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한국예종 교수 된 ‘상계동 올림픽’ 김동원 감독 
 
1988년 2월, 김동원 감독은 27분짜리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완성했다. 올림픽 준비로 온나라가 들떴을 때 서울 상계동 달동네 주민들은 집을 빼앗겼다. 2년6개월 동안 상계동에서 명동 성당으로 다시 부천시 자투리 땅까지 철거민들이 내몰리는 과정을 좇으면서 다큐멘터리 속 나레이션의 주어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됐다.

<상계동 올림픽>은 우리 영화계에서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기념비가 됐다. 마지막 장면, 성화봉송 때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가건물을 세우는 것도 허가받지 못한 주민들은 허허벌판에서 <출전가>를 불렀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김동원(52) 감독은 최근 <상계동 올림픽 20년 후>를 찍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목적도 없이 철거 현장에 넋이 나가 카메라를 돌리던 31살 초짜 감독 김동원은 그 뒤 20년 동안 독립다큐멘터리를 떠나지 않았다. 1991년 그가 변영주, 오기민 등과 만든 제작집단 ‘푸른영상’을 지키며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 <명성, 6일간의 기록> <송환> 등을 내놓았다. 그렇게 극영화를 비롯해 ‘제도권’과 거리를 뒀던 그가 올해 한국예술종합대학 방송영상학과 교수가 되어 국내에 처음 생기는 다큐멘터리 전문사 과정을 맡게 됐다. 그는 작품 제작보다 교육 쪽에 무게중심을 두게 되는 걸까? 제도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18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 감독을 만나 그의 새 작품 이야기, 그리고 교수가 된 사연과 심경을 들어봤다.

<상계동 올림픽> 그후

다큐멘터리가 나간 뒤 상계동 철거민에겐 공동체를 꾸릴 터전이 생긴 듯했다. 재개발 건축업체, 천주교, 서울시가 기금을 모아 부천에 땅을 사고 아파트를 올려 철거민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줄 계획이었다. 관리가 복잡해지자 일단 8평 남짓씩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땅값이 1년새 8배가 뛰면서 되레 액운이 몰려왔다. 주민들 사이, 대표자들 사이 신뢰가 틀어져버린 것이다. 3년 동안 가족처럼 연대했던 사람들이 서로 꼴보기 싫어하는 사이가 되어갔고, 결국 40가구 가운데 3가구만 남고 모두 땅을 팔아 흩어졌다. 절반은 억척스럽게 일해 살림이 나아졌다. 애초에 노동력이 없었던 사람들은 추락해 노숙자가 됐다. 몇몇은 투쟁의 기억을 긍지로 가지고 있고 몇몇은 철거민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긴다.

그는 다큐멘터리들에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담뿍 담아왔다. 아직도 믿고 있을까? “예전처럼 낙관하지 않는다. 저마다 욕망과 본성이 달라 공동체는 실패하기 쉽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는 세상의 빛이 된다. 나나 상계동 주민이나 꿈꾸는 공동체의 모습이 예전과 달라졌다. 그건 어떤 모습이며 우리에게 남은 최선은 뭘까?” 주민들은 여전히 송년회를 연다. 2세들 가운데 3분의 1은 매년 2~3차례 모인다. 그는 그 불씨의 구심력인 “긍지의 기억”을 조명하려 한다.

상계동의 기억

그는 <상계동 올림픽 20년후>에 자신의 이야기도 담을 예정이다. 상계동에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중산층 출신으로 한량처럼 지내다가 군 제대 뒤 영화 연출부로 일했고, 비디오카메라로 결혼식 촬영을 해주며 용돈을 벌었다. 1985년 그는 상계동에서 계고장도 없이 집을 부수는데 증거자료를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간단한 일인 줄 알고 하루 촬영하러 갔는데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철거민들은 사지를 들려 닭장차에 실려갔다. 그는 정신없이 찍었다. 어둠이 내린 뒤 주민들은 폐허 위에 큰 천막을 쳤다. 라면을 끓여먹고 술판을 벌였다. “내가 반쪽짜리 위선적인 세상에서 살았구나….” 도저히 천막을 들추고 혼자만 나갈 수 없었다. 하루를 보내기로 했고 다음날도 비슷했다. 그는 그때부터 1990년 1월까지 상계동 철거민들과 살았다. 그래서 상계동 철거민들은 그를 아직도 “김 감독님”이 아니라 “민기 아버지”라고 부른다.

