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스터를 먹는 시간
방현석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랍스터를 먹는 시간, 소설과 드라마

이원익 연출, 권민수 극본의 TV문학관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는 두 편의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방현석)과 <터널을 벗어나며>(김미라)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서 연출하고 있다.

옴니버스(omnibus)란 본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탈 수 있는 자동차’를 뜻하나, 영화나 연극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동시에 보여주는 양식을 지칭한다.
다른 소재, 다른 플롯, 다른 서사구조로 쓰인 개별 작품들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팔레트 위에 색을 만들 때, 더 많은 물감을 섞을수록 색감이 진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 작품들이 이루어낸 교집합은, 주제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개별 작품들의 구성요소 또한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하지만, 옴니버스 양식이 개별 작품의 나열 혹은 물리적인 결합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개별 작품들은 하나 이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연출 의도에 따라 수많은 조합을 이룰 수 있다. 그 결과, 옴니버스가 만들어 내는 다채로운 색감이, 오히려 기존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는 단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TV문학관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전쟁”에 초점을 맞춰 옴니버스를 구성하고 있다. 드라마가 위와 같은 중심축을 설정함에 따라, 원작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인물 및 갈등구조에도 약간의 지반변동이 발생한 것으로 보여 진다.

원작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상처 받은 개인 간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상처’의 배경은 다양하다. 그것은 전쟁이기도 하고, 노동 현장이며, 가정이기도 하다. 같은 배경 속에서도 상처는 또한 다양하다. 누군가는 전쟁에서 청춘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겼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잃었다. 누군가는 노동 현장 속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겼고, 누군가는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야 했다. 이렇듯, 원작소설은 다양한 개인의 상처들을, 몇몇 사회적 공간(전쟁, 노동 현장, 가족) 속에서 재조명하는 방식으로, 상처들이 서로 만나고 위로받도록 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과 사건, 배경의 유기적인 배열과 구성이 이러한 주제의식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TV문학관 <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상처는 오로지 전쟁만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것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강조하고 싶었던 연출자의 기획의도를 반영한 것이며, 이에 따라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이 가진 구성요소들은 취사선택 내지는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구성요소별로 살펴보도록 한다.

# 인물

인물 구성 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건석’과 ‘건찬’에게서 나타난다.
우선, 극중 건석의 역할이 다소 약화되었다. 등장인물로서의 비중은 큰 변화가 없지만, 사건을 전개하고 갈등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역할은 줄어들었다. 원작소설의 건석은, “개인의 욕망 때문에 형의 삶을 외면했던 과거”를 가진 인물이다. 베트남에서 건석의 일상은, 끊임없이 형과의 기억, 즉 자신의 상처를 불러낸다. ‘兄’의 기일이 쓰여진 달력, 아버지와 형이 함께 나온 바랜 흑백사진이 배치되었고, 베트남의 욕조는 동네 뒷산과 시골집을,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보낼 전보는 D중공업에서 온 전보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보 반 러이’에게 전해들은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그의 연인이었던 ‘이니’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건석이 노동조합 소식지를 통해 읽은 D중공업의 파업투쟁과 현장에서 죽어간 형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지게 된다. 각기 다른 배경과 다른 원인의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조우하며 연대의 단초를 마련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에서 건석의 상처는 뚜렷하지 않다. 어린 시절 건찬과의 기억이 종종 오버랩 되긴 하지만 극중 효과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데, 이것은 극중 건찬(우옌 카이 호앙)의 존재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D중공업에서 보내진 전보와 파업 현장을 통해서 드러났던 건찬의 사건들은 드라마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원작소설에서 건석과 보 반 러이의 상처를 이어주는 건찬의 역할이 사라진 결과, 건석은 김 부장이나 보 반 러이와 같은 참전 세대의 상처를 매개하고 수긍하는 역할로 다소 축소되었고, 이것은 ‘베트남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긴 상처‘를 강조하고자 했던 연출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보여 진다.

# 사건

사건 구성 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D중공업의 파업에서 나타난다.
원작소설에서,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보낼 전보문안의 번역을 망설이는 건석은, 건찬이 일하는 공장으로부터 받은 전보를 기억해낸다.

건석: “니가 뭔데 우리 엄마를 괴롭혀!”
건찬: “난 이 공장이 좋다. 넌 내 이름이 뭔지 아니? 여기서는 모두 내 이름을 부르지. 최건찬. 물론 나에게는 먼저 우옌 카이 호앙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째보, 베트콩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되뇌었다. 우옌 카이 호항. 하지만 최건찬인가 우옌 카이 호앙인가 하는 건 중요치 않아. 난 내 이름을 비겁하게 만들며 살아가지 않아.”


