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라미닌 > 마 6:25-34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마 6:25-34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성공하면 이름이 알려집니다. 유명해지면 인기 연예인을 섭외해가듯이 여기저기서 모셔갑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입니다./ 성공하면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면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더 큰 차로 바꿔 타고, 더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고, 더 비싼 옷을 쇼핑하러 다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 다닙니다. 사람들은 성공 병에 중독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 병에 중독되었으나 예수님은 성공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오늘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보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라고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하여 내일까지 쌓아놓고 먹을 양식이 아니라 오늘 당장 허기를 채울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사막에서 살다보니 실컷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배라고 채우고 싶어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옷이라고는 달랑 속옷과 겉옷 한 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제비를 뽑아 옷을 나눠가졌습니다.(마27:35) 예수님이 살던 당시 사람들은 오늘 먹을 양식과 오늘 마실 물과 오늘 입을 두벌 옷이 있다면 성공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표를 먹고 마시고 입는 것-현세적인 성공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공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예수님은 새는 봄에 씨를 뿌리지도 않았고, 여름에 땀을 흘려서 가꾸지도 않았고, 가을에 추수를 하여 창고에 쌓아놓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먹여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새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었다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새가 농부들이 뿌려놓은 농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사는 있었고, 사냥꾼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보도는 있었지만 굶어죽었다는 뉴스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한갓 새조차도 하나님께서 먹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먹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공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들에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를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8-29)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는 예쁘게 차려 입으려고 꾸미지도 않았고,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길쌈도 하지 않았지만 온갖 명품을 차려 입은 솔로몬 왕보다 아름답게 차려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자연미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한낱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공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와 같은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한 차원 높은 것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오늘 먹을 양식도 없고 오늘 마실 물도 없고 오늘 입을 두벌 옷도 없는 사람들이 염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먹을 양식이 풍족히 있습니다. 라면을 먹느냐 스파게티를 먹느냐가 다르지 내일까지 먹을 양식이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마실 물이 넉넉히 있습니다. 생수를 마시느냐 델몬트 주스를 마시느냐가 다르지 내일까지 마실 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오늘 입을 옷이 쌓여 있습니다. 시장 브랜드를 입느냐 백화점 브랜드를 입느냐가 다르지 사시사철 입을 옷이 옷장에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차원 높은 것을 멀리하고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다 보니 40대와 50대의 여성대비 남성사망률이 세계 1 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차원 높은 것을 외면하고 현세적인 것에 얽매이다보니 해마다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무엇에 두어야 할까요? 현세적인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인생의 목표를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두지 말고, 우리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 문제)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룰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두면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도 해결해 주십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철새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갔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옥수수 밭이 보였습니다. 철새들은 옥수수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철새들은 기운을 차리고 다시 남쪽 나라로 날아가려고 채비를 차렸습니다. 그러나 철새 한 마리는 옥수수를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다른 철새들이 겨울이 다가온다고 설득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다른 철새들은 하는 수없이 남쪽 나라로 날아갔고 철새 한 마리는 옥수수를 배불리 먹으며 여유를 부렸습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다른 철새들처럼 남쪽 나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옥수수를 두고 떠나기가 아까워 하루하루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다 눈이 내렸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그제야 남쪽 나라로 날아가려고 날개를 퍼덕였으나 옥수수를 먹고 너무 살이 찐 나머지 날아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결국 눈에 파 묻혀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철새 한 마리는 눈앞에 있는 옥수수에 집착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연연했습니다. 그러다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철새들은 저 너머에 있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했습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먼발치를 내다봤습니다. 그러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나면서 새끼도 낳고 봄이 찾아오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새 한 마리처럼 눈앞의 성공에 얽매인다면 하나님도 잃고 자신도 불행하게 되지만 다른 철새들처럼 먼발치를 내다본다면 하나님도 얻고 자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현세적인 성공에 집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시겠습니까?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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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말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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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7호 2007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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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2-1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씩씩하니 2007-02-1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님 그거랑 반대여도,,,음...그럴수 있는거지요???그쵸??

