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rim > [퍼온글] [펌] 7월 3일, 내 이름은 김선일입니다

제목    7월3일, 내 이름은 김선일입니다
  글쓴이 imKSI 글쓴날 2004-07-02 02:48:04 조회 93

7월 3일(토) 전국적인 故 김선일 씨 추모식이 
단순한 추모식으로만 정리된다거나, 
계속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파병철회를 눈물 흘리면서 빌거나,
말단들이 다 뒤집어 쓰게 될 진상규명만을 외쳐선 안됩니다.
모든 책임을 오로지 부시에게만 떠넘기는 집회가 되어선 안됩니다.

고인의 유언은 
"한국군은 이라크를 떠나라"였습니다.
"파병은 노무현 당신의 실수이다" 였습니다.
가족들에게조차 유언을 남기지 못할만큼,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파병을 철회해서 자신을 살려달라는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7월 3일, 토요일... 추모 집회에 있을 우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김선일 입니다.

나도 살고 싶습니다 !

두려움 없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싶습니다.
테러방지의 미명하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압살되고 싶지 않습니다.

부시의 재선을 위해서, 
미국에 빌붙어 이라크에서 돈좀 벌어보고 싶어하는 부자들을 위해서
부시와 재벌들에게 잘 보이려고 파병을 주도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한나라당 정치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서

없이 사는 우리, 서민들이 대신 전쟁에서 죽어줄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내 목숨을
저들에게 양도할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양도하도록 강요하는 사람은 
대통령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7월 3일 토요일, 故 김선일 씨 추모 집회에선, 
순진하게 파병철회를 눈물 흘리며 빌어선 안됩니다.
결국 말단이 몽땅  뒤집어 쓰게 될, 뻔한 진상규명만을 외쳐선 안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책임자에서 책임추궁자로 졸지에 위치 바꿔주는 겁니다
한국 땅에 없는 부시만을 탄핵하자고 공허하게 외쳐선 안됩니다.
더이상 그렇게만 외쳐선 안될 시점에 왔습니다..  

결국,누가 김선일 씨를 죽인 겁니까? 
잘못된 파병결정 때문에
한 국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파병재천명을 누가 했습니까?
그리고 그런 노무현에게 누가 박수쳤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끝까지 국민에게 저항하고, 국민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면,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7월3일 토요일엔, 우리 모두 김선일이 되어야 합니다. 

파병 강행을 하면, 노무현 당신을 퇴진시키겠다고 외쳐야 합니다.

집회 지도부가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 때문에
우리를 다른 구호로 이끌려고 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집회 지도부의 통제를 무시하고, 
[ 파병강행 노무현 퇴진 ] 을 외쳐야 합니다 !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해 두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생명과 안전을 지킬려면, 파병 최종 결정자인 
노무현 대통령에게  빌어야겠습니까? 선택하도록 강제해야겠습니까?

내 이름은 김선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주인 중에 하나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파병철회와 한군군 철수를 호소였지만,
노무현 정부는 냉정하게 뿌리쳤습니다. 
이제 더이상 빌지 않겠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요구하겠습니니다.
주권자로서 파병철회냐 퇴진이냐를 선택하도록 만들겠습니다.

7월 3일,전국 방방곡곡 거리에서 
우리도 한번 전쟁세력에게 승리하는 위대한 꿈을 꾸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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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uperfrog > [퍼온글] 과장된 슬픔, 또는 대면하는 척 외면하기

과장된 슬픔, 또는 대면하는 척 외면하기 /변정수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에 전혀 상반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적어도 그 슬픔의 표현에서만큼은 어떤 정치적 차이도 무화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차라리 누가 더 슬퍼하며, 심지어 누가 더 진정으로 슬퍼하는지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면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누군가의 실존적 부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기실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다. 그래서 지구 반 바퀴 너머에서 한 젊은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언필칭 '비보(悲報)'임에 틀림없다. 그 죽음이 슬픈 까닭은, 그가 '무고하게' 죽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참혹하게' 살해당했기 때문도 아니며 심지어 '얼마든지 살릴 수도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의 현실감이 슬픔이라는 정서로 표현되는 것이다.