‘전보 사건’은 그간 감추어져 있었던 건찬의 캐릭터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하고, 건석과 건찬 사이의 갈등이, 탄생배경을 둘러싼 가족 간의 갈등에서 노동권을 둘러싼 사회적인 갈등으로 옮아가는 사건이며, 결국, 전보에 반발해 사직서를 제출하는 보 반 러이가 건찬을 통해 건석과 만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난 건석과 보 반 러이는, 각각 D중공업 노조의 파업투쟁과 혁명군대의 대부대작전이라는 사건을 나란히 전개하며, 형 건찬과 연인 이니를 불러낸다. 개인의 공간에서 시작된 상처가 사회적 공간으로 옮아가고, 또 다시 개인의 공간으로 돌아가지만, 이제 더 이상 사회와 개인의 구분이 무관한 ‘연대감’에 이르는 것이다.
반면, 드라마에서는 위의 두 가지 사건이 배제되어 있어, 후반부에 이를수록 건석 보다는 보 반 러이가 사건과 갈등을 주요하게 전개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여 진다.

# 배경

원작소설에서 건석의 기억에 따라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던 배경 구성은, 드라마에서는 베트남에 좀 더 비중을 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베트남 전쟁이 남긴 상처’를 중심으로 하는 주제의 설정에 따라 소설 내 사건을 취사선택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작소설에서는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두 개의 공간, 그리고 각각에서 다시 일터와 가정, 사회로 나뉘어 지는 공간 구획이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생국가를 제외하면 아무런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건찬과 보 반 러이가,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서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한국과 베트남 모두에 일터라는 배경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터와 베트남의 일터가 수평으로 만나는 지점에서 기억의 연대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 사건을 선택하였고, 자연스럽게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한국 내 배경들은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공백은 또 하나의 단편 <터널을 벗어나며>의 70년대 한국을 통해서 메워지고 있다. 물론, 드라마는 한국이나 베트남이라는 ‘지리적’ 공간배경 보다는 참전세대의 ‘사회적’ 공간배경에 더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극중 ‘삼촌‘의 자살사건이 베트남이 아닌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볼 때, 한국이라는 공간배경은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다운 가짜, 대중문화와 센티멘털리즘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01
김혜련 지음 / 책세상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대중’과 ‘대중적인 것’

‘대중’이라는 단어는,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공식적인 지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지칭(popular)하는 것이지만, 평가적인 관점에서는, 주체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집단(mass)을 일컫기도 하였다. 흔히 ‘대중적인 것’이라 함은 평가적인 의미를 띠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대중적인 것’이라 함은, 한꺼번에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의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역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내용, 대중의 취미와 가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적인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위의 두 가지 지점을 모두 고려해야 할 것이다.

# 문화의 예술화와 예술의 문화화

문화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라면, 예술은 특정한 매체, 기법, 스타일,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복제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예술의 독점적 영역이 해체되자, 예술과 문화 사이의 경계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순수예술은 대중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대중문화는 예술적 형식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열어준 가능성의 공간에서, 예술과 문화는 각각의 영역을 개척하며 더욱 발전해나가기 보다는, 서로의 영역을 다툼하는 경쟁의 구도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예술이 가진 매체적 형식과 미적 아우라만을 차용하려하고(문화의 예술화), 예술은 그 스스로 작품의 형식성과는 괴리된 채 감상자의 관심사와 욕구충족에만 매달리는 현상(예술의 문화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인문강좌 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실용강좌(문화)와 인문학(예술)의 만남은 분명 가능성의 공간이지만, 대가와 석학의 이름과 작품만 나부끼는 일회성 인문강좌와 외딴섬과 같은 인문대학들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그것을 또 하나의 문화의 예술화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도식성, 통속성, 관능성

대중예술은 상품이기에 앞서, 제작과정과 소비방식에서 비롯된 구조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도식성과 통속성, 관능성이 그것이다.

도식성은 익숙한 플롯 형식을 통해 감상자들로 하여금 별다른 노력 없이 유사한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측 가능한 구성과 종지부, 감정이입이 손쉬운 성격 묘사, 현실과 분리되는 별세계의 경험,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과 같은 것들이다. 대중예술의 도식성은 현실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단순화하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주지만, 진지한 성찰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이 내면화되고 습관화된다면 센티멘털리즘의 핵심인 자기기만이 내면화될 수 있다.

