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암살 미스터리 3일 1
이주호 지음 / 예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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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언제나 목에 걸리는 이름이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이나 왕자가 어디 한 둘이겠냐만은, 그를 죽인 이가 아비였다는 점에서, 또 그의 아들 역시 아비의 이름을 등에 업고 가혹하게 살았던 점을 떠올릴 때 사도세자의 이름은 갑절의 울림으로 아파왔다.  

이 책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병조 좌랑 유문승은 청나라 상인들 틈바구니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이력이 있는 자이며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조정에서 어느 당에도 기울지 않는 소신을 가진 자였다. 그가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을 맡으면서 무섭고도 놀라운 음모와 공포 속으로 들어가며 내용은 점점 깊어진다.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팩션 소설의 한 패턴이기도 해서 새롭진 않았지만 살인자가 남겨놓은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문자 놀이가 재밌었고, 이야기의 흐름 사이사이에 들여다보게 되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법, 문화가 지적 만족감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부수적이고, 사도세자의 역사적 진심에 다가가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역사적 '진실'은 우리가 동시대에 살면서 눈앞에서 지켜본 것이 아니니 확언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의 '진심'에는 충분히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잘 설명해냈다. 이 책이 진행되는 사흘의 시간이 너무 리얼해서 그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지만 각 캐릭터들의 행보는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름 끼치도록 노회한 정객 홍봉한의 캐릭터는 독자를 자주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작품 속에서 세자는 춘천의 조재호를 움직여 군사를 움직였는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그가 준비했던 과정임은 분명했다. 뜨거운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서 무려 여드레를 버티다가 죽은 세자. 그를 그토록 견디게 했던 것은 어쩌면 판을 뒤엎어 줄 조재호의 출연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결국 조재호는 오지 못하고 저승사자가 그를 먼저 방문했지만. 

퍼즐의 조각이 거의 다 맞쳐지고, 세자의 결단이 모두 뒤엎어지고, 그가 자신에게 떨어진 운명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부터는 책장을 넘기는 손이 떨릴 것만 같았다. 아들을 향한 그의 뜨거운 부정이 절박했고, 아비에게 버림받은 아들로서의 그가 서러웠다. 거느렸던 신하를 살리고, 미안했던 충신의 아들도 살리려 한 영조이건만, 자신의 아들은 철저하게 내친 영조의 위선과 위악에 착잡함을 느낀다. 그것이 그의 이름을 경종독살'설'에서 '독살'의 주체로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그가 진정 경종 죽음의 절대 책임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과거를 되갚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업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면, 역사는 이미 흘러가버린 선왕 대의 일을 달리 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의 힘이었을 것이다. 투명하지 못한 그의 과거. 그가 손잡았던 검은 손. 그리하여 이용당하는 권력의 무거운 채무.  

그러나 아들은 달랐다. 아들은 아비처럼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저당잡히지 않았다. 그가 죽을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죽기 일보 직전, 그를 구명해달라 엎드린 세손을 붙잡고 늘어졌다면, 그는 미친 세자로 불렸을지언정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어린 아들에게 아비의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아들의 가슴에 원한을 새기지 않으려고,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없이 배려했다. 그 극한의 순간 앞에서 말이다. 아들과 아비의 그릇 차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업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랬다. 혜경궁 홍씨가 물었다.  

"저하께서 세손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자의 대답은 간결했다.  

"목숨일세." 

그 한 마디가 그의 최후 선택이 무엇이었는지를 강변했다. 그 이상 그가 지켜낼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고 최상의 선물이었고, 최대의 사랑이었다. 절절함이 사무쳐 독자는 울고 싶었다.  

작품의 마무리는 또 얼마나 문학적이고 극적이었던가. 

지난 밤을 생지옥이라 표현한 혜경궁에게 세자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떠하냐고.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다.  

"한가한 날(閑中)이 될 것입니다." 

작품 속에선 잘 묘사되지 않았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에 혜경궁 홍씨가 보태준 역할을 잘 설명해 주는 단어였다. 먼 훗날 그녀가 쓸 책 제목뿐 아니라.   

