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분석-북한 핵보유 선언의 의도

 

 

"북미 갈등 조기 종결을 위한 협상 카드"
분석 - 북한 ‘핵보유 선언’의 의도는?

 

김종성 jkim0815@nate.com

 

설날 연휴의 마지막인 10일 오후,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이 국제사회에 충격과 당혹을 안겨 주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평양중앙통신 을 통해 ‘핵 보유’를 선언하는 성명문을 발표한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문은 다음과 같은 6가지 메시지의 전달을 의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미국을 상대로 북핵문제의 조기 종결을 요구한 것이다.
둘째, 미국 및 국제사회를 상대로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셋째, 미국을 상대로 대북적대정책의 포기를 요구한 것이다.
넷째, 미국을 상대로 협상의 여지는 남겨둔 것이다.
다섯째, 미국을 상대로 일본 강경파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던진 것이다.
여섯째, 한국 국민을 상대로 대북 일체성을 느끼도록 의도한 것이다.


그럼, 여섯 가지 사항에 관해 각각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북핵문제의 조기종결을 요구한 것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제 또 다시 4년을 지금처럼 지낼 수 없으며, 그렇다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4년 동안 반복할 필요도 없다”고 언급했다.

북핵문제를 둘러싼 ‘지난 4년간의 지루한 공방을 되풀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북미간의 ‘휴전’을 제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4년간의 지루한 공방을 되풀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휴전’을 희망한다는 의미로도 들릴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의미로도 들릴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부시 행정부에 대해 ‘전면전을 원치 않으면 휴전을 하자’는 제의를 한 것이다.

북한이 이러한 요구를 하게 된 것은, 부시 2기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1기의 연장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 11월 대선 이래 부시 외교라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해온 북한은, 지난 1월 이후 미국 외교라인이 보여준 ‘이중적’ 행보에 일종의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미국이 1월 8일 이후 2차례나 의원단을 북한에 파견하는 등 한편으로는 유화적인 모습을 연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대통령취임연설과 연두교서 등을 통해 강경한 모습을 연출했기도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1기 때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위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려 할지 모른다는 의혹을 가진 것이다. 외무성 대변인의 다음 발언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우리 제도의 전복을 목표로 한 새로운 이념 대결을 선포해 놓고도, 다른 한편으로는 핵문제의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해결책과 6자회담의 재개에 대해 염불처럼 외우면서 세계여론을 기만하려 들고 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북핵종결 요구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시 행정부가 처한 외교적 난국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전쟁은 물론 아프카니스탄전쟁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동맹국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사정을 백분 활용하여, 미국에게 일종의 ‘휴전’ 제안을 한 것이다. ‘북핵문제를 조기에 종결하지 않으면 동북아에서까지 미국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을 계기로 앞으로 일정 기간 동안 북미간의 ‘형식상’ 마찰이 빚어질 수도 있지만, 미국이 처한 입장을 고려해 볼 때 북·미 양국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에는 북핵문제의 ‘극전 반전’을 ‘연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북핵문제의 조기 종결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 보유’ 선언을 선택했다. 지금 시점에서 북한의 핵보유 선언은 절묘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현 상황에서는, 북한이 핵 보유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미국이 아무런 ‘손’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북한이 핵보유를 부정할 경우에 미국이 현장 검증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부시 행정부가 외교적으로 난처한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검증할 길은 없다.

그런데 그동안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 의혹을 제기해온 상황에서 북한이 핵보유 사실을 ‘인정’하고 아예 ‘핵보유국’ 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핵보유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제까지 ‘북한에 핵이 있다’고 주장해온 미국이 이제 와서 ‘북한에 핵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핵보유국’ 북한을 ‘응짱할 길도 없다. 만약 미국이 북한 ‘응짱에 나선다면, 그 승패 여하에 관계없이,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중동문제를 해결한다’는 2기 행정부의 외교정책이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이 된 이상, 앞으로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예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향후 북핵문제를 마무리하는 어떤 합의서를 체결한다 하더라도, 그 합의서는 1994년 제네바합의서와는 차원을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94년 제네바합의서는 ‘북한에 핵무기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유사한 합의서를 체결할 때에는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북-미 대결구도에서 북한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대북적대정책의 포기를 요구한 것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는 6자회담을 원했지만, 회담 참가 명분이 마련되고 회담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과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불가피하게 6자회담 참가를 무기한 중단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담 참가명분’과 ‘분위기’라는 것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1994년 제네바합의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 포기를 약속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미국이 이 약속을 이행하기는커녕 오히려 북한 침공계획인 ‘작전계획 5027’을 개정하면서 북한을 압박해왔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그것이 북한이 4차 6자회담을 거부한 중요한 이유였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 발언의 핵심은 사실 ‘핵보유’ 선언이라기보다는 ‘적대정책의 포기’에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북미관계의 최대 쟁점은 ‘핵보유 여부’가 아니라 ‘대북 적대정책’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대북적대정책의 포기를 6자회담 참가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4. 협상의 여지는 남겨둔 것이다

