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무기력증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관심도서에 대한 리뷰기사가 뜨지 않는 것이다. 주목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책들이 어떤 이유에서건(책이 늦게 배부돼 언론리뷰가 다음주로 미뤄지는 경우도 많다) 관심밖으로 밀려났다는 점이 유감이고, 덧붙여, 할일들을 제쳐놓고 이렇게 뭐라도 적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또다른 유감이다. 제 살 깎아먹기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가장 먼저 꼽을 만한 책은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나남, 2011)이다. 공리주의의 원조 철학자이자 법학자의 주저 가운데 하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서도 샌델이 벤담의 공리주의를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인용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개인적으론 벤담과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의 책이 번역되지 않는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책이 번역됨으로써 갈증의 일부는 해소됐다(얼마나 읽히는지는 별개이지만). 1789년에 초판이 나오고 1823년에 신판이 나온 책의 첫 장에서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쾌락이라는 두 주인에게서 지배받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일은 물론이요 무엇을 행해야 할까 짚어내는 일은 오로지 이 두 주인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시작하여 벤담은 도덕의 과학과 입법의 원리를 이끌어낸다. 이게 '대단한' 과업으로 보인다면, 적어도 '신기한' 작업으로 여겨진다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일독해볼 만한 책이다.  

한편, 역자는 머리말에서 "지성사의 위대한 고전 하나를 한국 최초로 완역해냈다는 사실에 보람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고 소감을 적었는데, 최초의 '완역본'은 맞겠지만 최초의 번역본은 따로 있었다. <도덕 및 입법의 제원리 서설>란 제목으로 휘문출판사의 세계 대사상 전집 가운데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70년대에 나온 책이다). 오래전에 어디선가 책을 보고 이런 책도 번역돼 있구나라고 무심하게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면 <자유론>, <자서전> 등과 합본이었기 때문에 완역이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후에 벤담의 책으론 <파놉티콘>(책세상, 2007)이 출간된 게 전부이다. 그리고 공리주의에 대해서라면 밀의 <공리주의>(책세상, 2007)가 '고전'으로선 유일한 번역이 아닌가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리주의 장을 읽은 다음에 참조할 수 있는 책이 이렇듯 몇권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참고로 대학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일역본은 1928년에 나왔다. 완역본인지 최초 번역본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와는 상당한 격차다(<입법의 원리>로만 한정하면 명치기인 187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두번째 책은 마르틴 브로샤트의 <히틀러 국가>(문학과지성사, 2011)다. 중요한 나치즘 연구서를 지속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역자 김학이 교수에 따르면 "1969년에 간행된 이 책은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생산된 가장 위대한 나치즘 연구서"이다. 그래서 이 책을 모르면 나치즘의 '연구사' 자체를 모르게 된다고. 두 가지 사례로 드는 것이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교양인, 2005)과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교양인, 2008)이다. 팩스턴의 책은 "브로샤트에 의거하면서도 브로샤트를 넘어서려다 실패한 시도"이며, 오버리의 책은 "브로샤트가 이 책에서 개진한 것을 반복한 것일 뿐"이라는 게 역자의 평가다. 요컨대 나치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소홀히 할 수 없는 책이다.   

 

세번째 책은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이다. 이미 마이리스트로 올려놓은 책인데, 방대한 분량의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의 저자로 아렌트의 삶과 사상에 정통한 영-브루엘이 아렌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안내한다. 역자는 <과거와 미래 사이>(푸른숲, 2005)를 번역한 바 있는 서유경 교수다. 새롭게 아렌트를 읽어보려는 독자들에겐 가장 요긴한 길잡이가 아닌가 한다.   

