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고명섭 기자  
 
밥을 먹듯 책을 파먹고 숨을 쉬듯 문자를 호흡하는 이들. 인터넷상을 어슬렁거리는 책벌레들이 있다. 새 책에 관한 정보를 재빨리 잡아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책의 내용을 평가하며 책의 허점을 일러준다. 열렬히 옹호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냉정히 외면하는 책도 있다. 책에 관한 한 이들은 인터넷상의 안내자이며 파수꾼이고 정보의 허브다. 책에도 여론주도층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익명의 바다에서 등대 노릇을 하는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오피니언 리더들의 집합처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 포털 다음의 카페 ‘비평고원’이다. 책의 숲이라 할 이곳은 저마다 무림의 고수를 자처하며 갈고 닦은 내공으로 일합을 겨루는 공간이다. 일본의 최근 소설에서부터 프랑스 현대 철학까지 막 출간된 책들이 품평의 대상이 된다. 서슬 퍼런 칼날이 책의 허점을 찌르고 오래 쌓은 지식으로 책의 특장을 증명한다.

지난 2000년 문을 연 이 카페의 회원은 줄잡아 3천명에 이른다. 매일 500여명이 이곳에 들어와 책의 정보를 얻어간다. 이 무림에서 돋보이는 고수는 30~40명 정도다. 대다수가 문학·철학·정신분석학 등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박사과정이다. 이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매번 새로운 초식을 선보인다.

이들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사람이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 알려진 필명 ‘로쟈’다. 로쟈의 강점은 문학·역사·철학·사회서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나온 책은 거의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개해준다는 점이다. 로쟈의 순발력은 전광석화급이다. 책이 나오면 즉각 해당 책의 내용과 배경을 설명해주고 저자의 다른 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며 중요한 서평을 끌어다 덧붙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책과 관련이 있는 해당 분야의 다른 책들도 성격별로 정리해 소개해준다. 말하자면 로쟈는 최근에 나온 책의 지도를 그려주는 사람이다. 로쟈의 지도는 오차가 적을 뿐더러 군더더기가 없고 신속한 편이어서 책 정보 전달꾼으로서 그의 지위는 확고하다. ‘비평고원’의 초기화면에는 로쟈가 운영하는 코너 ‘책의 바다’가 떠 있다.

비평고원 회원인 최성희(37·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씨는 “로쟈처럼 책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올려주는 회원도 있지만, 회원들의 다수는 책 자체를 놓고 평가하고 토론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이 카페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글 쓰는 이들이 주로 대학 박사과정급 이상이기 때문에 전공 지식이 풍부하고 그러다 보니 논쟁이 일며 격렬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한번 싸움이 붙으면 몇 달씩 진행되기도 하고 논쟁에서 졌다 싶으면 아얘 카페에서 탈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논쟁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평가가 많지만, 외서의 경우 번역의 질을 놓고 벌어지기도 한다. 잘못된 번역을 문제 삼아 품평이 오고가는데, 때때로 번역자가 직접 들어와 항의하다가 일대 격전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다. 최성희씨는 “비평고원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좋은 번역서를 추천하고 질 나쁜 번역서를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 곳”이라며 “대학에서 강요하는 답답한 논문식 글쓰기의 대안을 찾아 이곳에 모여드는 사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상에서 필명으로 교류하지만 1년에 한두 번씩 오프라인 모임도 연다. 지난 연말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 10여명이 서울 종로 맥주집에서 모여 송년회를 열기도 했다. 이 카페를 만든 운영자 조영일(서강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씨는 “카페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많다”며 “책에 관한 수준 높은 담론을 원하는 네티즌들이 물어물어 이곳으로 찾아들다보니 지금은 인문학 책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곳으로는 가장 다채로운 곳이 됐다”고 말했다.

논문 글쓰기 벗어난 대안공간

비평고원이 인문학 연구자들의 자생적 모임이라면,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나의 서재’는 서점에서 북마니아들을 위해 만들어준 방이다. 로쟈를 포함해 비평고원의 주요 필자 가운데 일부가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 글을 쓰는 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알라딘의 인문서 담당 김현주씨는 “‘나의 서재’는 서점을 찾는 독자들에게 책을 안내해줄 수 있는 필자들이 주로 사용한다”며 “2003년 8월에 문을 연 뒤 3만~4만명이 서재에 필자로 가입했고 그 가운데 40여명이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현직 일간신문 기자로 알려진 필명 ‘딸기’, 대학 3학년 때부터 3~4년째 활약하고 있는 ‘평범한 여대생’, 계간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서평을 쓰는 ‘바람구두’, 단국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마태우스’ 등이 알라딘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대표급 필진이다. 김현주씨는 “이분들은 책이 서점에 깔린 직후에 번역이나 내용을 꼼꼼히 따져 품평하기 때문에 일종의 검증장치로서 기능한다”며 “특히 인문서의 경우엔 이들의 평가가 초반 판매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고 말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 제시

