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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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을 처음 만난 것은 '풍금이 있던 자리'였다. 처음 접한 작품이었는데 그 깊은 우물같은 지독한 우울함이 싫었다. 이니셜이 남발하는 인물들도 싫었고,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진행되는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의 메아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외딴방을 읽은 후 너무 우울해서 싫어졌다고 이 책 가지라고 한 지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었다. 지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더 우울해지기 싫어서 다시 만나지 못했던 신경숙을, '리진'과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결국 다시 만났다. 작품의 출간 간격이 있어서인지, 첫 책에서 만났던 그 느낌이 많이 상쇄되어 있어서 슬프긴 했지만 그때처럼 우울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외딴방'을 만났다.  

각오했던 것보다 덜 힘들었다. 여전히 우울함이 깔려 있고, 슬픈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도 그때처럼 뿌연 안개가 가리고 있지는 않았다. 사건들과 인물들은 좀 더 구체화 되었고 선명해졌다. 그것이 작가가 꺼낼 수 있는 것을 다 꺼낸 것이라고 여겨지진 않지만. 

작품은 두 개의 축을 동시에 진행시킨다. 정읍에서 상경해서 낮에는 구로 공단의 여공으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산업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열 여섯부터 열아홉의 나와, 소설가가 되어 지금 이 '외딴방'을 쓰고 있는 나가 동시에 나온다. 물리적으로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도 넘을 수도 없는 불화의 강이 하나 존재한다. 그 존재는 '희재 언니'로 통한다. 37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 집 3층에 살고 있는 그녀의 1층 집에 살고 있던 희재 언니.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고향도 모르고, 사실은 아무 것도 몰랐을 수 있는 그 언니가 작가의 삶에 그은 획은 무서운 것이었다. 누구라도 쉬이 자유로워질 수 없는 낙인과 족쇄와 천근 같은 마음의 무게를 남겼으니. 

작가가 열 여섯 나이로 공장에 들어갔을 때가 79년이었다. 같이 상경한 외사촌이 열아홉, 그리고 이들 두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준 큰 오빠가 스물 셋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어리고 어린 나이다. 부모의 보호와 그늘이 필요했을 때에 그들은 '산업역군'이라는 달갑지 않은 훈장을 어깨에 이고 지고 부모가, 사회가, 세상이 떠안긴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 힘을 썼다. 시골 집에서는 동네에서 가장 제사 많이 지내는 집인지라 먹을 게 많았고, 마당도 넓고 동네 한 가운데에 있던 풍요로움을 알고 지냈는데,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최하 빈민층이었다. 쉽게 납득되지 않았던 그 체감온도를 스스로 이해시키기도 전에 한 장 연탄과 한 줌의 시금치에 발발 떠는 현실이 그들을 맞이했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작가의 가족 이야기는 '엄마를 부탁해'에서의 내용과 많은 부분 겹친다. 고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장남으로의 막중한 책임에 눌려 공무원직도 포기하고 동생들을 보살폈던 큰 오빠나, 약사가 된 여동생,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엄마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일 것이다. 너무 비좁은 방에서 나란히 누워 자다가 잠결에 오빠를 치는 바람에 야단을 듣고 주머니에 손 찌르고 자던 습관 등도 모두 작가의 실제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 소녀의 이야기도 작가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작가가 된 그녀에게 모교의 한 교사가 여전히 산업체 학교에서 야간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은 참 뜨거웠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었지만 나름의 꿈과 희망과 포부는 야무졌다. 물론 부유한 지역의 아이들이 말하는 꿈과는 차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일.류.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라든가 "의사가 되고 싶어요"가 아니라 "나는 미용기술을 배우고 싶어요", "전문대학에라도 꼭 가고 싶어요"라고 말을 하는 그 아이들의 꿈이 더 작고 가난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으니까.  

작가 신경숙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오래 전 같이 공부했던 하계숙의 전화를 받으면서부터다. 너는 왜 우리 이야기는 쓰지 않냐고. 그때 그 시절을 부끄럽게 여기냐고. 너는 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작가의 목에 걸림돌이 되었다. 뱉어내려고 해도 빠져나가지 않고 무시하려고 하면 통증이 되어버리는 굴레. 작가는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게 맞을 것이다. 그 지독했던 가난과 지독했던 탄압과 외로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재 언니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자신 때문에.  