가난의 힘

“어떤 주장을 하는데 힘을 실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난해야 떳떳하다. 세상을 낮은 데서 봐야 정확하다. 나에게 다큐멘터리는 주류 삶의 방식과 기치관에 딴죽을 걸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필요한 것만 지니려 애쓰지만 그는 “악착같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고백한다. 생활 자체가 협박이다. 늘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세 아이들 앞에선 조금씩 점점 양보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떠맡아야 할 생활의 짐이 있고 교수직을 맡아 좀더 안정될지 모르지만, 마음은 복잡해졌다. 다큐멘터리가 영화와 저널리즘과 사이에서 제 영역을 굳건히 하려면 교육방법도 개발해야 하고 다큐멘터리를 모아 아카이브(* 정보창고)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주먹구구로 공부해서 더 필요를 느낀다.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벗어나는 건 아닌지 회의한다.

긍정을 위한 질문

전문적인 다큐멘터리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교수가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옆길로 샌 듯한….”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내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 때문이다. 천도교빈민회 회원들 가운데 힘들지만 의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힘이 나고 날 보면 맥이 빠진다. 내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이다.” 생활공동체에선 쓴맛을 봤지만 그의 곁엔 제작공동체인 푸른영상이 남아 있다. 감독 7명은 한달 활동비 50만원으로 버티며 미군기지에 반대해 싸우는 대추리로 가고 해고된 학습지 교사들을 만난다.

그의 작품을 보려면 푸른영상(02-823-9124)의 회원이 되면 된다. 3월30일부터 4월3일까지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벌(sidof.org)에서 <명성, 6일간의 기록>과 <송환>을 볼 수 있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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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6회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네 편의 영화를 볼 생각입니다. (각각의 상영일이 모두 떨어져 있어 무척 난감하군요.) <글래스톤베리>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나와) 다른 삶, 소수자의 삶 이라는 다큐멘터리 고유의 매력 때문에 선택한 것이구요, <글래스톤베리>는 '축제' 라는 내용 자체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문화센터 강좌에서 기획하려는 작품과 맞닿는 부분이 있어, 촬영기법이나 이야기 전개방식을 유념해서 보려고 합니다. 아래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공하고 있는 시놉시스와 감독에 대한 소개입니다. 크레딧을 비롯한 몇몇 부분은 임의로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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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츨처: 인디다큐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

<글래스톤베리 Glastonbury>
감독 : 줄리언 템플 / 영국 / 컬러 / 138분
     
[시놉시스] 1970년, 마이클 이비스라는 젊은 농부는 1,500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1파운드의 가격에 주말 내내 팝과 포크 가수들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150에이커에 달하는 자신의 농장을 개방했고 그것은 글래스톤베리 음악축제가 탄생하는 순간이 되었다. 다음해, 윈스턴 처칠의 손녀를 비롯한 몇몇 돈 많은 히피들은 이 이벤트가 커질 수 있도록 기금을 모았고, 12,500명의 사람들이 존 바에즈와 데이빗 보위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지난 30년 동안 글래스톤베리의 이 부유한 농장은 7월말 가장 더운 주말에 수천의 사람들이 광적인 야외 콘서트를 즐길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왔다.

줄리안 템플 - 섹스 피스톨즈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를 연출한- 감독은 글래스톤베리 축제가 담긴 모든 촬영분을-니콜라스 로그의 다큐멘터리 작품(1971)부터 참가자들이 직접 찍은, 수년간 다락방이나 벽장 속 구석에 묵혀져 왔던 홈비디오들까지- 수집하기 위해 지난 몇 년을 고생해 왔다. 이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글래스톤베리>는 즉흥적인 예술행위들, 그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역 주민들, 신화적인 뮤지션들의 잊을 수 없는 공연은 물론, 세대를 거쳐 내려온 젊은 음악팬들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까지 아우르며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음악 페스티벌의 연대기를 솜씨 있게 엮어내고 있다.

