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국정브리핑)

‘신문 경쟁’ ‘여론다양성’ 원칙 세웠다
‘자전거일보’ 등 신문 유통시장 혼란 바로잡아

[정책리포트] 공정한 신문시장

‘자전거일보’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만큼 2000년대 초반 신문시장에선 ‘자전거’가 단연 화두였다. 월 구독료 1만2000원짜리 신문을 보는데 10만 원이 넘는 자전거 경품이 제공되다보니 “신문 지국이 아니라 자전거 지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곳에서 자전거를 뿌리면 그 지역의 신문시장은 곧바로 초토화된다”는 게 당시 신문지국 관계자의 설명이다. 급기야 2003년 1월에는 자전거 판매업자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매출이 50% 이상 줄어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며“법적 제재를 해달라”는 이유였다.

과다 경품을 앞세운 신문업계의 물량경쟁은 2000년대 초 ‘자전거일보’ ‘비데신문’ 등의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극심했다. 신문 경품은 역사가 길다. 1970년대에는 설탕이 있었다. 그 후 컵, 손톱깎이 등으로 발전하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믹서, 레저용TV, 뻐꾸기시계, 버너, 다기능 도마, 교자상, 위성방송 수신 안테나, 원목탁자, 발신자표시 전화기, 킥보드, 에어컨형 선풍기, 소형 진공청소기, 돗자리, 밥솥, 정수기, 자전거, 비데, 백화점상품권 등 신접살림을 차려도 좋을 만큼 끝없이 이어졌다.

과열 경쟁은 살해 사건까지 빚었다. 1996년 7월 판매 경쟁을 벌이다 중앙일보 경기 남원당 지국 직원이 조선일보 지국원을 살해한 사건은 언론계 안팎에 충격을 줬다.

과당경쟁으로 신뢰 잃고, ‘제살 깎아먹기’

과열경쟁은 신문사들의 수익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김영주 언론재단 연구위원은 국정브리핑 기고에서 “신문사 재정의 80% 이상을 광고수익이 차지하다 보니 개별 신문사들은 보도의 질을 높여 독자를 늘리기보다 고가 경품과 무가지를 통해 구독자 수를 늘리고, 광고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량공세를 앞세운 경쟁은 관행으로 굳어졌고, 결과적으로 신문시장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신문은 제값 내고 보는 게 아니라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렸다. 무리한 확장 경쟁은 신문 절독이 “담배 끊기보다 힘들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오게 했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신문이 불법 경쟁을 공공연히 벌이는 모습은 앞뒤가 맞지 않다. 게다가 출혈 경쟁은 부실 경영을 낳는다. 한국기자협회가 “광고주를 현혹하기 위해 벌이는 경품 파티로 신문 경영이 더 부실해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등 언론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2002.5.22 우리의 주장).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익명의 신문사 사주는 “연간 300억~400억원이 출혈 경쟁으로 낭비된다”며 “이 돈을 절약하면 신문 종사자들의 대우가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선 지국장들은 경품 사용을 ‘울며 겨자먹기’라고 말한다. 대개 경품 사용으로 확보한 신규독자 가운데 70% 이상은 기존의 다른 신문 구독자다. 그만큼 이탈 독자가 많이 생긴다는 얘기다. 결국 경품 사용 후 1년이 지나면 지국 수입은 ‘현상 유지’ 수준이라는 게 지국장들의 설명이다. 출혈경쟁이 발전적 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부에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가경품’이 위험한 이유, “여론 다양성 훼손”

경품은 단순히 시장질서를 해치는데 그치지 않고, 훨씬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부자신문’들이 경품을 통해 물량공세를 펴면 ‘가난한 신문’들은 시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소수 의견은 힘을 얻지 못한 채 여론은 획일화하고, 심지어 왜곡 가능성도 높다. 몇몇 신문이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계층만 대변한다고 생각해보자. 단편적인 ‘사실’은 알려지더라도 전체를 조망하는 ‘진실’은 가려지기 쉽다. 다양한 여론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되고, 사회적 손실은 커진다. 매체 선택권을 박탈하는 ‘고가 경품’은 그래서 위험하다.

신문이 ‘질적 경쟁’을 벌이고, 독자들은 자유롭게 신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신문업계도 ‘자율규제’를 통해 시장정상화 노력을 벌여왔다.

신문협회는 1960년대 이후‘영업정화위원회’ 활동, 신문판매협의회 구성, 신문판매윤리강령 제정 등 자정 노력을 펼쳤다. 1977년에는 ‘신문판매 정상화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고, 1996년 조선일보 지국원 살해사건 직후엔 ‘신문 판매질서 확립 공동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7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신문고시를 제정하고, 2001년 폐지했던 신문고시를 부활할 때에도 신문업계는 ‘자율규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율규제는 말 그대로 자율에 그치면서 근원적 처방에 실패했다.

불가피했던 정부의 신문판매시장 정상화 조치

이 과정에서 언론관련 단체들의 시장정상화 목소리는 날로 커졌고,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신문고시 개정을 통해 불법 경쟁을 단속하고, 여론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신문유통원 설립,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신문발전위원회 구성 등을 단행했다.

신문고시는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5월 개정됐다. 신문업계가 자율적으로 규제하던 신문고시 위반사건을 공정위가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신문고시는 연간 구독료의 20%를 초과하는 경품과 무가지 제공을 금지하고 있다. 그해 5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공정위가 조사한 신문지국은 1316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신문고시를 위반한 904건에 대해 시정조치를 내렸고, 12억715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2005년 4월 1일부터는 불법경품 등에 대한 신고포상금제를 도입했다. 이후 2006년 9월까지 모두 117건에 포상금 1억4777만 원을 지급했다. 일부에서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 신문고시는 이미 2002년 7월 헌법재판소의 전원 합의를 통해 합헌 결론이 났다. 헌재는 “신문고시는 신문업계의 과당경쟁을 완화하고, 올바른 여론형성을 주도해야 할 신문의 공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만큼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선풍기 지급’에 첫 수금월도 구독일자보다 4개월 후로 명시돼 있는 애독자 카드. 이 신문 지국은 시민 신고로 적발됐다. 현재 신문시장 신고포상금은 최고 1000만원까지 지급된다.

“참여정부 잘한 일, 신문고시 개정”

신문고시 개정은 신문업계 안팎의 지지를 받았다. 기자협회가 전국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신문고시 개정은 참여정부 언론정책 중 ‘잘한 일’ 2위에 올랐다(2004.2). “잘했다”는 응답이 50.3%, “잘못한 편”이 12.4%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이 각계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대(對) 언론조치’ 중 가장 잘한 것 1위로 꼽혔다(2003.6). 일선 신문 지국들은 더욱 강력한 규제를 주문했다. 언론학회의 ‘전국 신문판매지국 실태조사’에 따르면 2531개 지국 중 79.7%가 “판촉활동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서울 소재 지국은 83.7%가 “더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2004.3).

신문고시 개정과 신고포상금제 실시로 판매시장은 다소 개선되는 양상을 보였다. 공정위가 중앙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신규독자 중 위법한 경품 및 무가지를 받은 비율은 63.4%(2003)→ 41.9%(2005) → 35.1%(2006)로 줄었다. 그러나 판매시장의 오랜 관행이 하루아침에 정상화되기는 쉽지 않았다. 공정위는 2006년 12월 “신고포상금제 시행 직후 거래질서가 일시적으로 개선되기도 했으나 2005년 말 이후 다시 불공정거래행위가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매체선택권 보장 위해 신문유통원 설립

신문시장 정상화를 위한 또 다른 축은 신문유통원 설립이다. 유통구조를 개선해 신문산업 진흥과 국민의 폭넓은 매체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게 설립 취지다. 신문유통원이 담당하는 공동배달은 언론계의 오랜 주문사항이기도 했다. 매체선택권을 보장하고, 다양한 여론형성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고속도로와 같은 공공인프라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요구였다. 자본력이 약한 신문사는 배달망이 무너져 신문을 잘 만들더라도 ‘질적 경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배달 체계의 효율성을 높여 고비용 구조 개선도 기대했다. 공동배달제 연구는 2000년 언론노조를 중심으로 본격화했고, 2003년 경향신문 등 5개 중앙일간지를 주축으로 과천에서 시범운영을 거쳤다.

신문유통원은 2005년 1월 제정된 신문법 37조에 따라 2005년 11월 문을 열고, 공동배달제의 법적 토대를 만들었다. 기능적으로는 지국의 배달, 판촉, 수금 업무 중 배달에 대해 위탁수수료를 받고 대행해준다. 강기석 신문유통원장은 “신문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민간기업”이라며 “공공재인 신문이 물량경쟁으로 도태되지 않고 질적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통한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신문유통원은 2006년에 공배센터 73곳을 구축했고, 2007년에는 223곳을 추가로 설립할 계획이다. 공동배달은 배달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유통원에 따르면 실제 공동배달을 하고 있는 서울 서소문 공배협의회의 경우 평균 배달단가가 공동배달 전 1부당 1,100원에서 925원으로 줄었다. 특히 규모가 작은 신문의 경우 1부당 3,000원에서 큰폭으로 낮아졌다. 부수가 많아지면서 1부당 배달단가가 절감되는 효과다. 또 지국들이 배달 부담에서 벗어나면서 판촉이나 독자관리에 충실해질 수 있다. 지국간 합의를 통해 과도한 경품 사용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이점이다. 강기석 원장은 “전문지나 각종 간행물 배달 등 2차 사업을 통해 수익모델을 만들 것”이라며 “배달원의 근무여건도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경쟁 지국간 합의를 통해 민영 공배센터를 운영하고, 수익모델을 창출하는 일이 간단치는 않다. 2006년 가을 공배센터에 참여하기 시작한 서울의 한 지국장은 “지국들이 2차 사업을 통해 수익을 내면 지금처럼 무리한 확장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도 “거대 신문들이 지국의 공배센터 참여를 사실상 막고 있어 주저하는 지국들이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공동배달제는 프랑스, 스웨덴, 독일 등 유럽 국가에서 수십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스웨덴은 1969년 도입해 공동배달회사를 이용하는 신문에 국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프랑스는 이보다 앞선 1947년 정기간행물 공동배급회사인 NMPP를 설립하고 국가 지원을 시작했다. 당시 공동배달제 근간을 마련한 전 통신분야 정무장관 로베르 비셰는 “언론의 자유는 편집자가 원고를 작성한 시점부터 독자가 그 기사를 읽는 순간까지 계속돼야 한다. 그러므로 신문, 잡지들에게 동등하고 정당한 운송 및 배급 조건을 보장하는 것은 진정한 언론자유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도 신문유통원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바 있다. 헌재는 2006년 6월 29일 신문법 위헌 제청사건에 대한 결정에서 “신문유통원을 이용해 공동배달망에 가입할지 독자적인 배달제도를 유지할지는 각 신문사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며 “(신문기업에 대한) 기본권 침해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유통원을 통한 국고지원으로 신문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통제의 길이 열리게 된다고 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신문고시 개정, 신문유통원 설립과 함께 2004년 3월 지역신문발전지원특별법이 제정되고, 2005년 10월 신문발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경영이 어려운 언론사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민주주의 기초인 여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신문사는 기사의 질로 경쟁하고, 독자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신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작업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특별기획팀 (webmaster@korea.kr) | 등록일 : 200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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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위기 진단’ 진보학자들 논쟁 불붙었다
최장집 교수 “한나라에 정권 넘겨야” 일파만파
조희연-손호철 교수, 반박-재반박 뜨거운 설전