소설은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 치열한 자기 검열이 됨과 동시에, 그녀의 성장소설도 되어주고, 노동소설도 되어주고 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실체적 사건들을 다루는 현장 르포의 느낌으로도 독자를 만나고 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한켠 충분히 얘기되어지면서 동시에 충분히 비껴가고 있다는 느낌도 주어진다. 평론에서 백낙청 교수가 말했듯이 노동현장에서 일어날 법한 분쟁과 거친 사건들이 채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큰오빠가 어린 동생들을 보호하면서 느끼는 부담감과 답답함, 외로움과 고독의 무게가 참 애틋하게 보였다. 그는 충분히 사랑받고 충분히 기대와 인정을 받고 자란 사람이지만, 장남으로서 받았던 그 사랑은 장남으로서 감당해야 할 업으로 다시 그를 눌렀다. 그 시절 그만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이후에도 많은 장남들이, 장녀들이 그렇게 살았다. 굳이 첫째가 아니어도 가족의 짐을 어깨에 지고서 무거운 삶을 산 사람이 어디 그뿐일까. 가족이기에 아프고, 가족이기에 힘이 되는 그 사연들이 당연히 이해되면서 또 당연하게도 나는 싫었다.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작가의 동네 친구 '창'의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이 작품 속에서 허구적 인물이 등장한다고 하면 그건 창이 아닐까 짐작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창과의 이야기가 가장 진행도 더디고 이야기도 하다만 것처럼 된 것이 아닐까. 창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나'에 가끔 등장하는 '그'도 있다. 터미널까지 그녀를 태워다 주었던. 역시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그런 글쓰기와 전개는 독자를 답답하게도 만드는데, 이제는 그저 신경숙식 화법이라고 이해할까 한다. 말해주지 않는 것을 미뤄 짐작하라는 의도이기 보다 거기까지만 말하고 싶은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실제 연재 기간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진행 시간으로는 1년. 그 시간 동안 신경숙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꺼내고 싶지 않았던 '외딴방'을 수면 위로 올려보냈다.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던 인물들을 다시 꺼내놓았고, 그 사람들과 조우했으며, 그들과 화해를 했다. 그건 그녀의 과거이기도 했으며, 곧 그녀 자신이기도 했고, 그녀의 살아온 시간 모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제 작가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탓이 아니었다는 면죄부와 함께. 

작품 속에서 은사님은 그리 말씀하신다. 너무 많이 쓰고 있다고. 너의 글쓰기는 네 살 파먹기이니, 너무 많이 파내면 네가 아프다고. 

그 말에 동감한다. 그리고 바꿔 말하면 이렇게도 들린다. 그녀의 작품은 매력적이지만 우울하고, 아름답지만 아프다고. 그래서 읽는 독자도 제 살을 파먹는다고. 그러니, 많이 읽으면 내가 아프다고.  

읽으면서, 나는 좋았다. 신경숙에게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제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말자고 말한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만나자고. 그녀의 외딴방이 아닌 나의 외딴방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해진 게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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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6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6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9-08-0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 신경숙이 싫었는데 책만 잡았다 하면 빠져요.

그리고 다 읽고 나면 왜 그리 힘이 드는지..

그래도 신경숙 책 나오면 또 지르고요..

마노아 2009-08-06 23:43   좋아요 0 | URL
그치요? 힘든데도 자꾸 찾게 되는 마력이 있어요.
그리고 또 후회하고, 또 찾고 막 그래요.^^

전호인 2009-08-06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이 아니어서 제 기억에 엄마를 부탁해가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던 듯 합니다.
너무 감명깊게 읽었기에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욕심이 나네요. ^*^

마노아 2009-08-06 23:44   좋아요 0 | URL
엄마를 부탁해는 정말, 헐떡이며 보았던 것 같아요.
그만 봐야지... 하다가도 새로이 소식 들리면 다시 찾게 되는 작가예요.^^;;;

순오기 2009-08-0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읽기가 두려워요~ 많은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 언니 오빠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마노아 2009-08-06 23:4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그 안에 내 얘기, 우리 얘기가 많아서 읽기 벅찰 때가 있지요. 어휴.. 아프더라구요..ㅜ.ㅜ

꿈꾸는섬 2009-08-0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리뷰에요.^^

마노아 2009-08-06 23:45   좋아요 0 | URL
섬님, 감사해요.^^

머큐리 2009-08-0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하고 멀어진지 오래되었지요...그래도 외딴방은 신경숙 소설중 가장 잘 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초기 몇작품들 중에서요 요즘 작품은 읽지를 않아서..) 그런데 왠지 그녀에게는 왠지모를 위화감이 있어요...겨안는 듯하면서 배척하는 듯한 이상한 느낌..뭐라 표현을 못하겠네요...

마노아 2009-08-06 23:46   좋아요 0 | URL
저도 신경숙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닌데, 그 위화감을 느끼곤 해요. 오히려 온몸으로 체험한 그녀가 더 깊은 얘기를 할 것 같으면서 비켜가고, 오히려 훨씬 유복했던 공지영이 더 밑바닥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예인 2009-08-07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를 보니 신경숙의 소설이 일고 싶어지는 군요.

마노아 2009-08-07 02:04   좋아요 0 | URL
책을 읽다보니 많이 사랑 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동시에 기피되는 이유도 알겠구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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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완득이'를 관람했던 공연장은 무대 오른쪽에도 좌석이 있어서 90도 각도로 앉은 관객을 볼 수 있었다. 한 여성 관객의 옆 얼굴을 보았는데 '손담비'라 착각할 정도의 빛나는 외모였다.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한참을 연극 대신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며 부러워 했다. 연예인이 예쁜 건 연예인이어서라고 납득하고 넘어가지만, 일반 대중이 그렇게 예쁘면 배가 아파지는 것이다. 뭘 먹고 저렇게 예쁠까? 하며... 어쩌다가 그 관객이 고개를 틀었고, 그 바람에 정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정면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인공의 기운이 확 끼치면서 어색한 부조화가 깔렸던 것이다. 아, 얼굴에 손을 댔구나... 다시금 연극에 눈길을 돌리면서 나도 참... 했었다.  

