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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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고백'으로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미나토 카나에의 후속작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고백'이라고 적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비슷한 구조의 내용이 전개되는데, 내용은 여전히 강한 충격을 추어서 얼떨떨한 느낌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초등학생 강간 살해 사건. 범인을 목격한 여자 아이가 네 명이나 있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아이들은 횡설수설하며 범인의 얼굴조차 그려내지 못한다. 사건 발생 3년 후. 희생자의 어머니는 도쿄로 떠나기 전 네 명의 아이들을 모아놓은 채 협박하듯 말했다. 


그런 얘긴 이제 지긋지긋해. 얼굴은 생각 안 나요. 생각 안 나요. 이 말밖에 할 줄 모르니?! 너희가 그 모양이니까 3년이 지나도 범인을 못 잡는 거라고. 이런 멍청이들이랑 놀아서 우리 에미리가 죽은 거야.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는 살인자야!

난 너희를 절대로 용서 못해.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찾아내. 그렇게 못하겠으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속죄를 하라고. 그것도 안 하면 난 너희들에게 복수할 거야. 난 너희 부모보다 훨씬 더 많은 돈과 권력이 있어. 내가 기필코 너희들을 에미리보다 더 처참하게 만들어 놓을 거야. 에미리의 부모인 나한테만은 그럴 권리가 있어.
 
페이지 : 95-96  

이 엄포가, 네 소녀들의 앞날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두 다는 아니었지만 대개는 그 메시지에 사로잡혀 인생을 저당잡혔고, 왜곡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혹은 우발적으로 기막히게 살인 사건에 모두 연계되었고, 그 직후에 각자 저마다의 '속죄'를 털어놓았다. 그들은 모두 범인을 잡는 대신 속죄의 길을 걸었지만, 놀랍게도 그네들의 진술을 모두 연결하다 보면 진짜 범인에게로  다가가는 징검다리가 완성된다. 

마지막 속죄는 에미리의 엄마, 아사코의 몫이었다. 자신이 충동적으로 내뱉은 몇 마디가 아이들의 인생을 어떻게 좌우했는가에 대한 충격과 죄책감과 반성과 변명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다보면 마지막 퍼즐 조각이 모두 완성되면서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게 된다. 

미나토 카나에는 입담이 좋은 작가인데 단지 말장난에 가까운 아멜리 노통브와는 다른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다만 소재의 잔혹성과 전개의 비극성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꺼리는 독자들도 많을 듯하다. 재미를 포기하되 상처를 보호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을 테지만 재밌게 읽은 독자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은 단순히 살인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문화 충격과, 또 도시에서만 살아온 부유한 여인이 시골마을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배척당하며 갖게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을 꽤 실감나게 그렸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그의 말도 일리가 있고, 또 저 사람의 입장에서 독백을 듣다 보면 그의 입장이 이해가 가고, 저마다의 상황과 이해가 모두 다름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이고, 모두가 서러운 사람들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빠른 전개로 속도감을 느끼며 읽게 되지만 제법 뒷여운이 길었던 작품이었다. 

작가의 스타일을 고려할 때 빠른 다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직 두 작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장차 세상에 내놓을 그녀의 다른 작품들이 몹시 기다려진다. (그런데 작가가 여자 맞던가?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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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4-1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별이 다섯개!!!

마노아 2010-04-14 11:08   좋아요 0 | URL
빠르고 강렬하게 읽히는 힘이 있지요.^^ㅎㅎ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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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미술 과제로 시화를 만들어오는 게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하나 고르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오는 것. 그림의 주제와 재료, 형식은 모두 자유였다. 당시 내가 고른 시는 에드가 앨런 포의 '애너벨 리'였고, 그림은 만화원고지에 펜촉으로 그리고 스크린 톤을 붙였다. 당시 내 꿈은 만화가였던 터라 곧잘 만화 재료를 이용해서 습작을 하곤 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옮겼는데 생각외로 점수는 형편없었다. 스크린톤을 붙인 만화 그림이 너무 튀었거나, 아님 그림이 형편없었거나... 