[감독] 줄리언 템플. 1953년 런던 출생. 줄리언 템플은 ‘로큰롤 영화계의 <시민 케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위대한 로큰롤의 사기>(1979)로 데뷔하여, 뮤지컬과 음악다큐멘터리는 물론이고, 롤링 스톤즈, 데이빗 보위, 믹 재거 등의 뮤직비디오 연출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글래스톤베리>는 2006년 선댄스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위대한 로큰롤의 사기>(79), <완전 초보>(86), <비고>(98), <글래스톤베리>(2006)

<쿠바, 천국의 가치 Cuba, the Value of Utopia>
감독 쟈나라 구아쟈사민 Yanara Guayasamin / 2006 벨기에, 에콰도르 / 칼러 / 116분 
     
[시놉시스] 현재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 혁명 이후 이루어졌다. 영화의 초중반부는 카스트로를 포함한 혁명의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민중들 속 개인의 삶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데 덕분에 혁명에 대하여 발설되지 않았던 섬세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구술 기록을 통하여 다양한 쿠바인들이 압제와 폭력, 체포, 납치, 탈출의 과정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산에서 이루어진 게릴라 작전과 아바나에 입성하게 된 과정 등 혁명 당시의 생생한 삶을 쿠바 혁명의 전후세대들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증언들은 현재 쿠바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자료화면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혁명세대 쿠바인들이 회고하는 혁명 이후 47년간의 상황이 펼쳐진다. 쿠바인들은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이데올로기적 슬로건이 아닌 구체적인 요구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자유의 대가는 너무나 비싸지만 그들은 미국이 전 세계에 강요하고 있는 값싼 소비사회와 자신들의 고귀한 삶을 맞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감독] 쟈나라 구아쟈사민은 인류학, 생물학 그리고 정보과학을 전공했고 그 후 브뤼셀에 있는 I.N.S.A.S. 학교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였다.  (1988-92) 그녀의 첫 다큐멘터리 작품인 <죽음이 우리를 방문했을 때 When Death Visited Us>는 포스트 프로덕션부분에서 세계 카톨릭 교류 협회 (OCIC)가 증정하는 SIGNIS 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평을 받으면서 칠레, 콜럼비아, 에쿠아도르, 스페인, 파나마, 페루에서 상영되었고 뉴욕에서 상영된 때에는 CinemaFe에서 수여하는 황금사과상(Golden Apple)을 수상하였다. 에쿠아도르에서 찍은 <천년의 직업들 Millenary Jobs>은 촬영부분에서 Ernesto Alban 상을 안겨주었고 다른 단편 모음인 <테이블 The Table>로 Augustin Cuesta Ordonez 상을 수상하였다. “Jusqu'au silence”는 벨기에, 이스라엘, 프랑스, 캐나다, 스페인 그리고 멕시코에서 상영되었으며 쿠바 영화제에서 실험적 영화부분 첫 Diva 상을 수상하였다. 쟈나라는 칠레의 발디비아 국제 영화제(Valdivia International Film Festval)와 콜롬비아의 Bogocine 영화제에서 초청 심사위원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캐나다의 세계 여성 영화제 (Mondial des films de femmes)과 에쿠아도르의 Watch out for Democracy 그리고 Cinememoria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현재 독립영화사 루시에르나가 필름의 감독이자 창립자로써 활동하고 있다. 

<영매: 산자와 죽은자의 화해 Mudang-Reconciliation between the Living and the Dead>
감독 박기복 / 2002 한국 / 105분 / 컬러     

[시놉시스] 먼 옛날 한국 무(巫)는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주관하는 제사장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 어디선가에서 한국 무(巫)는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경북 포항의 동해안 별신굿 풍어제를 시작으로 한강 이남의 세습무와 중부의 강신무 무당을 아우르면서 보여준다. 그리고 진도의 씻김굿을 당골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무(巫)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수천 년 이어져 온 한국의 무(巫)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밑바닥에 흐르는 종교적 심성에 다가서는 일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선조들의 음덕(陰德) 안에서 모두 하나(大同) 되어 한 판 멋들어진 영(靈)의 축제를 벌여 보는 것, 그것이 본 작품의 소망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했던 무적(巫的) 사유 안에서는 한과 원, 그 모든 기억의 상처들에서 우리가 조금은 자유로와질 수 있지 않을까..." (감독 노트 중에서)