여러가지 비밀들이 오래오래 감춰져 있다가 작품의 말미에 드러나지만 유문승의 존재가 드러나는 장면도 꽤 압권이었다. 실존인물과 가상의 인물을 잘 짜맞춘 작가의 솜씨에 감탄했다. 두권 분량의 꽤 긴 소설로 호흡이 길어서 추리 기법으로 진행하지만 오히려 앞부분은 긴장감이 덜했다. 오히려 가상의 이야기보다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때 독자는 더 큰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생각하는 와중에 감정이입이 더 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느낌은 자주 받곤 하지만 이 책도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스릴러로서, 또 감동의 드라마로서 구색이 잘 맞을 듯하다. 관객들은 마지막에 울고 나올 지도 모른다. 그리고 'IF'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무 의미 없지만, 그래서 더 허무하지만, 그럼에도 그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리며 우리 역사의 긴 장을 되새겨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지금 그렇게 해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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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8-1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헙 잼나겠다.... 이거 소설인거죠? 흠..

마노아 2010-08-14 12:31   좋아요 0 | URL
소설이에요~ 미스터리 역사 추리 소설이요.ㅎㅎㅎ

순오기 2010-08-15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인조처럼 손자까지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어요.
비록 짧은 재위지만 조선에 정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고백만 봤는데, 이 책은 더 극적일 거 같네요.

마노아 2010-08-15 08:32   좋아요 0 | URL
적어도 인조는 미화되진 않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이 책이 두 권짜리라 제법 긴데 앞에 살인 사건 추적 부분이 호흡이 길어 자칫 지루할 위험이 있어요. 오히려 뒷부분 사도세자와 세손의 이야기가 짧지만 가장 긴박했어요. 뒷심이 좋았지요.^^

치유 2010-08-15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뭘 읽어야 할까..생각중이었는데 찾아서읽어야겠어요.

마노아 2010-08-16 13:13   좋아요 0 | URL
헤헷, 저는 무척 재밌게 읽었답니다.^^
 
구텐베르크의 조선 2 - 꽃피는 인쇄술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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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권을 미출간 도서로 읽은지 한참 지났다. 그때는 이게 무려 3권짜리 책의 첫 권인줄 모르고 한참 재밌게 읽다가 이야기가 뚝 끊겨서 당황했었다. 궁금했었던 것 치고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뒷 이야기를 읽게 된 셈이다.  

일단 소재가 무척 신선했다. 세종 때 맹활약을 펼쳤던 장영실. 그가 만든 가마가 부서지면서  장을 맞고는 홀연히 실록에서 이름이 사라진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야기. 

작가 오세영은 그가 세종의 밀명을 받고 명나라에 가서 한글 보급을 위한 활자 발명에 올인한다고 설정해 놓았다. 그러다가 그의 제자 석주명이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서방으로 도망을 치다가 마침내 독일까지 흘러들어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은 '구텐베르크의 조선'이다. 

 

표지에서 포스가 흐른다. 금박을 입힌 제목도 눈에 띄고, 구텐베르크의 일하는 모습과 한글의 활자가 어우러져 무척 고급스런 느낌을 자아내었다.  

두번째 권에서는 이야기의 무대가 좀 더 커진다. 공방의 일거리가 늘어나면서 주자량이 많아지자 주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 그것을 보수하려면 안티몬이 필요한데 그걸 구하기 위해서 석주명 일행은 함락되기 직전의 콘스탄티노플로 향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여주인공 이레네의 마음의 고향. 당연히 그녀도 석주명과 동행한다. 이곳에서 안티몬을 구하기까지의 과정은 대하 서사 드라마가 되어버린다. 콘스탄티노플 출신이면서 신앙을 버리고 예니체리 군관으로 거듭난 한 사내.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원수가 되어버린 집안,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 등등. 잡다한 설정들은 너무 뻔한 편이어서 이야기는 커지고 스토리가 장황해지나 지루한 감이 많았다.  스케일이 크고 역사적 상황을 잘 버무렸음에도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어서 매력을 잃은 듯하다. 그것은 주인공인 석주명과 이레네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의 첫 시작 부분의 설정은 무척 참신하고 호기심을 끌어당겼지만 작품을 쭈우욱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힘은 부족했다.  