많은 소설과 만화와 드라마와 영화에선 멋진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거나 아니면 원수 집안이라는 등 서로의 사랑을 방해하는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등장하지만, 어쨌든 선남선녀였다. 설령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 비해 못 미치는 외모라는 '설정'은 갖고 있어도 실제로 별로 안 이쁜 주인공을 내세우는 경우를 본 일이 없다. 시청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통 대중의 속성이 '예쁜', 혹은 '아름다운' 그녀를 원하기 때문이다.(당연히 아름다운 '그'도 원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아마도 잘 생긴 남자주인공과 지나치게 못 생긴 여주인공을 내세운 첫번째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그냥 못 생긴 게 아닌 '얼어붙을 만큼'의 못 생긴 여자 주인공 말이다.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도 말을 한다. 못 생긴 여자가 잘 생긴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그 여자가 돈이 많은 걸 거라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다 대서라도, 못 생긴 그녀가 연애를 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 든다. 예쁜 그녀가 연애하는 건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으면서.  

그러니, 이 소설 속의 잘 생긴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못 생긴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할 것이다. 그녀는 가난했다. 여상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되어질 외모였고, 정규직으로 입사한 백화점에서 점차 사람이 아닌 화물을 상대하는 직종으로 좌천되고 미끄러지던 입장이었다. 남달리 착하거나 인류 구원의 상징이 될 만큼 정의로운 인물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남자 주인공에게 상처가 있었다. 예쁘고 잘났던 무명의 배우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뜨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기생해왔던 튼튼하고 못생긴 엄마와 자기를 버리고 딴 살림을 차렸으니까. 적어도 그는 미모를 무기로 사람을 짓밟고 이용하고 또 홀리는 것에 대한 혐오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게 다는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작품은 독특한 구조를 취한다. 스무 살의 그가 스무 살의 그녀와 해후하던 어느 겨울 밤의 카페에서 시작되고, 그 날의 이별 후 찾지 못한 그녀를 십 여년 세월 지나서 다시 찾아 헤매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 만났던 열 아홉의 그 때로 돌아가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수를 하면서 백화점에서 주차 안내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거기서 독특한 사내 요한을 만나고 또 그녀를 만났다.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을 그녀가 믿기까지는 꽤 오랜 진통이 필요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상처는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요한의 짧은 귓속말이 인상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몇 번이 확인이 필요할 만큼,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일을 믿을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그녀의 신산한 삶은, 다가온 사랑을 두고서 떠나는 행로를 취하게 만든다.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강풀 작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송이뿐 할머니가 생애 끄트머리에 찾아온 소중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는 마음에 견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인가? 그럴리가... 

없다. 

작가 특유의 줄바꾸기 신공을 따라해 보았다. 쉽게 읽혀서 빨리 빨리 넘어가게 하는 책장이 있는 반면, 박민규 작가의 문장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따라가며 입속의 울림을 되새김하게 만든다. 그 호흡을 놓치면 문장의 참맛을 읽기 어렵다. 그 호흡 그대로. 그 느낌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작품의 엔딩은 놀라운 구조를 취하고 있다. 두 개의 결말은 세 개의 결말로도 읽히고, 그 이상의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뿐아니라 그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촉촉하게 눈도 젖고 마음도 젖게 해주는 작가의 고마운 선물.  

작가는 외모 지상주의가, 물질 만능주의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모두의 불행을 가져오는 지를 소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그것들을 함께 지적해왔던 우리들이 사실은 제일 먼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부끄러움도 함께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것을 떨쳐낼 수 있는 힘도 절대 다수인 우리에게 있다는 진실도 함께.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다.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 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416쪽)

 
   

책 속에는 CD가 한 장 들어 있다. 네 곡의 노래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을 위해서 만들어진 곡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듣고 있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벨라스케스의 그림도 다시 쳐다보게 된다. 왕녀 마르가리타가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는 작고 예쁘지 않은 그녀에게 시선이 간다. 아마도, 앞으로도 쭈욱 그럴 것이다. 이 그림에서 파생된 라벨의 곡도 더 특별해질 것이다. 책의 구성과 느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음악의 제목이 이 소설의 제목에 꼭 맞는 까닭을 결말까지 다 읽고서야 이해했다. 아, 박민규 작가가 너무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작가의 전작들도 사랑해 왔다. 그의 작품에선 자본주의의를 비판하는 서늘함을 촌철살인의 유머와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입장을 품어주는 따뜻한 속내를 보여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이젠 절절한 '사랑'을 얘기하면서 삶을, 세상을, 인간을 노래한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제는 주저 없이 '박민규'라고 말하겠다. 여전히 김훈의 문장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박민규의 따스함을 더 사랑하노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제 함께 꿈꾸어보련다. 자기만 있고, 자신만 알고, 자아는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끝끝내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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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8-03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이 마음에 와 닿아요.^^

마노아 2009-08-03 11:22   좋아요 0 | URL
작가님은 분명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을 믿는 분이라고 믿어요.^^

바이런 2009-08-03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정말 좋은리뷰 잘 읽고가요. 끝까지 읽는데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저도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T_T

마노아 2009-08-03 11:23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해요. 좋은 책은 널리널리 소문내야죠.^^

라로 2009-08-0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다운 리뷰에요,,,,,,,,,박민규의 책인가봐요,,,제목이 엄청 특이하네요,,,,
그런데 책이 무척 두꺼운?????정말 마노아님의 독서력에 입이 딱 벌어진다는~.와