알라딘은 이들이 쓴 글을 읽고 책을 구입할 경우 책값의 1%를 적립해주는 인센티브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필진은 한달이면 1만원 이상의 적립금을 받기도 한다고 김현주씨는 말했다. 적어도 100명의 독자가 필자의 글을 읽고 책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이들의 의견이 책을 선택하는 데 기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데, 말 그대로 책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셈이다.

또다른 인터넷서점 예스24도 알라딘과 유사한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리뷰를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을 위해 독자칼럼란을 두고 있는데,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한동안 인기를 끈 난이었고, 요즘 가장 조회수가 많은 칼럼난은 ‘정군의 책 대 책’이다. 이 칼럼의 필자인 ‘정군’은 1주일에 한두 번씩 두 권의 책을 선정해 비교 분석해준다. 예스24에서 블로그 관리를 담당하는 심현숙씨는 “40명 정도가 개인 블로그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적으면 1주일에 한두 편, 많으면 하루에 한 편 정도 책 리뷰를 올린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 필자들 가운데 특히 인기가 있는 필자에게 따로 코너를 마련해주기도 하는데, 정군의 코너가 바로 이 경우다. 심현숙씨는 “주목도 높은 필자들의 글에는 적어도 열 건 정도의 댓글이 달린다”며 “대다수 댓글이 좋은 정보를 고맙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교보문고도 알라딘·예스24처럼 서평자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 책 오피니언 리더의 시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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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여간 모은 책이 300여권이 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정리하려구요.

상당한 양의 책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셨을테지만,
분류를 하는 것이 굉장히 애매해요.

그래서, 도서 분류 방식과 목록 작성 방식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아래는 제가 임의로 정한 기준입니다.

- 도서 분류 방식

1. 대분류(소분류)
역사(국제사회주의운동/한국사회주의운동/세계사/한국사/한국근현대사/전기)
사회(일반/마르크스레닌주의고전/사회주의사상/자유주의사상/수정주의사상/노동운동/삶/자기계발/정치비평)
경제(경제사/자유주의분석/재테크)
과학
종교
철학
미디어(일반/미디어비평/언론사회비평)

2. 장르: 일반, 소설, 시, 수필, 인터뷰, 전기
※ 만화는 특별한 구분없이 분류한다.

- 도서 분류 원칙

1. 제목: 한글과 한문은 한글로, 영문은 영문으로 표기한다. 시리즈물일 경우에는 시리즈명을 먼저 표기하고 제목을 표기한다. 로마자는 숫자로 바꾸어 표기한다.
2. 지은이: 3명 이상인 경우에는 1명만 표기하고 '外'를 덧붙인다. 외국 지은이의 경우에는 성은 한글로 적고 이름은 약자로 표기한다. 약자 표기는 온점(.)으로 하고 한칸을 띄운다.
3. 출판사 이름은 띄어쓰기 하지 않는다. 영문은 영문으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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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아파트값 거품빼기와 진보

오전에 '벼랑끝 인문학'에 대한 기사들을 모아두었는데, 사실 내가 더 공감하는 것은, 그리고 보다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위기'이다. 소득 양극화는 OECD국가 중에서 미국, 멕시코와 함께 가장 심각한 나라에 속한다고 하고 어제 보도로는 자살율도 2년 연속 세계 1위라고 한다. 각종 통계수치에 대한 신뢰도를 조금 낮추더라도 '살맛나는 사회'의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정치권 안팎으로 갈수록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골은 깊어만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게 '길잃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짚어본 지난주 경향신문의 창간 60주년 특집기사를 버리지 못하고 책상 한쪽에 모셔두고 있는 이유이다(지금 보니까 가방에 있다). 기사는 주로 '진보개혁의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 중에서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감시단장, 아니 보다 실감나게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장'의 비판은 여러 모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사실 '아파트값 안정'과 '사교육비 경감', 이 두 가지가 대내적으론 가장 핵심적인 국정과제 아닌가? 정부나 정치권에도 난다긴다하는 '전문가들'이 많은데, 왜 해결이 안되는 것일까? 거꾸로 사정은 왜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일까?). 진단에 걸맞는 해법이 현실화될 수 있는 방도는 과연 없는 것일까, 의문을 던지면서 한번 더 읽어보고자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경향신문(06. 09. 14) “현실 모르는 ‘반쪽 진보’ 권력 맛본뒤 퇴화”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사람들 정치는 잘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독재냐 반독재냐, 직선제냐 간선제냐 같은 선악이 뚜렷한 이분법적 정치 문제에는 상당한 능력이 있다. 독재자를 타도하고, 부패한 정치 세력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경제는 바보’다. ‘실물’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처럼 이분법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다. 또 정치 문제와 달리 바로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야 느낀다. 그걸 교묘하게 이용하는 세력이 관료다.

