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 어느 때인가 내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길가에 피어 있는 작은 꽃 작은 돌 하나까지도 내게는 다 삶의 의미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의미는 내 이웃들 슬픈 이, 기쁜 이, 외로운 이, 미운 이, 착한 이, 가난한 이...... . 이 모두는 내 삶의 이유이다. 내 소중한 이웃이 없다면 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랑하고 미워하고, 함께 울고 웃고, 괴로워할 수 있기에 내 인생은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난한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다. 아! 그러나 이 소중한 삶의 시간들은 너무도 짧다. 한정돼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삶의 순간 순간이 시간속에 묻혀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졸인다. 더 사랑해야지. 더 크게 울고 웃고 괴로워해야지. 이 귀한 삶의 시간들이 그냥 소홀히 지나쳐가지 않도록. -좋은글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노부후사 > 공산당 선언 3강

공산당 선언 3강

 

* 근대(modern)에 대하여

 

홉스봄의 서론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1847년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른바 '의인동맹義人同盟(Bund der Gerechten)'에 가입하기로 약속했다. ... 공산주의자 동맹 제2차 대회는 형식적으로는 목적과 새로운 조항들을 수용하였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초청하여 동맹의 목표와 정책을 해설한 새로운 선언을 작성해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로 나온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이라는 제목(1872년 이후로는 '공산주의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라는 제목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을 가진 23페이지짜리 문서는 '1848년 2월에 출판'되었으며, 런던 시티의 리버풀가 46번지에 있는 노동자 교육협회에서 인쇄되었다."

 

텍스트를 읽을 때는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을 동시에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는 텍스트가 성립하게된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이해하는 관점이다. 곧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공부하려면 <<공산당 선언>>이 쓰여진 1847년의 앞뒤 50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 텍스트와 나의 관계 - 내가 <<공산당 선언>>을 왜 읽어야 하느냐 - 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남들이 고전이라 하니까, 읽으면 폼나니까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내가 왜 읽는지를 알기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야 된다. 따라서 과제를 내겠다.

 

과제 : '2005년 봄에 <<공산당 선언>>을 읽는 나는 누구인가'를 A4 용지 1매 내로 적어오도록. 객관적으로 서술한 뒤, 두 세 단어로 자신을 압축하여 써올 것.

 

이러한 자기인식 과정이 없으면 책을 읽든, 뭐를 하든 모두 헛짓이 된다. 죽을 때 관뚜껑에다 "나는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고 적어 놓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중국에선 선(禪) 수행한 스님들의 선문답을 적어놓은 <<전등록>>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한 주지스님이 경내 순찰을 하는데 누군가가 열심히 불경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주지스님이 가서 무엇을 읽고 있는지 묻자 그는 <유마경>이라 대답을 했다. 그러자 스님이 다시 "유마경을 읽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경전이냐?"고 묻자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고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읽으면 지식은 많이 쌓일지 몰라도 한 순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다. 별 탈 없이 사는 사람도 어느날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누군지 모른 채로 살다가, 자신의 한계에 대한 객관적인 탐색없이 살다가, 누군가 자기의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올 때 무너지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남자들에게>>에서 '지식인 남자들은 삶의 아수라장을 거쳐보지 못한 약함이 있다.'고 비꼰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1847년이라 하면 근대이다. 대체로 근대는 산업혁명 이후를 말한다. 1847년은 산업혁명이 일어난지 50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므로 근대의 최첨단이라 할 수 있다. '근대'라고 하면 나름대로 폼나지만 '근대화'리고 하면 처치곤란한 단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근대라고 할때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함께 맞물려서 돌아가야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온전히 제도화되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말이 안된다. '식민지'와 '근대화'는 동시에 쓸 수 없는 단어이다. 근대는 주체적 개인이 활동하는 시대인데 주체적 개인을 인정치 않는 식민지 시스템에서 근대화란 있을 수 없다.