외무성 대변인 성명은, 일견 강경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미국과의 협상 여지는 여전히 남겨두었다. 북한이 극단적인 상황을 원치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의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원칙적 입장과 한반도를 비핵화하려는 최종목표에는 변함이 없다.”

핵을 갖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위 목적이라는 점과, 대화 및 협상에 대한 의지가 여전히 강력함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은 한국과 같은 한민족이기는 하지만, 북한을 인식하는 시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지금의 동북아 국제정세 하에서 북한은 엄연히 북-미 양강 구도를 이끌어가는 주도국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북한 역시 이러한 양강구도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험악한 북-미 대결구도를 ‘연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타협을 통해 대결을 완충하려는 역내 주도국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앞부분에서는 모종의 극단적인 대결을 불사할 것처럼 암시했지만, 결국엔 사태가 험악해지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 일본 강경파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던진 것이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월드컵 예선에서 북한이 일본에 패배한 다음 날에 나온 이날 성명에서, 북한은 일본에 대한 강경 메시지도 빼놓지 않았다.

“일본도 미국을 추종하여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다”면서 “이미 다 해결된 납치자 문제를 걸고 가짜 유골문제까지 조작하면서 북일평양선언을 백지화하고 있다”고 일본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전반적인 문맥을 볼 때, 이 성명문은 어디까지나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미국을 겨냥한 성명문에 대일(對日) 비판을 넣은 것은, 일본 강경파가 6자회담 순항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시사를 통해, 북한에게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일본 강경파 문제의 ‘처리’를 미국의 손에 떠맡긴 것이다.

일본 강경파의 존재는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일정 정도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강경파의 독자적인 대북 압박이 미국의 대북정책 구도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자는 최근 흥미로운 분석에 접한 적이 있다. 이미 국내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에서 활동 중인 북미평화센터 김명철 소장은 ‘NHK 외압 폭로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볼 때, 이 사건은 일본 강경파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려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워싱턴 D.C.의 신뢰할만한 소식통은 “보도가 제한적으로 허용된 지난 1월 26~28일의 미 워싱턴국방대학 심포지엄에서 일부 패널이 ‘미국의 허락 없는’ 일본의 대북 압박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고 기자에게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미국 역시 일본 강경파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이 문제의 ‘처리’를 미국의 ‘손’에 떠맡겼다는 점에서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문이 흥미를 끈다 하겠다.

6. 대북 일체성을 느끼도록 의도한 것이다

국가적 축제가 갖는 심리적 기능 중에는 쉬운 말로 ‘의식 순화 기능’이 있다. 축제 이전의 불편한 인간관계라든가 혹은 마음 속 찌꺼기를 없애고 인간의 의식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설날 같은 대형 축제의 경우에는 그러한 기능이 더 더욱 두드러진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성명문을 발표한 시점은 설날 연휴 마지막이다. 음력 1월 1일을 기념하지 않는 일본인들과는 달리, 한국인들에게는 음력 1월 1일이 최대의 축제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설날이 갖는 ‘의식 순화 기능’이 한층 높아지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성명문을 발표한 것은, 설날을 쇠고 ‘텅 빈’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북한의 ‘핵 발언’이 한국 국민들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에 관한 2002년 12월 25일자 뉴욕타임스의 보도는 이러하다.