 
(출처: 한겨레 고명섭 기자)
 
한국 정치 위기 진단을 놓고 진보학계의 지도급 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사이에 논쟁이 불붙었다. 논쟁에 불을 댕긴 쪽은 조희연 교수다. 조 교수는 <한겨레> 인터뷰(1월22일치 4면) 등 여러 매체에서 최장집 교수가 한 발언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인터넷 진보매체 <레디앙>에 기고했고, 이에 대해 손호철 교수가 조 교수의 주장을 일면 동조하고 일면 비판하는 글을 같은 매체에 기고하자 조 교수가 다시 손 교수를 반비판하면서 논쟁의 판이 커졌다.

애초 쟁점을 제공한 최 교수의 논지를 요약하면 노무현 정부는 무능력과 비개혁 때문에 실패했으며, 실패한 이상 특단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한나라당으로 정권을 넘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으로, 사회적 갈등을 제도정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운동정치(포퓰리즘=민중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정치를 무력화한 데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의 이런 주장에서 출발한 세 학자의 논쟁을 진행 순서대로 정리해본다.

조희연의 최장집 비판=조 교수는 최 교수가 한국 정치의 위기에 대한 ‘지적’은 올바르게 했지만 ‘진단’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원인은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정당과 국회를 배제한 데 실패 원인이 있다는 최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조 교수는 사회적 힘을 이끌어내는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하지 못한 데 참여정부 실패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로 갈등을 수렴하는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저항을 돌파하는 제도정치 바깥의 사회적 힘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확언했다. 민중주의란 정당이나 국회 등 제도권 정치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고 대중과 결합하는 전략을 가리킨다. 진보적 민중주의는 ‘사회경제적 개혁’을 급진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그러려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르는 대중의 분노를 급진적 방향으로 키워야 한다고 조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제도정치가 정상화하고 그 제도적 틀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민중주의적 사회운동’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조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 문제를 진보세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타자의 문제’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과 열린우리당 등 중도자유주의세력을 포함한 진보·개혁 세력 전체가 지닌 본질적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문제의 하나로 그는 노무현 정부가 ‘헤게모니 정치’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 참여정부는 지나치게 정체성에 집착해 집권 기반을 협소화했을 뿐, 보수적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 함께 가는 기반확대 전략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호철의 반론=손호철 교수는 조 교수의 최장집 비판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자유주의 세력이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줘야 한다”는 최 교수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었다. 손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이 역설적으로 긍정적 요소가 있다며, 정권이 넘어가면 오히려 한국정치가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 한나라당식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사회적 양극화와 민중 생존의 파탄을 경험”하면 “문제의 핵심이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럴 때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에게서 대안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 교수가 말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를 다시 거론한 손 교수는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안에서까지 ‘한나라당에 권력이 넘어가도 좋으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문제를 풀려는 것은 코미디”라며 “이제 유치한 ‘두려움의 동원 정치’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이 논리에 ‘두려움의 동원 논리’가 여전히 있다는 인식이 깔린 반론인 셈이다.

조희연의 재반박=이에 조 교수는 “우리 현실의 복합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손 교수의 한나라당 집권 긍정 논리는 최 교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한나라당 집권 촉진 운동을 해야 한다는 오해도 나올”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손 교수의 논리는 “한국 자본주의가 더 파국적인 상황을 맞아야 대중이 더욱 급진화하고 변혁운동 기반이 강화된다는 1980년대식 인식을 떠올리게 한다”며 매우 위험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한나라당의 집권은 한국에서 ‘신보수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1930년대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한 뒤 긴 파시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진보세력에게 불리한 상황만 안겨줄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2004년 탄핵반대 투쟁에서 확인됐듯이 올바른 일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진보세력의 공간도 확장시킨다며, “탄핵반대 투쟁이 열린우리당에게만 혜택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대약진에도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007년 대선도 마찬가지”라며 “현재와 같은 구도로 지속되는 것이 좋은가, 한나라당의 패권적 구도가 흔들리는 것이 진보정당의 약진에 좋은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라”고 주문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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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박노자가 본 러시아혁명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The 1917 Russian Revolution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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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힙합플레이야)

Q. 먼저, HiphopPlaya.Com 회원분들, 그리고 리스너 분들께, 인사해주세요.

먼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한동안 많은 논쟁에도 참가해주셨던분들인데요..(웃음) 여러분들때문에 하는거잖아요.. 결국엔. 이분들이 힙합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인데, 너무 거대하게 말씀드리는것일수 있겠지만, 좀 느껴주세요..어차피, 한배를 타고 있고, 전부 존중하자 좋아하자는 뜻이 아니고, 자기 취향/수준/기준이 있는건 알지만, 여러분들의 행동이나 글에 따라서 힙합의 변화를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거니까,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Q. 힙합플레이야의 어떤 메뉴를 자주 이용하시는지?

예전에는 외국뉴스를 자주보다가, 가사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LYRICS] 메뉴를 자주봤어요.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제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걸 보면서, 그때부터는 무슨말이 오가나 보면서 놀라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인터뷰도 자주봐요. 뮤지션분들이 어떤생각을 가지고 있나 하는것과 어떤사람인가 볼수도 있고.

Q. 게시판을 종종 이용하셨다면, 가사에 대한 논란부분에 있어서, 그에 대한 반응 들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고, 리스너 들이 가지고 계신 오해 라는게 있을 것 같은데, 뮤지션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리스너라고 하면, 각자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는 다양한 수준의 청취자들을 말하는 것일 텐데요. 논란되는 의견을 들어보면, 차라리 무슨 적대 크루나 기획사들 사이의 전쟁같이 들릴때가 많아요. 오해라기보다는 너무도 굳어버린 고정관념을 보는 느낌이죠. 우리편은 언더, 음악만을 위해 싸우는 뮤지션, 저들은 오버, 돈만 아는 상업적인 랩, 저들을 좋아하면 광팬, 우리는 안티일 수 밖에...,너는 영어랩을 많이하는 해외파, 비애국자, 우리는 애국자편, 우리 크루 소속이냐, 상대방 크루 소속이냐....이런 극단적으로 이분법적인 분별을 보면, 음악 사이트가 아니라 일간지 정치면의 댓글 싸움을 보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런 분별에 눈이나 귀를 가리다보면, 자기의 감상 영토를 스스로 좁혀버리는 결과가 되고, 리스너로써 누릴 수 있는 음악의 즐거움이나 감상의 목적까지도 잃어버리게 될 뿐입니다. 제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영어 랩이 많이 섞였다는 비판이었는데, 랩이나 힙합이 처음 생성됐던 영어 라임 속에 성장했던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약점이 되버리는 것이죠. 우리말 랩을 나름대로 새로 배우고 개척하겠다는 정신으로 영어와 우리말 랩을 섞으면, 이 두 가사가 서로 연관성이 없이 따로 논다는 비평이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제 가사를 보면, 영어나 우리말 가사의 의미가 따로 놀고 단절됐다기보다는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즐겨듣던 'Common - I Used To Love H.E.R' 나, 한용운님의 시처럼, 여인의 사랑이나 님이라는 말로 표현되던 은유가 많았었고, 이걸 알아주시느냐 아니냐는 리스너의 몫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적대 관계에서 작품을 보면, 가사 뒤에 숨은 뜻은 눈에 가려 안보이고, 흠집으로 확대돼 단점으로만 크게 보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처음 한국에 와서는 음악대학이나 학원 세미나에 초청되거나 참가해 나름대로 힙합 랩 라임등에 대한 강의를 한다며 사명감을 불태우기도 했어요. 힙합라임은 퍼즐찾기와 비슷하다고 말예요.
그러나 일단 자기의 작품을 발표하고 나면, 작품이 말하는 거지, 아티스트나 MC는 무성영화의 ‘변사’도 아니고, 자기의 작품에 대해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일일이 나서서 설명하는 해설자가 아니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서야 처음 털어놓고 말하는 사연입니다. 우리나라 힙합이 발전하고 라임이 형성되고 정착하며, 우리나라 힙합계에 문법적으로도 완벽하고 우리말 가사를 유려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고, 그들을 보면 존경하게 되죠. 나도 저렇게 저런 수준으로 제 표현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어휘를 늘여야겠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보다 제가 떨어지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잖아요.
근데, 리드머에서도 밝혔지만, 그것을 저는 약점으로 만들고 싶지 않고, 그것을 무기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바로 내가 그 동안 영어랩에서 접해왔고 경험해온 힙합 리릭시즘 본연의 특질을 살려, 우리말 라임 특유의 표현을 나 나름대로 실험하고 만들어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6집까지 오며, 그래서 영어를 줄이려고 노력해왔고 했지만, 또 다른 부분도 있어요. 세계에 나가서 살고 있는 많은 팬 분들 말입니다. 캐나다, 필리핀, 뉴욕, 보스턴, LA, 호주 까지… Drunken Camp 라는 외국사이트도 있고요… 그 분들은 오히려, 영어를 제가 안 쓴다고 되게 섭섭해해요.
한류가 새로운 이슈로도 등장하며, 우리 음악인들의 터전이 넓어지고 있어, 힙합도 국경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말은 힙합에서의 좁은 싸움, 소모적인 내전(內戰)으로 영토 줄이기라는 부정적 차원 보다는 가슴을 활짝 열고 편식에서 벗어나 살좀 찌자는 말입니다. 더 넓고, 너 깊고, 더 높은 세계, 긍정적인 힙합을 향해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힙힙플레야로 거듭 나고, 거듭 발전하자는 제안입니다.