 

이렇듯 근대사회의 여물어 가는 과정 속에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서로 아귀를 맞추지 못하고 어긋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여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발전하게 되었지만, 그에 발맞추어 인간의 정신과 그 정신을 뒷받침하는 제도를 마련치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어긋남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이를 타개하기 위한 프로젝트로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 생각의나무

 

 - 알찬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올해에 도서구입비로 30000원을 책정했다면 28,000원은 이 책을 사고 나머지 2000원은 김밥을 사먹기를 권한다. 기존의 하비 번역본들의 번역과 견주어서 번역이 훌륭하다. 프랑스 혁명부터 파리 꼬뮨까지의 파리를 다루고 있는데 관심사에 따라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1848년 이전까지 파리는 중세 도시였다. 서울의 사대문 안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1848년 이후 보나파르트가 황제에 즉위한 후 파리에 도시 계획이 수립되면서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 도시의 재개발, 재건축, 계급 변화가 이루었는지는 인문학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계급지형과 함께 바뀌는 파리의 변화를 다룬 부분은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 30년 간에 등장한 예술가들(쿠르베, 보들레르, 발자크, 마네 등등)을 통해 그 시대 분위기를 읽어낸 부분은 문학, 예술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매우 즐거운 읽을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을 때의 파리 상황을 살펴보자.

 

"그렇다면 정확하게 1848년의 파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온 사방에서 굶주림과 실업과 빈곤과 불만이 팽배했고, 사람들은 생계수단을 찾으려고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파리를 중심으로 모였다.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군주제와 상대하려는, 적어도 그것이 애초에 약속한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때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1840년에 벌어진 파업과 거리 시위와 봉기 음모는 저지되었고, 그들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판단하건대, 이번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했다. 1848년 2월 23일 카푸친 대로에서, 외무성 앞에서 벌어진 별로 크지 않은 시위가 당국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고 진압부대가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여 50명 가량을 죽였다." (10쪽)

 

1848년이 칼 마르크스에게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나와있다.

 

"마르크스에게도 1848년은 이와 비슷한 지적 정치적 분수령이었다. 1848년에서 1851년 사이에 파리에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멀리 망명지인 런던에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그가 과학적 사회주의로 돌아설 수 있게 해 준 분기점이자 성령의 출현과도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낭만주의와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1848년에 그 둘 모두를 가차없이 폐기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유토피아 사상이 노동자의 계급의식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던 역사적 순간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것은 기껏해야 부적절한 것이고 심하게 말하면 혁명의 장애물이 될 뿐이라고"(30쪽)

 

홉스봄 서론 중 첫번째 섹션은 <<공산당 선언>>의 성립과정을 간단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다.

 

* Eric Hobsbawm' introdution. Ⅱ

 

"무엇을 말해야만 하는가?" 홉스봄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토릭을 따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홉스봄은 2 번째 섹션인 이 장에서 <<공산당 선언>>의 학문적 의의를 살피고 그에 대한 기본적 해제를 하고 있다.

 

"선언의 언어들이 더 이상 그 독자들의 언어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이 "인구중 현저히 많은 부분을 세상사에 무관심한 농촌 생활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이 있었다."

 

- "세상사에 무관심한 농촌 생활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독일어로 "dem Idiotismus des Landlebens entrissen"이다. 여기서 Idiotismus의 당시 의미는 '세상사에 무관심한'이었다. 그러나 이 단어와 대응하는 영어는 idiot이고 오늘날 의미는 '바보'로 쓰이고 있다. 곧 <<공산당 선언>>이 쓰여질 당시의 언어와 지금의 언어가 다르므로 양자를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 <화양연화>의 영어제목은 'In the mode for love'이다. 이것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for'이고 따라서 '사랑을 향한 분위기 속에서'로 번역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화양연화> 장면 5에 그 이유가 있다. 장만옥과 '장만옥에 편승하여 떠보려는' 양조위가 함께 밤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양조위가 장만옥에게 "오늘밤 같이 있고 싶어"하고 말한다. 그러자 장만옥이 빙긋 웃는다. 그때 카메라가 장만옥의 손을 클로즈업한다. 손을 넣은 양조위의 바지 주머니 위에 장만옥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하며 파르르 떨린다. 장만옥의 양조위를 향한 애정의 정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선언의 정치적 어휘들에서는 이러한 점이 더욱 더 분명하다... 선언이 주장하는 '공산당'은 소비에트나 중국에서 전형적인 국가의 당과는 물론이고 현대의 민주정치의 정당이나 레닌주의적 공산주의의 '전위대'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선언이 주장하는 당은 아직까지 존재한 적이 없다."

 

- 여기서 당은 "의견이나 정책의 경향 또는 흐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산당 선언>>의 본래 뜻은 <<공산주의적인 성향을 집약한 선언>>이라 말할 수 있다.

