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읽으려고 생각하다가 어젯밤에서야 책상맡에 놓은 책은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책읽는수요일, 2012)이다. 작년 아마존닷컴의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지만, 제목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원서의 부제가 '몽테뉴의 삶'이고, 번역서 표지에는 '프랑스 정신의 아버지 몽테뉴의 인생에 관한 20가지 대답'이 보충설명으로 박혀 있다. 몽테뉴의 삶과 사상에 관한 책이라는 얘기인데, 베스트셀러까지? 해답은 '더 타임스'의 리뷰가 말해준다. "몽테뉴 입문서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다."

 

 

 

나로선 '어떻게 살 것인가'란 제목도, 몽테뉴에 관한 책이라는 점도, 몽테뉴의 얼굴이 담긴 표지도(특히의 표지의 톤) 모두 맘에 들기에 바로 주문한 책이다. 덕분에 '책읽는수요일'이란 출판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몽테뉴라고 하면 '에세(essais)'의 창시자로도 유명한데, 몽테뉴 이전에는 그런 장르가 없었다고 한다. 하나의 장르 자체를 만들어낸 책이 <에세>이며 우리에겐 흔히 <수상록>이라고 알려진 책이다. 몇가지 제목이 경합을 벌이긴 했지만 <수상록>으로 안착된 듯싶다. 연구자들은 <엣세>라고도 부르지만. 

 

그런데 <수상록>을 손에 들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이게 상상 이상의 분량이다. 국내에는 손우성 선생의 완역본이 나와 있다(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제목만 여러 번 바뀌었다). 몽테뉴가 1572년부터 1592년까지 20년 남짓 동안 쓴 것인데, 모두 107편의 에세이다. 거기서 끝난 건 뭔가 완결됐기 때문이 아니라 몽테뉴가 거기까지 쓰고 죽었기 때문이다. '시도하다'는 뜻을 가진 '에세예' 동사의 결과물이 <에세>라는 걸 상기하게 된다.

 

<에세>, 곧 <수상록>은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이지만 당연히 두서가 없다.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어떻게 읽을지 말해주는 하나의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책을 주문한 이유다.

 

개인적으로 <수상록>과의 첫 인연은 중3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패널로 나온 이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추천하면서 몇몇 에피소드를 들려주었고('습관에 대하여'가 인상적이었다) 막바로 서점에서 구입한 게 세로읽기로 된 선집이었다. 선집이어도 분량은 웬만한 책 이상이었다.

 

마땅한 새 번역본이나 완역본을 구경하지 못하다가 다시금 몽테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러시아 시인 푸슈킨이 몽테뉴를 읽었다는 걸 알면서부터이다. 몽테뉴 읽기가 '전공' 공부에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에서 두 권짜리 두툼한 <수상록>을 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컬렉터로서 자랑거리의 하나다). 러시아어 제목은 <경험>이라고 돼 있는데, 나는 나중에야 흔히 '경험'으로 옮겨지는 러시아어 단어가 불어 '에세'의 번역어라는 걸 알았다. '해본다'는 뜻인 것.

 

 

 

홋다 요시에의 평전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한길사, 1999)도 좀 뒤늦게 구했다. 오프라인서점에서였다. 지금 확인해보니 1권이 품절로 뜬다.

 

 

 

국내 저자의 책으론 파스칼 전공자인 이환 교수의 연구서로 <몽테뉴의 '엣세'>(서울대출판부, 2004)와 <몽테뉴와 파스칼>(민음사, 2007)이 나와 있고(<몽테뉴와 파스칼>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박홍규 교수의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청어람미디어, 2004)가 몽테뉴에 대한 수상록이라 할 만하다. 그래도 다소 빈곤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데, 마침 사라 베이크웰의 책이 부족한 부분을 꽤 상쇄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의 첫 독서를 <어떻게 살 것인가>로 시작하는 이유다...

 

12. 01. 24.

 

 

 

P.S. 여러 사정상, 그리고 습관적으로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편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이 읽고 있는 책은 프랑스 철학자 뤽 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기파랑, 2008)이다. <미학적 인간>(고려원, 1994) 이후에 소개된 그의 책들을 대부분 갖고 있는데, 읽다 보니 가장 유익해보이는 책이 바로 <사는 법을 배우다>이다. 몽테뉴의 후예답게 서두에서 몽테뉴의 말도 한마디 인용하고 있다. "철학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 말이다. 사실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그건 우리가 죽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방식은 아주 간단해. 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에서 출발하는 거야. 즉, 신이 아닌 인간은 반드시 사멸한다는 사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야.(19쪽)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유한한 존재란 일반론을 특수한 정황에 맞게 고쳐 말하면, 독서인으로서 나는 나의 서재에 유폐된 존재다. 아직 난장판인 방안을 둘러보며 연휴 기간중 책장을 정리하겠다던 계획을 1월말까지로 연장한다. 생각해보니,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대로 읽어보려고 해도, 일단은 오늘치의 정리부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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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고 에릭 라이너트의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부키, 2012)를 사러 서점에 갔다가 손에 든 책의 하나는 금장태의 <다산 정약용>(살림, 2005)이다. 밤에는 오히려 이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작년 여름에 4쇄를 찍었으니까 꾸준히 나가는 셈인데, 사실 다산에 대해서 나는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예전에 한형조의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세계사, 1996)를 읽은 게 마지막인 듯싶으니 십수년 전이다. 그러다가 책이 눈에 들어온 건 나이가 들어서 동양고전과 한국사 쪽에 좀더 본격적인 관심이 갖게 되어서이다. 젊은 시절 마흔 이후로 미뤄둔 독서계획이기도 했지만.  