아무튼 안티몬을 구한 것은 물론이요, 제조비법까지 익힌 석주명의 공으로 구텐베르크는 더욱 승승장구한다. 그렇지만 갑작스런 성공은 많은 이들의 시새움을 얻게 하였고, 독선적인 그의 성격은 그 감정을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불타오르는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하는 대활극에서 이제는 밀고 당기는 법정 공방으로 이어진다. 여주인공 이레네가 법률가 가문의 딸답게 무척 큰 활역을 하는데도, 이미 캐릭터의 매력을 잃어서인지 그녀의 노력이 시큰둥하게 다가왔다. 명색이 주인공이 석주명은 거의 꿔다 놓은 보릿자루 수준으로 전락한다. 안타깝다. 

드라마로 친다면 무척 긴장감이 넘치게 전개될 법정 싸움이었는데도, 읽으면서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애석한 일이다. 구텐베르크는 법정 싸움에서 힘겹게 패배를 인정해야 했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곁엔 석주명과 그를 따르는 이레네가 있었고, 그들은 그의 잃어버린 공방을 되찾아 오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터였다. 그러니 3편에서는 그 과정이 이어질 것이다.  

시작은 조선에서 했지만 무대는 이미 유럽이다. 조선에서 세종은 물론이요, 그 아들 문종과 그 아들 단종도 이미 죽었고, 세조가 왕이 되어 있는 상태다. 석주명이야 알 턱이 없지만. 

조선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쯤으로 생각했는데, 조선은 이야기의 발단만 되어주고 구텐베르크 이야기가 주가 되니 어쩌면 나 스스로 김이 좀 샜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3권에선 떨어진 매력이 조금 더 솟아오르기를! 

책 맨 뒤에 이야기를 돕기 위한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본편의 이야기보다 더 관심을 끌었다.  

 

15세기 말에 그려진 콘스탄티노플 전경이다. 천 년의 영광이 새겨진 도시의 풍경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해학적인 느낌의 그림인데, 그래도 이렇게 보고 있으니 근사하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 성서>와 성서의 첫 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중 하나인 이 책은 인쇄물 테두리에 필경사가 직접 채식 장식을 하여 우아함과 화려함을 더했다고 한다. 사진으로 보아도 근사한데 실물을 보면 더 감격스러울 테지... 

 

구텐베르크의 인쇄소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종이를 들고 있는 이가 구텐베르크다. 

 

초창기 인쇄업자들이 쓰던 인쇄기다. 실제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치수도 나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작품의 배경이 된 아토스 산 중턱 절벽에 세워진 시모노페트라 수도원. 푸른 에게 해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작품 속에선 결코 이런 서늘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은 받지 못했다는 거... 

 

1453년 5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천 년 제국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다. 빼곡한 그림 속 인물들이 치밀하게 다가온다. 

이 책을 보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계속 떠올랐다. 아, 카리스마 짱이었는데...... 

 

르네상스 시대 법정의 모습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 현대의 법정 풍경만 떠올랐다. 나의 상상력 부족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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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0-07-2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땡기는 책입니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ㅎㅎㅎ

마노아 2010-07-26 10:03   좋아요 0 | URL
설정이 흥미를 돋우지요? ^^ㅎㅎ

마녀고양이 2010-07-2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조선에서 유럽으로? 흠....... 판단이 어렵네요. ㅋㄷㅋㄷ

마노아 2010-07-26 23:37   좋아요 0 | URL
시작은 좋았는데 마무리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소녀
미나토 가나에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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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백, 속죄에 이어 미나토 가나에를 만난 세 번째 작품이다. 앞의 두 작품이 워낙 흡인력 있어서 이번에도 매우 기대가 컸다. 특유의 독백 말투로 진행을 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약간 다르긴 하지만 형식 자체는 비슷하다고 본다.  