Q. 가사부분에서 있어, 많은 분들이 비평하시는 부분이 내용상의 이해가 힘들고, 문법적인 측면에서의 어색함을 많이 꼽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나 락 등 다른 음악 장르에서 보면, 순수나 대중을 가리지 않고 장르마다 그 분야의 대한 비평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평론하는 전문 비평가들이 있습니다. 힙합의 경우, 다른 장르에 비해 그 역사가 짧은 탓인지, 지금까지도 다른 분야에 비해 평론가들이 많이 형성되지 않았고, 오히려 매니아들이나 리스너들이 전문 평론가들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비평활동을 벌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힙합은 오늘날까지 우리보다 역사가 훨씬 더 긴 미국에서조차도 작품의 방향이나 예술성에 대해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고,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거로 잘못 아는, ‘진짜 힙합’의 정의에도 합의점을 못찾고, 여전히 올드 스쿨과 뉴 스쿨 논쟁도 시끄럽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 미국 힙합의 개척자 아프리카밤바타가 힙합의 emergency라며, 비상시국 선포까지 하고 나왔쟎아요? Universal Zulu Nation이 ‘최고 세계 회의’를 소집하고 힙합에서 ‘트루 스쿨’찾기 운동을 벌이겠다는 경고문도 발표하고 말입니다.
처음에 우리말 표현이 서툴렀고, 어휘가 넓지 못했다는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그 동안 발표해온 내 라임은 나름대로 내가 알아오고 겪어온 세계의 나의 이야기를 해외의 힙합 리릭시즘에 동원되는 비유, 은유, 숨겨진 이중의미 (double entendre) 등, 모든 랩 작사 작법과 스키밍을 모두 우리말에 시도해보고, 적용해 본 것입니다. 나름대로 힙합의 한국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인데, 이게 난해하게 들렸다면, 아마 내 과욕의 탓일 수도 있어요.
요즘 힙합플레야 게시판에서도 가끔 들어와 볼 기회가 있었는데, 비평 내용을 보면 처음와서 들어본 비평과 별반 달라진 내용이 없이 똑같은 줄거리여서 놀랬어요. 스테레오타입이나 매너리즘에 빠진 비평이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두운, 요운, 각운 등 작품성을 위해 단어를 코이닝(조어)한다든가, 일부러 앞뒤로 어순을 바꾼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문법에 늘어지는 비평에는 솔직히 실망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힙합 언어는 흔히 인터넷 언어에 비교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옛것이 파괴되고 새로운 표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태튼 아일랜드출신의 wu tang clan 들은 옛날 중국영화들에서 그들의 철학과 비유들을 많이 인용해 사용했기 때문에 뉴욕출생의 학자들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랩과 표현을 쓰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랩을 이해하고 알아듣는데 도움이 될 그들만의 wu tang clan 용어사전을 발표하기도 하잖아요? 특히 내가 좋아하던 a tribe called quest 의 q-tip 도 aka abstract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의 추상적인 표현을 많이 썼어요. 우리 동네쪽 project blow 의 freestylefellowship , heiro쪽의 souls of mischief 등의 스타일에 깊이 빠져있었는데 , 이들의 랩이나 라임의 배치 혹은 비유와 표현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들 외의 다른 크루들은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리스너들이 전문평론가 보다 더 많이 비평에 많이 참가할수록 힙합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며, 도움이 되고 그만큼 바람직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난해성을 호소하고 문법의 철칙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결론은 그 가사를 다시 한번 잘 분석하고 음미해보라고 권하고 싶을 뿐입니다.

Q. 계속 안좋은 질문일수도 있는데요, '난 널 원해'로 대표되는 과도한 샘플링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과도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 역시 듣는 이들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통 샘플링이 나쁘다라고 단정 짖기에는(제 생각이지만) 힙합음악에서 샘플링은 아주 중요한 요소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샘플링 위주의 비트를 선호하는 편이고 , 많은 음반을 내면서부터 생음악과 모듈사운드에도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역시 샘플링 위주의 룹핑으로 이루워진 비트를 좋아하는 편이구요.
하지만 듣는 이들이나 비트메이커들의 입장에서의 수준에 제 옛곡들이 많이 미달 한다고들생각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습니다. 샘플링을 통한 신선한 재 편곡 혹은 재창작이 독창적일 때 , 아 이곡은 정말 우수하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제자신도 그런 곡들의 팬이기도 하고, 제 기분에 따라 잊혀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음악이나 ,평소에 너무 좋아했던 곡들을 그대로 통샘플해서 가져올 때 , 그런 곡들 만의 매력을 느낄 때도 있고요..
하지만 양심적으로 크레딧을 꼭 표기해야겟죠 이부분 에서는, 비트메이킹 보다 랩핑에 더관심이 있었던 루키적인 실수 또는 샘플을 마구하고 샘플한 곡들의 원곡 이름을 적지못한 게으름 또, 돈문제 때문에의 의도적 행위도 있었어요.... 절대 아 이건 모르겠지 생각하며 힙합팬 들을 우롱하려 그런적은 없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저의 이런 실수들이 정당화된다는건아니고요) 이것 또한 변명인데, 거기에 대해서 후회스럽고, 실수한 부분도 있지만, 말씀을 드리자면 제가 어렸을 때 했던 앨범이 Drunken Tiger 1집이에요. Tiger JK 에 있었던 곡들이 그냥 나온건데, 당시 저의 비트메이킹 개념이 그때 는 컷 & 페이스트였어요. 좋아하는 샘플따서 비트얹어놓고.. MC니까 랩에 더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이건 절대로, 정당화나 합리화가 아니라, 그때는 제가 앨범을 여기서 팔고 제가 활동을 하고 이런 개념이 아니었어요. 제가 옛날에 만들었던 앨범을 가지고 와서 그냥 힙합 좋아하는 동아리회원들 앞에서 공연을하고, 이럴려고 했던것들이 갑자기 시디로 나온다고 했을 때, 우리 는 선뜻 감사한마음으로 임했고, 제가 우리나라에서 활동을 해서, 소위 연예인이 될지는 모르고.. 저는 그냥, 공연하기 위해서 만드는거라고 생각했죠. 제작비가 500만원이던 그 시기에 하늘에서 내려 온 계단에 Led Zeppelin 의 곡을 샘플로 쓴다고 했을 때 정말 큰 액수를 달라고 했어요, 이런 자본적인 부분에서 어려웠었고, 샘플을 어떻게 재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멋있는 샘플링이 어떤것이다 라는 것은 알지만... 어쨌든, 조금씩 지식이 생기고, 비트메이킹의 매력도 느끼고, 직접 만들기도 할 때부터, 그런걸 줄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런건 묻히고.. 소변을 화장실에서 매번 싸다가 몇 번 전봇대에 싼 것만 봐주시니까..(웃음) 안 타깝죠. 역시 변명이지만, 그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6집까지 들어보시면, 많이 줄어든걸 느끼실거에요.

Q. 2005년은 Movement Crew (이하: 무브먼트)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은 한해 였는데요, 2005년이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이렇게 말하면 다들 내숭떤다고 하는데, 회사에서는 30만, 50만, 파는 가수들이 있고 저는 그렇지 못하니까,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밖에서 제 인기 테스트하려고 코엑스를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음악 만들다가 밤에는 게임하고, 힙합플레이야, 리드머 등 매니아 사이트들, 보구요…(웃음) 그러니까, 제가 즐겨보는 매니아사이트 에서는 욕을 먹고 있고 하니까 전 인기가 많은 지 몰랐어요.
구석에서 일하다가 시키는 데로 하고, 음악 만들고 녹음하고 음반 나오면 ‘나왔구나’ 이 정도였는데, 요새는 좀 느끼고 있어요. 그렇지만, 무브먼트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가 최고다, 잘 됐다' 하는 친구들은 없어요.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웃음) 특히, 다이나믹 듀오 친구들은 진짜 모범생들이고, 순수하고, 천사 같고, 칭찬은 말로 다 못하는 음악에 미쳐있는 친구들부터, Bobby Kim 은 Bobby 데로 음악 좋아하고, 리쌍도 허니패밀리이후 그들많의 스타일을 찾으려 많은 노력을 하며 그들의 일집에 사람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줄 때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
사람들이 '음악좋아요, 멋있어요' 하면 좋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거나, ‘우리가 잘됐구나’, 이렇게 생각을 많이 안하는 친구들이라서 그냥, 안도 하는거죠. 다들 불안해 했었거든요, '이번에 안되면 어떻하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축하해주는 분위기인데 다들 욕심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다른 기회나 커넥션이 없어서 빛을 못 보는 그런 사람들도 끌어주려고 다들 노력을 하고 있고, 이런 것들이, 무브먼트의 진정한 의미였는데.. 그런 것들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 한거죠

Q. 무브먼트 식구들에는 어떤 분들이 계시죠?

TBNY, 윤미래, 다듀, 부가킹즈, Epik High 리쌍, Sean2Slow 양동근, 은지원, Deegie, Dok2, 망고 등등이 있구요, 너무 커져서 빠진 사람이 있을 텐데..(웃음) 간단히 말해서, 무브먼트는 우리끼리 뭉쳐 다닌다는 패밀리 개념 이구요..힙합플레이야, 리드머, 무브먼트, 가리온, Defconn, 등 리스너와 뮤지션들, 즉, 모든사람들의 움직임이 무브먼트 라고 생각합니다.