"미국이 도발하는 전쟁으로부터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북한이 핵폭탄을 가지게 되었음을 과시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인들로 하여금 민족적 긍지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일부 한국인들은 북한의 발언을 듣고 마음속으로 일종의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한국 국민을 직접 겨냥하고 있지는 않지만, 발표 시점으로 볼 때, 이 성명문은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한국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또 북한과의 민족적 일체성을 느끼도록 유도하려는 측면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 11월 13일 LA 발언 이후 한국 여론이 북핵문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음을 고려한 조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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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2005년의 박정희, 박정희의 2005년(한홍구)

2005년의 박정희, 박정희의 2005년

 

 

 

 

 

 

 

 

 

 

 

 

 

 

 

 

 

 

 

 

 

 

 

 

 

 

 

 

 

[한겨레] 죽은지 26년이나 됐음에도 제대로 파묻히지 않은 그를 이제 편안히 장사보내주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한국현대사

지난 10여일 동안,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박정희란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한-일 협정의 내막을 담은 문서 공개, 문세광 사건 관련 외교문서 공개, 그리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개봉, 그리고 광화문 현판 교체 논란 등은 죽은 지 25년이 넘은 박정희를 다시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에 불러놓았다. 시간이 가면 법에 따라 해마다 많은 문서가 공개될 것이고,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 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과거 청산 관련 위원회가 국정원, 경찰, 군, 검찰 등 주요 국가기관에서 활동을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다. 이들 위원회가 다루게 될 사안들은 하나하나 폭발성이 아주 강한 사건들이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인간 드라마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에서 영감을 얻거나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수구언론은 열심히 ‘박정희 일병 구하기’에 나서보지만, 박정희의 딸이란 것 말고는 그 어떤 정치적 자산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 잊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냈던 김영삼
왜 박정희는 2005년에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가? 역설적으로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은 김영삼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의 터널을 지나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나타난 김영삼은 처음에는 인기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절망은 더 큰 법, 김영삼 말기에 부패와 실정, 그리고 경제난이 겹치자 사람들은 슬슬 박정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집권 진영 내의 대선 후보 경쟁에 나선 주자들은 저마다 박정희를 본받고, 심지어는 ‘아버지’로까지 모셨다. 그리고 도둑처럼 우리를 덮친 외환위기, 박정희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럼에도 1997년의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정권 시기 목숨을 위협받았던 김대중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김대중은 박정희 시대를 청산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청산할 수 없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총구를 거꾸로 들이대고 한강다리를 건넌 군사반란의 2인자 김종필과 손을 잡고 지역감정의 포위를 돌파하면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것이다.

김대중 시절 박정희 유산에 대한 청산이 시도될 수 없었던 것은 이른바 DJP연합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 빨갱이, 거짓말쟁이, 말 바꾸기의 선수 등 온갖 음해에 시달렸던 김대중이 박정희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박정희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처지를 역이용해 박정희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수층 껴안기에 나선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1961년의 군사반란 이후 18년간 집권하며 민주주의를 유린한 박정희가, 죽은 지 또 18년 세월이 흐른 1997년에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묻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죽고 권력을 잡은 자는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전두환이었다. 일찍이 1961년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육사생도의 군사반란 지지 시위를 조직해 박정희에게 강한 인상을 준 뒤, 박정희가 군부 내에 영남 출신 직계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후원한 사조직 하나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의 경력이 말해주듯 박정희가 양성한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

전두환이 1979년의 12·12와 1980년 5·17의 2단계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뒤 실시한 프로그램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이후 써먹은 수법을 그대로 빼닮았다. 동네에 큰 깡패가 나타나면 양아치들이 평정되듯이, 19년을 사이에 두고 탱크로 무장하고 출현한 이들은 기껏해야 회칼 정도나 들고 다닌 자들 몇몇에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깡패’ ‘불량배’라고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팼다. 그리고 기성 정치인들을 정치정화법으로 발을 묶어놓고, 자신들은 정보기관을 이용해 사전조직을 통해 공화당과 민정당을 조직했다. 구 정권의 실력자나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강탈한 것도, 그리고 새로이 등장했다는 ‘신악’(新惡)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구악’(舊惡)을 찜쪄먹은 것도 그대로 닮은꼴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박정희가 친위부대로 육성한 군벌들로서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들이었다. 족보도, 일의 솜씨도 그대로 박정희를 빼닮았음에도 전두환 등은 마치 자신들이 박정희와 무관한 것처럼 행세했다.

규제의 상징이던 야간 통행금지는 해제되었다. 길거리에서 경찰이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와는 달리 전두환은 교복 자율화를 실시했다.