마노아 2009-08-03 12:32   좋아요 0 | URL
앗, 저는 방금 나비님 서재에 다녀왔는데 찌찌뽕이에요!
제목이 독특하지요? 인터넷 연재로 안 보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책이 419페이진가 그래요. 몇 시간 동안 주구장창 읽었는데 지치지도 않을 만큼 재밌었어요. 으하핫^^

글샘 2009-08-03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민규가 다시 삼미슈퍼스타즈 수준으로 컴백한 모양이군요. ^^

마노아 2009-08-04 00:07   좋아요 0 | URL
삼미만큼 유쾌 상쾌 발랄하진 않지만 곱씹어볼 대목들이 많았어요. 이런 글도 쓰는구나...했죠.^^

kleinsusun 2009-08-1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Thanks to를 꾸~욱 누르고 가요.^^

마노아 2009-08-11 01: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클라인수선님^^
오늘 이 책을 소중한 이에게 빌려주고 왔어요. 땡스 투 감사해요~
 
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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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제목에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닮은 일러스트 표지. 사전 정보가 없다면 이 작품이 아관파천 시절 고종에게 매일 새벽 커피를 올린 바리스타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결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제목의 '노서아 가비'는 '러시아 커피'를 의미한다.  

주인공은 역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러시아 말을 익혔다. 나랏 것에는 결코 손대지 않았던 아버지가 청나라 황제의 하사품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머리가 효수되고 열아홉의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홀로 압록강을 건넌다. 청나라를 지나 러시아에 정착했던 그녀가 살아남는 법은 '사기꾼'으로 사는 거였다. 따냐라는 이름으로 그림의 낙관을 위조하는 일을 하였고, 거대하고 광활한 러시아의 숲을 팔아치우는 협잡의 세계에도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이반을 만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기꾼이었던 이반은 좀 더 크게 한 건 할 것을 권했고, 그 손을 잡음으로써 따냐는 좀 더 자유로운 인생을 살게 되지만, 100%에 이르는 신뢰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사실을 그녀가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진 않지만.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해치우려던 일이 틀어지면서 도피하듯 고국에 돌아온다. 동짓날 보름에 박연 폭포 앞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헤어졌던 이반을 만나지 못하고, 대신 독립문 주춧돌을 세우는 자리에서 재회하게 된다. 이무렵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시절이었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전권을 쥐고 있던 때였다. 베베르는 처제 손탁이 아닌 따냐에게 바리스타 일을 맡겼고, 고종을 감시할 새로운 눈으로 그녀를 심어놓는다.  

비극적인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이후 달디 단 커피가 아닌 쓰디 쓴 커피 쪽으로 입맛을 바꿨다. 워낙에 재주 있고 센스 있는 따냐는 고종의 벗으로서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등극한다. 파천 1년 동안 환궁에 대한 목소리는 계속 고조되고 있었고 친러파로 활동하고 있는 이완용과 이반은 이에 위협을 느낀다. 고종의 환궁을 막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고종까지 죽일 각오로. 

작품은 엄청 빠르게, 가볍게 읽히고 넘어간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도 말이다. 망국을 눈앞에 둔 고종은 가련한 신세였지만 그다지 가엾어 보이지 않았고, 따냐와 이반은 서로 사랑하지만 서로 믿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좀 더 깊은 은원 관계가 있었고, 작가는 그것을 명확히 밝혀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랴. 진실이었대도 믿지 않을 것이고, 믿었대도 진실이 아니었을 것을.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매천야록에 실린 고종 커피 독살 사건 때문이었다. 실제 그 사건은 1898년으로 환궁 1년 후 정도지만, 이 작품은 환궁 직전으로 잡아서 설정해 놓았다. 세자와 함께 커피를 들던 고종이 커피에 독이 든 것을 알고 뱉어내지만, 순종은 마시는 바람에 크게 탈이 났던 그 사건. 커피에 들어갔던 것은 치사량의 아편이었다. 커피와 고종 독살 음모를 대륙을 누비던 두 사기꾼과 엮은 솜씨가 유려하다.  

   
 

 내가 전하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이반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건 내가 사기꾼이기 때문이다. 사기꾼은 진실해선 아니 되고 정직해선 아니 되고 일이 끝난 후 같은 곳에 머물러서도 아니 된다. 삶의 원칙을 바꾸면 큰 낭패를 보는 법이다.   -192쪽

 
   

누군가에게 커피는 그저 기호품이고 습관이다. 또 누군가에게 커피는 인생이고 철학이고 사랑이다. 이 작품 속의 커피는, 현란한 카피와 함께 경쾌한 사기극 한 판과 역사적 사실을 접목시켜주는 도구가 되긴 했지만, 짙은 깊음과 향기로운 속내까지 비쳐내진 못했다. 그저 습관처럼 한 잔 마시고 금세 잊어버릴 것 같은 정도의 재미를 안겨주었을 뿐. 어쩌면 작가 자신도 '독한' 무엇을 보여줄 생각 없이 딱 이만큼의 가벼움만 선사해줄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이 책은 한 시간 정도의 무료한 시간을 채워준 달콤한 커피 한 잔만큼의 깊이였다. 그건 나쁜 것도 모자란 것도 아니지만 딱 그만큼 뿐인 가치였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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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7-29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 커피 한 잔 만큼의 깊이라니 솔직한 리뷰로군요.^^
김탁환씨는 역사에서 소설적 감을 잡아채는 능력이 뛰어난 듯...