 

"선언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상의 발전에 있어서의 한 단계 - 상대적으로 덜 성숙한 단계 - 를 대표할 뿐이었다... 따라서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노동labour'을 자본가에게 파는 것과 그의 '노동력labour-power'을 파는 것이 분명하게 구별 - 이는 잉여가치와 착취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있어 본질적인 것인데 - 되지 않았다."

 

- <<공산당 선언>>을 쓸 당시의 마르크스는, 학문적으로 봤을 때 아직 <<자본>>을 썼을 때의 마르크스가 아니다. 따라서 둘 사이의 시대적인 제약, 즉 마르크스의 학문적 제약이 따른다. 홉스봄은 대표적인 사례로 "'노동labour'을 자본가에게 파는 것과 그의 '노동력labour-power'을 파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에게서 뿐만 아니라 흄, 로크, 헤겔 등 근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도 핵심적인 개념이다.

 

"사용 가치를 낳는 어머니로서의 노동은 사회 형태가 어떠하든 그 모든 형태로부터 독립된,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 대사를 매개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을 매개 하기 위한 영원한 자연 필연성이다." - 마르크스의 <<자본 1권>>에 적혀있는 노동에 대한 definition이다.

 

"사용 가치를 낳는 어머니로서의 노동" - 넓은 의미의 활동activity.

"인간의 존재 조건" - '노동하는 인간'이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라는 말.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 대사를 매개" - 사람이 자연물을 가져다가 가공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물질대사를 노동이 중간에서 매개한다는 말.

"자연 필연성" - 노동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말. 따라서 이는 사회형태와는 무관함.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다. 노동하는 존재 강유원이 알바를 하여 3시간동안 일해 주고 3시간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면 그것은 강유원이 3시간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판 것이다. '노동력'은 화폐로 계산된 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력'이란 '노동'의 일부분이다. 노동력을 팔았다고 해서 나의 전인격적인 개념을 판 것이 아니다.

 

아주 거칠게 예를 들겠다. 노동하는 존재 강유원이 회사 사장과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하기로 연봉계약을 맺었다. 6시에 강유원이 퇴근하여 귀가하다가 회사 사장을 만났다. 그런데 강유원은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하기로 했으므로 회사 사장은 더이상 강유원의 사장이 아니다. 따라서 강유원이 "안녕하십니까 사장님"이라고 안 해도 괜찮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말 안 하면 사장에게 밉보여서 잘리기 십상이다. 이렇듯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면서 계산하기 어려운 부분까지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나머지 부분을 뜯어 먹는 것을 착취(exploitation)라 한다. '노동력이 상품화되고 인간의 노동이 착취되는 시스템'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비밀이며 마르크스 철학의 요체이다. 각자 동녘에서 나온 <<마르크스 사상사전>>이나 노동자의 책웹사이트(http://www.laborsbook.org)에 가서 확인해 보길 바란다.

 

노동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출산 밖에 없다. 애를 낳아야 노동이 확보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순환 사이클에서 유일하게 끼워져 있는 유기체는 사람 밖에 없다. 자본 자체가 노동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노동을 벌충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일컬어 '흡혈귀'라고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마르크스는 선언을 마르크스적인 경제학자로서 쓴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적인 리카도주의자로서 쓴 것이다."

 

- 리카도주의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를 말한다. 이들은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노동력이나 노동이나 그게 그거지"하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은 마르크스의 경제학과는 달리 이미 1840년대 중반에 완숙한 공식화에 이르렀으며, 후기에 이르도록 그 근본이 변하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은 무엇인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가장 친절한 해설자인 엥겔스가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 "<<선언>>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 사상은 이런 것들이다. 각각의 역사적 시대들의 경제적 생산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사회 구조가 이 시대들의 정치사와 지성사의 기초를 이룬다." - <<공산당 선언>> 65쪽. (이런 문장은 마땅히 외워놔야 된다. 그래야 삶의 배수의 진이 마련된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이다. 먹고 사는 방식부터 본 다음에 그 시각을 가지고 문화를 파악하든지, 개인을 이해하든지 한다는 소리다. 역사적 유물론 소리 한다고 갑자기 몸통이 빨개지는게 아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빨갱이 사냥한 박정희야 말로 '역사적 유물론자'이다. 우선 먹고 살고 봐야지 민주주의건 뭐건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그에 따라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의 해체 이래로) 역사 전체는 계급 투쟁의 역사, 즉 사회 발전의 다양한 단계에서의 피착취 계급과 착취 계급, 군림당하는 계급과 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이를 완화된 투쟁론으로 이해해도 되고 강력한 투쟁론으로 이해해도 된다.