 

서울대 종교학과 재직했던 저자가 다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조선의 천주교 전래와 박해에 관해 공부하다가 이렇게저렇게 연결이 됐기 때문이다. 우선 이만채의 <벽위편>. 이 책은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했을 때 유교 지식인들과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배척한 사실에 관한 자료집"이라 한다(조선의 천주교 수용에 대해선 조광 교수의 연구서가 나와 있다). 종교학을 전공한 저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책. 이어서 <벽위편>은 마테오 리치에게로 관심을 이끈다. 명나라 말기 중국에서 활동한 이 예수회 선교사가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를 읽게 된 것이다.

<천주실의>는 천주교 교리를 유교 경전의 사상과 조화롭게 만나도록 한 책이다. 16세기 말, 동양과 서양의 두 사상이 본격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는 중요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15쪽)

 

 

어젯밤에 읽은 대목인데, 그래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또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몇 차례 출간된 적이 있지만 현재는 서울대출판문화원에서 나온 <천주실의>(2010)가 정본에 해당한다.

 

 

 

마테오 리치의 다른 책으론 <중국견문록>(문사철, 2011)과 <교우론 외>(서울대출판부, 2000)이 더 나와있고,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산, 1999)이 유용한 평전이다(오래전에 구입하고 완독하진 못했는데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군).

 

금장태 교수가 대학원 과정에서 정약용과 서학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무렵인 1960년대는 다산 연구가 시작되는 단계였다고 한다. 이렇게 진술한다.

당시 북한에서는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1955)이 간행되었으나 당시에는 그 책을 볼 수가 없었고, 남한에서는 홍이섭교수의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1959)가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뒤이어 이울호 교수의 <다산 경학 연구>(1966)이 간행되어 다산 사상의 연구가 시작되는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16쪽) 

 

 

1960년대에는 읽을 수 없었다는 최익한의 책이 작년에 나온 <실학파와 정다산>(서해문집, 2011)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한에서 나온 홍이섭, 이을호 교수의 책은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듯싶다. 아무튼 금장태 교수는 다산과 서학의 관계를 연구의 관심사로 삼았지만 당시에는 다산 사상이 서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공박을 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지금은 대놓고 반박을 당하지는 않을 정도로 다산 사상과 서학의 연관성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상태라고. 그렇다면 저자의 핵심적 관점은 무엇인가.

나 자신이 정약용에게 한발짝씩 다가가면서 뒤이어 깨달은 것은 정약용이 서학의 세계관을 수용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 아니라, 서학의 세계관으로부터 충격을 받고 유교 경전의 세계를 새로운 빛으로 해석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19쪽)

책의 부제가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종합자'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다산을 재조명한 연구서가 백민정의 <정약용의 철학>(이학사, 2007)이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한 책인 듯싶은데, '주희와 마테오 리치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란 부제가 핵심을 요약해준다. 이 책과 함께 금장태 교수의 <다산 평전>(지식과교양, 2011)을 또한 장바구니에 넣었다(알라딘은 오늘까지도 주문이 먹통이다). 다산 평전을 검색해봤지만 의외로 본격적인 저작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다산 평전>만 해도 작년에 나온 책이니 이전에는 어떤 책이 읽힌 것인지 궁금하다.

 

 

 

여하튼 정약용과 마테오 리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는 것. 물론 기념비적으로 방대한 저술을 남긴 다산의 대표작 '1표 2서', 곧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만 갖추는 일도 만만치 않다. 나는 <목민심서> 정도만 챙겨놓고 있는데(<흠흠신서>는 절판된 듯하다), 다음 목표가 일단은 <경셰유표1,2,3>(한길사, 1997)이다.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 2011)까지 가려면 일단은 '다산의 발견'이 먼저일 테니까. 아,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은 '재발견' 이전에도 읽어볼 수 있겠다. 이미 갖고 있는 책이니까...

 

12. 01. 22.