Q. 무브먼트식구들이 다른 크루 혹은 다른 회사의 뮤지션들과의 교류가 많이 없었던 편이다가 최근에 와서야 조금씩 결과물들이 나오는 것 같은데, ‘무브먼트는 자기들만 한다’라는 식의 의견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안타까운 점이 제가 너무 대장 대부로.. 언론인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JK 이렇고 저렇고' 한 것은요. 무브먼트에서 제가 Sean2Slow, Bobby Kim과 함께 나이가 많기 때문에 형이라고 부른 것뿐인데, 그것을 받아들이실 때 많은 사람들이 'JK가 우두머리' 이렇게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Sean2Slow 는 원 없이 다른 크루의 작업도 많았고, 다듀도 나름대로 많은걸 했지만 이상하게, 그런 것들은 부각이 안되고, 우리는 우리만 하는걸로 ...
이 부분은 사실은 알면 시시한게, 집에 쌀이 많으면 집에 쌀 다 먹을 때까지 쌀 안 사잖아요.생각이 깊지 못했던 것 같아요. 너무 바쁘게... 예를 들어서 무브먼트 식구끼리의 작업은, Bobby 가 녹음을 하고 있으면 커피라도 사들고 구경가니까.. 그러다 보면, '이 노래는 생각이 안 나는데', '코러스 뭐 넣지' 하면 '이거 어때' 하면서 자연스럽게 피쳐링이 진행되니까 그렇게 진행됐고..
또 재밌는 부분은, Roc-A-Fella, Wu-Tang Clan, 그런 패밀리.. 끼리끼리 논 다는게 맞는 말 인게 자기들 취향에 맞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마스터플랜 쪽이나, 등등 다 즐겨 듣고, 가사도 공감하고 좋아하고 그런 편 이지만, 제가 추구하고 원하는 그런 스타일이랑은 조금 달랐어요. 달랐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작업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좀더 유하고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면서, 이루어지는 것 같고.. 어차피 이루어 질 거였어요. 제 목표는 60까지 열심히 달려서, 해방을 맞는 것이었기 때문에, 앞 만보고 달렸는데 그런 계획들이 다 있었는데.. 너무 급하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Q.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무브먼트의 앨범이나, 콘서트 계획에 대해서...

이제 거의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무브먼트 친구들이 패기가 넘치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우리가 잘됐다, 하지만.. 자기들만의 목적, 꿈이 있기 때문에... 성이 안찼어요 다들. 그러니까 안타깝죠.
다듀는 다듀데로 커빈이 빠진 이후에 CB MASS 와 비교 안되는 뭔가를 하고 싶었고, 자기들만이 추구하는 음악이 지금 하는 그런 음악이었기 때문에, 그거를 많이 설득을 시켰어야 했고, 제가 DJ Shine 이 빠지고 하는 것처럼 굉장히 힘들었을 거에요. Bobby는 Bobby데로 랩을 원했지만, 음악적으로, 깊이 빠져있는 친구였기 때문에, 그런것들로 자기위치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같이 뭉쳐서 하는 것들이 힘들었던 이유가 기획사 문제도 있지만, 이런게 있잖아요. '나 좀 잘되고… 형들이 날 도와주는게 아니라, 나도 내가 내 이름 값을 하고 싶어요' 하는 사람들이 많았었어요, 이제는 나름대로 자기위치를 찾고, 약간 여유가 생겼고 한데, 기획사들과 타협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기획사 사람들 눈에도 보이니까… '이 사람들은 우리회사 가수들한테 잘해주는구나' 하는게 말이에요. 이해관계도 좋아져서 아마 콘서트가 올해 있지 않으면, 디지털 싱글로 나올 것 같아요. 그리고 돈이 끼면 더러워지니까, 몇 년 전 부터 이야기된 것은 이익은 불우이웃돕기 하자. 우리가 뭉쳐서 서로 나누기도 힘드니까.. 그리고 왜 예전에, 이현도씨가 와서 힙합구조대 한다고 했을때, 그것 때문에도 오해가 있었잖아요. 그때 JK가 시킨거다 아닌거다로 이야기가 많았었잖아요.. 무브먼트 친구들이 원하는 목적, 꿈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약간 거절하기 힘드니까 내 핑계를 된 것이 아닌가... (웃음) 제 추측이에요.

Q. 무브먼트가 크루로써, 궁극적으로 원하는것은 힙합씬의 최고 위치인가요?

힙합 안에서 최고의 위치는 아니구요, 저는 힙합에서 최고가 되기는 싫어요.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무슨 말 이냐 하면은 언더그라운드를 5만 이상 팔리는 시장이 성립 됐을 때나, 저는 그런게 의미가 있지 않나 싶어요. 지금은 힙합은 유행으로 안 끝나게... 그런 활동을 하고 싶죠. 더 많은 사람들한테 퍼져나갈수도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이제는 인기가요가 아니라, ‘인기힙합’ 그런 프로가 있을 정도로. 공중파라디오에서도 힙합전문 라디오가 생기고 하면은, 많은 힙합 뮤지션들이 즐겁게, 그리고 리스너 들도 즐거운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1위하고 그런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저만 따져서 이야기하라면은...

Q.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소속사와 결별하셨는데요, 개인레이블 창립이나, 다음 앨범 계획같은것들에 대해서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정글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으로 인디레이블을 거의 시작중인데...

Q. 그럼 C.E.O 로써, 회사를 이끌어 가시는건가요?

(웃음) 구멍가게식이에요 큰 투자나, 기획사랑 연결 되지 않고...사람들은 왜 거꾸로 가냐고 하지만, 리드머 몇 만, 힙합플레이야 10만, Tiger Balm 몇만.. 이런 사람들과 우리의 무언가를 공유하고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많이 만들어서, 언더는 언더 틱 해야 하고 메이저로 올라오면 안되고, 메이저 애들은 그런 것 만 해야 하는 그런 갭(gap)없이 언더 도 충분히 먹고 살수 있는 그런 시장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조그맣게 시작하면서 그 동안 많이 못해봤던, 가리온 앨범참여, Defconn 앨범참여, 각나그네 앨범참여등, 그들의 앨범과 쇼에 참여하면서 조그맣게 시작할 생각입니다. 공개적으로 데모도 받을 것 이구요.. 사무실은 굉장히 작은데, 부지런하게 열심히 활동하려고.. 그래서 머리도 잘랐습니다. (웃음)

Q. 골든디스크시상식에서도, Respect 의 의미를 가득담아, 표출해주신 '가리온'에 대한 생각이랄까? 가리온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가리온은 제가 많이 이야기 한거지만 예전에 MP라는 작은 클럽에서 외국힙합비디오 틀어주는거 구경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랩도하고, MC들 올라가서 배틀하는것도 구경하고 저도 랩도 하고 그런시절에..가리온 뿐아니라, 디지도 그때 만난거고.. 그런 시절에 자연스럽게 알고 지내던 분이었는데.
조금 다른이야기지만, 예전에, 소울트레인이라는 동아리에서 Tiger JK 힙합강좌를 해달라는 이런제의가 있었는데, 그런거 하고, 랩을 하면서 끼니를 잇고, 즐겁게 힙합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러 다니고 이랬을 때, 제가 들고 다니던 앨범을, 기획사에서 찍어주겠다고 했을 때 어린 마음에 '어!' 했죠. 저는, 그 앨범을 찍어주면 앞서 말한, 소울트레인 라든지 힙합 컨벤션(convention) 에서 나눠줄 생각으로, 세상물정 모르고 OK 한건데, ‘한국에서는 한국말로 된 노래 밖에 타이틀이 안된다. 당장 만들어내라’ 해서..그때, 제대로 배워서 한번 하고 싶다고 가리온의 메타형 한테 부탁한적이 있어요. 도와달라고.. 그때는 메타형이 나름의 자기 것을 추구하고 계셨고, 저는 제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에...서로 약간 자기 길을 걸은 거에요. 그렇게 되면서, 만나면 반갑지만, 연락이 안되던 사이였는데..
5집 때 제가 굉장히 힘들 때... DJ Shine 이 빠져서 '이빨 빠진 호랑이다.', '넌 망했다' 식의 말들을 회사에서 듣기도 하던 그때, 매니아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도 저를 외면할 시기에.. META 형이 따뜻한 말을 해주셨어요.'난 5집이 좋다. 너의 의도를 알아듣겠다. 지금 즐겁게 듣고 있고, 가사도 1집하고 비교했을때, 월등하고. 지금 가고 있는 그 방향을 알겠다.' 라고. 사람이 간사한게 칭찬을 해주니까.. 좋았던거죠..(웃음)
그렇게 해서 다시 연결이 되고, 서로 '도와주세요'라고, 부탁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편해져서 어차피 이루어져야 했던 것 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웃음)
가리온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힙합이 없다고 생각하셨을 때, 그런 음악을 했던 분들이고, 무조건 오래했기 때문에 리스펙을 하라는게 아니구요, 가리온이 걸어온 과정들이 굉장히 쿨한 것 같아요. 역사와 같이 했다는 느낌도 들고..한번 더 말씀 드리지만, 가리온의 음악이 취향에 맞지 않는데, 무조건 좋아하라는게 아니라, 한국힙합역사에서 가리온을 삭제하면 허전할, 그런인물들이라 생각하고, 이제 '힙합' 하면 '가리온'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리온 만을 이야기 한게 아니라, 가리온을 대표로 이야기한거죠. 대세, 대세 하지만, 본상 에는 후보도 안 끼잖아요. 힙합..