검열자들이 보기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금지곡을 남발하던 박정희 시대와 결별이라도 하듯 여의도 광장에서는 ‘국풍81’이라는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졌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를 잊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그 시절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박정희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의 군벌들은 박정희, 김종필이 군사반란 이후 자신들의 군 선배들을 고려장 지낸 것처럼, 박정희를 서둘러 묻어버렸다.

그를 죽인 김재규까지.

박근혜가 있건 없건 치러야 할 통과의례
민주화 운동 세력도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박정희를 잊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얼마나 흉악했나? 수백명의 동포를 학살한 자가 대통령이라고 뻐기는 세상에서, 광주의 끔찍한 사진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그런 시절에 죽은 독재자를 상대할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아 있는 독재자를 상대하기도 힘에 부쳤다. 이렇게 아무도 박정희를 제대로 파묻지 못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97년에 되살아났다. DJP연합에 힘입어 등장한 뒤 보수 껴안기에 주력했던 김대중 정권은 되살아난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묻는 대신, 거액의 국고를 지원해 박정희 기념관을 짓겠다고 했다. 그리고 2002년 말의 대통령 선거를 거쳐 2004년 봄의 탄핵 사태를 겪게 되었다. 탄핵은 당시 <한겨레21>을 통해서도 강조했지만,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2004년 3월18일, 501호). 그러나 수구세력의 탄핵은 시민들의 심판을 받아 4·15 총선을 거치면서 국회의 의석 판도가 급변했다. 이제 과거 청산은 단순히 재야 민주세력의 외침이 행정과 입법 두 권력의 지지를 받는 국가적 과제가 된 것이다.

한편, 탄핵 직후 위기에 몰린 수구세력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였다. 자연히 박정희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좌제를 반대해온 입장에서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박근혜가 역사적 인물 박정희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나 공인으로서의 역사인식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가 헌법에 대한 도전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1961년의 군사반란으로 헌법을 짓밟고도 성이 안 차서, 1972년 또다시 헌법을 짓밟으며 유신 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에 대해서 그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박근혜가 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유신헌법을 비판하기만 하면 군법회의에 보내 사형까지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던 박정희 시대의 무시무시한 긴급조치가 떠오른다.

한나라당이나 수구언론은 현재 박정희에게 쏠리는 관심이 마치 박근혜를 흠집 내기 위한 정치공작인 것처럼 비판하지만, 사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과거를 극복하고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은 대한민국이 박근혜가 있건 없건 반드시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다. 지금 박정희 시절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수구세력은 있는 힘을 다해 박정희 시대를 미화해왔고, 냄새나는 것은 기를 쓰고 덮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힘이 다했다.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면 꼭 누가 때리거나 옆구리를 간질여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가 막아주었고, 전두환 시절에는 전두환의 악행이 막아주었다. 노태우와 김영삼 시절, 박정희는 잊혀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김영삼 말기부터 수구세력은 박정희를 불러냈고, 김대중 시절에는 아예 기념관을 짓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니 박정희에 의해 얻어맞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이 가만있을 수 있는가? 1997년부터 친다면 근 8년 가까운 시절을 잘 버텨왔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어졌을 것이다.

수구세력이 박정희 문제와 관련해 기진맥진하게 된 것은 변화하지 않고 진보하지 않는 수구세력이 자초한 당연한 결과이다.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낼 능력도 관심도 없는 수구세력은 박정희의 유산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산을 상속받게 되면 부채도 같이 상속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박정희가 써버린 카드 고지서가, 그가 남발한 약속어음이 만기가 되어 정신없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수구세력은 뒤늦게 전열을 정비해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몰아붙이지만, 하필 빌릴 것이 없어 일본의 극우파 용어를 베껴와야 하는가? 아무리 박정희가 일본식 민족주의자요, 그의 발전 모델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모델, 특히 만주국 모델을 닮았다 하더라도, 그를 미화하는 것까지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빌려와야 하는가?