나는 그걸 DJ 때부터 봐 왔다. DJ는, 태생적으로 DJP연합이다. 정치는 진보, 경제는 보수를 택했다. DJ때 경제 정책은 모두 개발 관료에 의존해 나온 것이다. 부동산 경기 부양, 건설 경기 부양, 신용카드, 외자 유치 등이다. 그러다 말미에 아들과 측근이 개발 세력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 YS, DJ보다 나은 진보 정부라 여겼기에 서민·중산층을 위한 진보적 경제 정책을 내놓을 줄 알았다. 또 재벌·기업의 특혜를 파헤치는 경제 과거사의 진상 규명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이룰 줄 알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만 유능, 경제는 바보
참여정부는 집권 1년간 법안을 통과시킬 의석이 적다고 변명했다. 2004년 4월 ‘탄핵풍’으로 진보개혁적 정치인들이 여의도에 대거 입성했다. 민노당도 거저 들어갔다. 여대야소 정국 의미도 있지만 더 큰 의미가 있다. 총선 승리로 진보개혁 세력이 청와대뿐만 아니라 여의도까지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게 다였다. 의미있는 입법 하나 못했다.

경제에 대한 인식도 문제다. 단적인 예를 들면, 아파트 선분양은 그것 자체가 특혜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아파트는 분양받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돈주고 사는데 ‘구입’이고 ‘매입’이지, 왜 분양이냐. 분양이라는 말에 나눠 준다는 뜻이 있다. 강아지 분양하듯 이해하는데, 누가 주체인지 잊고 산다. 신도시 개발 방식도 들여다보자. 정부가 농민들의 농지, 임야를 30년간 헐값으로 뺏어서 건설업자에게 팔아넘겼다. 택지 조성도 하기 전에 말이다. 농민은 도시민에게 당연히 빼앗겨야 하고, 국가는 농민의 땅을 뺏어도 된다는 인식이었다. 빼앗은 농지를 건설업자에게 30년간 판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값싸게. 그리고 소비자는 분양받는다. 분양이란 말이 ‘값싸게’를 뜻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시세보다도 높다. 그 자초지종을 알아야 한다.

◇기득권층 얘기만 들어
청와대에 들어간 진보개혁 세력 이야기도 해보자. 학자 출신이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도 현장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두번째 공통점이 통계와 자료를 관료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상황, 현실을 잘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청와대 들어가서 외국에서 배운 이론만 접속시키려다가 항상 관료와 재벌 민간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역이용’ 당한다.

집권 이후에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내 진보개혁 세력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관료, 재벌, 재벌 이익단체, 재벌 민간연구소 연구원,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이다. 시민단체 사람도 만나지만 열에 한두번 정도일 뿐이다. 경제부문의 무능함을 외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료, 이익단체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진보’가 어느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보수’가 된다. 권력의 맛도 느낀다. 그런데 정치권내 진보개혁 세력들은 어떻게 접대와 로비를 피해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즐기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진보한 사람들? 경제 관료나 재벌에게 팽팽당한다. 재벌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 예전에 경제 공부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제대로 스터디하나. 관료나 재벌, 이익집단의 연구소 연구원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자료에 데이터에 논리까지 만들어주니까 편하다. 가만 있어도 가져다 준다. 그러다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또 그런 세상이니까.

각종 국가정책 용역 생산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관료를 통해 나오면 관료를 위한 용역 보고서만 생산된다. 국회나 정당에서 현장 중심의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국책 연구소도 100% 독립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미국처럼 관료나 행정부는 법안을 발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관료는 국민을 위한 머슴이다. 머슴한테 의존하는 법안은 안된다. 대의 기구인 국회의원과 정당이 정책·제도를 파고들고 연구해 내놓아야 한다.

보수적 관료들이 진보개혁 세력에게 지시받는다고 갑자기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안 바뀌는 데 무엇을 바꾸겠는가. 미국의 연방 공무원은 정권이 교체되면 고위 공무원 절반이 바뀐다. 우리도 헌법이나 공무원법을 싹 바꿔야 한다. 한국처럼 ‘고시’로 평생을 보장받는 나라는 없다.