[감독] 박기복. 1994년부터 95년까지 푸른영상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행당동 사람들>(1994),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1994)를 연출했다. <냅둬>(1999)는 제3회 서울다큐멘타리 영상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제15회 뮌헨국제다큐멘타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192-399: The Story About the House Living Together>
감독 이현정 / 2006 한국 / 126분 / 컬러
     
[시놉시스] 2005년 10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희망을 만드는 노숙인 생산공동체”를 모토로 하는 노숙인공동체 [더불어 사는 집]은 서울 정릉의 빈 집을 점거해서 함께 모여 살았다. 더불어 사는 집의 식구들은 무료급식사업을 하는 등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회에 되돌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으로 충천했다. 그리고 유난히 추위가 가혹했던 겨울을 보낸 후, 더불어 사는 집의 면모는 상당히 바뀌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집을 잃는다는 것은 일을 잃고 희망을 잃고 자존감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빈집 점거를 통해 삶의 희망을 얻고자 했던 노숙인들의 일 년을 관찰하면서 인권은 주제가 아니라 태도임을 상기하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가 중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시기이다. 그래야 “왜 하는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 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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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한동안 그 여자만을 떠올리지만, 서서히 남쪽 생활에 젖어들면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결혼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는 북한에서 사랑했던 그 여자가 남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귀에 익은 이 이야기의 배경은 3·8선 획정 때일 수도, 한국전쟁 당시 ‘바람찬 흥남부두’일 수도 있다. 분단이라는 상황이 낳은 이 의도치 않은 삼각관계는, 하지만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국경의 남쪽>은 시간차로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자’ 남녀를 통해 이같은 관계를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준다.

관현악단 호른 연주자 김선호(차승원)는 평양의 평범한 중산층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했다고 ‘기록’된 할아버지 덕에 남부럽지 않은 형편을 누리고 있으며, 부모님과 누이 부부와도 그럭저럭 화목하게 살고 있는데다 “성격도 얼굴도 동치미처럼 쩡하고 시원”한 여성 연화(조이진)와 목하 열애 중이니, 별일이 없는 한 그의 인생은 거침이 없을 듯 보인다. 하지만 별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어느 날 온 가족을 소집한 아버지가 ‘할아버지는 실제로는 남한에 살아 있으며 그동안 서신을 교류해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서신교류가 당국에 적발된 탓에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처하게 됐다. 결국 이들 가족은 탈북을 결행하게 되고, 선호는 ‘사람을 보내서 남으로 부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연화 곁을 떠난다.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남한에 도착한 선호가 연화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또 다른 여인 경주(심혜진)를 만난 뒤에야 시작된다. 북한쪽 소식통으로부터 연화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호는 그의 상처와 삶을 보듬어주는 경주와 함께 가정을 꾸린다. 그리고 그 삶에 익숙해질 즈음, 연화는 탈북자 수백명과 함께 남한에 나타난다. 선호는 연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하지만, 서서히 옛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초라한 자신을 온몸으로 받아준 현재의 여인 경주를 저버릴 수도 없다.