경제발전 칭찬하려면 우간다와 비교해야
박정희 찬양론의 핵심은 경제 성장이다. 만약 우리가 경제만 잘되면 다른 것은 볼 것 없다는 경제 지상주의에 기대 박정희의 군사반란과 헌정질서 파괴, 인권유린과 정보정치를 용인한다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어디 일제뿐이랴. 히틀러도, 스탈린도, 무솔리니도, 심지어는 김일성도 일정 기간 동안에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거두지 않았던가? 박정희는 그야말로 경제 성장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것은 경제가 중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짓밟고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는 일을 꿈꿀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서구의 사상이자,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경멸하는 일본 군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는 성장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정희 같은 독재를 하고도 경제도 성장시키지 못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버마의 네윈 같은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쓸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박정희는 3선개헌을 하면서, 유신을 하면서 안정이냐 혼란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지만, 정말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은 같이 추구할 수 없는 목표였을까? 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많은 나라들, 특히 공산주의 국가들은 단기적인 강제 동원을 통해 이른 시일 내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거두었다. 그러나 조금 길게 보면 그 성과를 이어간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 경제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한 것도 박정희식 경제 모델의 파탄이 아니었을까? 한-일 협정 관련 문서의 공개는 이미 최근에 알려진 내용이지만, 참으로 속이 쓰리다 못해 아리다. 이런 속을 달래느라 사람들은 ‘모르는 게 약이다’란 말을 만들어둔 게 아닐까? 유상, 무상에 차관까지 합한 8억달러. 박정희는 왜 겨우 그 금액을 받아내려고 청구권 문제를 그렇게 서둘러 포기했을까? 경제가 어려웠다는 말로 변명하지는 말자. 경제가 어려웠다면 이승만 시대도 어려웠다. 김일성이 다스리는 북인들 경제가 어렵지 않았겠는가? 이승만도 받지 않았다. 김일성도 받지 않았다. 냉전 문제가 걸려 있던 김일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승만은 왜 일본과 그런 조건으로 한-일 협상을 마무리지으려 하지 않았을까?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나름대로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며, 비록 분단을 확정지은 단독선거이긴 했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절차적 정통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박정희식으로 경제 발전에서 빠른 성과를 거두어 국민들을 달래는 데 목을 매야 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총칼로 뒤엎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일단 급전이 필요했다. 조건은 상관없었다. 정권의 이해관계 때문에 급전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민족의 역사도, 피해 당사자인 개인의 권리도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독도 문제가 한-일 협상의 걸림돌이 되자 김종필이 “그까짓 바위섬 폭파시켜버리자”고 망언을 한 것도 정통성 없는 정권의 주역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사생활이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
적어도 올 한해는 박정희 문제로 계속 시끄러울 전망이지만, 사실 지금의 20대나 30대는 박정희를 잘 모른다. 지금의 20대에게 박정희 시대는 시간상 지금 40대에게 이승만 시절만큼이나 먼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의 인간성이니, 청렴성이니 하는 것이 터무니없이 미화되곤 한다. 박정희의 사생활을 아주 살짝 다룬 <그때 그사람들>을 두고 논란이 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박정희의 사생활, 영화 속의 대통령이 직접 말하는 일본 속담이지만, 사내의 배꼽 아래의 일을 갖고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박정희 자신이 누구를 크게 봐줄 때, 예컨대 박정희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정인숙 사건과 관련해 당사자인 모씨를 봐줄 때라든가, 야당의 2세 정치인인 모씨에 관한 첩보가 올라왔을 때 실제로 박정희는 이런 말로 보고를 덮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는 의원들의 약점, 특히 여자 문제를 캐어 협박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이병린 변호사는 중앙정보부의 회유와 협박을 단호히 거부했다가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간통죄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반란의 주범 박정희가 최고권력자였던 시대는 불행하게도 그의 일거수일투족뿐 아니라 표정과 기분까지도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대였다. 그의 사생활이 평범한 개인의 사생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사생활은 이미 권력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측근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는 권력의 풍향계였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되어 민주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라면 그의 공적 활동과 사생활은 엄격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다시 한번 헌법을 짓밟고 절대권력자가 되었을 때 공과 사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권력의 사유화, 인격화가 이루어지고,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여자를 조달해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독재자의 사생활은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었다.

정보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다른 정보장교 출신들과 나라를 주무른 18년은 큰 정치가 실종되고, 정보와 약점 캐기, 조작에 기초한 정치공학만 만발한 시대였다. 박정희교 신자들은 박정희를 가리켜 용인술의 천재라고 찬양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용인술이란 정보와 공작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이 용인술에 기대어 권력을 적당히 위임했다가 거둬들였다 하면서 정권을 관리해갔다. 박정희의 용인술의 핵심은 자신의 측근 몇몇에게 권한을 위임해주고, 그들을 서로 경쟁시키며 감시하게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식 모델이 외환위기로 성수대교처럼 무너져버렸듯이, 그의 용인술도 박정희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파국을 맞았다. 용인술의 천재라는 박정희가 자신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 왼팔인 경호실장, 그리고 술친구인 비서실장과 술을 먹다가 중앙정보부장에게 사살된 것이다.