 

* Eric Hobsbawm' introdution. Ⅲ

 

세번째 섹션은 <<공산당 선언>>이 오늘날에 갖는 의의를 다루고 있다.

 

첫번째 의미 :

 

"1998년에 그것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선언은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 새로운 독자는 이 놀라운 팜플렛이 가진 열정적인 확신, 집중된 간결함, 지적인 문체의 힘에 압도되지 않을 수가 없다."

 

- "집중된 간결함" - 전라도 사투리 중에 '쟁여넣다'란 말이 있다. '꾹꾹 다져서 눌러 넣다'는 뜻이다. A4 10매 분량의 글을 5매로 줄이고 1매로 줄이고 한 문장으로 줄이는 것, 그것이 쟁여 넣는 것이고 집중된 간결함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당 선언>>이 이렇게 쓰여질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1줄에서 5줄로 된 짧고도 명백한 문단"으로 쓰는 고도의 문체 전략을 짰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30살, 28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 정도의 문체를 구사했다는 것은 그들이 보통의 교양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각주 12, 13번 참조)

 

각주 12번 직역 - 지배계급이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는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그들의 족쇄 말고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

 

두번째 의미 :

 

 "선언에 힘을 준 것은 두가지였다."

 

- 1)  "자본주의가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고 있었는데도 이 생산양식은 영원한 것도, 안정된 것도 "역사의 종말"도 아니며, 오히려 인류의 역사에서 일시적인 단계일 뿐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1848년은 자본주의의 황금기이다.

 

역사의 종말, 종말: Ende - > 끝이라는 뜻도 있으나 목적이라는 뜻도 있다. 즉 역사가 그 목적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 2)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인 장기적 역사적 경향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나갈 것인가를 전망했다는 뜻으로 예언적 의미를 갖는다.

 

세번째 의미 :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는 하나 마르크스가 저술하던 1848년이 어마어마한 발전 단계는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나아갈 장기적 방향을 파악했다.

 

마르크스의 한계 :

 

마르크스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선 그의 한계점도 명확히 알아 두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마르크스를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이지 마르크스를 위해서가 아니다. 숭배하는 것은 마르크스교 신도나 할 일이다. 마르크스를 나를 위해서 읽으려면 그것을 상식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한 그의 한계를 알기 위해 노력해 봐야 한다.

 

* Eric Hobsbawm' introdution. Ⅳ

 

"어떤 경우에든 선언이 상상했던 자본주의의 전복은 인구의 다수를 프롤레타리아로 변환시키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치적 계급 운동으로 조직화 되면, 다른 계급들을 주도하고 그들의 불만을 그 자신이 결집하여 "막대한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른 막대한 다수의 자립적인 운동"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이란 가정에 달려 있다."

 

흔히 빈부격차를 얘기할 때, 20:80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20:80을 넘어서 5:95가 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절대 전복되지 않는다. 인용문에서 '자립적'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각주 16: 독일어 "스스로를 국민적인 계급으로 고양시킨다sich zur nationalen Klasse erheben" (여기서 '국민적'라는 표현을 '보편적'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따르면 5대 95가 되어 PT가 다수가 되어도 이 95가 고양erheben 되지 않으면 자본주의 전복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자신이 PT임을 자각한 다음 그러한 자각을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화하는 과정을 통해 의식이 고양되어야 비로소 자본주의 전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양erheben' 좀 고리타분하게 말하면 의식화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무리 과학이라 해도 과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양을 시키는 이들이 PT의 유기적 지식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PT들은 부르주아의 유기적 지식인들의 책 - 이를테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나 공병호의 책들 - 을 보면서 즐거워 한다. 이런 점을 중요시한 사람이 안토니오 그람시이다. 그람시가 태어난 이탈리아는 독일이나 러시아와는 달리 봉건적 의식이 뿌리깊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의 <표트르대제와 서유럽>을 읽어보라. "성급한 유럽화가 러시아 사회 구조에 위태로운 단절을 초래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표트르는 농노 신분에 얽매인 수백만 농민들의 이익을 무시했다. 징병과 세금으로 그들을 파멸시켰고, 결핍과 무지 속에 빠져들도록 방치했다. 그의 개혁으로 이익을 얻은 것은 상층 계급뿐이었다... 이미 표트르 대제의 치세 중에 두 부류의 러시아 국민 사이에 상호 이해의 결여와 심각한 간극이 생기기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원인 중 하나는 분명 이 균열이었다." 러시아의 사회계급은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중간층이 없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자 기존체제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반면에 서유럽은 중간층이 매우 두터웠고 이를 부르주아 계급을 보조하는 유기적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서유럽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도 그러하다. 외국에 유학가서 학위 받아온 사람들의 내면에도 '싸가지 중심주의'가 자리한다. 나이 밖에 내세울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나이 앞세우는 사람처럼 가진 거 없는 사람도 없는 법이다.   