국상(國喪)을 방불케 하는 그야말로 '전국민적인' 비통과 애도의 물결이 내게 적지 않은 당혹과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그 죽음 자체가 개별적인 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혹시나 망자와의 기억을 상당 부분 공유하는 '가족'들이나 '불알친구'들의 또래 집단이라면 모를까, 도무지 '함께 슬퍼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아니 심지어 가족이나 불알친구라 해도 그에 속한 각자에게 고유한 기억이 있을 터이므로 각자가 느끼는 망자의 부재감은 철저하게 개별적인 영역에 있다. 하물며 김선일씨라는 개인과 일면식조차 없었던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슬퍼한다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어디에선가는 '얼마든지 살릴 수도 있는' '무고한' 사람들이 심지어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죽음에 한결같은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알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 부재가 새삼스럽게 슬픔으로 다가올 까닭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생전의 김선일씨와 교분은커녕 면식조차 없었던 이 수많은 사람들 또한 적어도 그가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김선일이라는 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슬퍼하도록 하는 것일까.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을 마치 잘 알던 사람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래서인지 슬픔의 표현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망자와의 크고 작은 공통점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논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감정이입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려는 흔적이 쉽게 발견된다. 그리고 격한 슬픔의 정서를 과장하는 표현일수록 제시된 공통점이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양 절대적인 근거로 설정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김선일씨가 죽었다면 나 또한 똑같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당신이 이라크에서 인질로 잡혀 살해당할 가능성,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그 주체가 누구이건 간에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전쟁에 휩쓸려 비무장 민간인 희생자의 한 사람이 될 가능성은, 지금 당장 집 앞 골목을 지나다가 공연히 시비를 걸어오는 깡패를 피하지 못해 날벼락 맞듯 살해당할 가능성이나 고층 아파트 밑을 우연히 지나가다 20층 높이에서 고의로 내던진 물건에 깔려 생명을 잃을 가능성, 또는 적절한 치료만 받으면 얼마든지 완치될 수 있는 질병에 걸리고도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보다 낮다. 그래도 우리는 거의 매일 밤 뉴스에서 이런 어이없는 죽음의 소식을 접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가해자를 욕할지언정 피해자를 위해 슬퍼하지는 않는다. 유독 김선일씨의 죽음만 '다름 아닌 자신의 일'이 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가.

아니 좀더 정직해지자. 당신이 윤리적으로 매우 고매한 사람이어서 이 모든 죽음들, 적어도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생리적 수명이 다하기 전에 맞이해야 하는(즉 크건 작건 사회적 책임을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책임을 나누어야 할) 모든 죽음들에 대하여 언제나 한결같이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하자. 아마도 당신은 존경할 만한 사회운동가나 종교인이 되기 전에 노이로제에 걸려 정신과적 치료를 먼저 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특별히 무감각하거나 무책임하지 않은 지극히 평균적인 수준의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갑남을녀들이 이 수많은 '무고하고,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죽음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까닭일 터이다.

물론 나는 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슬프지 않은 데도 슬픈 척하는 것뿐이라고 매도할 의사는 전혀 없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애통해한다는 것을 나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궁금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유독 김선일씨의 죽음을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등가인 다른 숱한 죽음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도록 하는가. 게다가 존재하던 누군가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죽음 앞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라면, 모든 죽음은 심지어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사형 집행조차도 실존적으로는 등가(사람의 목숨 값에는 차등이 없다!)라는 점은 다시 상기되어야 한다.