 

네번째 책은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있는 대니 로드릭의 <자본주의 새판짜기>(21세기북스, 2011). '세계화 역설과 민주적 대안'이 부제다('세계화의 역설'이 원제이며, '얕은 세계화'가 저자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책소개를 보고 흥미가 생겨 전작인 <더나은 세계화를 말하다>(북돋음, 2011)까지 같이 주문해서 받았다. 발전경제학이란 관점에서 장하준 교수와 비교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추천의 말에서 이병천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올해는 경제학 책의 번역 사업에서 수확이 좋은 해가 될 듯하다. 그중에서도 대니 로드릭 교수의 책이 번역된 것은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가 번역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자본주의 새판짜기>가 나왔다. 짧은 기간에 그의 책이 연이어 두 권이나 번역출간되었으니, 위기 이후 경제학의 새로운 혁신에 목말라 있는 한국의 '경제 시민'들에게 좋은 선물이 배달된 셈이다. 로드릭의 책은 자유시장주의와 '묻지마' 개방주의가 득세해온 보수적 공론의 장과 한국의 경제학계에 독소를 씻어내는 신선한 해독제와 자극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유료이긴 하지만 '경제 시민'들이라면 받아둘 만한 선물이다.    

그리고 다섯번째 책으로 9.11 10주기를 앞두고 미리 나온 마이클 웰치의 <9.11의 희생양>(갈무리, 2011)도 이주의 관심도서다. 부제는 '테러와의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조나단 사이몬의 추천사가 책의 의의를 잘 요약하고 있다.  

마이클 웰치는 9.11 테러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응이, 그 끔찍한 날이 있기 오래 전부터 미국의 민주주의를 불구로 만들어온, 공포의 동원과 희생양 만들기의 인정화된 패턴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세계화의 또다른 측면으로서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의 양상을 관찰하고 분석한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소수에 대한 두려움>(에코리브르, 2011)도 어제 배송받은 책인데, 저자는 '지구화의 문화적 역동성'을 다룬 <고삐 풀린 현대성>(현실문화연구, 2004)의 저자이기도 하다... 

11. 06. 05. 

 

P.S. 독서인 혹은 독서광을 위한 아이템들도 매주 출간되는 형편인데, 이주의 책은 알베르토 망구엘의 <밤의 도서관>(세종서적, 2011)이다. <독서일기>(생각의나무, 2006)와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의 독자라면 안 챙길 수 없는 책이다. 번역본 표지는 정겨운 느낌마저 주지만 원서의 표지는 좀 으스스하다. 이게 독서의 실상에는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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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6-05 14:54   좋아요 0 | URL
휘문출판사에서도 <도덕과 입법원리 서설>이 번역되어 있더군요.소개를 송건호씨가 썼어요.

로쟈 2011-06-05 15:05   좋아요 0 | URL
제가 잘못 봤습니다. 휘문출판사가 맞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05 15:40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06-05 15:52   좋아요 0 | URL
김학이 씨 같은 학자 덕에 두툼한 나치연구서들을 번역본으로 보게 되는군요.라울 힐베르크 저서도 번역하고...어떻게 이런 엄청난 분량의 저서들을 번역하는지 감탄만 나옵니다.

로쟈 2011-06-06 17:43   좋아요 0 | URL
학자다운 욕심과 사명감이겠지요...

헌내 2011-06-05 20:50   좋아요 0 | URL
옛날에 홍사중 씨의 '히틀러'라는 책이 있었는데...... 꽤 괜찮은 책이었는데 지금은 절판되고 없더군요...ㅠㅠ

로쟈 2011-06-06 17:42   좋아요 0 | URL
'옛날에'라고 하니까 웃음이 나오는데요.^^
 

온라인에서는 주로 '서평블로거'로 지칭되지만, 요즘 들어서 점점 블로거 노릇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야 물론 시간 부족에, 여유 부족이다. 쏟아지는 책에 견주어 책을 읽을 시간과 순수한 블로깅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에, 이런저런 상념과 블로깅 아이템은 줄지 않거나 심지어 늘기까지 한다. 그 사이가 벌어지고 있기에 어려운 것이고, 엄살을 조금 보태면 '죽을 맛'이다. 게다가 언제까지 '블로거 노릇'을 할 거냐는 내면의 투정도 가끔은 '경고'로 들린다.   

예전 같으면 오늘 같은 주말에 약간은 여유를 내서 좀 '재미있는' 글도 올려놓고 하는 것이 기분전환 거리였지만 지금은 손도 굳었을 뿐더러 의욕도 예전 같지 않다. 어제 이번주 <시사IN> 출판면의 '아까운 걸작' 란에서 프랑스 드 왈의 <보노보>(새물결, 2003)에 관한 얘기를 읽다가 '품절된 책'들에 대한 페이퍼를 써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에너지'가 딸린다. 마치 사진 속의 보노보의 표정을 거울로 보는 듯하다.   