<국경의 남쪽>은 인민들이 탈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드라마도,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고단한 삶을 드러내는 사회드라마도 아니다. 때때로 사회성과 정치성의 민감한 바늘숲을 그냥 지나치는 영리함을 발휘하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엇갈리는 사랑의 슬픔이다. 신파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신파성’을 숨기지 않은 채 이야기를 밀어붙인다. 그런데도 영화 속 사랑은 눈물을 짜내기 위한 가식이 아니라 진실로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이들 모두가 변방의 존재이기 때문일 것. 남한에서 이들이 발붙일 곳은 거의 없다. 북녘을 떠나면서 ‘공화국’을 배신한 이들에게 배신은 이제 운명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들은 한때 존경했던 지도자 동지의 이름을 명찰에 달고 행인의 옷깃을 붙든 채 호객행위를 해야 한다. 아웃사이더의 마음은 아웃사이더만이 헤아려줄 수 있다. 연화가 분식점에서 ‘랭면’을 주문했을 때 종업원이 “혹시 연변에서 왔수까?”라고 묻는 것처럼. 남한에서 살아왔지만 경주 또한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가진 여자다. 그의 과거는 영화 속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선호를 성심성의껏 도와줄 때나 가게를 찾아온 연화에게 냉면을 대접하려 할 때 연화의 내면은 짐작된다. 이 경계인들은 사랑 말고는 별달리 가질 수 있는 게 없는 존재들이기에 어긋난 사랑의 교집합은 더욱 애처롭게 다가온다.

<국경의 남쪽>이 신파를 극복하는 또 다른 지점은 연화라는 캐릭터의 존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통쾌한 처녀” 연화는 직설적이며 씩씩한 인물이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게 될 때나 결혼 이야기를 할 때 관계를 주도했던 연화는 남한에 온 뒤에도 쿨한 사랑법을 보여준다. 연화는 미적대는 선호에게 “만났으니 됐어요”라고 의젓하게 말하거나 “그 여자 가슴이 만져집디까?”라고 ‘직사포’를 날린다. 선호의 내레이션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며 이야기의 중심에도 선호가 놓여 있지만, <국경의 남쪽>을 연화의 시점에서 읽어도 무방한 것은 둘의 관계를 이끄는 것이 연화이기 때문이다. 반면, 선호는 소심할 뿐 아니라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지금 와서 보니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음표로 가득 찬 악보와도 같아서 제가 할 일은 그저 더듬더듬 연주하는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유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다. 이 작품을 남성적 판타지가 내재된 선호의 성장영화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다음 말은 선호의 독백에 대한 성숙한 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브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좀더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인물과 대사 위주의 단조로운 구성은 방송사 PD 출신 안판석 감독이 대형 스크린에 적합한 영상 화술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며, 반복되는 플래시백 또한 감정몰입을 막는 지나친 친절로 느껴진다. 하지만 소박한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국경의 남쪽>은 세련되거나 섬세하진 않을지언정 성실하고 정직한 연출의 미덕을 오랜만에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놀이공원, 옥류관, 보통강 유원지 등 평양 시내를 재현한 실감나는 미술, CG 작업과 배우들의 집중력있는 연기 또한 영화에 무게를 싣는다. 특히 이 영화를 통해 연기자로 ‘발견’된 조이진의 활약은 인상적이다.
 
글 :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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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경의선 개통 기념행사장, 꽉 채워진 행사장 한쪽에 늘어선 빈 의자들이 눈길을 끈다. 외국 인사들은 아무도 참석을 하지 않은 것.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더니, 남쪽 대통령(안성기)의 휴대폰이 울린다. “경의선 개통을 불허한다고요?” 일본쪽은 대한제국 시기에 맺었던 조약을 빌미로 경의선의 모든 권한을 주장하고 나선다. 경의선 개통을 취소하지 않으면 경제적 압박에 들어가겠다는 것.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이때 일본이 제기한 문서에 찍힌 국새가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학계에선 퇴출된 사학자 최민재(조재현)가 진짜 국새의 존재를 입증하겠다고 나섰다. 이후 영화는 진짜 국새를 찾으려는 최민재와 진짜 국새가 있어도 없게 해야 한다는 국정원 요원 이상현(차인표)의 대결로 진행된다. 이상현은 최민재의 학교 후배. 오늘날 일본은 대한민국에 없어선 안 될 스폰서라고 믿는 현실주의자다. 국새를 둘러싼 논란 속에 대통령은 갑자기 쓰러지고, 국정은 또 다른 현실주의자 국무총리(문성근)의 권한대행으로 이뤄진다.