마노아 2009-07-29 10:37   좋아요 0 | URL
감각이 탁월하시죠. 근데 늘 감각만 있고 감동이 없어요...;;;;;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지 못했지만, 익숙한 이름인지라 무진은 한반도의 지도 어디쯤에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전라도 어디쯤에 있는 곳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아주 안개가 많이 낀 어디메일 거라고.  무지한 탓이었다. 조금 머쓱해지고, 또 무진이 손에 딱 잡히는 어느 곳이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이 책이 소설이긴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고,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선 이렇게 장애아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실제 지명을 이 책이 쓰고 있었다면 그 지역 주민들의 대단한 원성을 샀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책 속 서유진이 무진에 처음 내려온 강인호를 향해 호객 행위하던 십대 매춘부를 보면서 느꼈던 그 수치심처럼.  

(아, 무진은 광주의 옛 지명이란다. 공지영 작가가 모델로 삼은 사건도 광주에서 있었고. 그래도 이 작품에선 '무진'이라고만 말하자. 그래야 덜 미안할 것 같다.)

워낙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읽기도 전에 다 읽은 느낌이었다. 소재의 위태위태함을 알고 있기에 읽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불편했던 소설이었다. 당연히 읽고 싶기도 했지만 당연히 읽고 싶지 않았던 그 소설 도가니. 작가 공지영은 작품의 제목을 무척 잘 지은 듯하다. 다음 연재 때에도 동제목이었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같았겠지?), 읽다 보니 온갖 도가니가 다 떠오른다. 광란의 도가니, 환멸의 도가니, 쓰레기의 도가니...... 

서른 네살 강인호는 사업의 실패로 반년 동안의 백수 생활 끝에 아내의 도움으로 무진으로 내려간다. 아내 동창의 친척이 운영하는 사립재단의 농아 학교, 그곳에 기간제 교사로 들어간 것이다. 특수교사 자격증은 없지만 차차 마련하면 될 일이고 조금만 더 고생해서 정교사 되어 생활의 기반을 잡자는 게 그들 부부의 생각이었다.  

무진은 온통 안개에 덮여 있었다. 바로 전 날 자애학원 학생이 철로에서 죽어버린, 한 달 전에 학생 하나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어버린 그 암흑 속의 학교에 젊은 강인호가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사립발전기금' 5천 만원. 그게 강인호의 취직 조건이었다.  치욕스러워하는 그에게 아내는 돈 있다면 불쌍한 아이들에게 정말 기부할 수도 있는 돈 아니냐며 더 이상 자존심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강인호가 정말 몰랐을까. 그 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 부부가 몰랐을까? 그 돈이 그곳에 있는 정말 불쌍한 아이들에겐 한 푼도 쓰여지지 않을 거라는 걸. 

면피는 되었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는 명분이 있었고, 어쨌든 강인호는 그 학교에서 수화를 배워온 몇 안 되는 선생 중에 하나였고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첫날부터 문제가 심상치 않다. 농아 학교 여자 화장실에서 울린 비명같은 괴성. 자신의 동생이 죽었다고 우는 아이. 그 아이를 죽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우린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하는(표현하는) 학생들.  

그랬다. 그곳엔 너무도 짙은 어둠이, 안개가 끼어 있었다. 교회의 장로이기도 한 두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사립농아 학교. 시 예산의 40억을 끌어다 쓰면서 앙상하게 마른 학생들에게 돼지죽같은 저녁을 내주는 그런 몰염치한 인간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성추행을, 성폭행을 일삼아오던 인면수심의 인간들이 견고한 옹성을 짓고 있는 학교가 자애학원이었다.  

그리고 독자를 더 버겁게 만드는 무진 시의 그 거대한 커넥션이었다. 학교와 교회, 경찰과 검찰, 병원과 교육청, 시의회, 총동창회가 모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말 못하는 농아가 학교장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는데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는 이 거대한 장막 앞에선 한숨을 쉬는 것조차도 한심스러웠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명 비유가 이럴 때 딱 맞아 떨어질 것이다.  

강인호는 투사가 아니었다. 그는 적당히 세속에 때 절은, 평범하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못 미더운 인성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한때 교직에 몸담았던 적이 있었고, 그리고 군에 입대한 후 자신을 찾아온 졸업생과 잠자리를 같이 했던 과거도 있었다. 훗날 그 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걸 알았지만 커다란 죄책감도 갖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완전무장도 하지 못한 채, 정신적 무장은 더더욱 하지 못한 채 이 길고도 어려운 싸움에 주역으로 뛰어든 것이다. 독자는 그가 과연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조마조마했다.  

반면, 그의 파트너(?) 서유진은 달랐다. 무진 인권 센터 간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이혼한 뒤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억척 엄마였다. 게다가 둘째 딸은 선천성 심장 기형으로 병을 안고 사는 아이였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목사님 아빠. 그 후 천형처럼 지고 산 가난과, 불우한 결혼 생활, 그리고 딸 아이의 장애까지.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산 것처럼 불행해 보였을 법하건만 그녀는 꿋꿋하고 씩씩하다. 핑계를 댄다고 하면 누구보다 많은 핑계가 있을 그녀인데,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자기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운다는 그녀 앞에서 독자는 경외와 부끄러움을 함께 느낀다.  