 

 

 

P.S. 한국 유학과 유학자들에 대한 많은 연구저술을 갖고 있지만 금장태 교수의 주된 연구주제는 '종교로서의 유교'이다. 편역서인 <유교는 종교인가1,2>(지식과교양, 2011)란 물음이 주제를 이끄는 물음이다. 찾아보니 최근작으로는 <한국유교와 타종교>(박문사, 2010)도 나와 있다. 제사를 지내는 종가집이라면 '유교'가 갖는 의미가 남다르겠지만, 나의 관심은 일단 공자나 정약용에 머문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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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부랴부랴 원고를 써서 보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책주문을 넣는데, 이런, 책주문조차도 에러가 뜬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라딘은 이제 책주문조차도 거부하는 것인가.

요청 페이지 : http://www.aladin.co.kr/shop/wbasket.aspx?Submit.ChoiceOrder=1
에러코드 : 500
에러 : 'System.Web.HttpUnhandledException' 형식의 예외가 Throw되었습니다.

하긴 어제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들이 하나도 오지 않은 상태라 오늘 새로 주문한다고 해도 연휴가 끝나고 배송되기 쉬울 듯하다. 마음을 접는 게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주문하려던 책은 남경태의 <역사>(들녘, 2008)와 로마사 관련서들이다. <역사>는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1>(들녘, 2009) 반값 할인 광고를 보고 떠올리게 된 책이다. <생각의 역사1>의 역자가 남경태 선생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예전에 한두 꼭지만 읽고 꽂아두었다가 이번에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다시 책상 가까이에 놓은 게 <생각의 역사>다.

 

 

로마사 관련으론 에이드리언(아드리안) 골즈워디의 <로마 멸망사>(루비박스, 2012)가 새로 나온 책이다. 로마전쟁사가 전문분야인 학자로 보이는데, <로마전쟁>(플래닛미디어, 2010), <로마전쟁 영웅사>(말글빛냄, 2005) 등의 책도 쓰거나 같이 썼다.

 

 

골즈워디는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루비박스, 2007)의 저자이기도 하다. 상당한 분량에다가 꽤 비싼 가격의 책인데, 알라딘에는 절판된 걸로 뜬다. 지난주 부산역내 서점에서 보고 구입할까 하다가 그래도 너무 '비싸서' 내려놓은 기억이 있다. 카이사르 관련서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외에도 필립 프리먼의 <제국을 만든 남자 카이사르>(21세기북스, 2009)와 스티븐 단토 콜린스의 <로마의 전설을 만든 카이사르 군단>(다른세상, 2010)을 얼마전에 구입해놓은 터여서 자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 책들을 다 정돈해서 꽂아야 하는 게 주말까지의 일이다. 

 

 

 

카이사르, 하니까 <갈리아전쟁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얼마전에 <갈리아전쟁기>(사이, 2005)를 <내전기>와 같이 구입했고, 합본인 <갈리아전기/내전기>(동서문화동판, 2008)도 같이 챙겼다.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 <갈리아 원정기>(숲, 2012)도 이번에 나오기에 마저 구색을 맞춰놓을 참이다. 그렇게 하면, 카이사르에 대해선 할 만큼 하는 게 되지 않을까.

 

조선사 분야에도 요즘 나름대로 공을 들이고 있는데,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주로 선비와 당쟁에 관한 책과 신분사에 관한 책으로 관심을 좁히고 있다. 이쪽으로는 나중에 다시 다뤄야겠다...

 

12.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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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 중이라 가뜩이나 방안이 어수선한데(주말까지 정리를 끝내는 게 목표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알라딘 페이퍼의 저작권 시비로 더 혼란스럽게 됐다. 알라딘에서는 내일까지 자기 글의 저작권 문제에 대해서 알려주기로 했다. 요즘 쓰는 매체라고 해봐야 경향신문(주간경향)과 한겨레 정도인데, 나는 언젠가 자음과모음의 웹진 연재를 제외하고는 계약서를 써본 일이 없다. 원고료를 받는다고 해서 저작권을 양도하는 것도 아니다(그렇다면 그런 서평들을 모아 서평집을 내는 것 자체가 '위법'이란 얘기가 된다).

 

 

나도 두어 번 경험이 있지만 저작권의 온전한 양도는 특별한 경우이며 계약서에 명시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내가 쓴 글에 대해선 내가 처분권을 갖는다. 똑같은 글을 서로 다른 매체에 싣는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일이 표절이라거나 위법이라는 건 상식에 맞지 않는다. 그런 걸 문제삼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절필할 생각이다.  