가능한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이것은 김선일이라는 개인의 부재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 수많은 '추모'객들은 김선일이라는 개인을 알지도 못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건 망자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 심리적 투사일 뿐이며 그러한 점에서 이 모든 슬픔은 '정치적'이다. 즉 개인 김선일의 죽음이 아니라 '정치적인 나'의 죽음인 것이다. 물론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과 예컨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살릴 수도 있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낙후한 의료보장 체제는 '정치적'으로 등가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이라크전쟁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에 전혀 상반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적어도 그 슬픔의 표현에서만큼은 어떤 정치적 차이도 무화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차라리 누가 더 슬퍼하며, 심지어 누가 더 진정으로 슬퍼하는지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게 과잉된 슬픔의 행렬 속에 정작 서른 두 해 동안 이 세상에 존재했다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 개인 김선일의 자리는 사라지고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는 '집단'에 의해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호명된 추상적 상징으로서의 김선일'들'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모든 상제례가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기는 해도, 비통과 애도가 '전국민적으로' 흘러 넘치는 자리에서조차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정작 망자의 실존적 부재가 '소외'된다는 것은, 그 어떤 '정당한' 명분을 끌어댄다 해도 기실 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죽음의 개별성을 실존적으로 대면하지 않은 채로(기실 그럴 방법도 없지만) 마치 대면하고 있는 양 슬픔의 정서를 제의(祭儀)화하는 것은 오히려 죽음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치적' 욕망은, 비겁하게 망자에게 투사시킬 일이 아니라 정직하게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정치적 견해를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해 '파병 반대'의 머리띠를 두를지언정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다는 것을 사양한다. 당장 '무고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가는 절박한 사회적 의제들에 책임 있는 관심을 가지고 적절한 실천을 모색하고자 하는 한편으로 그 피해자들을 위해 일년 내내, 하루 이십사시간을 비통해하지는 못하듯이.

출처: http://www.cultiz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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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개구장이 스머프에 대한 고찰

개구장이 스머프에 대한 고찰


"개구장이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스머프 마을은 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완전히 독립적이며 토지는 개인이 아닌 전공동체의 소유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라기 보다는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다만 그의 나이와 지혜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그는 칼 막스처럼 수염을 길렀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의 캐리커쳐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관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파파 스머프와 지혜를 겨룰 수 있는 인물이며, 사색가이다. 둥근 테의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인 것이다. 똘똘이 스머프는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스머프 마을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배척당하기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 또한 USSR(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추방당했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각기 다른 직업/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완벽하게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스머프, 편리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가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에 비해 그 역할면에서 더욱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궁극적으로 그들 모두는 '스머프'이므로 직업이나 기술의 정도 때문에 더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스머프 마을은 폐쇄 시장의 성격을 띈다. 돈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소유물은 공공의 소유 즉 집단의 재산이다. 모두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주인이다. 스머프는 자유 시장 경제와 그에 따르는 탐욕과 불공정을 거부하며, 집단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스머프들은 자신들의 명칭에 모두 '스머프'를 붙인다. 예를 들면, 똘똘이 스머프, 목수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른 사람을 지시할 때 좀 더 선별된 호칭이 아닌 '동무(comrad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집단 내의 완벽한 평등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대부분의 스머프들은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공통적인 노동 유니폼으로 독특한 모자와 스머프들의 파란 피부색과 결합하여 공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마오 제복을 떠오르게 한다.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의 관습에 따라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을 표방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신(神)도 사제 스머프(Priest Smurf)도 없다. 자연 어머니(Mother Nature)와 시간 아버지(Father Time)를 통해 은유적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물리적 현상의 '실재하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부정적인 면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다. 가가멜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현실적인 친구가 없는 미치고 늙은 운둔자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스머프를 잡아 먹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은유적으로 가가멜이 스머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를 멸망시키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두 번째 계획은 스머프를 잡아서 그들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완전한 자본가인 가가멜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품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가가멜이 기르는 붉은 색 고양이 아즈라엘(Azrael)은 가가멜의 집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자유 시장 속에서의 노동자를 상징한다. 아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다. 이것은 불평할 수 없는 노동자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그의 임금을 교섭할 수도 없다. 아즈라엘은 주인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가가멜보다 작고 덜 때깔이 난다는 사실은 가가멜이 부르주아인 반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을 은유한다. 아즈라엘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 그는 그의 주인을 위해 사냥을 하고 싸우며 목숨의 위협을 감수한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세기 동안 노동자들이 교육의 기회에서 소외된 채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 속에서 고통받아 왔던 것과 유사하다.


80년대 시리즈의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스머플링(Smurflings)과 같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의 인기와 판매력을 증가시키려는 현실 세계의 상업적인 이해 관계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친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이 소련 연방의 궁극적인 종언을 예고했듯이, 방송에서 그들은 은유적으로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인 조화를 위협하는 서구의 침입을 나타낸다.


