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기루 (1978년 데뷔시)
  -김혜순                   


한 방 건너고, 두 방 건너서
사람들이 돌아온다.
불개미 한 마리에 불개미 한 마리가 얹혀서
사각사각 사람들이 돌아온다.
잠시 수그려 보면
여기서 소리들은 잦아들고
잦아드는 소리마다 은밀한 불꽃이 튀긴다


마디말 곤충이 마디말 언어를 낳고
마디말 곤충을 낳고, 낳고, 낳을 때
문 밖에 서 계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한 방 건너고 두 방 건너서
누가 아직도 돌아갈 수 있을까?


거기선 새도록 당나귀들이 떠나고
붉은 꽃 샐비어 지는 향기 하늘 높다지만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바삐바삐 이 방에서 이 방으로
건너 다니기만 할 때 나는 듣는다.
네가 부르던 외마디 가엾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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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08-29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 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물,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어딘가로 또 흘러가네.

 

    - 김혜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전문,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중에서.

 

 




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 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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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 로버트 번즈


옛 친구가 잊혀지랴,
생각나지 않고 ?
옛 친구가 잊혀지랴,
생각나지 않고 ?

먼 옛날을 위하여, 그대.
먼 옛날을 위하여,
우리 우정의 술잔을 들자
먼 옛날을 위하여.

우리는 둘이서 언덕을 달렸고,
실국화를 땄었다.
그러나 그후 오랫동안
고단한 나그네 길 헤매었다.

우리는 시냇물 속에서 놀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러나 그 후 오랫동안
둘 사이엔 큰 바다가 가로 놓였다.

여기에 내 손이 있다. 친구여,
그대의 손을 다오.
그리하여 우리 정답게 술을 들자.
먼 옛날을 위하여.

그대는 그대의 큰 잔을 들고,
나는 나의 큰 잔을 들련다.
우리 우정의 잔을 들자.
먼 옛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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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詩)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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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에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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