Q. 많은 분들이 공중파 1위라든지, M.net 의 수상 등을 리스너, 매니아 분들이 굉장히 좋아하시는데, 이런 것들이 대세, 대세 하지만, 아직 발달되지 못해서 인 것도 같은데 어떻세요?

대중들이, 무서워 하는 것 같아요.. 카우치 사건처럼, 무서워 하는 것 같아요. 약간.. 모르는 것을 무서워하는 인간의 본능, 두려움.. 때로는 과격하기도 하고 사실이잖아요.. 욕설도 들어가고..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다수의 사람들이 안전한 것 을 원하잖아요. 그런데 힙합 인들은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선을 계속 뒤로 미루는 재미로 음악 활동 하거든요. 그래서 옛날에는 힙합에 슈퍼스타가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만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힙합슈퍼스타가 생기면 문은 더 큰문이 열리겠지만, 유행으로 그치고 슈퍼스타 때문에, '힙합 = 그 슈퍼스타'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제 혼자 생각이에요..

Q. 위와는 반대로, 대세라고 하는 가운데에서 힙합팬들이 많아지고 있는 이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간단한 답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뮤지션이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신적이 있다면요?

좋은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리고 공인으로서가 아니라,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그 이상한 시스템 안에서의 커넥션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타협이라기 보다도 연맹, 상부상조 할 수 있게, 그런… 힙합 하는 친구들이 자기들만의 스타일의 컨셉을 유지 하는 것도 멋있는데,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듯이, 하지만 힙합은 또 로마에서 한국식으로 해도 되는게 힙합이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된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서 관찰 해볼 때 저도 그랬지만, 가끔 피해의식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야 되는 줄 알고...라디오에서 괜히 욕설을 하거나, 선배가 아주 자상하게 인사를 하는데, 마치 할렘에서 온 친구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나… 그러니까 도리는 서로 지켜가면서 힙합을 널리 알려야 될 것 같아요.

Q. 힙합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줄곧, 메이저 씬에서 활동해오시면서 느낀 한계와 가능성 등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공중파는 다수가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못 보여 주는 것 같아요. 중요한 매체인데, 힙합을 위해서 만들어진 무대가 없기 때문에..제 팬들이 하루종일 기다려서 3분 보려고 우리 팬 들이 공연장 찾아오면 오지 말라고 해요.
무슨 말 이냐면 영향력이 다른 팬 들의 영향력만큼 못되니까.. 앨범을 사주고 이런 것 들도 필요한건 알지만, 안보이는 서포트 없이 들어가서 전쟁을 해야 하는게 첫번째, 힘들구요.
그 안에서는 이제, 드렁큰타이거 뿐만 아니라 힙합을 모른 다던지, 혹은 좋아하지 않는 분들 앞에서, 저흰 공연을 해야 하고, 그 안에서는 많은 정치가 있어요. 행동을 어떻게 해야하고등등, 한국의 계급사회가 깊이 박혀 있는곳이 방송국이기 때문에, 선.후배와의 관계 PD와의 관계등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적용되서 굉장히 힘들어요
힙합하면, 후까시도 잡을 때도 있고, 소위 ‘Keep It Real’ 한다고, 가식적이지 않은 모습 보이려고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모순이 생기죠. 예를 들어서 어떤 방송에서 공연을 하면, 그 많은 정치에 수긍해서 올라가면 마이크 상태라던지 MR, 모니터 상태가 립싱크 가수에 맞춰 있다는 거죠. 결국은 거기서 우리가 잘못하면 욕을 먹는데, 그런걸 일일이 설명하지 못해서 슬프고.
그 공연장에 사람들은 저를 보고 전혀 열광할 수 없는 분들이에요…겪어보지 못한 분들은 모를거에요. 디티 하면은 공연을 열광적으로 한다...디티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아서 한탕치기 할라고 계속 나온다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이 정말 모르는게, 제 음악으로 그곳에서 손을 들게 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야유도 받아봤고, 이상한 손짓도 받아봤고, 길을 막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거기서 전 열정 하나로 사기를 쳐야해요. 그 많은 레인보우색깔의 풍선 안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인생에.. 삶의 고통을 말한다고 생각해봐요.. 힙합 매니아들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이 랩을..(웃음) 그 아이들 앞에서 한다는게 굉징히 힘든 일이고, 비즈니스적인 면에서 볼 때 거기서 특별히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방송을 해버리면은.. 홍보하지 않은 것 보다 못한 효과가 나타나고,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거길 또 해야하고... 기획사랑 묶여 있을 때는 방송이 어렵고 힘들지만, 매니저, 기획사, 피디와의 관계 때문에, 정치적인 것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해요. 그런 부분들을 이해를 못해주니까 안타깝지만.. 저는 방송에 나간다고 제 색깔을 버리거나 행동을 다르게 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힙합 하면 너무 무섭다는 인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계셔서, 방송국에 가면 밝게 웃고 다니느라 웃음은 좀 늘었어요. 개인적으로는 대중적인 힙합을 해가지고 대중들에게 알려야 할 사람들도 필요하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으로는 '가리온형 '들이 쇼 프로 나가서 웃기고 있다면 울거에요. 그렇지만, 또, 그걸 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뭐, 그 사람들의 위치가 있고, 그 사람들의 팬이 있으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Q. 말씀하셨다시피, 정치적인 문제로든 아니든, 가요시장에서 쇼 프로는 거의 필수인 분위기인데, 이 부분에서 많은 뮤지션 분 들이 딜레마를 겪으실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딜레마를 겪지만, 저는 간단하게 생각하고 안 하는 편이에요. 요즘 들어 공연외적인, 인터뷰라던지, 낭독의 발견 같은 프로 라던지, 패션쇼라던지 그런곳에 종종 얼굴을 비추며, Tiger JK 란 놈이 있구, 이 사람은 힙합을 하는 놈 이다 라는걸 알리는 자기홍보 정도는 꾸준히 하는 편 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쉽게 내가 알려질 기회가 많았지만, 혹시나 나같이 밖에 못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 나가면 그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하니까.. 나는 내 위치를 지켜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메이저 라고 하는데, 저는 굉장히 고독한 언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해요. 메이저에 있는 언더… 제가 안무를 하고, 현란한 댄스와 쉬운 멜로디를 후렴구로 겸비한 그런 타이틀곡만 가지고 나와서 아주 쉽게 힙합을 하고 있다면, 아마 많은 PD들이 시스템을 그대로 고정시킬 것 같고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이 됐을 수도 있다고 저는 믿고, 거기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나 같은 놈 하나 때문에, 나같이 그냥 나와서 마이크 하나만 주면 힙합...자기 음악 할 수 있는 그런 틀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명감으로 열심히 했어요.

Q. 6집앨범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앨범 타이틀, [1945 해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건지 궁금합니다. 이전의 음악적 굴레에서의 해방? 혹은 소속사에서의 해방? (웃음)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어요. ‘나는 내 욕하는 사람들 말 안 들을거야.’ 뭐 그러면서도 빨려 들어가잖아요.. 결국, 욕하는 사람들이 이걸 원하니까 저런걸 만들어주면 좋아 할거야 하면서 그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려고 만들어 주는 것도 가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제 음악이 아니라 그 사람들 음악이잖아요. 정말 그 안에 숨은 보물 같은 비판도 있고 꾸짖음도 있어서 그런걸 걸러 들으려 노력하지만, 칭찬을 해준다고, 또, Good Life 좋아해준다고 계속 Good Life 같은 곡, 만들고 이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Ja Rule 이 그거 하나 떠가지고 계속 그거 했잖아요.. 저는 그렇게 딱 스탑 되기는 싫었어요. 그래서 힙합이니까, 힙합 스러운 머리스타일을 해야 하고, 힙합패션을 취해야 하고, 이런 것들을 버리고 싶었어요. 제가 지금 빠져있고 제가 경험한 것에 의해서, 그런 시도를 해서 욕도 많이 먹고 했지만..칭찬이나 욕이나 이런 전형적인 것들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은 저만의 바램. 그리고 제 청춘을 한 기획사에서 보낸 그런.. 그곳에서의 해방. 그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8월15일에 나와서 이건 ‘컨셉이다’ 이런 말들도 있었죠. (웃음)

Q. 타이틀곡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보 앞으로]는 개인적으로는 뮤직비디오로 처음 접했을때, 드렁큰타이거가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곡이라고 생각될만큼 멋진 곡이었습니다. 전인권씨의 이름을 언급하신 부분이 인상 깊었고 합니다만, 곡 소개 부탁드릴게요.

비하인드 스토리나, 다른 이야기들은 이제 많이들 아시니까...(웃음) 힙합플레이야에서 난데없는 전인권은 왜 나오냐.. marching은 왜 나오냐 하면서 이야기되는걸 봤었어요. 근데 그게 아주 흔해빠진 표현이고 오마주 거든요. 외국힙합퍼들 사이에는 아주 흔한 애정 혹은 존중의 표시 이죠. 예를 들어 ‘we slick like rick’ 이라던지, ‘bob marley high’ 라던지 등의 그런 외국식의 표현을 가져와서 거부반응이 있을 수도 있는데. 무브먼트 식구들 사이에는 우리끼리 듣고 고마워하고 좋아하는 그런 표현들 살짝쿵 넣어서 즐거워하고 이해하는편이에요. 이번 다이나믹듀오에 개코의 ‘핸들이고장난 8톤트럭’ 지원이 같은 경우는 '남자기 때문에’ / ‘잔을 위로 컴온', 등등 서로 그런 재밌는 애정표현이라든지 오마주를 많이 하는 편인데, 이 노래를 만들었을 때, 제일 와 닿았던게 느낌이 행진 느낌이었어요. 소외된 사람들.. 간단한게 말해서 행진하자. 제 나름대로의 표현을 '왼발을 한 보 앞으로 그 다음은 오른발의 차례' 이런식이잖아요. 그게 행진을 재밌게 표현 한건데.. 너무 깊이 생각해주시니까..(웃음) 그게 전 또 그게 제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구요.. 아무리 열심히 창의력을 발휘해서 만들어도 전인권씨의 행진 이상 어떻게 만들어요? 너무 교과서적인 곡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행진을 빌려왔으니까, 그분의 이름을 애정표시를 하면서 '전인권의 marching' 그런 뜻으로 넣은 건데, 사람들은 뜬금없다.. 이런 반응이었어요. 흔한 오마주고 애정표시에요. 지금 논란도 많이 되지만, Jay-Z 도 많이 하고.. 'It's Been A Long Time' 이라든지 'Make It Clap To This' 등, 이런게 다, Rakim, Slick Rick, Run DMC 등, 예전에 자기들이 즐겨 들었던 MC들의 가사를 대놓고 인용해서 가져 올 경우에는 확실히 이사람 것이다 해서 이름을 대는 사람도 있고 그렇거든요..