작품은 기승전결을 기막히게 잘 탔다. 강인호가 무진으로 뛰어들면서 가려졌던 사건들이 하나 둘 드러나고, 학교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중반 이후를 지나면 재판정에서의 숨막히는 공판이 긴장감을 확 조성한다. 말 못하고 지체 장애도 갖고 있는 아이들이 똘똘 뭉쳐서 힘을 내는 장면은 눈물 겹기도 하거니와 유독 똑똑했던 아이 연두가 보여준 활약상은 엄지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고 싶을 만큼 대견했다.  

모두가 숨 죽이고 나 몰라라 했지만, 이게 서울에서 온 취재 팀에 의해 전국 방송을 타고 난 후 무진을 들었나 놨다 하는 사건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게 미디어의 힘이었다. 뿐인가? 피고 측의 협박과 거짓말과 모략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순식간에 파렴치범으로 바뀌게 만드는 것도 역시 미디어의 힘이었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어주려 애쓰는 강인호는 아이들을 현혹시키는 사악한 전교조 출신 교사가 되어버리고, 대책 위원장을 맡은 최목사는 과거 교회 세습을 반대했던 전력을 들추어 교회와 성도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끔찍한 사건 앞에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던 많은 쳐죽일 집단과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추악했던 것은 교장 형제가 장로로 있는 교회의 행태였다. 그곳의 젊은 목사가 보여준 일장 연설(설교)은 최목사가 표현한 대로, 예수가 다시 살아온대도 제일 먼저 앞장서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만한 수준이었다. 그들 교장 형제가 그 교회의 재정을 책임지는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대도, 그렇게 핏대 세우며 후안무치의 인간들을 일방적으로 옹호했을까. 거기에 대고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외치는 무지한 성도들을 보고 있는 것이 숨막히게 갑갑했다. 그건 비단 소설 속의 한 극단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유진이 말했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냐는 강인호의 질문에, 상식... 그게 없다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아니 상식 자체가 아예 없는 일이 대한민국에선 속속 발생하고 있다. 아니, 원래부터 그랬을지 모르지만 유독 지금 눈에 많이 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상식이 없는 세상 일은 가난한 자들의 삶 속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의 삶 속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그렇지 뭐...하는 말로 간단히 체념한다. 내 일이 아닌 사람은 내 일이 아니어서 그랬고, 피해자들은 그 험난한 가난의 굴레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고 합의하고 침묵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 하겠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는 반격하지 못할 변명을 단 체 말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그건 사실이다. 다만 진실이 아닐 뿐. 이 싸움이 무리라고 해서,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해서 미리부터 포기하는 건 비겁한 변명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심난하여 힘들어하자 친구가 말했다. 왜 머리 아프게 그런 책을 읽느냐고. 그것 아니어도 죽겠으면서 왜 사서 고생이냐 했다. 그런 말을 해준 친구는 장애를 갖고 있으며 특수 학교 생활을 해보았고, 책 속 사건 같은 비리도 목격했던 사람이었다. 진심이기보다 나름의 염려였겠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일 좋은 것은,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아름다운 세상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그게 꿈같은 일이라면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고 동참하는 일일 것이고, 하다 못해 그조차도 안 된다면 마음이라도 보태고 외면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껴?"라는 말로 기부터 죽이고 기운 빠지게 할 일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소설가의, 글쟁이의 역할이 새삼 크다는 생각을 했다. 공지영 작가가 사회파 소설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사진 작가가, 그림 그리는 이가, 목사가, 교사가, 스포츠 선수가 저마다 할 일은 따로 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그게 아름다운 세상, 안전한 세상,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일,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은 자신의 일을 다 마친 다음에 남는 시간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 모든 건 동시에 일어나고 진행된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나'의 일이라는 자각을 갖는 순간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이 광란의 도가니가 감사와 축복의 도가니가 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 우리 아버지 때문에 불쌍하고 불행한 적 없었어. 가난으로 말하자면, 타락한 세상에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도 해고당하고 사업 망하고 빚보증 서서 망해. 아니면 처음부터 쭉 가난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정권에 아부하면서 목회를 하셨대도 우리가 가난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것으로 말하자면 동서고금 너무나 많은 아이들의 운명이야. 아버지들이 고문으로도 죽지만 병으로도 죽고 사고로도 죽고 자살도 하니까. 우리 아버지의 삶과 죽음은 인류의 반 이상이 겪는 그 어쩔 수 없는 가난과 편모라는 핸디캡 속에서 오히려 내가 왜 귀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그 이유가 되어주셨어. 아버지 때문에 나는 그냥 남루하고 그냥 불쌍한 편모슬하가 아니었다구. 내가 불쌍하고 불행한 적이 있다면 그건, 나도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야.”
–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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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7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7-2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마노아님.
이 리뷰는 추천이 괜히 많은게 아니에요. 리뷰를 읽으면서도 욱, 하잖아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마노아님.

마노아 2009-07-28 18:04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뜻밖에 추천이 많네요. 추천 5개 이상이면 메인에 떠서 이리 되었나봐요.^^;;;

turnleft 2009-07-2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마노아 2009-07-28 18:05   좋아요 0 | URL
네, 턴님!

같은하늘 2009-07-2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입하고 아직도 보지 못하고 있는 이 책...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얘기에 가슴이 아파서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시간도 없어서...
이젠 책을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마노아 2009-07-29 00:11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읽으면서 통증을 호소할 것 같아요.
참 먹먹하더라구요...