주인공은 유키와 아쓰코. 유키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로 인해 왼손의 악력을 거의 잃는 사고를 당하는 등 할머니에 대한 증오로 성격이 변해버렸고, 아쓰코는 어려서부터 검도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전국 대회 우승까지 갔던 이력이 있지만 한 번의 실패와 그로 인해 얻은 악성 리플로 자신감을 잃고 검도의 길을 포기했다.  

일본 사회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여고 시절을 지난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잊은 것인지, 작품 속 두 친구의 심사는 이해가 잘 안될 때가 많았다. 둘은 너무 서로 견제하고 불필요한 것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그리하여 불만 속에 오해를 꽃피웠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왕따가 일반화되고, 그 왕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겹겹이 갑옷을 두루며 자기 보호에 실패한 나머지 자살이라는 골문을 향해 달리는 아이들이 많다면, 그런 심사들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만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은 받았다.  

아이들은 철없는 호기심으로 '죽음'에 가까이 가고 싶어했다. 죽음을 직접 곁에서 목격하고 그 생생한 기운을 느껴보고 싶어했다. 본인이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남의 죽음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호기심이 과하다고 하기엔 너무 무례하다고 느껴졌다. 바로 직전에 '애도하는 사람'을 읽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그래도 작가의 글솜씨를 아는 지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정말 이렇게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기대 반 염려 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작가는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작품 깊이 독자를 끌어당겼다. 책장이 매우 빠르게 넘어가는 책이기도 했지만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윤회하듯 하나로 만나지는, 원인과 결과가 맞붙어서 회전하는 이야기의 결말에 아찔함을 느꼈다.  

각 개인의 고통과 절망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냐만은, 아이들의 비뚫어진 마음들이 불편했다. 철없는 호기심으로 사고를 칠 것 같던 아이들이 그래도 순수한 모습을 보이면서 서로에게 쌓인 오해를 풀 때는 다행이다 여겼는데, 그건 그거고 역시 이 아이들은 철딱서니도 없고 최소한의 양심도 별로 없는 게 아닌가. 뭔가 힘이 탁 하고 풀리는 기분이다. 뭐랄까. 지나치게 가볍다. 허영끼가 많은 여고생이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라는 게 있을 것 같은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두 아이뿐 아니라 그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맡은 두 아이의 행보가 목끝에 걸린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 속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끝없는 나선형 구조를 올라가는 것처럼 맞물린다. 그렇게 이야기를 조합한 작가의 솜씨는 기술적으로 참 탁월하다. 그렇지만 '고백'에서 보았던 그 섬뜩한 전율과 '속죄'에서 느꼈던 타자의 고통과 감정은 이번 책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들었다. 어느 정도 '성장 소설'의 범주에 분명 들어가지만, 그 '성장'이라는 게 꼭 그렇게 긍정적인 가치로만 제시되는 건 아님을 보여준 것이 신선했달까.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지만 작품 속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그렇게 세상 일은 자신이 무심코 내뱉고 저지른 언행이 나비 효과가 되어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 오기 마련인데, 이 아이들은 얼마만큼 더 성숙해져서 지난 모습들을 되돌아 반성할까.  

소녀를 읽으며 '목숨'이 너무 가볍게 취급되는 세태를 탄식한다. 꿈많은 문학소녀의 그 여고생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옳은 선택이 아니다. 재밌게 읽었지만 무언갈 남겼다고 말하기는 좀처럼 어려운 독서였다. 일본 문학에서 곧잘 느끼곤 하는 감정이기도 한데 그걸 깨는 작품을 어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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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2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2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0-07-02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보고 충격 먹었어요.
그런데 손을 뗄 수 없는 흡입력이 있더군요.
요건 궁금해서 리뷰를 읽지 않고 넘어갈께요.^^

마노아 2010-07-02 21:45   좋아요 0 | URL
고백에 이어 속죄까지 연타로 아주 충격 먹었어요.
대단한 이야기꾼인 건 분명해요.^^

마녀고양이 2010-07-0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작품이 영 뒤가 찜찜하다눈.......
그런데두 한번 잡으면 밤을 새더라도 읽게 만들더군요.
대단한 작가입니다.