그 후로 오래도록 애너벨 리를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이 책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라니... 뭔가 엽기적인 것 같기도 하고 반전을 예상케 하는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애너벨 리 시 전문에 나오는 표현이라는 걸 다시 시를 찾아 읽다가 알아버렸다. 오랜 시간 흘렀더니 이렇게 잊혀진다. 애석하게도...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처음이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전후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의 작품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 그가 쓴 작품들이 내 보관함에서 숨을 쉬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며 집필한 책이다. 22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가 2007년에 마지막 작품이라 예상하며 심혈을 기울인 작품. 이 작품의 특징은 앞머리에서 소설 속 소설가와 아들을 통해서 제시된다. 

   
 

 아직 백 살까지는 시간이 있지.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 (11쪽)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저명학 작가가 오래도록 소설을 쓰고 있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미 중년이 된 지적 장애 아들의 질문에 노년이 된 작품 속 주인공이 대답하는 말이다. 설정으로 볼 때 이미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대입시켜 실제와 소설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진행시키는 이야기들은 자주 본다. 이 책은 그 형식성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좀 더 특별한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일흔을 넘긴 노년의 작가가 30년 만에 옛 친구를 만나면서 과거에 미완으로 끝났던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원래 한국의 김지하 시인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으나 유신 시절에 투옥되어 계획이 무산되고 작품 속 겐자부로는 그의 석방을 위한 단식투쟁을 하던 장소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맡아달라고 찾아온 영화감독 고모리와 여주인공 사쿠라를 만나게 된다. 실제로 오에 겐자부로는 김지하의 석방을 위해서 애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실제 사건과 소설 속 허구가 겹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여기에 또 몇 개의 이야기들이 중복되어 표현된다.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금세 이야기의 중심축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 책이 250쪽이 되지 않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만만하게 읽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 속 겐자부로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연극을 직접 올린 경험이 있다. 마을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농민봉기 일화를 극으로 올려 지역 주민들에게 큰 반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쿠라는 원래 시나리오 예정 중이었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의 배경을 일본으로 옮겨와 겐자부로 어머니와 할머니가 올렸던 연극의 내용으로 다시 각색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메이지 유신 직후의 농민봉기 이야기로 시나리를 바꾸기로 합의하는데,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그녀에게는 또 다른 사연과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중첩된다. 작가의 평생의 은사인 와타나베 교수의 죽음으로 소설을 쓰지 못하던 그가 사쿠라와 만나면서 다시 작품을 쓸 마음을 먹게 되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연극을 올리면서 가슴에 쌓인 '한'을 풀고, 그 연극을 보았던 주민들도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을 겪었다. 가장 큰 상처와 치유의 주인공은 사쿠라였다. 아역스타로 성장한 그녀(그녀가 출연한 영화 제목이 '애너벨 리'다)가 미국인 후원자에게 시집을 가서 그 상속자가 된 채 이 영화의 제작에까지 손을 대며 완성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자신이 알지 못하지만 은연 중 느끼고 있는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대한 치유였다. 

그 상처들과 치유들은 한꺼풀 한꺼풀씩 등장하며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의 켜를 쌓는데, 작게 보면 한 개인의 이야기가 되지만 큰 울타리로 보면 전후 일본이 안고 가지만 좀처럼 드러내지 못하는 상처들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한다. 인물들의 설정에서도 현실과 허구가 겹치기도 하고 반영되기도 하지만 주제 의식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이 아닌 은근히 내비치는 솜씨가 일품이다. 역시 대가답다는 감탄이 나온다. 

30년 전에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영화의 작업은, 다시 30년 뒤에 다른 형태로 재차 시도된다. 이제는 과거의 상흔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 노년의 그들이 어깨의 힘 잔뜩 빼고 정말 해야할 말들로 '진짜' 극을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쿠라는 '그래봐야 야구, 그래도 야구'라는 말에 빗대어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라고 말했다. movie라는 말 대신에 '문학'이라고, 혹은 인생이라고 대입해 보아도 공감하게 된다. 더불어 작가 이름을 집어넣어도 역시 수긍하게 된다. 짧고도 굵은 대가의 작품! 