Q. 후속곡으로 소개되었던, '심의에 안걸리는 사랑노래' 외에도 '진정한 美는 마음안에', '죽지 않는 영혼' 등의 트랙들은 대중적으로도 좋은 반응이 기대되었는데, 활동을 조금 일찍 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활동을 일찍 접은 것은 이것은, 좀 예민한 문제이기도 한데요. 활동 할 때 주석 사건이 터졌을 때, 약간 김이 샜어요.제가 이때까지 쌓아놓은 업적 이랄 것은 별로 없지만.. 제가 천사도 아니고..저도 뒤에서는(비공식적인 자리) 지인들과 많이 씹고, 가사 가지고 놀리고, 좋아하는 힙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지만..남이 안되게 하려고 나서서 하고 그러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무브먼트 친구들만 봐서라도 아직도 이런 우정이.. 제가 형 이라서 만이라고 생각 안해요. 서로 진실했기 때문에..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떨어져나가고... 커빈 이라던지...(웃음) 진실했던 사람들은,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힘들 때 도와주고 그런 사람들 이었는데, 그 사건이 터졌을 때 힘들었죠. 아무리 설명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방송국에서는 다 그런 눈빛들 이었어요.. '잘 끝냈다고는 들었는데 솔직히 왜 그랬어요?' 하고 되물을 때 저는 할말이 없었고 회의를 느꼈어요. 나는 왜 항상 잘될 때 일이 무언가 터지니까..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나.. 하면서 활동을 확 줄였어요...어차피 소심한 저의 '더 이상 알려 지지말자' 의 저의 첫 번째 의도와도 잘 맞아떨어져서 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기사는 계속 나오더 라구요... 그래서 줄였다가, 예상치 못했던 좋은 기회들이 생겨서 열심히 활동을 하게 됐다가, 계약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해방을 느끼고 싶어서..(웃음) 마지막으로 저번사건은 서로 추해질 수 밖에 없는 불상사였고,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주석 그리고 MP 식구들과 나쁜 감정이 남아 있고 그런 건 젼혀 없습니다. one!

Q. 멋진외모를 가지고 계신데, 외모나 모델 등의 다른분야에 진출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

멋진 외모를 가졌다는 말은 많이 못 들었던 것 같은데..(웃음) 모델로 섰던 것은, 정말 모델답지 않으니까 재밌어서 이벤트 식으로 섭외된 것 같구요. 그것 때문에 많은 문이 열리긴 했지만.. 첫번째 목표는, 제가 돌아봤을 때,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할걸 하는 후회가 조금 줄여지는 제 그런 음악을 만드는게 목표 구요. 그 와중에 좋은 기회가 와서 만약에 연기를 하게 된다면 아마 돈 때문일거에요. 예술로 봤을 때 말도 안되는 어떤 연기자가 랩 좆나 못하는데, 나 랩 할거야 하고 뛰어들면은 많은 MC들이 화나게 되는 상황이 올 것처럼, 제가 만약에 그런 짓을 한다면은 진짜 가난하게 연기를 예술로 여기고 했던 분들한테 모욕이 될 것 같아서... 하게 된다면 아마 돈 때문이겠지만, 신중히 생각해서 진짜 멋있는 엑스트라를 하고 싶어요. 시작부터 차근차근 (웃음)

Q. 이제는 회원분들이 직접올려주신 질문들을 해볼게요, 먼저 이민호씨의 질문입니다. 예전 초기의 드렁큰타이거의 성격.. 힙합특유의 직설적이고 프리한 이미지완 달리 어느순간 바뀌어버린 현재 JK의 도인 이미지는 너무 상반된 느낌이시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제 생각에는, 머리스타일의 영향이 컸던 것 같구요. 쭉 공중파를 타고, 쇼 프로를 나갔고 하는 그런 활동을 계속 했다면, 그렇게 상반되지 않았을거라 생각해요. 여러분이 생각 한만큼 저희들이 그런 대중가요계에 활동을 많이 안 했거든요. 일부러 어렸을 때는 약간 우월감에 빠져있었고, 나만의 힙합 우리 힙합간지만의 매너리즘에 빠져서, ‘시발 저런거 안해’ 이런 것도 있지만. 또, 제가 끼가 없어서 안한 것도 있고 그런 자유스러운 변화가 노출이 안된 것 같아요. 그리고 두번째 간단한 대답은 그때는 정말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였고, 20대에서 근육도 짱이었고, 몸짱에 제가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王자부터 해서 지금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런매력.. 옛날에 다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웃음) 안타까운 것들이 이것도 변명이지만, 옛날에 이렇게 말해놓고, 이제 바뀌어서 JK는 이제 싫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맘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것이 어느 정도의 것이냐의 문제인 것 같은데. 하지만 저는 옛날에 했던 것 중에 실수한 것도 있고 후회하는 것도 있고, 후회 안하는 것도 있고..살면서 배우는 거죠. 그 실수를 계속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정말 혈기 왕성 할 때 였고, 자기 살면서 무슨 자극적인 일이 생겨서 갑자기 돌연변이가 되서 망나니가 될 수도 있죠.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Q. 다음은 권승원님의 질문인데요, 가사중에 ‘영감의 원천의 선천적 내 MIC 스킬은 겨우 투퍼센트’ 라고 말씀하신부분이 있는데, 랩을 지금과 같이 최고가 되시기 위해 노력하신 점, 연습할때의 이야기를 질문해오셨습니다.

포기 않는 너의 큰 포부는 어리석은 만큼 아름다운 너의 전부이자 또 그것이 내가 바라보는인간의 전부이며,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인간들의 모습이 나의 영감의 원천이다, 그리고 선천적인 내 MIC skill은 겨우 Two percent 즉 타고난 나의 마이크 스킬은 고작 2퍼센트밖에 안된다 라는 뜻이죠. 소외된 모두의 아픔은 나머지 Ninety Eight...결국 인간들의 참모습과 그들의 번뇌와 고통, 또 그 고통속에서도 살아남는 인간들의 투지가 저의 영감의원천이자 내 마이크 스킬에 98 퍼센트나 차지하는 큰 부분이다..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진부한 이야기지만, 연습이 중요한 것 같아요. 좋아하는 랩퍼를 따라 한다던지, 밤새 프리스타일을 한다던지.. 차에만 타면 프리스타일을 해서, 친구들이 절 싫어했어요. 침튀기고, 시끄럽다고.. 요새도 술 먹으면 그런 버릇이 있는데, 무브먼트 친구들은 이거 읽으면서 웃을거에요.. 대화를 못 나눌 정도로 하거든요...(웃음) 그런 열정이 있었어요. 죽기살기로 하던 열정.. 재미로 하는거고 사랑해서 하는거지만 요즘 보면은 죽기살기로 안하는 것 같아요..죽기살기로 뭐든지 하면은.. 이걸 못하면 난 죽는다는 생각으로 하면, 되는 것같아요. 아직 어설프다고 욕을 먹지만, 그래도 행복 한게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니까, 행복해요. 저는 더 잘할 수 있구나.. 그런 것에서 매력을 느껴요

Q. 다음은 서원호씨의 질문입니다. 음악 외 적인 것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서태지씨도 이런 말을 했더라구요.. '무슨 이유라든지 자기를 좋아하면 감사하다'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떤 이유로든지 저한테 잘해주면 사람이니까.. 고맙고 감사한데..이거는 상대적이고 영원 한게 아니니까 부담스럽죠…(웃음) 결국은 그랬던 분들도 제 음악에 더 매력을 느끼시도록 유도를 하는 편이고..제 사이트에서 환상을 깨는 일을 해요. 하루에 똥 세 번 쌌는데, 변비가 걸려서 어쩌고... 이런 말 하는 이유가 혹시나, 저를 우상화하는 그런 어린아이들이 있을 까봐.. 너보다 더 잘난 사람이 아니라, 음악에 열정이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다.. 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괜히 이상한 소리 하고, 괜히 깨는 구린 소리도 하고 이런걸 많이 하는 편이에요.

Q. 이동우씨께서 Best 음반을 낼 생각은 없는지 물어오셨습니다.

이전 기획사에서 저의 모든 음원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거기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저는 어떻게 됐던 간에, 사람들이 제 음악을 더 많이 듣게 되면은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만약에 제가 7집이 나와서 대박이 난다면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음반이 나올까 하는 추측을...(웃음)

Q.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제가 무지해서 그런 것 일수도 있습니다만, '드렁큰 타이거'의 팀명에 담긴 뜻이 있다면요?

드렁큰타이거는 간단히 타이거는 호랑이를 뜻하고, 저는 호랑이띠고... 제 어렸을때 사진을 보면은 호랑이랑 똑같아요. 별명도 어렸을 때부터 호랑이였고, Wu Tang Clan 이라던지 이런 동양적인 것들이 우탱이 무당파 잖아요. 이런 것들이 유행하고 그랬을 때, 저희들도 그때 휩싸여서 Tiger Clan 이라든지 Tiger Chamber 라고도 했고… Drunken Clan 이라든지, Drunken Tiger 라는 영화도 있고.. 술을 먹으면 먹을수록 잘하는 친구들이다 해서 우스갯소리로 만들고… 괜히 의미를 부여해서 우리음악으로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싶다 라는 뜻이죠.