마노아 2010-07-03 09:48   좋아요 0 | URL
엄청 궁금하게 만드는 작가예요. 그런데 재미와 흥미와 몰입도는 최고인데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지요? 그래서 베스트는 늘 아니게 되어요.^^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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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로만 상상했던 '애도하는 사람'은 좀 더 고전적인 분위기였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를 상상했고, 표지 속의 저런 옷을 입은 주인공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애도한다'는 의미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었던 영조를 생각했다. 그때의 '애도'는 이 책의 '애도'와 사전적 의미가 같음에도 의미가 너무 달랐지만.  

애도하는 사람. 이것은 주인공 시즈토에게 사람들이 붙이 별명이다. 그는 어느 날부터 죽은 사람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라디오나 신문 등을 통해서, 혹은 길을 가다가도 꽃이 놓여있는 장소를 발견하면 곧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죽은 사람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세 가지였다. 죽은 이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지, 또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가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지... 그의 애도 자세는 이랬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 손은 머리 위로 올려 공중에 떠다니는 뭔가를 잡는 것처럼 끌어모으고 왼손은 대지의 숨결을 퍼올리기라도 하듯 땅에서부터 끌어올려 두 손을 가슴께에서 포갠다. 그리고 그가 알아낸, 혹은 짐작하는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망자를 향해 애도를 표한다.

이 독특한 사람을 이 책은 세 사람의 화자를 통해 설명한다. 첫번째 인물은 주간지 기자인 마키노 고타로. 그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로 지면을 채우며 위악을 떨며 살았던 인물인 그가 애도하는 사람-시즈토와 마주쳤다. 진심으로 '애도'를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을 인정할 수 없던 그는 시즈토의 뒤를 밟으며 그의 진의를 파헤치려 애썼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당황한다.  

두번째 인물은 시즈토의 엄마인 사카쓰키 준코다. 그녀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입원 치료에 더 이상 기댈 수가 없어서 재택 케어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즈토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인물로서 그가 왜 '애도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키를 쥔 사람이었다. 정작 그 자신은 아들의 속 마음을 제대로 모른다고 판단했지만, 그녀가 느낀 그대로가 곧 시즈토가 애도하는 사람이 된 까닭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인물은 남편을 살해한 죄로 징역을 살고 막 출소한 여인 나기 유키요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했던 그 장소에서 남편을 애도하는 시즈토와 마주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혼란과 절망에 사로잡힌 채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유키요는 시즈토의 뒤를 따르면서 남편의 죽음과 자신의 생의 의미를 찾아내 보려고 애쓴다.  

가급적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애도 여행을 진행하는 시즈토. 때로 그는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되어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고 유족들의 경계를 사며 분노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애도 행위를 위선으로 보는 이도 많았고, 주제 넘는다 판단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오히려 유족의 상처를 더 헤집는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의 애도에 감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세상에 왔다가 불행히 떠났다는 것에 서러운 눈물을 짓는 부모님, 비극적인 끝을 맞았지만 사실은 사연 많은 삶을 살았던 이들이라며 추억하기를 원하는 친구까지... 시즈토를 경멸하는 눈동자만큼이나 그에게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과연 어떨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쉽지 않은 대답이다.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죽음에 대해선 그의 애도에 고마움을 느낄 테지만, 만약 내가 분노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인물의 죽음이라면, 더군다나 그게 피해 당사자라면, 그런 사람도 똑같이 애도받는 것에 대해선 혼란을 느낄 것 같다. 그에게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사랑하고, 또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건 사형제를 폐지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결론이다. 혼란스러울 독자를 대신해서 시즈토의 입을 빌려 작가는 말한다.  

"살인사건이나 음주운전으로 일어난 교통사고를 접할 때는 감정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노와 원통함을 앞세우다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고인이 아닌, 사건이나 사고 혹은 범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아이의 이름보다 그 아이를 죽인 범인의 이름이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식으로요.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본질'이란 단어가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인간인지라, 더군다나 죽은 사람과 깊은 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의 마지막 모습에 집착을 하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생각하고 떠올리는 게 더 올바르단 생각을 하게 된다. 내게 있어선 아빠가 그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고, 젊은 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심지어 오늘 떠나 버린...ㅜ.ㅜ-연예인들도 그렇다. 생전의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 그렇게 애도하는 일. 그것이 남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인연의 끈이 아닐까.  