그날 그 비극의 현장에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은 박정희 이하 죄다 정보장교 출신들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보안사령관도 지낸 인물이고, 김계원도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공수부대 출신이지만, 경호실장이 된 뒤 김재규와 충성 경쟁을 벌이며, 전두환의 처삼촌인 헌병감 출신 이규광을 책임자로 하는 독자적인 정보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10·26 사건도 권력의 최고 상층부 내에서 중앙정보부 대 중앙정보부를 견제하기 위해 직제에도 없는 비선 정보조직을 만든 경호실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박정희는 권위주의와 정보정치 속에서 판단력이 무뎌졌고, 그의 용인술 줄타기는 파국을 불러왔을 뿐이다.

다른 악명높은 독재보다 부드러웠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그 권력의 악랄함으로 친다면 이디 아민의 우간다나 보카사의 중앙아프리카 같은 나라, 또는 피노체트의 칠레 등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의 수는 이런 나라에서 피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수와 견주어볼 때 현격하게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시기에도 보면 의문사 사건도 있지만,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처형이나 인혁당 사건에서와 같이 반대파의 생명을 빼앗을 때도 일정한 법적 절차- 그렇기에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 를 밟으려 한 사례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이 박정희 독재가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악명 높은 독재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 차이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이 출발한 역사적 조건의 차이라 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 학살로 인하여 한국 사회에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꿔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 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비록 4월혁명을 거친 뒤이기는 하나, 일반대중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길들여져 있는’ 상황에서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에 시민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여러 차례 군을 동원해야 했고, 집권 말기에 가서는 긴급조치와 같은 극도의 강압적 조치가 상시화돼 있었다.

‘긴급’조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발동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발동돼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동안 긴급조치, 계엄령, 위수령 등이 발동됐던 기간은 무려 105개월이나 되었다. 박정희는 빈번히 군을 동원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비상대권을 휘둘렀지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거나 집단 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권력 입장에서 한편에서는 총칼을 실제로 사용할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대규모로 거리에서 피를 흘리는 상황을 피하려는 나름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유신의 마지막 나날에 가서는 나름대로 지켜지던 자제 규율이 양쪽 모두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민간인 학살은 완벽하게 잊혀진 사건이 되었고, 1960년의 4월혁명 당시의 유혈 사태조차도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갖지 못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 정권이 총을 쏠 수 있는 정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재권력은 독재권력대로 ‘겁을 상실’한 학생들을 다시 길들여야 했다. 1975년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 살인도 별로 약효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살해당하기 직전, 유신정권 내부에서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위가 폭력시위로 발전하자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10·26 사건이 일어나던 날 저녁, 당시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하던 박정희의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명을 학살하고도 문제없었다며, “부마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00만~300만명만 깔아죽이면 잠잠해진다”고 호언했다. 김재규는 이런 분위기를 들어가며 자신의 박정희 살해가 대규모 유혈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의거였다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유신정권의 종식을 가져왔지만, 대규모 유혈 사태를 방지할 수는 없었고 다만 6개월가량 연기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장소가 영남의 부산 또는 마산에서 호남의 광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는 국헌 문란의 수괴가 아닌가?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정말 우리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박정희 시대에 민주주의가 그립다고 말하다가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마냥 매달려본 사람들 앞에서는 제발 박정희 시대가 그립다는 말은 삼가주었으면 한다.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은 오늘의 기준으로 그 시절을 평가하지 말자고 한다. 좋다. 그런데 박정희가 한 짓, 다른 나쁜 짓 제쳐놓고 총 거꾸로 들고 민주정부를 뒤엎고 헌법을 두번씩이나 짓밟은 것은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국가보안법은 봐주고, 형법을 적용한다 해도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로서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형법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 함은”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박정희,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지른 국헌 문란의 수괴 아닌가? 형법 어디를 찾아봐도 경제 발전에 기여하면 그 죄를 사해준다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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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낸 후에는 잘 닦아야 할까?

땀을 계속 흘릴 때 잘 닦지 않으면 먼저 나온 땀의 소금기가 땀구멍을 막아 고열 두통 등에 시달릴 수 있다. 따라서 땀이 나면 즉시 닦아주는 것이 좋다.