 

'고양'과 같은 의식적 측면을 고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려 한다면 정치경제학적 분석뿐만 아니라 고양과 같은 의식의 측면에 대한 연구가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 결정론에 빠져버린다. 말인즉 "계급의식적 노동계급"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 강의를 들어서 자본주의 전복 운동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자기자신이 사회물질적 생산관계 속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있는가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의 계급적 위치만이라도 명확하게 알고 있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 수 있다.

 

"'마르크주의자'가 되기 이전의 마르크스가 채택한 공산주의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발전에 대한 분석이 아닌 인간 본성과 운명에 대한 철학적 - 사실상 종말론적인 - 논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공산주의는 철학적 사상이지 사회과학적 사상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이렇게 해석하면다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생기게 된다. 먼저 밝은 면은 마르크스 사상의 철학적 힘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어두운 면은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학적 분석이 마르크스의 철학적 부분인 공산주의와 기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자본>>에서 설파하는 정치경제학을 열심히 읽었다 하여 그가 공산주의의 지지자가 될 필연적인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자본>> 열심히 읽으면 월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가 가능해진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전반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는 계급이라는 생각 - 그 때 이후로 마르크스에게는 근본적인 생각 - 은 처음에는 '관찰의 결과라기 보다는 철학적 연역(철학적 명제, 테제)으로 나타난다.'" - '연역'을 테제라 읽어도 된다. 곧 사회과학적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철학적 테제라는 뜻이다. 이것이 공산당 선언의 두 번째 한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골적인 이해관계 ... 유념해야만 할 것이다." - 오늘날의 상황과 마르크스주의를 연결시킨 부분.

 

* Eric Hobsbawm' introdution. Ⅴ

 

- "사실상 논증을 결정론적으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 정치적 행동의 영역이 놓여있다."

 

<<공산당 선언>>에 대한 홉스봄 자신의 해석이다. 말하자면 <<공산당 선언>>을 오늘날의 상황과 대조해가며 읽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홉스봄의 입장이 상당히 모호하다. 홉스봄의 의견에 공감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는 각자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다음 주부터는 <<공산당 선언>> 본문으로 들어간다. 하루에 잘 해야 2페이지 정도를 꼼꼼하게 읽어 나갈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영어판이나 독어판으로 미리 읽어오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

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 

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 

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가 깃들인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 

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 

숲과 나무에 깃든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 쉬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반생을 보냈다 





 


나는 너무 오래 햇볕을 만졌다

이제 햇볕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

성사(聖事)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 

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 

나는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한다.





 


 

Era / Davino  
글 / 이기철
    
편집 / 강재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슴으로 느껴라     -글쓴이: 헬렌 켈러


태양을 바라보고 살아라.
그대의 그림자를 못 보리라.

고개를 숙이지 말라.
머리를 언제나 높이 두라.
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라.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고통의 뒷맛이 없으면 진정한 쾌락은 거의 없다.
불구자라 할지라도 노력하면 된다.
아름다움은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다.

그대가 정말 불행할 때
세상에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
그대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
마음을 혼란 시키는 내적 갈등의 대부분은 인생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과 지금과는 다른 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합니다.
일상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마음을 여는 법을 터득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괴롭혔던 많은 문제들이 더 이상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닌 것이죠.
인생은 전투가 될 수도 혹은 자신이 공 노릇을 하는 탁구 시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당하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돼보세요.


출처 : 어울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억력 좋아지는 손가락 체조


평소에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건망증에 잘 걸리지 않는다. 기억력이 떨어졌을 때 혼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손가락 체조를 15~20분씩 하루 3번 해주면 가벼운 건망증에 효과적이다.

한 손의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잡고 위로 힘있게 꺾어준다. 중지­검지­약지­엄지­소지 순으로 한다.
손가락을 아래로 최대한 내려서 구부리는데, ①과 같은 순서로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연 2005-03-23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꼭 필요한 운동이군요! 퍼감다^^

꼬마요정 2005-03-23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열심히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