새물결의 조형준 주간은 이 책을 두고 "왠지 대단한 물건이 될 것이라는 나의 직감이 여지없이 빗나간 몇 권 되지 않는 책"이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검색해보니 이미 품절이다. 다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첫 운명을 다한 책인 것. 돌이켜보니 나도 출간 당시에 서점에서 들춰본 기억이 있는데, 너무 고가의 사진집이어서 엄두를 못낸 기억이 난다(당시에 35,000원이었으면 지금 체감으론 50,000원 이상이다). 그래도 예전보단 지금 자금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니 중고로라도 구해둘까 생각중이다.  

<보노보>란 책이 꼬투리가 돼 떠올린 책은 나폴레옹 샤농의 <야노마모>(파스칼북스, 2003)이다. 아마존 오지의 아노마모족에 대한 책이다. 이 또한 관심도서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로 구입하진 않았고 그래서 주저하는 사이에 품절된 책이다. 아예 출판사가 문을 닫은 듯하다. 다행이 이번에 찾으니 알라딘 중고샵에 책이 나와 있길래 바로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중고샵에서라도 구하려는 책의 하나는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생태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0)다. 저자의 책은 이후에도 여러 권 나왔는데, 하필 이 책만 품절 상태다(출판사의 사정이 어려운 것 같다는 인상은 든다). 아무튼 그때 그때 챙겨놓지 않으면 이렇듯 나중에 아쉬운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어떤 책이 있을까?

    

현재 가장 많은 뉴스를 쏟아내고 있는 지역이라면 중동일 텐데, 그런 시사적인 관심에서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아자르 나피시의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한숲출판사, 2003)이다.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어디에 둔 줄 모르고 있으니 절반은 실종도서이고, 다시 구하려고 해도 이미 절판된 책이다(중고샵에는 나와 있다). 이란의 격동기에 테헤란에서 처음엔 대학에서, 나중엔 은밀하게 영미문학을 가르쳤던 저자의 체험담을 담고 있다.  

중동과 이슬람 지역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에서 오늘 당일 배송으로 주문해 받은 책은 제럴딘 브룩스의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뜨인돌, 2010)과 하이다 모기시의 <이슬람과 페미니즘>(프로네시스, 2009)이다. 물론 이 두 권은 따끈따끈하거나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책들이다. 하지만 5년 뒤를 장담할 수 있을까?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보태자면, 이슬람, 조금 좁혀서는 이란의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새만화책, 2009[2005])부터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하기야 이미 널리 알려진 만화이고 많이 읽힌 책이니 나 혼자 '뒷북'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만화책을 선호하지 않는 탓에 안 읽고 있다가 이번 이슬람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읽게 됐는데, 기대 이상이어서 아예 저자의 <바느질 수다>(휴머니스트, 2011)까지 손에 넣었다...   

음, 써놓고 보니 '컬렉터의 일기' 같은 느낌도 주기에 '로쟈의 컬렉션'으로 분류해놓는다. 하긴 오늘 오전엔 지난 달에 모스크바에서 부친 책이 도착하기도 했다(절반 가량인 60권은 들고 들어왔었다). 보름이 걸린 셈인데, 5킬로짜리 여섯 꾸러미에 나눠 포장된 책 49권이다(대략 30만원 가량의 발송비용이 들었다). 꽂아놓을 곳이 없어서 방바닥에 쌓아두긴 했지만 마음은 그런대로 흡족하다. 이 책들에 대한 얘기도 늘어놓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힘에 부친다. 볕이 더 좋은 날을 기다려봐야겠다... 