ps. 여담이지만,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는 표지가 정말 잘 빠진 듯하다. 블랙으로 통일했지만 표지의 질감과 느낌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해당 작품의 분위기에 잘 드러맞는 듯하다. 표지 때문에 시리즈를 다 갖추고 싶은 욕심이 마구 생긴다. 이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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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16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여고때 에네벨리 열심히 외웠는데...
낭송테이프를 갖고 있는데 백만년 만에 들어봐야겠네요. 지금도 슬플려나~

마노아 2010-03-16 08:09   좋아요 0 | URL
낭송 테이프라니, 완전 로맨틱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침 자습 시간에 두 명씩 조를 짜서 시를 낭송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한 명은 시 준비하고 한 명은 음악 준비하고... 처음엔 뻘쭘해하던 친구들도 나중엔 굉장히 즐겁게 참가했던 기억이 나요. 아, 추억이 방울방울이에요.^^

2010-03-16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4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4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
성석제 엮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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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기까지 대기 시간을 버티게 해줄 책으로 급하게 도서관에서 골라간 책이다. 딱히 내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책이 없어서, 차라리 여기가 집이었다면 사놓고 못 본 내 책 중에서 제일 끌리는 녀석으로 잽싸게 고를 텐데... 하며 선택한 책.  

이 책을 고르게 해준 일등 공로는 사실 고 장영희 씨가 될 게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었을 때는, 소개하는 책을 내가 보지 못했더라도 저자의 애정이 담뿍 담긴 소개와 감상만으로도 읽고 싶어 탐이 줄줄 났었기에 이 책도 그런 느낌이지 싶었다.  

목차를 보니 내가 이미 읽은 책도 있고, 읽지는 않았지만 읽으려고 벼르던 책도 있었지만 모르는 책도 다수였다. 이미 읽은 책은 이미 가졌던 감상에서 별로 더 보태질 못했고, 내가 읽으려고 원래 마음 먹고 있던 책은 딱 그 만큼의 호기심을 유지했을 뿐이었는데, 추가로 다른 책들에서 더 많은 것을 꺼내지는 못했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무래도 두쪽이나 세쪽 분량의 소설을 보여주고는 맛과 멋과 감동을 함께 받기엔 벅찼던 듯하다. 더불어 이 책을 엮은 성석제가 양념처럼 몇 마디 보태는 말들은 그저 다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처럼 묻어가는 느낌을 주었으니 더 허탈했다.  

이건 마치 수험생들이 고교생이 읽어야 할 한국 명작 100... 이런 식의 제목으로 요약본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이어서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다.  

사실, 메일로 받아보는 문학집배원도 처음 신청한 얼마 동안만 열심히 보다가 금세 싫증이 나서 읽지도 않고 삭제한 지 좀 되었다. 뭐랄까... 이미 가득찬 병에 넘치고 있는데도 자꾸만 물을 붓는 느낌이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빈 병에 붓고 있는데도 병을 채우지 못하고 밖으로 다 쏟아지는 그런 느낌. 나로서는 참 별로였던 선택이었다. 그래도 뭔가 건질까 해서 꾸역꾸역 다 읽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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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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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저렇게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일을 준비하던 아이가, 오늘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천지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남편과 사별한 엄마가 마트 일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키우는 두 딸중 동생. 뭐든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언니 만지와 달리 떼쓰는 일 없이 착하기만 하고 뜨게질을 즐겨하고 리폼도 잘하던 아이 천지. 갑자기 딸과 동생을 잃은 엄마와 언니는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아무 조짐도 눈치 채지 못했기에. 

그러나 천지의 흔적을 되짚어가면서, 그리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밟아가면서, 천지를 힘들게 한 시간들을 파악하게 된다. 한 마디로 왕따 문제였다. 조직적으로 천지를 물먹이고 엿먹이면서 절친인 척 했던 화연이, 그꼴을 보고 또 알면서도 모른척 방관했던 아이들, 혹은 멍청하게 당한다고 비웃었던 아이들.

발 빠른 화연이의 사과. 화연이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상처는 내가 받았습니다. 거짓 소문은 살을 보태가면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정정된 진실은 더디게 퍼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사라져버렸습니다. – 21쪽

 읽는 내내 참 먹먹했다. 이 아이가 지나온 시간들이 계속해서 교차해서 지나가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막막하고, 얼마나 서러웠을까 가엾고, 이제 돌이킬 수도 없는데 남겨진 가족과, 또 떠난 그 아이를 대체 어찌해야하나 싶어 아프기만 했다. 누구라도 짐작할 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게 아니라, 보이지 않게 조금씩 목이 졸려온 아이. 숨 쉴 구멍 하나 없이 계속해서 헐떡이던 아이. 아이를 둘러싼 주변인들은 그렇게 조금씩 저도 모르는 채,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기막힐 노릇이다.  