또 땀을 흘리고 난 뒤 수분 보충은 필수. 수분이 부족하면 혈액 순환장애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갈증이 날 때는 필요한 물의 5분의 1정도만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기 때문에 땀으로 나간 수분을 충분히 보충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갈증이 날 대는 목을 약간 축인 뒤 물을 자주 마셔야 한다. 또한 그냥 맹물을 마시기보다 수분이 많이 함유된 과일을 먹는 것이 좋다. 수분이 서서히 보충되며 필요한 전해질들이 칼로리와 함께 동시에 흡수되는 잇점이 있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면 소금을 먹어야 한다?

땀을 많이 흘려 팔에 소금기가 하얗게 보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땀과 함께 염분이 나간다는 것. 그래서 땀으로 소모된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물과 함께 소금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땀을 흘린 후 소금으로 염분을 보충해 주어야 할까?
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땀속의 염분은 혈액속의 염분보다 농도가 낮다. 그러므로 땀으로 흘린 염분을 소금으로 보충해준다면 혈액의 염분 농도가 진해져 혈액 순환 장애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



땀 흘리는 여름에는 보약이 효과 없다?


일반인들이 한방과 관련해서 지니고 있는 잘못된 편견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는 게 바로'여름철 보약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보약을 먹어 보아야 땀으로 다 배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땀에 보약의 영양분이 섞여서 나온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므로 약 기운이 땀으로 배출되어 없어진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낭설에 불과하다. 옛부터 여름에 건강을 다스리지 못하면 가을에 만병을 갖는다고 하였다.

오히려 여름철에 허약한 몸을 보해야 다음 계절을 건강하게 지낼 수있는 것이다.

<땀을 다스리는 민간 요법>



1) 황기
: 잠잘 때 땀이 많이 나거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때는 황기 12g을 물에 달여 하루 3번에 나누어 끼니 뒤에 먹는다. 몸이 허약하거나 병을 앓고 난 다음 식은땀을 많이 흘리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

2) 굴조가비(모려) : 불에 구운 것을 보드랍게 가루 내어 한번에 3-4g씩 하루 2-3번 더운물에 타서 먹는다. 땀을 멈추는 작용이 있으므로 식은땀을 많이 흘리는 데 쓴다.

3) 참깨(호마) : 참깨기름 한 숟가락을 거품이 없어지도록 잘 저어 식힌 다음 달걀 3개를 까 넣고 잘 섞는다. 하루 3번에 나누어 끼니 전에 먹는다. 참깨기름은 몸이 약하면서 땀을 많이 흘리는 데 효과가 있다.

4) 차조기엽 (자소엽 紫蘇葉) : 흘려야 할 땀을 못 흘리고 오랫동안 땀이 나지 않는 데는 차조기잎(자소엽)과 선귤껍질(청피)을 섞어 차로 마신다.




5) 박하잎
(薄荷)
: 박하는 독기를 내보내는 땀이 나게 한다. 박하잎을 엽차처럼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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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보잘것없는 것 - 





욕망은 끝이 없다. 욕망은 욕망을 부른다. 
욕망이 충족된다면 그것이 무슨 욕망이겠는가.
욕망은 점점 크고 거대해진다.

크고 거대한 것들은 사람을 소외시킨다.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행복을 건다.
봄이면 피어나는 저 이쁜 풀꽃을 보며 
나는 행복하다. 내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


-김용택의《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중에서-


* 꿈은 커야 합니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와 행복을 
느끼는 자족(自足)의 수위(水位)는 낮아야 합니다. 
그러면 땅 위의 모든 것이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마른 겨울나무에 핀 하얀 눈꽃만 보아도 그날 하루가 
즐겁고 따뜻한 말 한마디, 답신을 기대하지 않는 메일 
한 통에도 하루 종일 행복합니다. 
낮고 작은 것에 감사하면 큰 꿈도 저절로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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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씨가 된다 -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됩니다. 
이를 풀이하면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 됩니다. 
말은 마음의 알갱이에서 나옵니다. 
말이란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말을 곱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을 험하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험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말에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거나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 윤태익의 <당신 안에 모든 답이 있다> 中에서 -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고
나의 말을 더 많이 하면서 살 때가 많습니다.
말이 마음의 알갱이에서 나온다면 내 마음의 여유도 
나의 말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아울러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곧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아닐까요?
좋은 하루 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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