 사암(沙岩)과 수성암(水性岩)이었다. 사암은 황토색과 분홍색 등 파스텔 색상의 돌로서 부드러워 조각하기 쉽고 습기에 강하므로 외벽의 정교한 조각을 하는데 많이 애용되었으며, 수성암은 매우 부드럽지만 일단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매우 단단해 지는 특성이 있으므로, 기초나 장식이 필요치 않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12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이 위에 목조문화가 첨가됨으로서 보다 완벽하게 예술성이 가미된 구조물을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목조 기둥과 장식물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것들을 받치거나 고정했던 구멍들만이 돌 위에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암은 이곳으로부터 약 60km 떨어진 프롬끌렌 산으로부터 톤레삽 호수에 뗏목을 띄워 운반하였고, 평지에서는 통나무를 바퀴 삼아 코끼리로 하여금 끌어 운반하여 현장에서 가공하여 축조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암의 조형물과 건축물에는 일절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사암의 조형물 중 걸작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지어진 바이욘 사원으로서, 1281년에 완공된 불교사원을 들 수 있다. 이 사원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으로 앙코르톰의 각 변에서 정확히 1.5km 지점의 정 중앙에 주 탑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54개의 주탑(主塔)이 있었으나 현재는 37개만이 남아있다. 특이한 점은 하나의 거대한 완성품을 위해 쌓아진 돌의 규격이 모두 틀리다는 점이다. 돌들은 접착제 없이 모두 지그재그로 쌓아져 있는데, 돌과 돌 사이에 원래는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조립되었고,
그 후에 조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교하게 쌓았었다는 증거는 역사적인 연대가 이를 증명한다. 만일 틈이 있었다면 그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공기가 들어가게 됨으로써, 따라서 자연히 이끼가 끼고 벌레가 들어가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틈이 더욱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800여년 이라는 세월동안 이렇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주탑(主塔)으로 오르는 계단들은 무척 가파르고 보폭이 좁게 건축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오르내리게 하기 위한 계단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계단이라는 의미로서 신을 연결하는 계단이라는 의미로 설계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얼듯 보면 힌두교의 신들의 조각들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이욘사원이 불교사원이라는 것은 다시말하면 앙코르의 유적은 불교와 힌두교, 또는 반대로 힌두교에 불교가 가미된 그러한 믹스된 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거의 모든 앙코르의 유적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아무튼 앙코르의 유적 중 자야바르만 7세의 40년 재임기간 중 가장 많은 불교사원이 지어지게 되었다.