작가 분이 캐릭터 설정을 굉장히 잘한 듯 보인다. 억척스러움을 가장한 꿋꿋하고 당당한 엄마, 무뚝뚝하지만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만지, 엄마 잃고 망나니 아빠를 견뎌내며 열심히 살아가는 미란 미라 자매, 그리고 옆집 오대오 가르마 추상박까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항변하듯, 보이는 것과 달리 다른 속내를 품고 살아가는 저마다 아픈 사연들의 캐릭터들이 입체감 있게 묘사되어서 무척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심지어 초짜 선생님의 '통과의례'는 너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 살벌할 정도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천지는 멍청한 게 아니라 착한 거야. 착한 애는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꼭 가지고 놀려는 것들이 생겨서 문제지. 자기 맘에 들면 착한 거고, 안 들면 멍청한 건가?  – 195쪽

 반면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설득력 있는 대사까지는 좋은데, 그 대사와 대사를 연결해주는 지문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혹은 부재할 때가 많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잘 치고 나갔는데, 마무리를 덜하거나 바로 생략해버린 느낌이랄까.

그래서 털실 속에 숨겨진 천지의 메시지 찾기나 천지 엄마가 화연 엄마에게 한방을 날리고 난 뒤가 개운치 않다. 화연의 방황과 만지의 쿨하고 멋진 마무리도 그래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 모든 아쉬움들은 천지를 향한 어떤 미안함과 안타까움에는 결코 미칠 수가 없다. 각각의 캐릭터들에는 내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면들을 투영하고 있었고, 또 내 기억의 어떤 부분과 많이 닮아 있었다. 결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곱게 포장할 수 없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금세 불편해지고 마는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작가님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면서 다시 아파진다. 이 소설, 꼭 읽어보라고 권장하고 싶은데, 더불어 많이 아프다고 주의도 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듣고 살았던, 혹은 하고 살았던 우아한 거짓말들이 지금 어디를 떠돌며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 있는지도 생각해야 할 차례다. 문득, 섬뜩함이 스친다.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 210쪽

 

그나저나 완득이로 홈런을 쳤던 김려령 작가, 이제 롱런을 칠 차례인가보다. 완득이보다 훨씬, 훨씬 더 좋다. 아프긴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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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15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며칠 전에 구입했는데 아직 펴보지도 않아서 리뷰는 패쓰해요.^^
하긴 사놓고 안(못)보는 책이 어디 한둘이냐 싶지만...

마노아 2010-01-15 21:53   좋아요 0 | URL
전 출간된 직후에 샀던 것 같은데 한참 뜸들이다가 이제사 읽었어요.^^;;;

같은하늘 2010-01-15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 올라오는 이 책의 리뷰로 인하여 조만간 지름신이 강녕하실듯~~~^^

마노아 2010-01-15 21:54   좋아요 0 | URL
입소문만큼 무서운 게 여기선 리뷰더라고요.^^ㅎㅎㅎ

하늘바람 2010-01-1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살까 말까 망설이는 책 중 하나인데 죽음을 다루어 미리 겁먹고 있어요

마노아 2010-01-15 21:54   좋아요 0 | URL
좀 많이 아프긴 해요. 전 내용은 잘 모르고 샀어요.^^;;

비연 2010-01-15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읽고 싶은 책이에요. 더욱 당기네요~

마노아 2010-01-15 21:54   좋아요 0 | URL
읽어보셔용. 비연님 올해는 한국 작가 책 많이 읽기로 하셨잖아요~

후애(厚愛) 2010-01-1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보고싶은 책 중에 하나랍니다.^^
근데 슬픈 건 정말 싫은데..

