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에서 ‘죽음의 상업화’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장례식을 거부한 법정 스님의 죽음이 장례의식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 데 이어 최근 가톨릭 평신도 신학연구단체인 우리신학연구소가 펴내는 연간지 <우리신학>이 ‘죽음, 그 영성과 상업화 문제’라는 특집을 통해 ‘죽음의 상업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법정 스님은 ‘장례’를 ‘검은 의식’이라고 지칭했다.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라’는 게 그의 유언이었다. 
 
법정 스님의 유언은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었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저서와 법문을 통해 남악현태를 비롯한 선사들의 죽음을 소개하곤 했다.
그가 2003년 길상사 개원 6돌 법회 등에서 언급한 9세기 당나라 때의 남악현태 스님은 외떨어진 암자에서 홀로 맑게 살았다. 예순다섯 살 되던 어느날 그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길가던 한 스님을 청해 화장을 당부한다. 미리 나무를 암자 앞에 쌓아둔 그는 가사를 입고 장작 위에 앉은 채 ‘불을 당겨달라’고 청한다. 그가 이때 남긴 임종게(죽을 때 남긴 시)의 내용은 이렇다.

‘내 나이 올해 예순다섯, 사대(지·수·화·풍)가 주인을 떠나려 한다. 도는 스스로 아득해서 그곳에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머리 깎을 필요도 없고 목욕을 할 필요도 없다.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덩이로 천 가지만 가지가 넉넉하다.’

법정 스님은 또 ‘내 몸 본래 없었고 마음 또한 머문 곳 없으니 태워서 흩어버리고 시주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던 고려말 백운 스님의 유언을 들며 국화 꽃송이를 5만개 이상이나 장식해 호화의 극치를 보이는 큰스님들의 장례 모습을 꼬집었다.

법정 스님은 “순간순간 한 생애를 어떻게 살아왔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죽을 때 야단스러운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내 삶이 유언이다’라고 했던 간디의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화려한 장례의식이 그의 삶을 아름답게 꾸며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와의 이별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많은 사람을 모아 돈을 걷고, 이후 사리를 수습해서 사리친견법회 등을 통해 계속 이벤트를 연출하는 행태를 수없이 보며 고개를 저었던 법정 스님은 자신의 죽음에 즈음에 장례식도, 상여도 없이 입은 옷 그대로 장작더미 위에서 태워짐으로써 ‘검은 의식의 윤회’를 끊고자 했다.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 박승옥 대표는 <우리신학>에 기고한 ‘죽음이 상품이 되고 폐품이 된 사막사회’란 글에서 “사람의 죽음은 이제 무엇보다 돈으로 계산되고 장례 비용과 묘지 비용 등 시체 처리 비용부터 걱정한다”며 “우리는 누가 죽었다고 하면 부주돈 액수부터 계산하고, 장례식장에 가면 부주돈을 내고 이름을 적고 일회용 음식을 먹고 끝”이라고 상업화한 장례의식을 꼬집었다. 그는 “망자에 대한 예란 그저 형식만 있을 뿐”이라며 “너무도 많은 죽음을 그저 일회용 컵 버리듯 쓰레기처럼 버리고 있는 중”이라고 개탄했다. 박 대표는 “농촌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어떤 이웃은 쌀을, 어떤 이는 호박을, 가난한 이웃은 그냥 맨몸으로 와서 일을 도우며 망자에게 최대한의 예를 다 갖추어 한 인간의 삶을 존엄하게 보내는 산 자들의 의식이었다”고 말했다.

죽음의 상업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죽음을 사랑과 자비를 펼치는 장으로 만들자는 제언으로 이어진다. 법정 스님의 5촌 조카인 현장 스님(보성 대원사 주지)에 따르면 법정 스님 자신도 부모님과 할머니 기일이 되면 남모르게 꼭 양로원을 찾아 어려운 노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정토회 법륜 스님도 부친의 장례식 대신 마을 경로잔치를 하고, 기일 때도 경로잔치를 이어왔다.