앙코르톰의 남문을 나와 1.5km를 내려가면 앙코르의 유적 중 가장 거대한 유적, 세계적인 불가사의라 불리는 앙코르와트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은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7년간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사원이나 궁전을 조성할 때는 풍수지리적인 방향을 무척 까다롭게 따져보았는데, 동쪽은 창조를 뜻하고 서쪽은 죽음을 의미하며, 남쪽은 자연을 나타내고 북쪽은 희망을 상징했다. 북쪽이 희망을 상징하는 이유는, 당시 앙코르의 숭앙의 대상이 되었던 시바신이 살고 있는 곳이 히말라야의 최고봉인 칼리아사 산(우리말로는 수미산이라 한다)이고, 이 영산은 캄보디아를 기점으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모든 사원은 창조나 자연을 나타내는 동쪽 혹은 남쪽으로 정문을 내는 것이 관례화 되어있었지만, 앙코르와트는 유일하게 죽음을 나타내는 서쪽에 정문을 냈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것은 당시 왕의 권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왕은 신과 동격이었고 신으로 불리었으며, 죽어서도 왕이고 싶은 사후의 사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왕의 기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의 이름 수리야바르만을 보면, 수리야는 힌두교의 태양신 '수르야'를 바르만은 '나중의 보호자'라는 의미로서, 당시의 왕은 자신의 이름대신 수리야바르만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격화된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서쪽 정문으로만 유일하게 석조의 다리를 놓은 것이 앙코르와트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리의 전면 양쪽으로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득도했다는 뜻의 상징적인 보리수가 두 그루 놓여 있다. 사실 이 사원은 원래 힌두 사원으로서, 힌두교의 신 비슈누와 자신의 합일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힌두 사원이었으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이 신상들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으로서 얼핏 보면 힌두 사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건축양식과 부조, 그리고 건물을 치장한 장식들은 완벽한 힌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 m 남북 1,300 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 m의 해자를 건너면 3개의 탑(塔)과 함께 날개모양의 회랑이 있으며,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길을 따라 470 m쯤 가면 사원의 본전에 다다르게 된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 m)이 4m, 제2회랑(115×100 m)이 12m, 제3회랑(60×60 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 즉 시바의 산 카일라사는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 m의 중앙 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건축양식은 얼핏 보면 인도의 영향을 받아들여 지어진 듯이 보이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 760 m에 이르는 제1회랑 벽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 압사라와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코브라, 그리고 마치 주판알을 붙여 놓은 듯 한 창문 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 밤에는 폴포트의 크메르루주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약탈로 인해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 난 채 나뒹굴고 나중에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어버렸다. 82년 집계에 의하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 %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혹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인도의 건축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유네스코에서 모든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사실 캄보디아의 국민들은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암울하고 뼈아픈 상처를 가진 민족이라 볼 수 있다.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캄보디아는 식민지시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미처 찾아 정비하기도 전인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테타를 일으킨 론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엇다. 당시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시하누크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시하누크는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론놀을 몰아내기 위해 크메르루주의 폴포트와 손을 잡게 된다. 하지만 시하누크는 외국에 있고 캄보디아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은 주공의 명에 따라 폴포트에 적극 협조함으로서 궁극적으로 75년에 론놀을 축출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자연히 실권은 폴포트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고, 시하누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 '루주'는 붉은 색을 의미하므로 크메르루주는 붉은 크메르군이라는 뜻이 된다. 아무튼 정권을 장악한 폴포트는 캄보디아를 명실 공히 자신의 수중에서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비롯한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킬링필드라 불리는 시절 15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로 사라져갔다. 단 한마디의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혹은 단지 안경을 쓴 모습이 지식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예외없이 죽어갔다. 이를 보다 못한 시하누크는 이번에는 하는 수없이 베트남의 호치민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호치민은 이를 수락하여 월맹군을 급파하여 크메르루주와 대항하게 되었다.
1979년 결국 폴포트의 군대는 북쪽 정글 속으로 물러나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이번에는 월맹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20년 가까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1986년 유엔의 개입으로 월맹군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오랜 내전과 많은 지식인의 학살로 생활은 궁핍할 때로 궁핍해지고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게 되었다. 1993년부터 관광이 개방되고 외국의 자본이 유입되면서, 실낱같은 희망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월맹군에 의해 매설된 수많은 지뢰로 인해 많은 농민과 아이들이 장애자로 바뀌고 있으며,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짓게 한다. 아직도 이들의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이곳의 아동병원이나 사원들의 입구에는 이러한 지뢰에 희생되어 팔과 다리를 잃은 아이들의 불쌍한 모습이 눈에 띄어 가슴을 메이게 한다.


쁘레아칸 사원 역시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조성된 불교사원으로, 쁘레아칸은 '신성한 도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이전 앙코르제국을 창시했던 자야바르만 2세가 신비한 효험을 지닌 보검을 지니고 있던 것을 자손인 자야바르만 7세가 이곳에 보관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이 사원은 특히 다른 보통 사원들과는 달리 앙코르톰이 외세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도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서 넓은 부지와 견고한 회랑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곳의 보검과 주요 유물들은 1860년 프랑스인에 의해 발견되면서 대부분 도굴되어 버린 듯 하다.
앙코르 왕조의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왕의 이름은 자야바르만 7세로, 그는 최초로 불교를 도입하였으며, 사원을 많이 지었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극대화 함으로써 역대 왕 중에서 백성들이 숭배하는 유일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팔 걷어 부치고 이 말을 음미해보면 이렇게 많은 사원들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필요했었을까. 즉 얼마나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왕의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폭정에 시달렸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자야바르만 7세가 다른 왕들보다도 폭군이 아니었을까하는 다소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 혼자 뿐일까.

