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감호(金現感虎)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
이 이야기는 '수이전'에 '호원(虎願)'으로 실렸던 것이 '대동운부군옥'에 전재되어 전한다. 호원사라는 절의 연기설화 역할도 하는 이 이야기는 호랑이가 등장하는 많은 설화 중의 하나이면서 소위 '변신형 설화'에 해당한다. 이 설화는 호랑이와 인간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이다. 이 설화가 나오게 된 동기에 대하여는 당시 호랑이가 많이 나타나서 사람을 해치자 호랑이에 대한 피해를 막아 달라고 절을 세우고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리고 호랑이는 죽음으로써 상대를 출세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호랑이답지 않은 이 행동은 불가능한 조건을 무릅쓰고라도 사랑을 옹호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최자의 '보한집'에 '호랑이와 승려'라는 내용으로 실려 있다. 서정주는 이를 바탕으로 '암호랑이와 함께 탑돌이를 하다가'라는 시를 썼다. |
신라 풍속에 음력 2월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청춘 남녀가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복을 비는 습관이 있었다. 원성왕 때 김현(金現)이란 청년이 밤늦게 탑을 돌다가 거기서 한 처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김현이 그 처녀의 뒤를 따라가니, 처녀는 서산 기슭에 있는 한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한 노파가 있다가 처녀에게 물었다.
"널 뒤따라온 이가 누구냐?"
처녀는 밖에서 있었던 사정을 다 얘기했다. 처녀의 얘기를 듣고 노파가 말했다.
"비록 좋은 일이라 하나 차라리 없었던 게 나았구나.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 어쩔 수 없다. 아무도 모를 곳에 잘 숨겨 주어라. 너의 형제들이 돌아오면 나쁜 짓을 할까 두렵구나."
처녀는 김현을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조금 있노라니 세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면서 오두막집으로 들어왔다.
"집 안에서 비린내가 나는데, 마침 시장하던 참이라 요기하기 꼭 좋구나."
노파와 처녀는 꾸짖으며 말했다.
"너희들 코는 어떻게 되었느냐? 무슨 그런 미친 소리들을 해대지?"
그때 하늘의 울림이 들려 왔다.
"너희들이 즐겨 많은 생명을 해치고 있으니 마땅히 너희들 중 한 놈을 베어 그 악을 징계하리라."
세 호랑이들은 이 하늘의 울림을 듣고는 풀이 죽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처녀가 그들에게 말했다.
"세 분 오빠가 만일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징계하겠다면, 제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세 호랑이는 모두 기뻐하며 머리를 숙이고 느슨히 꼬리를 낮추고선 달아나 버렸다. 처녀는 김현이 숨어 있는 데로 들어와 말했다.
"당초 저는 도련님이 저희 집으로 오시는 것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오시지 말도록 말렸던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이미 드러나 버렸으니 저의 내심을 말씀드리겠어요.이 몸이 도련님과 비록 유는 다르나 하루 저녁을 모셔 즐거움을 얻었던 것은 부부로서의 결합만큼이나 소중한 것입니다. 저의 세 오빠의 죄악을 하느님이 미워하여 이미 벌하려 하시니 집안의 재앙을 제 한 몸으로 감당하려 합니다. 이왕 죽을 몸일 바엔 도련님의 칼 아래 죽음으로써 소중한 은원에 보답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제가 내일 거리에 들어가 한바탕 소동을 부리며 돌아다니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님은 필경 많은 상금과 벼슬을 내걸고 저를 잡을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 그럴 때 도련님은 조금도 겁내지 마시고 도성 북쪽의 숲속으로 저를 추격해 오십시오. 거기서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김현이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교합하는 것은 인륜의 평범한 도리이지만 사람이 아닌 다른 유인데도 교합하게 되는 것은 보통이 일이 아니다. 이미 그대와 교합을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하늘이 정한 분복이라.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요행으로 한 세상의 벼슬을 구할 수 있겠느냐?"
처녀가 또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그런 말씀일랑 마십시오. 지금 제가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은 하늘의 명이요, 또한 저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련임의 경사요, 저희 일족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번 죽으매 이렇게 다섯 가지 이로운 점이 갖추어지는 데야 피할 이유가 있습니까? 다만 저를 위해 절을 세우고 불경을 강하여 좋은 업보를 빌어주시면 도련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둘은 울면서 헤어졌다.
다음날 과연 한 마리 맹호가 서울 성 안에 들어왔는데 그 사나움이 어찌나 심했던지 아무도 감당할 자가 없었다. 원성왕은 그 보고를 받고 포고령을 발표했다.
"호랑이를 잡아 죽이는 자는 관직 2급을 주리라."
이 포고령을 듣고 김현은 대궐로 나아가 자신이 그 맹호를 잡아 오겠노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단도를 들고 처녀가 알려준 도성 북쪽의 숲으로 들어갔다. 호랑이는 처녀로 변해 있었다.
"어젯밤 도련님게 드렸던 저의 간곡한 사연을 도련님은 잊지 않으셨군요. 오늘 저의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흥륜사의 간장을 찍어 바르게 하고 그 절의 나발 소리를 들려주면 상처가 나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처녀는 김현이 차고 있는 단도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졌다. 넘어진 것은 한 마리의 호랑이었다. 김현은 숲에서 나와 지금 그 호랑이를 잡았다고 외쳤다. 그리고 처녀가 가르쳐준 처방대로 하니 다친 사람들이 다 나았다.
김현은 등용된 뒤에 서천 가에다 절을 세우고 호원사라 불렀다. 그리고 항상 '법망경'을 강하여 그 호랑이의 명복을 빌고, 동시에 호랑이가 제 몸을 죽여 김현 자기를 출세시킨 그 은혜에 보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