3년 전 사망한 부친의 장례비용 전액을 히말라야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내놓고 매년 기일 때마다 캄보디아에 우물을 하나씩 파주고 있는 산악인 정명숙씨(50)는 “어떤 화려한 장례식이나 제사보다도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4134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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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 지식인’들은 대부분 강한 이념적·당파적 색깔을 드러내기 때문에 각자 막강한 지지세력을 거느리고 있다.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 우군의 지지가 더 뜨거워진다.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그런 ‘패거리 싸움’의 원리상 속된 말로 밑질 게 없는 것이다. ‘강심장’과 자기성찰은 원초적으로 궁합이 맞질 않는다. 적을 매섭게 공격할 때에 지지자들의 피가 끓는 것이지, 자기성찰은 오히려 지지자들을 내쫓는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강한 당파성을 갖고 있을 때엔 ‘강심장’에 속했지만, 당파성의 한계와 추한 면을 본 뒤로 자기성찰을 부르짖으면서 ‘심약파’로 변했다. 중간적 입장을 뜨겁게 지지해줄 사람들도 없으니 욕먹어 가면서까지 소신을 피력할 동기부여도 안 된다. 그래서 가슴속 깊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는다. 어느덧 “38선 혼자 막느냐”는 우스갯소리가 내 좌우명이 되고 말았다. 모두 다 미쳐 돌아갈 때엔 침묵하는 게 최상이라고 믿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공공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이 함정에 빠져 있다. 시장원리상 자기성찰이 가능하지 않게끔 돼 있는 것이다. 신문들도 마찬가지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다 ‘강심장 신문’들이다. 상대편을 공격하는 데에만 모든 정열을 쏟고 있을 뿐이다. 아니 지금 이명박 정권과 그 패거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런 양비론을 펴는가? 분노할 독자들이 적지 않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길 해보면 영 딴판이다. 지금 이런 식으로 가선 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왜 개혁·진보세력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는가? 그것도 이명박과 그 패거리들 때문인가? 이 물음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는다.

자기성찰을 좀 하는가 싶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모든 게 뒤집어져 버렸다. 이명박과 그 패거리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이 유일한 대안이자 비전이 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다. 서거 직전까지 노 전 대통령과 친노세력이 져야 할 책임과 관련해 날카로운 비판을 퍼붓던 진보신문들마저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도 없이 돌변해 노 전 대통령을 미화하면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외치는 전위대가 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권의 ‘표현의 자유’ 탄압만 무서운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 지금 개혁·진보세력은 스스로 건 최면과 자기기만에 의해 더 큰 탄압을 받고 있다. 공기업들을 망친 게 이명박 정권인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인가? 언론·학계에 있다가 정·관계로 진출한 개혁·진보 인사 가운데 무엇이 문제였으며 자신의 과오는 무엇이라고 밝히는 사람은 왜 한 명도 없는가? 개혁·진보적인 시민운동이 탄압을 받는다고 외쳐대기 전에 그간 정부와 대기업의 도움으로 편하게 살아온 과거를 반성하면 안 되는가? 나는 <한겨레> 지면에서 이명박 비판과 더불어 이런 의제들을 많이 다루는 걸 보고 싶다.
 
(한겨레 10-01-19, 강준만 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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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가디언>은 2005년 베를리너판으로 전환하면서 사람 얘기와 인터뷰 기사 등을 크게 늘렸다. 심지어 죽은 사람의 인생을 정리해주는 부음기사를 매일 두 면에 걸쳐 싣는 모험을 했다. 얼마나 끌고 나갈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국내외 인물을 가리지 않고 <워낭소리>의 노부부처럼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의미를 부각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이종욱씨를 비롯한 한국인도 여럿 부음기사로 다뤄졌다.