마노아 2010-01-15 21:55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내용이 많이 슬퍼요...ㅜ.ㅜ

무스탕 2010-01-17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토요일요) 아침 먹고 손에 잡아서 조금전에 책 덮고 지금 컴 켰네요..
나름 몇 줄 적어놓고 다른분들 리뷰를 보려고 검색하다 마노아님께 젤 위에 있어서 읽었어요.
이 책은 아이들, 그러니까 천지나 만지정도의 아이들이 읽을 책이 아니더군요.
학부모가 먼저 읽고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할 내용이었어요.
내가 낳은 내 새끼지만 그 속 아무도 모르고 보이는게 다가 아니었고 그 이면을 읽고 아이의 말 없는 호소를 잡아내는 날렵한 엄마가 되고 싶은 맘은 누구나 있을거에요.
완득이는 그래도 답답한 마음보다 슬쩍 미소 지으며 볼 수 있었는데 이 책은 가슴 부여잡고 읽었어요..

마노아 2010-01-17 01:00   좋아요 0 | URL
가슴 부여잡고 읽었다는 말이 콱 박혀요. 얼마나 목이 메이고 가슴이 먹먹하던지요.
이 작품은 2부작 정도의 단막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무겁고 아픈 내용이지만 이런 일들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다 함께 앍았으면 해요.
여운이 길고 짙어요. 천지를 생각해도, 그 엄마와 언니를 생각해도 참 아파요. 어휴...ㅜ.ㅜ
 
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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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일요일, 신원불명의 남자 사체가 강물에 떠밀려 내려왔다. 한 아이가 발견했다. 남자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독자는 모른다.  

시간을 돌이켜, 2008년 2월의 마지막 일요일. 진영옥은 친정에 간다고 거짓말을 한 채 대만행 비행기를 탔다. 딸아이의 바이올린 레슨비를 과외 선생에게 전달하라고 의붓 아들에게 부탁하고, 남편의 역정을 모르는 척하며 대만의 그에게 향했다. 남편 김상호의 전처 소생 딸 은성은 집에서 나가 따로 살고 있었다. 동생 혜성과 달리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인한 상처를 온몸으로 항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게 복수라도 되는 양 막무가내 삶을 살던 그녀가 그날도 사고를 쳤고, 동생 은성이 이를 수습하느라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다녀와서 여자친구와의 문제로 다시 외출했고, 동생을 본의 아니게 집에 혼자 두게 되었다.  

아비 김상호는 아들이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집에 혼자 있는 딸 아이를 한 번 들여다 보지 않고 외출을 했다. 비밀스런 거래를 마치고 한밤에 돌아왔을 때, 집은 비어 있었다. 곧 이어 아들이 돌아왔고, 그들은 딸과 배다른 동생 유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안에 없어진 것은 레슨비 봉투 하나뿐이고, 아이가 납치된 것인지, 제발로 나갔다가 어떤 사고를 당한 것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사건은 이렇다.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의 친엄마, 그리고 사실은 친아빠와 친아빠라고 믿는 남자와, 또 아이와 배다른 형제라고 믿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이의 이야기가 실종이라는 미스테리한 전개 과정 속에 녹아 있다.  

언뜻 보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연상시킬 것 같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서초동 방배동 서래마을의 복층 구조의 고급 빌라, 잘 터지는 사업체를 갖고 있는 아버지, 의대에 합격한 아들, 바이올린 영재 어린 딸.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근사한 외피를 두른 일가족으로 보이건만 속으로 속으로 곪아 있는 가족이었다. 아이의 실종이라는 끔찍한 사건과 맞닥뜨리면서 그들 내부의 목소리가, 그들 각자의 인생이 조금씩 드러난다. 서로가 몰랐던, 어쩌면 그들 자신도 몰랐던 그들의 이야기가...... 