 

이번에 알라딘에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는 연합뉴스의 경우 아마도 알라딘에서는 내가 제일 많이 기사를 옮겨오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짐작엔 내가 '유력한' 당사자이다. 대개 주말에만 북리뷰가 실리는 다른 지면과 달리 연합뉴스에는 매일매일 신간 소식들이 올라온다. 나로선 그걸 참고하면서 관심도서의 리뷰를 옮겨놓곤 했다. 대개 책을 구매하기 전에 어떤 책인지 판단하기 위한 자료였다. 판단이야 혼자하면 되는 거지만, 그렇게 스크랩한 자료가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어 약간의 '가공'을 거쳐서 포스팅하곤 했다. 상품페이지에 노출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서재와 즐겨찾는 서재 브리핑에만 노출되게 설정했음에도 그게 저작권법에 저촉된다면, 비공개로 돌리면 그만이다(알라딘에선 이미 그렇게 처리하고 있다).

 

나는 즐겨찾기에서 '연합뉴스'도 이미 삭제했다. 책이 나왔다는 정보를 취득한 정도인데, 그 정도는 약간 더 손품을 팔아 신간 검색을 하면 알 수 있다. 책소개는 출판사 소개를 참고하면 되고. 기사들의 경우 나는 '저작'이라기보다는 '정보'라고 생각해왔다(칼럼은 조금 다른 문제다. 칼럼은 문제의식의 공유 차원이다). '정보 공유'라고 생각했던 게 '저작권 침해'라고 하면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들의 재산과 권리를 열심히 지키라고 할 밖에.

 

 

 

마음을 좀 정돈하기 위한 방책으로 페이퍼를 시작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졌다. 내가 그냥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카테고리가 '로쟈의 컬렉션'인데, 지난달 러시아에 주문했던 책 몇 권을 어제 받았기 때문에 소재가 없지도 않다. 그 몇 권 가운데는 라캉의 '세미나' 20권 <앙코르>와 지젝의 책 두 권도 포함돼 있다. 하나는 <반인권론>이란 팸플릿이고(<뉴레프트리뷰>에 실렸던 글로 계간 <창작과비평>에 번역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론인 <우스꽝스런 숭고의 예술>(2000)이다(지젝의 린치론은 <향락의 전이>에도 들어 있다).

 

 

 

특이한 건 분량인데, 영어본은 48쪽밖에 안 되지만, 러시아어본은 문고본 판형이긴 하지만 166쪽이나 된다는 점. 영어본은 워낙 분량이 적어서 대학 도서관에 신청했을 때도 분량 미달로 신청이 취소됐었다. 한동안은 꽤나 읽고 싶어서 안달했던 책인데, 그렇다고 48쪽짜리를 23,730원(알라딘 가격)을 주고 구입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래저래 보기 어려운 책이다. 한편, 러시아어판은 작년에 나온 때문인지 말미에 <아바타>론도 붙어 있다. '<아바타>: 정치적 올바름 이데올로기의 전략'이란 제목이다.

 

 

 

연휴엔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아바타>까지 질주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12. 0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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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나온 학술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걸출한 두 기호학자의 책이다. 김수환의 <사유하는 구조>(문학과지성사, 2011)는 러시아의 문화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에 대한 연구서이고, 같이 나온 책이 프랑스의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1,2>(문학과지성사, 2011)다.

 

 

 

<사유하는 구조>의 저자 김수환 교수는 국내 유일의 로트만 전공자이기도 한데, 이미 로트만의 <기호계>(문학과지성사, 2008)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연구'를 부제로 달고 있는 <사유하는 구조>는 로트만의 학문세계에 대한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포괄적인 해설서로서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로트만 기호학 번역서로는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 1998) 등을 더 참고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바흐친과 자주 비교되는 거물급 학자이지만 영어권에서도 로트만에 대한 연구는 드문 편이다. <문화와 폭발>(1992)은 1993년 세상을 떠난 로트만의 마지막 저작인데, <사유하는 구조>의 마지막 장도 이에 맞추어 '로트만의 폭발'이란 주제에 할애돼 있다.

 

 

 

사실 한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올해는 로트만의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1,2>(나남, 2011)도 번역돼 나온 터여서 로트만 수용에 중요한 전기가 될 만한 해이다. 아직 소개돼야 할 책, 이미 소개됐지만 절판된 책이 여럿 더 있지만 이 정도면 출발점으론 부족하지 않다.

 

 

참고로, 다른 페이퍼에서도 다룬 적이 있지만 로트만의 영화기호학에 대해서는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2001),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있는집, 2005) 등이 소개됐었다. 영어판 <정신의 우주>는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의 대본이다.

 

 

영화기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메츠는 로트만보다는 9년 늦게 태어났지만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에 나온 논문집 두 권은 <상상적 기표>(문학과지성사, 2009)와 세트로 묶인다. 생전에 여섯 권의 저작을 남겼다고 하니까 얼추 절반이 우리말로 옮겨진 셈이다. 영어로는 아래 두 권으로 갈무리돼 있다(한때 영화학도들의 필독서였다).

 

 

1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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