순오기 2009-07-29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약주문으로 사놓고 손 못대고 있어요. 이동네 실화였잖아요~ ㅜㅜ
'무진'은 광주의 옛이름이예요~ 무진주, 무진...역사선생님이라 알텐데...^^
지금도 광주엔 '무진'이란 이름을 붙인 것들이 많아요.
공지영씨가 괜히 무진이라고 설정한 게 아니라는 얘기죠.

다락방 2009-07-29 08:42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순오기님?
저도 순오기님덕에 이제야 알게되네요. 무진이 광주의 엣 이름이군요!!

마노아 2009-07-29 10:49   좋아요 0 | URL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가상의 공간이고, 공지영은 오마주의 형태로 무진을 썼다길래 같이 가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광주에 무진 들어가는 이름이 많은 게 괜히 그런 게 아니군요.
기사를 좀 더 찾아보니 그 학교 이름도 보이네요.
리뷰를 수정해야겠어요.
그런데 실제로 광주에 안개가 많이 끼나요?
역사 선생님도 모르는 게 많아요.^^

순오기 2009-08-04 18:56   좋아요 0 | URL
광주 특별히 안개가 많이 낀다고 느끼진 못했어요.
이거 이주의 마이리뷰 먹으라고 기를 보냈는데~ 블로거 특종이 됐군요.

마노아 2009-08-04 23:34   좋아요 0 | URL
이주의 마이 리뷰는 뽑혀본지 근 2년 되가는 것 같아요. 그나마도 이젠 제도가 바뀌어서 상금도 팍 줄었더라구요.^^
순오기님이 기를 팍 넣어주셔서 그래도 블로거 특종은 되었어요. 냐하핫^^
 
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주목받는 작품이 등장하면 아무래도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입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리뷰도 주렁주렁 달린다. 궁금한 마음이 생기면서 기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읽고 난 다음에는 감동이 덜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그 경우는 '유명세'가 오히려 작품에 독이 되는 것. 기대 잔뜩 하고 나서 보았던 트랜스 포머 2가 생각보다 별로였던 것처럼.  

그런데 이 작품은 기대치가 좀 있었던 것에 비해서, 또 유명세에 비해서 깎아내릴 것이 별로 없었다. 작품 자체의 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기대를 엎어버린 전혀 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만난 탓일 게다. 그러니까 이 책이 성장소설이고 또 청소년 문학이기 때문에 좀 더 반짝반짝 빛나는, 마음이 훈훈해지는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였기에 허를 찔린 것이다.  

주인공은 열 여섯 살 남학생. 여섯 살에 엄마 손에 의해 청량리 역에 버려진 기억이 있고, 그 후 어머니가 자살하신 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인 배선생과 재혼. 의붓 여동생과 함께 네 가족이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언어 장애가 생겨 하고자 하는 말이 모두 더듬더듬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글로 써서 읽으면 똑바로 읽을 수 있다. 아버지는 그저 밥 차려주고 자식을 돌봐줄 여자가 필요했을 뿐,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지 못했고, 그 모든 갈등은 새엄마의 구박과 멸시와 모멸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여동생을 성추행했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고 새엄마와 경찰들에 쫓겨서 위저드 베이커리로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위저드 베이커리. 동네에 생긴 빵집 이름이다. 오밤중에 빵 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다고 24시간 영업을 표방하는 이상한 빵집. 게다가 주방장 겸 점장은 똘끼가 보이는 인물로 빵의 재료를 묻자 갓난 아기의 간을 말려서 빻은 가루라든지, 고양이 혓바닥 3종 세트, 티티새의 똥을 얇게 펴 발랐다거나 라푼젤의 비듬을 사용했다는 등, 하여간 정상으로 보이진 않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이 24시간 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빈 몸으로 무작정 뛰쳐나온 이 열 여섯 학생이 숨을 수 있는 도피처가 되었던 것.  

아이라고 해도 어색하고 소년이라고 해도 어색한 이 친구는, 빵집 주방의 오븐에 숨어드는데, 그 오븐 너머 異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점장의 방에는 너무도 안락해 보이는 멋진 침대가 놓여 있었고, 온갖 수상한 약품(?)이 들어있는 실험 도구들, 바닥에는 마법진이 그려진 듯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본의 아니게 집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 친구가 위저드 베이커리에 얹혀 살면서 나름 밥값으로 하게 된 일은 위저드 베이커리 닷 컴으로 들어오는 온라인 주문의 접수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수상한 빵집은 쇼핑몰도 갖고 있는데, 그 쇼핑몰에서 요상한 빵들을 파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 



쇼핑몰에는 취급 주의사항과 부작용에 대한 상세한 안내문이 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다른 사람을 혼내줄 마음으로 부두 인형을 주문했는데 본시 '저주'란 부메랑 효과가 있어서 자신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친절한 경고문까지 실려 있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안내문을 읽고도 기대 반 농담 반의 심정으로 제품을 주문하고 100%에 이르는 효과를 체험한 뒤 상품 후기까지 남기고 있었다.  

주인공 친구는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있으면서 제품을 사용했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 혹은 제품의 또 다른 A/S(?)를 원하는 손님들을 만나면서 마법이 해내는 역할과 대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점장이 위저드 베이커리를 차린 이유는 물질계와 비물질계의 '균형'을 위해서라는 뭔가 거창하고 설명하기 힘든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깨뜨린 불균형이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무 관심도 없고 책임도 없다. 심지어 자기가 뿌린 저주 때문에 엄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 가서도 죄책감과 반성은 없이 오로지 자신의 껄끄러운 마음이 편해질 방법만 추구한다.  