소설은 내가 짐작했던 것과 달리 덜 '영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좀 더 신비스런 무언가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즈토의 애도는 분명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평범하지도 않지만, 그가 해내는 애도는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비록 제3자가 보기엔 충분히 구도자의 삶 같았지만 그는 분명 감정과 감각을 가진 인간이기도 했다. 좀처럼 감정을 보이지 않고 늘 억제해오던 그가 자신을 드러내고 그 마음 속을 꺼내 놓을 때는 그랬기에 더더욱 인간적으로 보였던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준코와 그녀의 남편, 곧 시즈토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죽은 오빠의 생명을 대신 살고 있다고 느꼈던 준코. 그리고 어린 나이에 공습으로 죽어버린 형의 그림자를 안고 살던 다카히코. 같은 아픔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를 위로하며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 죽음의 그림자는 이제 아들을 따라다니며 그를 유랑하게 만들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던 준코는 이제 스러져가는 삶의 끄트머리에 닿아 있고, 그녀의 딸은 새 생명을 잉태했다. 그렇게 마치 윤회하고 있는 느낌으로 생명과 죽음을 함께 얘기한다.  

시즈토의 애도를 경멸하는 사람은 그의 애도를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의 애도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던 사람은 오래오래 그 고마움을 간직할 것이다.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가여운 영혼도,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 진심으로 애도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의 마지막은 분명 덜 외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분명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만약 시즈토와 같은 사람에게 나의 응원 한 마디를 보탤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애도를 계속해 달라고. 세상에서 가장 위로받고 싶은 영혼들이 그 애도 속에서 쉴 수 있도록.
그러나, 어디까지나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해달라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ps. 그런데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말줄임 표에는 점 여섯 개 뒤에 마침표가 없다. 옥의 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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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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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SF 소설이 많이 그렇듯이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인간과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대결구도를 다루고 있어 이제는 식상할 수도 있건만, 독특한 스타일로 그 식상함을 지혜롭게 비켜나간다. 주인공 아낙스(아낙시맨더)는 학술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관들 앞에서 네 시간에 걸쳐 시험을 본다. 한 시간씩 지날 때마다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잔뜩 긴장해 있던 아낙스는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 자신의 생각을 더 논리정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나 마지막 시험의 끄트머리에서 모든 인식을 뒤엎는 계기를 맞게 된다.  

199쪽의 비교적 짧은 페이지 안에서 미래 공화국의 모습과 대전쟁, 대역병의 창궐, 인간게놈지도 등등, 온갖 설정과 이야기가 난무하는 까닭에 1.2교시 시험을 마칠 때까지는 꽤 어지러웠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를 먼저 읽고 나서야 생각이 정리될 정도로 말이다. 공개된 내용을 가져와보면 이렇다. 

소설 속 2058년에는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강력해진 중국과 미국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이 무너지고 언론이 공포를 유포하면서, 대중은 음모론에 마음을 빼앗겨 이웃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 이때 전쟁의 먹잇감이 될 사건이 발생한다. 태평양 영공에서 미국이 중국 항공기를 격추하면서 3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대유행하면서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위기에도 기업가 플라톤은 남태평양의 섬을 사들여 자신의 공화국을 축조한다. 플라톤은 섬 주위에 높은 해양방벽을 쌓아 전쟁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외부세계에서 공화국을 보호했다. 주민들은 게놈 정보에 따라 신분이 나눠지고 이제 공화국에선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란 전혀 없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완벽하게 구현된 셈이다. 주민들은 선택과 의지를 국가에 넘겨주는 대신에 안전과 풍요를 보장 받았다.

소설의 제목에도 들어간 2058년은 소설에서 액자식 구성으로 등장한 아담이 태어난 해다. 그의 이름이 '아담'인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소설의 제목 '제너시스'가 '창세기'를 뜻하고 있으니 제대로 짝을 맞춘 셈이다.  