100여년 전에 작성된 문서로 갈등의 축을 만드는 영화 <한반도>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전작 <실미도>에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급습 장면과 강인찬(설경구)의 결혼식 습격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줬던 강우석 감독은 <한반도>에서도 고종황제(김상중)의 독살 장면과 남쪽 대통령이 쓰러지는 장면을 교차로 잡아낸다. ‘우리는 한번도 이 땅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는 영화의 메인카피처럼, 해방이 된 지금도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는 셈이다.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영화는 대한제국 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의 현실 정치를 너무나도 단순하게 연결시킨다. 국새만 찾으면 주변 강대국들의 문제도 모두 해결된다는 식이다. 드라마의 허술함도 보인다. 일제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등장한 것 같은 애국지사 민재는 “민비를 이미연”이라고 답하는 주부들을 상대로 핏대를 세우고, 민재를 한심한 민족주의자라고 칭했던 상현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민재의 손을 들어준다. 캐릭터들의 내적인 감정 변화는 쏙 빠져 있다.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시작했지만, 끝내 국가주의를 긍정하며 끝났던 <실미도>처럼, 강우석 감독은 다시 역사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길을 잃는다. 땅 주인 노릇 좀 해보자던 애국심은 어느새 국수주의로 빠져들고, 극일(克日)이라는 주장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손을 잡는다. 의욕만 앞서 드라마적 재미는 물론 자신의 주장마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경우다. 강우석 감독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너무 우습게 알고 사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문제의 원인은 우리의 무심함이 아니라 강우석 감독의 어깨에 들어간 힘이 아닐까.
 
글 : 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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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못할 일을 저지른 틴에이저였다면,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그 모든 것이 되기를 욕심낸다. 베송과 앤드루 버킨의 무엄한 각본은 잔 다르크 신화에 드리운 가톨릭적인 휘장과 성스러운 동기마저 쑤시고 찔러본다. 대관절 군사들은 뭘 믿고 애송이를 따랐는지, 어쩌자고 신쯤 되는 존재가 인간들의 패싸움에 끼어 들었는지, 엄청난 살생을 하고도 성녀가 될 수 있는지. 평범한 현대인이라면 품음직한 ‘경망스런’ 궁금증을 툭 까놓고 던지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그저 환각에 홀린 운 나쁜 광신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고 소근대는 무람없는 태도는, 실상 최신판 <잔 다르크>가 지닌 제일 쓸 만한 창과 방패다. 하긴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간구할 때마다 응답하는 존엄하고 아름다운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너를 믿노라고 어떤 소명을 쉼없이 속삭여온다면, 어떻게 그를 실망시킬 수 있으랴. 전장에 나선 소녀는 죽도록 무서웠을 것이다. 토막난 팔다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이처럼 눈높이 전략을 택한 베송은 기적에 대해 철저히 인색하다. 잔의 통쾌한 무용담이나 기적을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여, 나를 따르라!”고 소년 같은 목소리로 외쳐 병사들의 미묘한 집단 심리를 휘젓는 ‘치어리더’를 보여줄 뿐이다. 대관식의 성유를 보통 기름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화도 기적에 대한 코웃음에 다름 아니며, 잔의 종교적 비전을 원색의 넝쿨과 꽃잎으로 장식된 다소 유치한 소녀적 판타지로 꾸며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성한 후광을 걷어낸 <잔 다르크>의 승부수는 상업 영화의 그것이다. 악귀 같은 적군과 기회주의적인 왕실과 교회에 포위된 외로운 영웅, 남녀 관객 모두에게 호소하는 요보비치의 중성적 섹시함, 카메라로 드럼을 치는 듯한 베송 특유의 박력있는 스타일에 <브레이브 하트>류의 중세적 잔혹함까지 버무려진 액션 시퀀스는 기나긴 상영시간 동안 관객을 붙잡아둔다. 그러나 피부 안쪽까지 소름돋게 하는 흉칙한 모양새의 무기들이 일으키는 피보라와 불필요하게 잔혹한 강간 장면은 알레르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잔 다르크>의 또다른 주요 병기는 강인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 잔은 시종 여자를 얕잡아보는 병사들에게 으르렁대고, 끝내는 남장이 독신(瀆神)보다 더 큰 죄인 양 심문받는다. 하지만 전장에서 바람둥이, 무뢰한, 지적인 미남 등 다양한 유형의 장군들에게 보호받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든든한 ‘오빠’들을 거느린 ‘막내공주님’을 연상시킨다. 들판을 누비고 성벽을 타오르던 영화는 잔이 포로가 되는 순간 잉그마르 베르히만 풍의 사이코 드라마로 변신한다. 인간의 형상을 한 잔의 양심으로 등장하는 더스틴 호프먼은 “들판에 놓인 검! 그것이 징표였어요!”라고 도리질하는 잔을 “아니. 그건 그저 들판에 놓인 검일 뿐이야”라고 일축하며 가엾은 소녀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미국과 러시아의 배우들이 영어 대사를 주고받는 프랑스 시대극 <잔 다르크>는 베송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프랑스영화의 적통과도 관계가 멀지만 할리우드 관습에서도 비스듬히 비껴간다. 국적없는 영화가 2000년대 영화의 한 경향이 된다면 베송은 훗날 개척자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예산 6천만달러의 대작 <잔 다르크>가 당장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스타일의 소화불량이다. 서로에게 단단히 동여매졌더라면 이완과 긴장의 매력적인 리듬을 창출할 수도 있었던 전쟁 서사극의 악장과 심리극의 악장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데 그쳤고, 전투 시퀀스 내에서는 다시 중세적 하드고어와 코미디가 서툴게 공존하는 딱한 광경이 연출됐다.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 되는 인물 잔을 민중의 벗과 근왕주의자, 광신자와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고단하게 방랑하도록 만든 것도 시대극 팬들을 맥풀리게 할 만하다. 스펙터클과 영웅담, 인간성의 비밀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위대한 서사극의 징표를 <잔 다르크>에서 찾기는 힘들다.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승전고를 울린 지점에서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총총히 퇴각하고 만다.