11.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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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님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
    from 빵가게 재습격의 책꽂이 2011-03-05 23:16 
    요 몇 년간 매일진행되었던 행사(?)를 꼽으면 로쟈님 서재에 들리는 것이었다.내 서재엔 들어오지 않아도 로쟈님 서재는 하루에 한 번 꼭 들려본다. 나만 유별난 건 아닐거다. 알라딘 마을엔 저공비행에 '중독된 사람'들이 꽤 많을테니.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던 때를 되돌려보면 로쟈님이 유난히 바빠진 게 사실이다. 연재하는 글도 늘었다. 강연 소식도 늘었고 때때로 등장하는 책이나 번역물도 자주 눈에띈다. 좋은 일인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바쁜 일정때문에 생기
 
 
달담이와Anne 2011-03-05 22:45   좋아요 0 | URL
로쟈 선생님의 애환이 느껴져요. 음, 왠지 저도 함께 씁쓸하네요!
외딴섬에서 살아가는 저에게 선생님 블로그는 오아시스인데요.헤
빠이팅하십시오!아자!

로쟈 2011-03-06 10:08   좋아요 0 | URL
누구나 모든 일에서 겪는 피로와 푸념이지요.^^;

비로그인 2011-03-05 23:15   좋아요 0 | URL
음, 아, 저, 그.... 요즘 말할 때마다 이러고 있습니다 제가 ㅋㅋ
'보노보' 사진을 보니 정말 심난해지는군요.
'죽을 맛'이라시니 더 심난해지구요.
저야 저 만화의 여성처럼 꽥 소리라도 지르면 어느 정도 풀릴 일이지만
로쟈님의 상황은 그렇지 못한 듯싶어 또 심난해지네요... 에휴~

로쟈 2011-03-06 10:08   좋아요 0 | URL
그게, 음, 저, 엉덩이의 문제이기도 하군요.^^;
 

지난 12월 프랑스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 전집의 하나로 <문학의 공간>(그린비, 2010)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철학자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인간사랑, 2010)가 출간됐다. 낭시의 책은 12월 30일이 발행일자다. 2010년의 '마지막 책'이 아닐까. 책을 손에 든 건 엊그제이고 예전에 구해놓은 영역본도 어제 책장에서 찾았다. 다른 독서계획이 잔뜩 밀려 있어서 언제 차근차근 읽어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짝'은 맞춘 듯해서 흡족하다.  

  

'짝'이라고 한 건 블랑쇼와 낭시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를 보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두 권 모두 역자는 박준상 교수다.  

   

블랑쇼 연구서로 <바깥에서>(인간사랑, 2006)를 이미 펴냈고, 예술론이자 타자론으로 <빈 중심>(그린비, 2008), 그리고 블랑쇼 전집 번역으로 <기다림 망각>(그린비, 2009)을 펴냈다. 앞으론 블랑쇼란 이름과 함께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될 '전문가'이다.   

국내에는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0), <미래의 책>(세계사, 1993) 등으로 처음 소개가 됐지만(그의 소설 일부가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돼 나온 건 있다), 블랑쇼란 이름을 접한 건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에서였다. 그가 중요하게 다룬 20세기 후반의 비평가 네 사람이 사르트르와 바르트, 바슐라르, 그리고 블랑쇼였기 때문이다. 내게 각인된 블랑쇼의 키워드는 '죽음' '부재' '침묵' 등이다(푸코는 '바깥'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또 조교시절 일로, 대학원에 진학하려다 그만둔 한 후배가 가장 좋아하는 비평가가 누구냐는 나의 질문에 '블랑쇼'라고 답해서 놀란 적이 있다(그는 다소 침울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 후배 또한 블랑쇼란 이름이 연상시켜주는 이가 됐다. 그리고 세번째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다.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제목을 들뢰즈 표현에서 따왔다고 하셨는데, 비평을 보면 이 외에도 철학자, 평론가들의 차용이 많이 나오거든요. 사유의 돌파구가 된 사람은 누구였나요?

"마음 속에 항상 들어있는 사람은 두 명이에요. 벤야민과 모리스 블랑쇼. 두 사람이 쓴 책은 20대 때 읽기 시작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죠. 지금도 첫 구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 왼손에는 벤야민, 오른 손에는 블랑쇼를 들어요.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긴 합니다만, 동세대 중에는 들뢰즈 보다 바르트에 더 손이 가고요."   

하지만 아직 나는 '나의 블랑쇼'를 갖고 있지 않다. <문학의 공간>을 예전에 숙독해보지 않아서이다. 나는 그가 좀 비의적이고, 너무 은둔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정치평론 1953-1993>(그린비, 2009)은 그러한 인상을 재고하도록 요구한다. 해서 <정치평론>을 경유하여 <문학의 공간>으로 재진입하는 게 올 상반기 독서계획 가운데 하나다. 문학을 '다시' 읽는 계기나 영감 같은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모리스 블랑쇼에 다가가기...  