마법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소원을 예쁘게 들어줄 것만 같고, 좀 더 세상을 이롭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 않다라는 것에 적잖은 실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저 오래도록 살아온 성격 뾰족한 마법사조차도 과거 어느 시점에 잘못 사용한 타임 리와인더의 부작용을 톡톡히 알고 있을 정도이니.  

누군가의 욕망과 소망이 적절히 섞인 마법이 담긴 빵을 팔면서 점장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사게 되었고, 그 바람에 한 달에 딱 하루 24시간을 잠드는 그 유일한 수면 시간에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조금만 수면에 방해를 받아도 바로 '몽마'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 모습이 안타까워 대신 몽마의 공격을 받은 우리의 주인공은, 그 덕분에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엄마와의 기억. 엄마가 세상을, 자신을 버렸던 일들. 아버지의 무관심, 새엄마의 학대, 그리고 자기 없는 자기 가족의 단란한 모습까지.  

기막히게도, 이 아이가 겪은 그 무수한 고통의 시간은, 아이가 살아온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보통의 어른들이 감내해야 할 몽마의 공격에 비해서는 '약했다'는 것이다. 이 친구가 겪은 그 비극적인 시간의 무게를 짐작하면서도, 남은 시간 동안의 삶에는 더 큰 어려움과 괴로움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펐다. 저마다 사연 없는 삶이 없듯이, 누구에게나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는 게 말이다. 

적절한 스릴러적 긴장과, 또 몽환적 환상이 잘 아울러져 있으면서도 소년이 돌아가야 할 집이라는 결코 안락하지 않은 보금자리의 문제점 때문에 작품은 결말로 치달을 수록 공포를 담은 기대를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은 집으로 돌아갈 시점을 맞는다. 타임 리와인더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바로 그곳. 

시간을 돌린다는 건 엄청난 희생을 수반해야 한다는 맹점이 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시간을 다 함께 돌려야 한다. 돌아간 시간 속에서는 미래의 내가 되돌리고 싶었던 시간을 아직 알지 못한다. 재수 없는 경우 그 엄청난 희생을 치른 대가로 똑같은 경험을 반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녀석이 돌아가고 싶은 시점은 어디일까. 의붓 여동생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기 직전? 새엄마와 아빠가 결혼하기 전? 엄마가 자살하기 전?  

그때로 돌아가면 그 순간들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면 똑같은 고통을 두 번 겪으면서 상처를 재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코키 폴의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마녀 위니의 그림은 매력적이지만 어둡고 칙칙하다. 어린이 그림책 답게 늘 유쾌한 결론을 이끌어내지만 시작할 때의 위니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뭔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의 마법사는 좀 시니컬한 편이고 성격도 모난 편이지만, 그래도 주인공의 아군으로 등장하는 것만큼의 역할은 제대로 해낸다. 오히려 그가 신데렐라를 도와주는 마법사 아줌마처럼 일방적인 도움만 주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수상했을 것이다. 

작품은 재미 있다. 그러나 그만큼 아프기도 하다. 소재의 선정도 그렇거니와 내용의 전개를 지켜볼 때도 역시 마음이 무겁다. 아동 성범죄, 아동학대, 가정 불화. 그 모든 이야기들을 다 집어넣고도 원하는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에서 또 한 번. 

주류는 아닐지라도, 이 작품 속 주인공과 같은 가혹한 환경의 아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정상적인 부모, 혹독한 새 가족, 위로받을 수 없는 학교,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만큼 어리진 않지만 충분히 자신을 방어할 만큼 다 자라지 못한 낀 세대의 아이들. 동화처럼, 마법처럼, 이렇게 마법을 펼쳐줄 마법사 하나 만난다고 해서 그네들의 삶이 한 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 마법사를 만나지도 못하고 살게 된다. 하여 작품은, 지극히 소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사용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렇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픈 것이다.  

몇 가지 자연스럽지 못한 전개도 눈에 띄긴 한다. 베이커리를 도구로 썼음에도 영혼을 홀릴 것 같은 기막힌 빵과 과자의 묘사는 부족했고, 시점이 오고 갈 때의 전환도 조금 뻑뻑했다. 그러나 소재는 참신했고, 그걸 풀어내서 도출해내는 결론은 성숙했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이 미안한 사람에게 사과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제품이라면, 나는 사과받고 싶은 사람에게 사과를 받아낼 수 있는 스콘을 하나 주문하고 싶다. 사과라도 받으면 혹 용서할 수 있는 빌미가 될지도 모르는데, 도저히 사과 없이 용서하자니 내 속이 너무 끓어서 말이다. 그런데, 사과를 받아야 함에도 내가 먼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일까? 아, 그건 또 너무 가혹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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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7-1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리뷰네요 전 느낌만 적고 말았는데 말이에요 깨갱이에요. 마법에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 이게 해리포터보다 훨씬 현실적이었어요

마노아 2009-07-20 00:24   좋아요 0 | URL
해리포터보다 현실적이란 얘기에 공감해요. 그건 정말 환타지잖아요.
대가가 필요함에도 마법을 갈구하는 게 또 우리 인간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