실존인물 잔 다르크(1412∼31)
성녀인가 정신병자인가

 
“절망과 복수심으로 싸웠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구원으로 믿고 계속 피흘리게 했습니다. 저는 오만하고 편협했으며… 그래요, 잔인했습니다.” 영화 <잔 다르크>에서 화형을 앞둔 잔은 메마른 목소리로 이렇게 고해한다.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 근세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프랑스 국민의식 형성의 마스코트가 된 영웅 잔 다르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로렌 근교의 시골마을 동레미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잔은 대천사 미카엘과 성녀들의 음성을 통해 프랑스를 유린하던 영국군과 부르군디 일파를 축출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신과 직접 교통한다는 그녀의 고백은 후일 종교재판에서 교회의 심기를 거스른 원인이 된다. 잔의 언니가 반송장 상태로 강간당하는 영화 속의 끔찍한 사건은 역사에 기록된 바 없지만 시농성에서 신분을 감춘 황태자를 한번에 알아본 일화는 유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잔은 힘세고 건장했지만 얌전한 몸가짐을 가진 처녀였고 영화와 달리 태자를 만났을 때 이미 무장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진두지휘에 나선 잔은 계시를 받은 듯 갑작스런 공격을 명하거나 그녀가 들어봤을 리 없는 지역으로 출동을 명해 승리를 거둠으로써 프랑스 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했다. 현실적 조건을 초월한 몇 차례의 승전과 잔의 불가해한 육체적 정신적 용기는 신화가 됐고 영국군은 잔의 흰 옷자락이 나타나기만 해도 줄행랑을 쳤다. 1430년 콩피에뉴 전투에서 후위를 방어하다 사로잡힌 잔은 극심한 탈출 욕구에 시달린 나머지 첨탑 위에서 몸을 던져 실신하기까지 했다. 잔 다르크의 마지막 부탁은 화형의 순간에 십자가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현대의 연구들은 잔 다르크가 적인 영국인보다 프랑스 내분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을 밝혀내왔다. 종교에 비판적이던 후세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성직자들의 조종을 받은 신경쇠약증 환자라고 냉정히 평했으나, 전기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프랑스사>에서 잔 다르크를 가리켜 신앙과 의지가 성취할 수 있는 기적의 가장 경이적인 예라고 썼다. 1920년 5월16일 성녀로 추증된 그녀의 축일은 5월30일이다.
 
글 :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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