Q. 5집때부터, 혼자 활동해오고 계신데, DJ Shine 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샤인은 안타깝지만, 회의를 일찍 느끼고 그만 뒀어요. 그때는 기획사와 문제도 있었고, 저희 임무를 다 않하면 계약위반이었기 때문에, 앨범은 꾸준히 나와야 했어야 했고.. 샤인은 예전부터, 티비에 나가서 했던 것을 기억해 보시면 샤인은 ‘안녕하세요, 저는 재벌입니다.’ 했고, 저는 항상 ‘재벌친구입니다.’ 이렇게.. 항상 비즈니스에 대한 열정이라든지, 그런 필드에 관심이 더 많았었어요. 음악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비즈니스 적인 면에 더 눈이 밝고 거기에 매력을 느낀 친구라서... 5집 때 부터 이제 헤어진건 사실이고, 저러다오겠지 했는데..이제는 완전히 음악을 접은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제 생각에 샤인은 음악에 대한 미련을 못버린 것 같은데...제 추측입니다.

Q. 드렁큰타이거의 이름은 계속 쓰실건가요?

그거는 생각 중 이에요, 드렁큰타이거의 이름은 이전의 회사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데...6집까지 모든음원과 모든 혼을 바치고 나왔는데 드렁큰타이거라는 이름까지 주고 나오면 뭔가 저의 심장을 뺏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드렁큰타이거의 이름은 항상 소중히 간직할건데, 앨범이 나올 때 그게 Tiger JK가 될지, 드렁큰타이거로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만약에 외국의 모든 멤버들이 뭉치면 드렁큰타이거로 나올 것 같구요.

Q. 앞으로의 음악활동의 계획중에서 공개해주실 수 있는것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우선, Rascoe 앨범이 많이 팔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한국홍보는 제가 맡기로 했어요. Snacky Chan, Jin Da Mc 랑 같이 이야기 중이고.. 외국에 있는 아티스트들이랑 많은 교류를 해볼까 생각중이구요, 지금은 공개를 못하지만,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국내 언더뮤지션들 과의 EP 라든지, 싱글이라든지, 그런 많은 것들이 나올 것 같아요. 그리고, 제 목소리가 질릴까봐 지금 피쳐링 남은것들 열심히하고, 좀 옛날로 돌아가서 다시 연습시간을 갖고 책도 많이 읽고, 그러면서 MC.K 라든지.. 정글엔터테인먼트의 첫 신인이에요,(웃음) 신인 발굴을 하려고 돌아다닐 것 같아요.
운이 좋아서 '비' 같은 친구를 만나면 좋겠지만(웃음). 우선 저는 힙합음악을 열심히 하고 있는 친구들을 계약을 시켜서 돈을 벌고 그런 것 보다, 그런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줄 수 있는 활동을 하려 구요. 돈은 제가 열심히 일 해서 벌고...

Q. 7집의 컨셉이나, 스타일은 어떻게 잡고 계신지?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포크송, 댄스홀, 레게 에 빠져있거든요. 그걸 지금 따로따로 분리해서 앨범을 낼까, 한 앨범에 6집처럼, 맛보기로 낼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EP 앨범이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슬그머니 나타날 거니까, 주의해주세요! 홍보 없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으니까..(웃음)

Q. 힙합리스너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이게, 논쟁은 끝이 없고, 논쟁은 항상 재밌고.. 저도 어렸을때 친구들이랑 Rakim이 잘하냐 Nas를 잘하냐를 가지고 싸운적도 많아요. 그런 논쟁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최고고..그런게 재밌잖아요. 그런것까지 하지말자 존중하자 이런건 그분들한테 정말 시시한 음악인생같고. 하지만, 힙합을 듣는다는 우월감을 좀 더 좋게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힙합을 듣는 사람들의 우월감은요, 재밌는거라고 생각해요. 우월감 가져도 좋아요. 힙합은 분명히 청소년들의 보이스고, 얼굴이 유난히 잘생기던가, 몸이 유난히 좋지 않더라도, 또 나처럼 생겨도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툴이기 때문에, 자기자신한테 진실되고, 자신한테 제일 잘할 수 있는 것만 끄집어 낸다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는 소중한 툴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것 들을 가지고 우월감을 느껴도되죠. 하지만, 힙합리스너, 매니아분들만이라도 지금이런 좀 저질스러운 다른장르등의 인터넷에 팽배한, 그런쪽으로 안휩싸이고, 저질스러운 사람들과는 달라 라는 우월감을 가지고...열심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다 아닌척하고 하지만, 그런 말들에 상처를 받고 그 사람들에게 가끔은 음악적인 방향도 영향도 받기 때문에 그걸 좀 알아주시고, 리스너 분들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우리들한테만 책임이 있는게 아니라… 이게 잘못되면은, 그 장르의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하겠지만, 어떤 장르의 음악이 있었는데, 그게 그랬었어요. 잘나가다가 중간에 파가 너무 많이 생기고, 싸우고, 서로 씹고 기계적이고, 학구적으로 변하다 보니까 대중마저도 외면해리고.. 머리아프다 이거죠. 그렇게 안됐으면 좋겠어요.

Q.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었던 이야기..

남을 평가하거나 비평하는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게 게시판이니까.. 안타까운 것은 이중에 꼭 껴있어요.. 예전에는 저도 ‘그건맞다’ ‘동의한다’ 하면서 신선한 느낌이 많았어요. 근데 이제는 악하게 적용이 되고, 비즈니스적으로 누군가 선동하는 사람들이 한둘씩 나타날 때, 진짜 순수하고, 건강했던 비평들이 이제 악용화 되고 있다는게 제 눈에는 보여요. 누군가 선동해서 퇴색되고 있는 그게 좀 안타까우니까...
힙합플레이야 멤버분들의 위치가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냥 음악 좀 좋아해서 모인사람들의 위치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좀 더 건강한... 가끔 쌍욕도 하고 화풀이도 하는 게시판이 되야지 재밌는 것이지만, 우리뿐 아니라, 리스너도 중요한 위치라는걸 알아주시고, 상업적으로 선동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빨리 눈치를 채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인터뷰 / 김대형 (811kim@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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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름 2.0)



국내 유일의 전문, 전업 인터뷰어로 불리는 지승호가 통산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를 선보였다. 정치인에서부터 사회 운동가, 언론인, 영화감독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취재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을 얻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터뷰의 사나이 지승호를 만나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의 정체성과 고민에 대해 물었다.

지승호ㅣ<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라잉 넛, 그들이 대신 울부짖다>(공저) <사회를 바꾸는 아티스트>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마주치다 눈뜨다> <유시민을 만나다> <7인 7색> <감독, 열정을 말하다> <금지를 금지하라>

Q. 2002년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단행본 인터뷰집 작업을 시작한 이후 4년 만에 열 번째 결과물 <금지를 금지하라>를 내놓았다. 부지런한 건가 욕심이 많은 건가?

욕심이 많으니까 부지런한 거 아니겠나. 나야 전업 인터뷰어인데 이것 안 하면 먹고 살 게 있어야지.(웃음) 권수를 세면서 인터뷰집을 낸 건 아니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열 번째 책을 내고 보니 이제야 유아기를 벗어나 소년기 정도에 이른 것 같다. 한 백 권 정도에 이르면 많이 깊어졌다, 성숙해졌다 말을 들어도 부끄럽지 않겠지.

Q. 백 번째 인터뷰집? 정말 욕심도 과하다.

그 정도는 써야 딸내미 대학교도 보내고 시집도 보내고…. 난 이거 아니면 먹고 살 수단이 없다니깐 자꾸 그런다.

Q. 과연 전문 인터뷰어라 그런지 질문에 응하는 태도가 도전적이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전문 인터뷰어라는 감투는 내 말이 아니다. 사실 매우 가치중립적인 용어라 문제가 될 건 없지만, 기자 분들이 듣기에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빤히 기자라는 직업이 있는 상황에서 네가 뭔데 도대체 전문 인터뷰어라는 거야, 라고 생각할 것 같고. 아닌 게 아니라 인쇄매체가 내 작업에 대해 무관심한 건 사실이다. 벌써 열 번째 책인데 자칭 진보 매체들조차 관심 있게 지켜보려 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전문 인터뷰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홍보를 목적으로 아예 책에 박아 넣기도 하는데, 괜히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스스로 ‘전업 인터뷰어’로 자칭하고 다닌다. 그럼 좀 겸손해 보이려나 싶어서.

Q. 결국 인터뷰라는 작업이 전문적인 영역일 수 있느냐는 고민인 것 같다.

전문적이라는 말에 좀 거부감이 드는 게,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업에 대한 접근성을 차단하고 장벽을 쌓는 것 같다. 헌법에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 않나. 언론의 자유란 뉴스매체를 위해 보장된 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열려 있는 기본적 권리다. 누가 인터뷰를 하든 문제될 게 없다. 전문성을 해친다고 생각지 말고 좀 더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정직하게 보도하고 인터뷰했으면 좋겠다.