마노아 2007-02-1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그 반대의 경우도 우린 얼마나 많던가요. 그래도 잘하고 있는 거예요.T^T

2007-02-12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2-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아자아자 화이팅이에요^0^ 식사 맛나게 하고 오셔요~
 
 전출처 : 라미닌 > 요 1:43-51 거짓이 없는 나다나엘

 

미국의 어느 마을에 사람의 얼굴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불렀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언제나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 어른이 되면서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갈 거라는 예언이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큰 바위를 닮은 훌륭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사람은 도시로 나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돈을 모을 줄은 알았으나 베풀 줄은 모르는 탐욕스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세월이 흘러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사람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강한 의지는 있었으나 따뜻한 미소는 없는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사람은 유명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연설은 잘 하였으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우울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시 세월이 흘러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사람은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름다운 시를 쓸 수는 있었으나 더러운 현실에 파묻혀 사는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을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며 살았던 ‘어니스트’는 해질 무렵이면 숲속의 공터로 나가 사람들에게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시인도 어니스트를 따라갔습니다. 어니스트의 이야기는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보다 어니스트의 설교가 훨씬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시인은 큰 바위 얼굴을 둘러싼 흰 구름과 어니스트의 이마를 덮은 흰 머리카락을 보았습니다. 흰 바위 얼굴과 어니스트의 얼굴이 똑같았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흰 바위 얼굴과 어느스트의 얼굴을 보고 놀랐습니다.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은 돈을 많은 번 부자도 아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도 아니고, 연설을 잘 하는 정치가도 아니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도 아니고, 착하고 정직하고 친절하고 인자한 어니스트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다나엘 호든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 이름이었습니다. 마태복음(10:3)과 마가복음(3:18)과 누가복음(6:14)에는 바돌로매라고 나옵니다. 바돌로매가 나다나엘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과 단짝 친구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인 빌립이 전도하였습니다.(45절)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구약성경 신명기 18장 15절-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사람을 기다렸듯이 빌립과 나다나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빌립은 그 메시야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반박하였습니다.(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구약성경 미가서 5장 2절을 보면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남부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한다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북부인 나사렛출신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출현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지만 유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나사렛에 사는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신고를 하러 유대 베들레헴에 갔다가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출생 장소를 몰랐기 때문에 메시야가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 몰랐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라 메시야가 아니라고 오해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니라 세계 4대 성인 정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아셨습니다. 빌립은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이 누군가 궁금하여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감탄하셨습니다.(47절)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과 간사한 것은 대조를 이루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은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창27:35,31:26) 구약성경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날이 새도록 씨름하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다리를 절게 하고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고쳐주었습니다. 야곱은 간사한 사람에서 이스라엘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야곱처럼 간사하지 않고 정직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처럼 정직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가 숲속의 공터에서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듯이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서 성경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으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누군지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총을 선행은총이라고 불렀습니다.(롬5:8)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였을 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몰랐으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아시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49절)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사렛 사람(46절)이라고 불렀다가 하나님의 아들(49절)로 고쳐 불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신앙이 성장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51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여기서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교통수단은 사닥다리(계단)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은 에서의 축복기도를 가로채고 외삼촌댁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돌을 베개로 삼고 누어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계단)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사한 야곱에게 하늘나라로 오르내리는 사닥다리를 계시하셨듯이 정직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오르내리는 교통수단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계단을 밟고 교회를 올라오듯이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계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살갗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듯이 교인이 철이 들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을 위해 우리를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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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

오마이 뉴스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기고문을 옮겨놓는다. 작가는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있다”는 발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론 6월쯤에 그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모아야 될 형편인데 유익한 참조물이 되겠다. 물론 작가의 '총대'는 올 12월에 가서야 보다 확연한 윤곽과 결말이 드러날 듯하지만...

 

오마이뉴스(07. 02. 05)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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