앙코르에는 유적이 많다. 수정이라는 뜻을 가진 따께오 사원은 언뜻 보면 경주의 다보탑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부의 벽에 부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에서는 앙코르의 대부분 조각들이 조각을 먼저하고 쌓은 것이 아니라 벽돌이나 돌을 먼저 쌓은 다음 조각을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몇 개의 부분적인 유적밖에 남아있지 않은 바푸온 사원은 11세기 중반 유다야티다야 왕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사암과 벽돌, 그리고 수성암이 혼합된 앙코르 문화의 전형적인 중기의 사원이다. 피메나카스 사원은 뱀의 여인에게 바쳐진 사원으로서, 대부분 수성암으로 지어진 초기의 앙코르문화를 대변한다.
1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외벽에는 정교한 조각이 없고, 평범한 돔과 붉은 색의 수성암, 그리고 검은 색의 사암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탑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밤이 되면 아리따운 여인으로 둔갑하는 이 뱀의 여인은 왕이 아내와 동침하러 가기 전에 반드시 들러서 자신과 동침하지 않으면 죽음의 저주를 내리는 무서운 신이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는 용(龍)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여기의 뱀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바로 그 용을 상징하는 것인데, 용은 신이고, 따라서 왕의 몸에는 항상 신성한 신의 피가 흐른다는 의미로서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니핀 사원의 경우, 규모는 작지만 히말라야의 정상인 수미산(카일라사)과 그 밑에 있는 아나바타파 호수를 의미하는 우주의 정상과 치료에 효험있는 신비한 온천수가 4대 강으로 흘러내려가 네 개의 호수를 이루고 있는 구조의 형태로서 미래의 부처인 아미타불의 형상을 수사학적으로 해석하여 조성해 놓은 사원으로, 중앙의 탑은 수미산을 나타내고 주위의 호수 4곳은 바로 그 4대강으로부터 흘러내려 만들어진 삼라만상의 호수를 의미한다. 다른 사원들과는 판이한 색다른 구조의 형태로서, 우기 철에는 물에 잠기게 되어 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인 '닉핀'은 또아리를 튼 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들의 법에 의하면 법장 보살은 과거의 부처이고 석가모니는 현재의 부처이며 아미타불은 미래의 부처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말의 석상은 미래의 부처인 아미타가 물에 빠진 상인들을 구하기 위해 변신했던 말 '발라하'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람 석상은 보살을 의미하며, 사자는 보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앙코르의 유적들이 여행자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앙코르의 유적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스케일면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비록 오랜 세월 방치되고, 상당부분 도굴당하고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앙코르의 유적은 과거의 웅장함과 영광을 말없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유일한 언덕인 쁘놈바껭 사원에서 동쪽의 앙코르와트와 서쪽의 지는 해를 동시에 바라보면, 한때를 풍미했던 모든 영광과 권력도 결국은 덧없는 한 순간의 꿈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된다.

이정식,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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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도 이제 끝나간다... 말도 많고 일도 많았던 그 한 달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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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들렌느

    

 

   
 재료(단위g)

    계란                          100

    설탕                          100

    물엿                            15

    박력분                       100

 

 

베이킹파우더                   4

생크림                            40

버터                               40

크림치즈                        80

마들렌 철판

 

   
 만들기

1. 마들렌 철판을 준비하여 버터를 바르고 밀가루를 묻혀 털어낸다.

2. 볼에 생크림을 넣고  40℃로 끓인 후에 부드럽게 푼 크림치즈를 넣고 섞어준다.

3. 다른볼에 계란, 설탕, 물엿을 넣고 중탕(40℃) 하여 60%정도 믹싱한다.

4. 2),3)을 혼합한다.

5. 체친 박력분과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혼합한다.

6. 완성된 반죽을 30분 정도 휴지한다.

7. 준비된 마들렌 틀에 짤주머니에 반죽을 넣고 80% 정도 짜준다.

8. 굽기 : 200℃  8분

9. 물 100, 설탕 200을 끓여 냉각 후, 럼을 넣은 시럽을 만들어 구워낸 마들렌을 담근다.


 
 
알아두세요

1. 오븐은 항상 예열한 후에 사용하세요.

2. 반죽에 레몬피를 갈아 넣으면 맛이 좋아요. 기호에 맞아야 되겠죠?

3. 마들렌 틀이 아니어도 됩니다.

4. 시럽에 담가 두어 숙성 시켜 드시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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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rim > 할 수 있다구~!

오늘은 계속 추억의 사진전이로구나;;;;
(좀 고만 써먹지 그래.. -_-;;;)

몇번씩 떨어졌으면서도 결국 행거위에 오르고만 몽이...
저 위풍당당한 표정이란.....
다시 봐도 멋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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