Q. 그런데 사실상 그 언론의 자유라는 게 뉴스매체들에 한해 허용돼 있지 않았나. 얼마 전 한 독립영화 감독은 시위현장을 카메라에 담다 시위대로 몰려 연행되기도 했다. 당신은 일종의 언론 권력을 해체한 꼴이다. 주류언론의 미움 혹은 무관심을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건데, <감독, 열정을 말하다>를 내고 그나마 자부심을 가졌던 부분이 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취재원과 접촉할 때, 그 사람을 만나려면 자신이 속해 있는 매체의 권위가 있다든지 기자의 명성이 대단히 뛰어나다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전업 인터뷰어로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대중적인 명사가 아닌 이상 취재원을 섭외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언론매체와도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김지운 감독이 내 진심을 이해하고 작업에 동참해 “좋은 만남이었다”는 평가를 해준 건 정말 고무적이었다. 김지운 감독에 대한 책이 얼마 전에 나왔는데, 책에 넣을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는 출판사의 말에 “내가 할 이야기는 지승호와 다 했으니 그 인터뷰를 책에 넣어 달라”고 했단다. 결국 <감독, 열정을 말하다>에 들어갔던 인터뷰를 50매 분량으로 줄여서 건네줬다. 주류언론의 기자가 아니더라도 좋은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건 역으로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꼭 주류언론의 기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Q. 인터뷰라는 작업 자체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 이번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와 그간의 작업을 극찬하는 기사를 썼는데, 첫 번째 댓글을 보니 “전문 인터뷰어? 얘는 그냥 남이 하는 말 그대로 옮겨 적어서 책으로 만드는 것뿐 아닌가?”라고 썼더라. 인터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면 자기가 당해보기도 많이 당해보고, 해보기도 많이 해봐야 한다. 최종적으로 인터뷰가 정리돼 나올 때 조사 하나 잘못 붙이면 이야기의 뉘앙스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지 않나.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아, 이건 내가 한 말이다”라며 만족할 정도로 그 내용을 정리하는 일은 진정 어렵고 고된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내가 정말 여태껏 창조적인 면 없이 그저 남의 말을 기록하기만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워낙 주류언론의 시선이 내 작업에 대해 냉담하다보니, 그렇게라도 생각 안 하면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내가 부족하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Q. 일종의 피해의식 같이 들린다.

피해의식 많다. 운동선수를 보면 몸 전체의 밸런스가 좋다기보다 어느 특정부위를 훈련으로 혹사시켜 일종의 기형이 된 사람들이 많다. 발레리나 혹은 축구선수의 발을 보면 누구나 감탄하고 박수를 보내지 않나. 하지만 내가 하는 작업 같은 경우는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노력해도 그게 뭐냐고 폄하해버리면 그만이다. 증명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치판단의 영역이니까.

Q. 그건 변명 아닌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변명은 굉장히 중요하다. 변명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그만큼 고민이 없다는 의미다. 일단 변명을 시도한다는 건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거 아닌가. 변명을 하면서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거다. 그게 첫걸음이다.

Q.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신이 하는 인터뷰 작업이 결국 ‘변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적인 장을 마련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 욕을 하더라도 최소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나서 평가를 하자는 거다. 주류언론을 통해 노출되는 인터뷰 기사들은 대부분 매체의 정치적 지향점이나 목적을 위해 의도를 가지고 악의적으로 편집되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백 마디를 하면 그중에 전체적인 맥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엉뚱한 한 마디를 끄집어내 헤드라인으로 뽑는다. 그런 기사를 통해 어떻게 한 인간을 평가할 수 있겠나. 내 인터뷰 작업은 있는 그대로 한 인간의 생각과 모습을 드러내 세상과 정당한 소통을 하게 하는 데 그 가치를 두고 있다. 꼭 변명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언론이나 대중에 의해 정신적 상흔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 “당신의 진심을 이해한다”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참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Q.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신해철 같은 예술인부터 김규항, 홍세화, 강준만, 진중권, 이상호, 손석희 같은 지식인과 언론계 인사들, 그리고 유시민, 김근태, 강금실 같은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당신만큼 폭넓은 스펙트럼의 취재원을 만난 인터뷰어도 드물 것이다. 신기한 점은 그들 모두 당신에게 각별한 신뢰를 가지고 두 번, 세 번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거다. 비결이 뭔가?

예전에는 농담처럼 내 인터뷰어로서의 장점이 비굴함이라고 했다. 내가 인터뷰를 하는 대상들이 주로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그들을 만나기 전에 굉장히 많은 노력과 고민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내 인터뷰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뺏는 것 아닌가. 보통 며칠에 걸쳐 질문지를 만드는데, 꼬박 두 달이 걸리기도 한다. 관련된 모든 인터뷰 기록과 보도 내용, 취재원이 만든 영화 혹은 책을 몇 차례에 걸쳐 읽고 분석한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의 두 번째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박찬욱 감독을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만든 질문만 200개다. 이 전에 봉준호 감독을 만났을 때는 140개 정도의 질문을 준비했었다. 그렇게 노력을 들이면서 결국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왜곡 없는 그대로를 독자에게 전달하자는 것 하나뿐이다. 다행히 번번이 진심이 통해 ‘최소한 이 사람은 기사를 위해 취재원을 이용하지는 않겠구나’라고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

Q. 한정된 지면에 압축된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의 고충도 있다.

나도 기자생활을 해봤다. 하지만 그런 기사가 그 사람의 진의를 왜곡 없이 전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굳이 매체에 소속된 기자가 되려 하지 않는 거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취재원의 입을 통해 들은 다음 그게 마치 그 인간의 가치관인양 말하는 기자들이 많은데, 그건 정말 최악의 인터뷰다.

Q. 당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궁금하다. 언뜻 진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김규항 선생이 나보러 “너는 거북이처럼 점점 왼쪽으로 나아간다”고 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 스스로를 딱히 좌파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거다. 아마 난 자유주의자에 가까울 것이다. 남에게 피해 안 주면 사회나 국가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걸 극렬하게 반대하는 편이니까. 그러고 보면 나야말로 건전한 보수 쪽에 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한홍구 선생을 만났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젠다가 모두 우파적인 것들이라고 하더라. 경찰이 사람 잡아다가 함부로 때리지 말라는 거, 남 속이지 말고 도덕적으로 살자는 게 좌파적인 마인드가 아니지 않나. 자본주의 사회가 건전하게 돌아가려면 가진 사람들이 더 모범을 보여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 그거야말로 ‘진짜’ 보수우파가 해야 할 주장의 정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진보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위해 애쓰며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진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을 주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며 기록하게 되는 것이겠지.

Q. 한 번 인터뷰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건 무엇 때문인가?

진중권, 강준만, 홍세화 같은 지식인들을 매년 만나 인터뷰하고 기록해도 꽤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담론 생산자들을 만나 그 내용을 성찰하고 고민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의미에서 말이다. 큰 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란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부분과 불합리한 모순들, 착취와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그들의 기록이 꾸준히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데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Q. 이번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는 당신에게 단순히 수치상의 의미 이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물론이다. 그래서 가증스럽게도 셀프 인터뷰까지 끝에 싣지 않았나.(웃음) 이번 책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회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오해받고 마녀사냥 당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송가다. 개인적으로 이상호 기자 인터뷰를 제일 잘 했다 싶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에게 바치는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삼성이라는 권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면서도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번 출판기념회 때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와 인터뷰하기로 약속해놓고 굉장히 많이 후회했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어려운 인터뷰였다. 워낙 이상호 기자가 예민했던 시기니까. 그런데 그때 자신이 했던 고민들이 기록으로 남은 걸 보니 정말 뜻 깊게 생각된다며 고맙다고 하더라. 개인이 어떤 한 시점의 생각과 고민을 300매 분량의 글로 정리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난 그걸 공짜로 해준다. 얼마나 좋나.(웃음)

Q. 그런데 당신의 인터뷰 작업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버겁다고 생각지 않나? 누가 요즘 정치인 인터뷰를 읽고 싶겠는가.

‘아찔한 소개팅’같이 돈과 외모로 모든 걸 판단하는 얄팍한 상술의 프로그램을 봐도 이젠 예전처럼 흥분하거나 욕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모든 게 무기력해지고 의미 없어진 세상이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최근에는 좀 더 대중 친화적인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 한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도 그런 맥락의 작업이었다. 영화감독을 만나 단순히 영화뿐만 아니라 스크린쿼터, FTA 등 사회 전반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게 영 엉뚱한 작업이 아니라는 희망과 확신이 생겼다.

Q. 그럼 당신의 대중 친화적인 다음 인터뷰 상대는 누군가?

일단 <감독, 열정을 말하다>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과는 이미 약속을 잡았고, 개인적으로는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을 만나보고 싶다. 다른 계획도 하나 있는데 대중가수와의 인터뷰를 구상 중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책 한 권을 통째로 신해철과의 인터뷰로 꾸며볼 생각이 있다. 그와는 전에도 한번 인터뷰를 했었다. 정말 재미있는 아이콘 아닌가? 마광수 교수는 자기 홈페이지에 독자가 올린 누드 사진 때문에 조사를 당했는데, 신해철은 공중파에 나와서 “나는 여고생 교복을 트렁크에 넣고 다니면서 심지어 사용한 적도 있다”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자연스레 웃어넘긴다. 게다가 그의 통찰력과 화려한 언변을 봐라. 어떤 상황에서 분야를 막론한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보통 내공이 아니다.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다.

Q. 서점에 가면 책의 성격별로 여러 가지 코너가 나뉘어 있다. 당신의 책들은 그중 어디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역시 사회과학 코너가 가장 가깝지 않을까. 사람들에 관한 지난 기록이 인문학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지금 현재 생각하고 있는 문제의식들에 대해 기록하는 것보다 더 인문학적인 게 어디 있나. 옛날 글을 뒤져 현재의 담론을 생산할 게 아니라,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우선이다. 사람들이 그 중요성에 대해 좀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지만, 오히려 남의 이야기는 더 안 듣게 된 것 같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세상이다. 남의 이야기 좀 들어보자. 그의 온전한 의견과 생각을 읽고 듣자. 그리고 평가하자. 그리고 판단하자. 그게 옳다.

사진 | 김수홍
허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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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7-01-30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는 시비돌이님이시죠. 축하드려야겠군요 ^^

sb 2007-01-3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너해 전에 '인터뷰'에 무척이나 매력을 느꼈었는데, '전문 인터뷰어'를 표방하는 지승호씨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그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후였죠. 지승호씨도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는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