플라톤이 구축한 이 세계에서 게놈지도에 따라 가장 우등 계급은 '철학자' 계급이다. 가장 영리한 아이들이 철학자 계급이 되고 여기서 강등된 그룹이 군인 계급이다. 아담은 철학자 계급이었지만 십대 때 분리 거주하고 있는 여자들의 영역에 잠입했다가 좌천되어 해안 경계를 서는 보초병이 된다. 스무 살이 된 아담은 뗏목을 타고 공화국으로 다가오는 소녀(이름은 이브다!)를 발견하고, 공화국의 법에 따라 전염병을 퍼트릴 수도 있는 외부인을 즉각 사살해야 했지만, 오히려 사격을 강요하는 동료를 죽이고 소녀를 피신시킨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아담. 공화국은 그를 중요 범죄자로 다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모두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그를 죽일 수도 없게 된 난감한 상황!  

'변화란 곧 파멸이다.'라는 강령을 가진 공화국에서 아담의 돌발 행동은 큰 위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인공지능 로봇 분야에서 문제가 있었던 로봇의 새 버전 실험이 필요했던 위원회는 이 로봇 아트와 아담을 한 공간에 붙여놓았다. 3교시부터 시작되는 문답에는 아담과 로봇 아트의 문답이 주 내용인데 이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연상시킨다. 1교시 시험 직후 쉬는 시간에 마주쳤던 또 다른 수험생의 이름이 '소크'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담과 아트의 문답은 철학적 사유를 주로 담았지만 조금은 변죽만 울리는 기분이었다. 아트가 현 인간을 네 번째 창조물이라며 파격적 진화론을 펼친다. 아담의 주장도 옳았고 아트의 주장도 옳았다. 그랬기에 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시험 시간에 그동안 삭제되었다고 알려졌던 아담의 마지막 비공개 기록에서 아담은 아트를 끝내 인정하고 말았다. 사실 여태 버틴 게 용하기는 했다.  

이 책의 소갯말 중에서 마지막 반전이 주는 놀라움이 크다고 해서 읽는 동안에 계속해서 끝마무리를 상상했다. 아담이 사실은 알고 보니 진짜 로봇이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트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상상 말이다.  

미리 얘기하자면, 모두 어긋났다. 무언가 내가 상상했던 종류의 반전인 것은 맞지만 그 규격의 차이가 매우 컸다. 그리고 그 반전의 전율이 너무 커서 우왓! 소리가 다 나왔다. 상상 이상이었다. 별점으로 얘기하자면 앞 부분에서는 별 셋과 별 넷을 오가면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면 마지막 반전의 정체를 알고서는 바로 별점 다섯으로 승격되는 느낌? 어쩐지 맥이 탁 풀리면서 조금 섬뜩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느낌이었다. 미래 사회를 낭만적으로 상상해낼 수 없는 현실의 균열을 아는 까닭이다.  

책을 다 읽은 뒤 다시 표지를 살펴보았다. 바다 위의 경계막과 출렁이는 금빛 머리칼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 그리고 원죄... 그 모든 상징들을 제대로 녹인 작가 버나드 베켓은 경제학 전공 출신에 과학 교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비범한 소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과 스타일의 이 작가는 그러나 문학성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지구가 태양을 향해 등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고, 신시가지로 내려오는 길을 함께 걸었다. (80쪽)  
   

지구가 태양을 향해 등을 돌리는 저 풍경은 해가 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다시금 어린왕자가 떠올랐다.  

너무도 대단한 인공지능 로봇 아트가 계단은 올라갈 수 없는 다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가는 아날로그였지만 그건 설정 때문이니 넘어가자.  

작가도 훌륭하지만 역자 칭찬도 아니 할 수가 없다. 번역을 매끄럽게 한 것도 그렇거니와 우리말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바꾼 문장들이 걸작이었다. 번번이 사전을 찾는 수고를 겸해야 했지만 이런 표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기뻤다.

반면 몇몇 오타도 눈에 띄었다. 31쪽 밑에서 5줄. 그때 경계병 더 급박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조사가 빠졌다. 