11.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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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7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1-07 13:58   좋아요 0 | URL
사진 속 인물이 블랑쇼인가요? 워낙 은둔의 삶을 산데다 책에 자신의 사진을 싣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미남형이네요. 생전에 유일하게 너나들이한 친구가 레비나스였다죠? 이래저래 독특한 사람이네요^^

로쟈 2011-01-08 09: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래도 국내에선 알게 모르게 매니아 독자들이 있습니다.^^
 

이번주 관심도서는 어제 구입한 W.J.T. 미첼의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그린비, 2010)이다. 부제는 '이미지의 삶과 사랑'. 저자는 시카고대학에서 영문학과 미술사를 동시에 강의하고 있는 드문 경력의 소유자로 대학원 시절 내러티브 이론에 관한 편저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이다. 국내에는 <아이코놀로지: 이미지, 텍스트, 이데올로기>(시지락, 2005)가 소개됐었다.

 

두번째 관심도서는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사이언스북스, 2010). 저명한 개미학자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가 펼치는 '생명사랑'론이다. <생명의 편지>(사이언스북스, 2007), <생명의 다양성>(까치글방, 2005)과 같이 '세트'로 묶을 만하다. 바이오필리아 3종 세트다.

 

역사분야쪽으론 앙리 피렌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삼천리, 2010)가 있다. 소개에 따르면, "유럽 중세의 개막을 아주 새롭고 독창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게르만의 침입'을 통해 5세기 무렵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했다고 보고, 유럽의 기원을 실질적으로 게르만족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생겨난 개념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저작이 바로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이다."   

역자는 이렇게 거든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의 역사학적 가치는 '폭발적인 연구를 유발한' 점에 있다. “피렌이 없었더라면 중세 초기의 경제사와 관련된 역사서술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피렌 이후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은 필독서이다. 중세 초기의 많은 연구서들이 피렌의 저서를 출발점으로 한다." 즉 중세초기 연구의 기폭제가 된 저작이라는 것. 그 성격이 문제적인 것인지, 고전적인 것인지는 좀더 확인해봐야 알겠다. 앙리 피렌(피렌느)의 책으론 <중세 유럽의 도시>(신서원, 1997)이 출간됐었다. 샤를마뉴에 대해선 발췌역이지만 아인하르트의 <샤를마뉴의 생애>(지만지, 2008) 등도 소개돼 있다.  

 

끝으로 남성중심적 고고학의 편견을 깨는 책, <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알마, 2010). 원제는 '보이지 않는 성'이다. 그건 물론 여성을 가리킨다. "선사시대 사냥은 남자들만의 세계이며 여자들은 기껏해야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식물을 채집했을 것이라는 게 그동안의 통념"이었고 저자들은 그걸 깨뜨리고자 한다고. 덕분에 떠올리게 된 책은 로잘린드 마일스의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동녘, 2005). "최초의 여성이 등장한 때부터 현대까지 세계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쓴 세계사."이다. '보이지 않는 성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지방으로 강연을 가기 전에 급하게 몇 자 적는다. 몇 권만 꼽았을 뿐이지만, '전업'이 아닌 이상 이 책들을 다 읽을 순 없고, 일부는 눈요기로 때워야 할 형편이다(<바이오필리아>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는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식탁'으로 가져온 책이라고 해서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10. 1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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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케빈 2010-11-05 11:04   좋아요 0 | URL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 발행연도가 오기되었어요. 2010년인데..

로쟈 2010-11-05 11:11   좋아요 0 | URL
네, 수정했습니다.