통속성이란, 흔하고 저급한 소재를 통해 사람들을 모두 같은 부류로 만들어, 감상자들로 하여금 동류에 속하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문화적으로 획일화이며 하향평준화라는 점에서 퇴행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심리적, 신체적, 도덕적인 면에서의 노력과 투자를 최소화하는 것을 통해, 즐거움과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관능성이란 성적 판타지를 조성하여 감상자들에게 구체적인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성적 판타지는 상대를 자신의 필요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이기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가 내면화된다면, 우리는 인격성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워낙 알려진 소설이라, 풍월이라도 도움을 주겠거니 생각 했었다. 하지만, 극중 ‘윤희중‘에게 ‘무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쉽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 없는 결혼과 정략적 출세로 나타나는 서울에서의 삶과 대비해 ’잃어버린 순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했지만, 막상 무진에서 그의 행보는 그와 조금 달랐다. 거리낌 없이 놀음판에 끼어들고, 순수를 상징하는 후배 ’박‘에게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대하며, 그가 흠모하는 ’하인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연민 이상의 느낌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물론, 앞서 나열한 윤희중의 행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순수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진에서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나, 회상으로 드러나는 무진에서의 생활은 설익은 추측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였다. 그의 시선은 무진의 초여름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린 술집여자며, 적막한 거리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교미하는 개들에 머무른다. 동기생 ‘조’로 대변되는 무진의 주민들은 허영과 출세욕을 내비치고, 서로를 속물이라 생각하면서도 표리부동 한다. 또한, 징집을 피해 골방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지인들에게 절박한 편지를 쓰며 무진을 벗어나고자 했던 윤희중의 무진. 그의 무진은 결코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윤희중의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무진을 떠나며 하인숙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였던 것이다. 하인숙에게 약속했던 서울은 바로 몇 일 전 그가 떠나온 곳이었다. 더구나, 하인숙은 골방에 틀어박혀 외로움을 토로하는 윤희중이고, 무진을 벗어나 서울을 동경하는 윤희중이었다. 그저 ‘하인숙’, 그저 ‘윤희중’. 사람의 이름 석 자를 제외하고 그의 부끄러움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나는 찾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것을 ‘연민‘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세상의 속물들‘을 매질하는 어떤 숭고한 ’가치’에 반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에 대한 연민, 더러운 세상 속에서 더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나는, 김훈 선생님의 소설평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에 선생님의 신작 <공무도하>를 사야겠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비부인>중의 아리아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중략)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가는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있었다.” (<무진기행>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의 몸과 생각 평소에 존중 습관을 
 
아동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이다.
아동 성폭력의 뿌리는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에 닿아 있다.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이 남존여비의 오랜 인습에서 기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예방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예방의 문화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아이의 몸은 ‘전부’ 소중하다

흔히 예방 교육에서는 내 몸은 소중하기 때문에 남이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김영애 여성민우회 전문강사는 “어른들이 아이들 머리를 툭툭 치고 뺨이나 엉덩이를 손으로 때리는 것이 허용되는 문화에서 아이들한테 몸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일은 무의미하다”며 “아이들은 결국 성기만 소중하다고 배우는데 엉덩이를 만지거나 팔을 쓰다듬는 등의 성추행은 인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의 머리, 얼굴, 팔, 다리, 성기 모두가 소중하다는 인식을 부모나 교사가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몸뿐만 아니라 생각도 존중해야 한다. 이는 교육의 기본이지만 아동 성폭력 예방에 특히 기여할 수 있다. 김 강사는 “아이들은 부모한테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될 뻔했던 상황을 얘기하지만 부모들은 괜한 소리라며 일축하는 일이 많다”며 “어떤 아저씨가 예쁘대, 옆집 오빠는 이상해 등의 말에서 위기를 포착하려면 평소에 자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녀의 생각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의 거부 의사를 존중하라

“싫어요, 안 돼요”라는 저항은 아동 성폭력 예방의 기초다. 그러나 평소에 부모나 교사들이 아이들의 거부 의사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성폭력 상황에서만 저항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김 강사는 “아빠가 술 먹고 들어와서 자는 아이를 깨워 얼굴을 비비는 것도 아이가 싫다고 하면 그만둬야 한다”며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야 진짜 위험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은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전문강사는 “아빠의 친구한테 뽀뽀하기 싫어하는 아이한테 ‘뭐 그렇게 비싸게 굴어’ 하는 부모들이 있다”며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을 구분하는 교육을 아무리 해도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싫은 느낌을 강요하게 되면 아이들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아동 성폭력 가해자의 78%가 아는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이런 강요는 더욱 위험하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한겨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겨레,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당신에겐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처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당신은 그 콤플렉스와 상처를 넘기 위해 열심히 이 악물고 노력해서 스스로를 성장시켰습니다. 번듯한 회사도 들어가고 돈도 모아 자기 집도 장만했습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성취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속에 외로운 소년이 둥지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얻은 그 성취는, 그 콤플렉스를 빨리 버리라고 어렵게 얻어진 건데, 정작 본인이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소중히 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거죠. 왜냐, 그 상처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그 외에 소중히 할 만한 게 별로 없으니까. 물리적으로 남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상처를 자신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면 왠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어찌되었던 ‘상처’ 이야기는 피곤합니다. 왜냐면 대개 ‘상처’ 그 자체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 이야기가 잘 먹혀들기라도 하면 그것 역시도 문제이지요. 상처를 극복하거나 잊는 게 아니라 상처에 자꾸 의지하게 되니까요. 심지어 내가 나의 상처를 소중히 하는 것처럼, 나의 상처를 소중히 해줄 수 있는 ‘타인’을 찾게 되고 그것이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돼버리니까.

이때 자기연민과 자기애가 굳는 건 시간문제이지요. 이러면 사람 참 빨리도 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