역자 후기의 맨 마지막 문장 담아낼 수 있었다는 건 분명 하나의 성취하고 해야 할 것이다.  ^^

뭐, 이 정도는 귀여운 옥의 티다. 책이 워낙 재밌으니 금방 다음 쇄를 찍으면서 수정 되겠지.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열정적이었고 낭만(?)적이었던 부분을 옮겨본다. 아담이 아트에게 힘주어 얘기했던 내용이다. 

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어떻게 아침의 풀잎 냄새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겠어? 나는 내 피부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고, 나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의 감각이야. 나는 절대 가 본 적 없지만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이고, 다른 이의 숨결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야.
너는 인간의 수명이 짧다고 비웃었지만, 바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주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 나는 무관심이기도 하고, 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 아버지는 또 누군가의 아들이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나는 궁금함이고, 또 그 자체로 궁금함을 낳기도 하지. 그래, 세상이 네 버튼을 누르고 네 회로를 훑고 지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이 나를 훑고 지나갈 수는 없어. 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내가 세상 안에 있고, 세상도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나를 통해 우주가 스스로 알아가고, 그 어떤 기계도 나를 만들어낼 수 없어. 내가 바로 의미야. –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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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ia 2010-05-16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처음엔 정말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책까지 기대가 떨어지던데
책을 다 읽고 난 후는..... 좀 ㅎㄷㄷ했죠...

마노아 2010-05-16 12:50   좋아요 0 | URL
전 원래 상상력이 빼어난 작품을 좋아하긴 하지만 앞쪽에 철학적 질문과 답변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근데 진짜 정체가 드러날 때쯤 되면 서늘해지더라구요. 진짜 후덜덜이에요.^^ㅎㅎㅎ

Sylvia 2010-05-16 13:35   좋아요 0 | URL
앗, 저 책표지 얘기한거예요.
진짜 저런 표지 별로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읽고 난 후 책 표시를 다시 보니..엄마나! 싶더라고요^^

마노아 2010-05-16 13:45   좋아요 0 | URL
전 책 표지는 전혀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다 읽고서 무심코 보니 아뿔싸! 싶은 거예요. 그래서 표지가 다시 보였답니다. 근데 다락방님 말씀처럼 진짜 영화 포스터 분위기가 나긴 하네요. 영화 2010도 있었고요.^^

다락방 2010-05-1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 책 어떻게 읽게 된거에요? 리뷰를 읽어보니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는 마노아님이 관심가질 만 하다고 보여지지만, 책 표지만 보면 음, 전혀 관심가지지 않을 종류인 것 같아서요. 전 영화 리뷰인줄 알았어요. 영화 포스터 같아요, 책 표지가. 영화 포스터여도 저는 보지 않았을 그런 영화요. 그런데 책을 읽고 다시 보면 적절한 표지인가 보군요!

아담이 아트에게 얘기했다는 인용구절이 정말 멋져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이 문장이 특히 더.

마노아 2010-05-16 12:52   좋아요 0 | URL
선물 받았어요.^^
페이지가 짧고 소재가 독특해서 흥미있겠다 싶었는데 앞에 상황 설정을 먼저 알지 않고는 몰입이 좀 힘들어요. 그러다가 뒤에 가면 쭈뼛 서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요. 영화로 만들면... 곤란할 것 같아요. 영상을 보여줘야 하는데 문답자의 모습을 보여주면 반전이 약해지거든요.^^;;;
아담의 답변이 인상적이지요? 번역하신 분이 대구를 잘 맞추어서 잘 해준 것 같아요. 원작도 좋았을 테지만요.^^

루체오페르 2010-05-1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던 책인데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내가 바로 의미야... 캬~ㅎㅎ

마노아 2010-05-16 23:4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내가 바로 의미야... 정말 캬~ 소리 나오는 대사예요.^^ㅎㅎ

같은하늘 2010-05-20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 리뷰어하라는거 리뷰 쓸 자신이 없어 패스했는데 아깝다. ^^

마노아 2010-05-20 14:54   좋아요 0 | URL
저는 페이지가 적어서 수락했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