무이 2010-11-05 11:10   좋아요 0 | URL
앙리 피렌은 임지현 선생이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의 맺음말에서 언급하며 역사적 시각을 호평했던 학자였고 그 인상이 강해서 관심을 갖게 된 저자인데, <중세 유럽의 도시>와 같은 역자의 번역으로 주요 저작이 한권 더 나왔군요.. 소식 감사합니다^^

로쟈 2010-11-05 11:11   좋아요 0 | URL
어디서 이름을 들어봤다 했더니 그 책에서 읽었네요.^^;
 

지난 6월 일본에서 세상을 떠난 한국작가 손창섭과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뚜르게네프), 그리고 프랑스의 대표적 중국학자 마르셀 그라네의 이름이 같이 묶일 만한 이유는 전혀 없다. 내가 어제 구입한 책들의 저자라는 사실만 빼고는. 추석연휴에 뒤이은 주말이어서 새로 나온 책이 많지 않은데, 그 중 개인적으로 '이주의 저자'라고 꼽을 만한 이가 이 세 사람이다.  

 

먼저 손창섭의 경우엔 <삼부녀>(예옥, 2010)란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1969년말부터 1970년 6월까지 <주간여성>이란 잡지에 실린 소설이라고. <주간여성>은 한국일보에서 펴낸 주간지로 <썬데이 서울> 같은 부류다. 지면을 고려하면 자동으로 '통속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억지다. 사십 내외의 중고품 인간들이 눈앞에 다가온 낙조의 초조감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려본 자위적인 구실에 불과한 것이다. 

서술에 거침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제목의 '삼부녀(三父女)'는 말 그대로 아버지와 딸 둘을 가리키는데, 사십 대 후반의 아버지 강인구와 십 대에서 이십 대로 넘어가는 문턱의 두 딸, 보경, 보연이 주요 등장인물이어서 그런 제목이 붙었다. 이 가족이 좀 특이한 가족인데, 아예 '계약가족'이라고 불린다. "부부 이외의 가족이란 임시 가족일 뿐이다"라는 문구가 '손창섭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뒷표지에는 박혀 있다.  

책을 펴낸 예옥에서는 손창섭의 장편소설로 이미 <인간교실>(예옥, 2008)을 펴냈고, <이성 연구>와 <부부>를 앞으로 출간한 예정이라 한다. 제목에서 모두 부부생활을 다룬 통속소설임이 내비친다. 나는 내친 김에 단편선 <비 오는 날>(문학과지성사, 2005)도 구입했다(표지 사진이 아주 맘에 든다. 비 오는 날 달동네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을 담고 있다). 내년쯤에 강의 커리큘럼에 포함시킬까 생각중이다.   

그리고, 투르게네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열린책들, 2010)이 새로 번역돼 나왔다. 한때 다수의 번역본이 있었지만 범우사판이 품절된 이후엔 강의에 쓸 마땅한 번역본이 없어서 유감스러워하던 차였다. 대학 1학년인가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밋밋하게 여겨졌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이가 조금 먹고, 두번 세번 읽으면서는 매번 감동하게 된다. 특히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게 만드는 건 주인공 바자로프가 죽음의 침상에서, 그가 사랑했던 미망인 오딘쪼바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과 바자로프의 무덤가를 찾은 노부모의 애잔한 모습이다. 티푸스에 감염돼 죽어가는 사람을 황제처럼 방문한 오딘쪼바에게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아, 안나 세르게예브나, 솔직해집시다. 전 이제 끝났습니다. 마차 바퀴에 깔린 거죠. 결국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셈입니다. 죽음이란 오래된 농담이지만 또 누구에게나 새롭지요. 아직은 두렵지 않습니다만... 혼수상태가 찾아오면 끝장입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자,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사랑했다고? 그건 전에도 의미 없는 소리였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은 형체인데 제 형체가 이미 무너지는 중이니가요. 그보다는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기 서 계시는군요..."

작품의 유명한 서두에서 '니힐리스트'로 소개되는 바자로프는 유물론자이기도 해서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사랑이란 감정도 대뇌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라고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에 무너지고 만다. 나는 이 대목을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마지막 자존심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읽는다. 당신에 대한 사랑은 '형체'인데, 그 형체가 무너져가고 있다, 그걸 지금 당신이 보고 있다, 라고 말하는 자존심이다. "사랑은 형체인데"란 말은 예전 번역본에서는 "사랑은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옮겨진 적이 있다. 원어는 'forma'이고 영어의 'form'과 같은 뜻이다. 바자로프가 오딘쪼바에게 건네는 말은 세 대목으로 나뉠 수 있는데, 한 대목만 더 읽어본다. 