거의 500쪽에 달하는 긴 소설인데, 미스테리한 전개와 더불어 아이의 생사가 걱정이 되어서 자꾸 초조하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연재 소설이었는데, 매일매일 기다리며 읽었을 독자들은 더 초조했을 것이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고작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 유지의 입장에서 전개될 때, 이야기가 가장 서글펐다. 이 자그마한 아이에게 세상이란 참 버겁고 무겁고 무섭구나...라는 생각. 유복한 환경에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 사랑을 쏟아주는 엄마가 있어도 채우기 힘든 빈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엄마 영옥과, 그가 20년 동안 사랑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밍에게서도 보이는 이방인 혹은 경계인의 슬픔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였다. 짱깨가 아닌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그것이 폭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었다. 맞서 싸우기 위한 완벽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어금니를 꽉 물고 참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섣부르게 주먹을 내질렀다가 제풀에 위태로이 비틀거리는 꼴을 목격당하는 건 더 치명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조금씩 배워갔다. 지상의 모든 아이들이 결국 그러하듯이. – 158쪽

 
   

불법인 것은 물론이요, 그보다 더 심각하게 위험한 사업을 하고 있는 아비 김상호는 아이의 실종을 경찰에 알리지 못하고 탐정을 기용해서 풀어나가려 한다. 탐정 문영광은 초반에 제법 냉철한 척을 하며 갖은 폼을 다 잡고 등장하지만, 그도 결국 제 바닥을 드러내는 면면을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다 그랬다. 모두가 자신의 바닥을 마주친다. 그 안에서 제 실존을 찾아냈다면, 그 한계를 딪고 일어설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또 다시 수렁 속을 헤맬 것이다.  

재밌다는 말이 미안할 만큼, 누군가에게는 몹시 상처가 될 법한 소재의 이야기지만 흥미진진하게 숨가쁘게 읽힌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첫 장에 나왔던 사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독자들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목숨에서 사체로 발견되기까지의 과정은 통으로 생략되어 있다. 그의 마음과 희생만 짐작할 뿐이다. 더불어 아이의 실종과 발견 과정의 이야기도.  

몇 달에 걸친 충격적인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서로 섞이지 못했던 가족들이 서로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아름다운 결말이다. 상투적일 수 있어도. 가족을 자신의 안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도 좋고, 비록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더 소중한 일이다. 비록 그 가족을, 그들의 세계를 '너는 모른다'고 말하고 있지만. 너는 몰라도, '나'는 알아주면 되는 거라고, 나에게 뇌까려 본다.  

개인적으로 '달콤한 나의 도시'보다 훨씬 훨씬 좋았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정이현 작가는 공지영 작가를 연상시킬 만큼 영리해 보인다.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말도 온전히 믿는다. 노고의 흔적이 느껴진다. 2010년에 읽은 세 권의 소설 중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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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희망꿈 2010-01-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찜해두고 있는데요.
마노아님의 리뷰를 보니 저도 사고싶네요.^^

참, 새해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네요.
2010년은 건강하시구요.
늘 행복하시길 바래요.

마노아 2010-01-07 19:47   좋아요 0 | URL
책 무척 재밌어요. 그런데 만약 가족 당사자라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요.
한편의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를 본 느낌이에요. 물론 지극히 '한국적'이란 단서가 붙지만요.^^;;

행복희망꿈님의 2010년도 행복과 희망과 꿈이 가득하길 바랄게요.^^

메르헨 2010-01-0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부터인가 많이 뜨고 있던데...
괜스레 장바구니에 담기 그렇더라구요. 그냥...저 분홍색 표지가 심히 거슬리더라구요.^^
단순하죠?
그런데 마노아님 리뷰를 보면...꼭 ... 읽고 싶어져요. ^^

마노아 2010-01-08 12:02   좋아요 0 | URL
저는 표지도 맘에 들었어요. 분홍색에 약해서인가봐요.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의 분홍 표지도 참 좋았어요.^^;;;

다락방 2010-01-08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이현이 딱히 좋지는 않은데 마노아님의 이 리뷰를 읽어보니 이 책을 정말 읽고 싶어졌어요. 다음번 지름에 포함해야겠어요. 불끈!

마노아 2010-01-09 00:21   좋아요 0 | URL
헤헷, 저도 정이현 별로였는데 이 책 보고 나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천상 소설가더라구요.^^

hnine 2010-01-09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 작가는 앞으로 어떤 작품을 써도 그녀의 스타일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드는 반면, 정이현은 앞으로 어떻게 변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 리뷰를 읽으면서도 들었습니다.
표지가 벌써 눈길을 확~ 끌어요.

마노아 2010-01-09 19:22   좋아요 0 | URL
그래서 더 공지영 작가가 같이 떠올랐나봐요. 확실히 신경숙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