이상으로 우리들의 어린시절에 즐겨보았던 "개구장이 스머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를 짧게 분석해 보았다. 그렇다면 스머프를 창조해낸 사람은 사회주의자였나...?


스머프는 피에르 컬리포드 (Pierre Culliford), 일명 페요 (Peyo) 라는 벨기에 작가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였다면, 그는 소련연방(the Soviet Union)과 동구의 경찰 국가권에서 실행되던 형태의 사회주의를 추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페요는 이상주의자(utopian)였다. 따라서 스머프 마을에는 경찰도 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드물게 그들 스스로 적과 싸울 시민 의용군을 결성한다. 이것은 경찰 국가와는 명백히 대치된다고 볼 수 있다.


만화영화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 외에도 스머페트와 관련된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수 있고, 또한 유일한 여자였던 스머페트와 사세트를 제외하고는 스머프 마을의 구성원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에 근거한 "동성애"적인 고찰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도록 하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Peyo는 우화적인 동화의 형식을 빌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를 조명함으로서 뛰어난 판타지 문학으로 성공하고 있다. "스머프"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보여주는 우화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나는 이 만화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 유토피아적인 이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록 현실 세계에서 이뤄지기엔 너무 개연성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출처: 한겨례 하니유머 베스트 유머(?)란.(왕 추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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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우리는? 사면초가인가?-[일본 자위대 50년] 이지스함 4척 … 해군력 '세계 2위'-중앙일보

[일본 자위대 50년] 이지스함 4척 … 해군력 '세계 2위'

●막강한 자위대 전력
 
 일본의 안보 관계자들은 "적어도 해군력에서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라고 말한다. 해상 자위대 전력의 핵심은 최첨단 전투, 첩보 기능을 갖춘 이지스함이다. 한 척에 1조2000억원이 넘는 이지스함을 1990년대에 4척이나 구비했고 추가로 2척을 더 건조할 예정이다. 이지스함은 최대 200개의 표적을 동시에 추적해 10개 이상의 표적을 한꺼번에 명중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일본의 이지스함은 테러와의 전쟁 때 인도양까지 나가 원거리 항해 경험을 쌓았다.

 잠수함은 16척이다. 매년 1척을 폐기하고 새 잠수함으로 교체한다. 방위청 관계자는 "잠수함 수명이 15년 정도이기도 하지만 건조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 미쓰비시와 가와사키중공업이 번갈아가며 한대씩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헬리콥터를 탑재할 수 있어 '미니 항공모함'으로 불리는 호위함 16DDH 4척을 올해 발주했다.

 공군력도 막강하다. 최신예 전투기 F15를 203대 보유하고 있다. 자력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췄다. 항공자위대의 또 다른 강점은 정찰위성과 조기경보기, 대잠초계기 등을 활용한 첩보 능력이다. 숙원이었던 공중급유기도 도입한다. 대당 3000억원대인데도 내년까지 4대를 나고야 인근 기지에 배치한다. 이렇게 되면 전투기나 수송기가 단번에 태평양이나 인도양을 가로질러 갈 수 있어 작전 반경에 제한을 받지 않게 된다.

 지난해 예산에는 위성항법(GPS)으로 유도하는 합동직격탄(JDAM)도입이 결정됐다. 이는 방어 기능 위주로 무장해 온 항공자위대가 공격능력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육상 자위대의 전력은 약한 편이다. 방위청은 냉전시대에 소련군의 상륙을 가정해 설정한 육상자위대의 전력배치를 게릴라전, 대테러전, 시가전 등 비정규전에 대비해 재편할 방침이다. 또 지금까지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던 미.일 연합훈련을 강화해 정보.수송.보급 등 미군의 후방지원 기능의 수준도 끌어올린다는 전략이다.
 
 막강한 전력 보유가 가능한 것은 세계 2위 수준의 방위예산 덕분이다. 자위대의 1년 예산은 연간 50조원 수준으로 스위스의 국가 예산과 맞먹는다. 일본 방위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한 한양대 김경민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문민 통제 기능이 잘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력 증강을 놓고 군국주의로 되돌아간다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라며 "그러나 군사대국의 길에 접어 든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2004.06.29 18:08 입력 

http://news.joins.com/internatio/200406/29/2004062918084780014000420042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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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웃지마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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