"참으로 친절하십니다!" 바자로프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까이, 이토록 젊고 아름답고 깨끗한 당신이... 이 누추한 방에 계시다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오래오래 사십시오. 그게 다른 무엇보다도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최대한 유익하게 쓰시고요. 지금 보시는 게 얼마나 추한 광경입니까. 반쯤 짓눌린 벌레가 아직도 꿈틀거리는 꼴이라니. 그러면서도 생각하는 겁니다. 온갖 일을 해치우겠다고, 절대 죽지 않겠다고! 할 일이 있다고, 난 대단한 사람이라고! 지금 그 대단한 사람의 과업은 그저 가능한 한 흉한 꼴을 안 보이고 죽는 것이지요. 하긴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일이지만요... 어떻든 좋습니다. 지금 와서 남을 의식하진 않을 겁니다." 

바자로프는 자신의 부모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것을 당부하고, 자신과 같은 인물이 러시아에는 불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이튿날 세상을 떠난다. 외아들을 잃은 노부모가 비탄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내 그가 숨을 거두고 온 집안이 눈물과 탄식으로 가득 찼을 대 아버지는 갑자기 광란에 사로잡혔다. "난 하늘을 저주하겠다고 했어!"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찌푸리고 누군가를 위협하듯 허공에 주먹을 휘두름면서 목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 하늘을 저주하겠어. 저주한다고!"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매달렸고 두 사람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사유>(한길사, 2010)에 대해선 이미 포스팅한 바 있지만, 이번주에 나온 가장 묵직한 학술서다. 역자의 해제를 참고하면, 그라네는 "중국사유를 크게 언어와 문자와 주요개념이라는 3대 요소로 종합적으로 보려"고 시도한다. 이렇게 종합적이면서 포괄적인 기획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그라네는 국내에도 소개된 앙리 마스페로와 함께 프랑스에서 현대중국학의 기초를 세운 에두아르 샤반의 제자이며, 아울러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 에밀 뒤르켐의 제자다. 역자는 그의 학문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그라네는 당시 중국에 대한 연구가 주로 사상사적 측면에 국한되어 중국 본연의 사유를 서양의 철학적 개념에 입각하여 재해석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려는 자의적 접근방식을 배제하는 한편, 사회학과 민속학과 인류학 측면에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신선한 생명력'을 아직까지 견지하고 있는 중국문명의 유구한 역사성에 대해 물음을 제기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그의 탐구는 기원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사유방식이 2,00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줄곧 역사의 흐름을 관장하면서 아직까지 현대의 동양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경이로움을 간직한 채 그 이유를 찾아간다.

역시나 역자의 정리에 따르면,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그라네는 중국사유가 서구의 사유와 변별되는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첫째, 중국사유는 순수한 인식을 추구하기보다는 문화를, 과학보다는 지혜의 추구를 궁극으로 삼는다. 둘째, 중국사유는 인간과 우주의 연계를 도모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사회와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다. 셋째, 중국사유는 우주의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질서는 어떠한 법칙에 의해 추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구성요소인 인간과 자연, 사회와 우주의 내밀한 협조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역자인 유병태 교수는 프랑스에서 노신(루쉰) 연구로 학위를 받은 중문학자인데, 현재 파리7대학의 마르셀 그라네 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4)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여러 권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된 줄리앙에 대해선 따로 페이퍼를 쓴 바 있다... 

10.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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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5 11:53   좋아요 0 | URL
<인간교실>의 표지가 참 재미있네요 ㅋㅋ
로쟈님의 강의에 손창섭이 포함될 수도 있다니 제가 무슨 유족도 아닌데 공연히 두근거리네요 ㅋㅋ
예전의 세로조판 전집들을 수년 전에 모두 처분해버렸는데 요즘 후회하고 있습니다. 작품들이야 새로 발간되는 책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이런저런 잡글들 중 다시 읽고 싶은 게 문득 떠오를 때면 난감해집니다. 아무래도 경솔했지 싶어요...
가을 하늘이 시리도록 맑습니다.^^

로쟈 2010-09-25 11:55   좋아요 0 | URL
강의란 게 자세히 읽도록 강제가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