우리나라와 판이한 점은 죽은 사람의 공적은 물론이고 과오까지 가차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가디언> 부음기사의 객관성은 정평이 나 있어 ‘관 뚜껑을 <가디언>이 닫는다’는 얘기까지 있다. 누구나 죽음을 앞둔 처지이고 보면, <가디언>이 부음기사를 쓸 만한 공인이라면 살아생전에 언행을 경건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죽은 이에 대해 좋게만 보도하는 우리 언론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두 대통령 서거 당시 <한겨레> 보도 태도에도 ‘역사적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치우침은 없었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우리나라 신문에서 사람 소식을 전하는 면은 부음란을 빼고는 모두 경사스런 소식으로 채워진다. 연말에는 거의 미담기사와 희소식 일색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의 얘기나 출세를 해 ‘자랑스런 동문’으로 선정된 이를 비롯한 각종 수상자들이 ‘사람’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룹마다 대규모 임원 승진 인사가 발표되는 시기도 이때다.

합격자 뒤에는 사교육을 받지 못해 쓰라림을 맛본 불합격자가 더 많고, 승진 인사 뒤에는 평생을 바친 직장을 떠나야 하는 해고의 비애가 서려 있지만, 거기에 주목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대기업은 사기업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자산이 된 지 오래건만 재벌 총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 불문하고 초고속 승진을 해도 그저 ‘추인’하는 게 오늘의 한국 언론이다. 젊은 2, 3세 승계로 이어지면서 선대의 공신들은 한창 경륜을 펼칠 나이에 밀려나는 이들도 많다. 나이를 잣대로 능력과 의욕을 폄하하는 풍토는 나이든 사람들을 더 무능하고 의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이른바 ‘사회쇠약증후군’을 만연하게 한다.

(한겨레, 이봉수 「‘잘나가는’ 신문에는 ‘사람 이야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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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0-01-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개를 물어야' 보도해주는 것이 언론의 생리라고, 너무 체념했었나.
 

- 한국은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일극 집중도’와 ‘해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조건에서 치열한 내부경쟁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다. 살인적인 ‘입시전쟁’과 ‘영어전쟁’이 그 어떤 처방을 해도 약화되지 않는 건 그것들이 한국 사회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극렬한 경쟁에 치를 떨면서도 경쟁만이 한국의 살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몫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경쟁에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을 넘어서려는 진보 이념은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나아갈 길은 아니라고 보는 게 다수 민심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더라도 안에선 다른 행동양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부분은 전체와 비슷한 구조로 되풀이되는 구조를 갖는다”는 ‘프랙털 법칙’ 때문이다. 지방이 서울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각 지역에선 가장 큰 도시가 서울과 똑같은 패권주의를 행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법칙 때문이 아니겠는가.

- 경쟁과 통합은 양립하기 어렵다. 경쟁이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 같은 전근대적 관행을 근거로 삼을 때 통합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패거리를 중심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투쟁을 곧잘 이념투쟁이나 지역투쟁으로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이익투쟁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선 안 된다. 원인은 ‘이익’이고 ‘이념·지역’은 결과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면 기존 이익·이권 구도가 뒤집어진다.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각종 공적기관에서도 우두머리의 교체에 따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국인들이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도 늘 정치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사는 이유다. 그 누구도 자신이 이익투쟁을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이익은 늘 이념과 명분으로 포장된다. 그 포장을 중심으로 해법을 찾아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 결국 이익 배분의 공정화·투명화가 해법인 셈인데, 이걸 가로막는 게 껍데기일 뿐인 이념과 명분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같은 패거리의 ‘승자독식주의’가 당당하게 저질러진다. 권력을 가진 자와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같은 교회에 다니거나 같은 모임에서 몇번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이들이 탐을 내는 공직을 하나씩 꿰차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 놓고선 ‘통합’을 하자고 외침으로써 그런 ‘뜯어먹기 잔치판’에서 소외된 이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다.

(한겨레, 강준만 「사회통합이 불가능한 이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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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0-01-0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리와 이념을 내세울 때, 성찰해보자. 나 자신의 이익은 무엇인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