개발독재 때도 대다수 국민은 희망과 꿈을 가졌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 현재보다 나을 수 있다는 거였다. 자신감과 희망 있었다. 지금은 우선 열심히 일할 곳조차 없다. 일해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미래가 안 보인다. 항상 위기 의식에 사로잡힌다. 결국 부동산 문제다. 개인 자산의 80%가 부동산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고민 80%가 부동산이라고 보면된다. 집값 폭등하니까, 5년 10년 일하면 집 사고, 평수 늘리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된다. 투기 잘 하는 사람이 선망받는 시대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기를 죽여놓는다.

서민, 중산층의 삶의 질은 계속 떨어진다. 선진국 돼간다지만 재벌만 선진국이고 ‘그들만의 천국’이다. 집권 세력이 95%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5%의 기득권 세력에게 점점 살기 좋은 환경,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있다. 95%는 박탈감에 점점 힘들어지는데 5%는 불로소득으로 자산 늘리면서 잘 산다. 이런 게 위기의 본질이다.

대통령, 정부, 여당은 ‘성장률’에 집착한다.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잘 받으려면,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려면 거품을 조장해야 한다. 국민들은 자기 주머니, 집 마련, 저축, 일자리 이런 것 고민한다. 그렇지만 대통령, 정치인, 관료들은 ‘자기만의 성장률, 성적표’에 집착하고 결국 거품 유혹에 빠지게 된다. 거품 조장하면 결국 투기라는 병이 생긴다.

참여정부가 재벌에게 특혜를 늘려줬다.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기업도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각종 개발 계획을 남발하고, 거품 조장을 해왔다. 주택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2백만~2백50만명이다. 그중 15% 정도만 정규직이고 지식 노동자다. 나머지는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다. 참여정부 들어 50만~1백만명 고용이 창출됐다. 그중 30%는 외국인 노동자다. 건설경기 부양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란 게 우리 지식을 배운 청년,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만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계 투기 자본이 ‘부동산 투기장’에 투입됐고, 지금도 투입되고 있다. 자꾸 돈이 모이니까 개발과 부동산에 집중되고, 지식 산업과 거리가 멀어지고, 일자리는 점점 감소하고 병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은 결혼이 늦어지거나 못한다. 주택값은 폭등한다. 미래에 대한 위기, 불안 때문에 결혼 못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저출산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빈부격차 심화,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킨 자들이 세금 더 내라고 하니까, ‘미친 놈’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반대만 말고 대안 내놔야
진보는 그게 지식이든, 돈이든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없는 사람을 생각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보는 진보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민노당이나 민노총을 보자. 대한민국 1천5백만 노동자의 10%도 안 되는 귀족형이다. 그 10%도 다 재벌 기업, 보수 기업, 공기업, 언론, 교사, 병원 등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종사자들이다. 1천만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 1천만명에 육박한 비정규직을 위한 조직도 사실상 없다. 민노당, 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주장하지만,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는 안 한다. 내건 빼앗지 말고 소수에게, 권력자에게, 자본가에게 저들(비정규직)을 위해 더 내놓으라는 식이다. 유럽을 봐라. 자기 근무 시간 줄이고 하면서 같이 하지 않는가.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고 진보인가. 반독재하고 길거리 행동했다고 진보인가. 지금 진보개혁세력은 ‘머리만 진보’거나 ‘행동만 진보’가 많다. 머리와 행동이 다 진보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참진보’가 없다. 이것이 또 위기의 요인이기도 하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요즘 시민단체에는 ‘시민’이 없다.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정치, 관료 사회 진입하기 위한 시민단체인가 싶을 정도다. 진보는 인재양성소가 없다. 그래서 인재도 탄생하기 힘들다. 학생운동하다 노동계로 가고, 정보도 자료도 차단된 상황에서 행동하고 일했다고 해서 본인이 인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속한 경실련도 마찬가지다. 무슨 정부나 지자체 위원회에 왜 그리들 많이 가는지, 시민단체가 무슨 이력 관리하는 곳인가.

우리 사회가 왜 위기가 왔고, 중병이 걸렸느냐. 황우석 거품, 부동산 거품 이런 것이 대한민국에서 선진국 진입단계에 왜 발생했나? 브로커 천국이 된 근본 원인은 뭔가. 엉터리 진단에 엉터리 처방만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예견해야 하는데 중병이 들어야 치료법을 생각한다. 그나마 병치료 늦어지고 치료하다 마는 게 반복된다. 어쩌다 먼저 떠들면 미친놈 되기 일쑤다. 지금 권력에 반대하는 자들은 많은데 견제하고 감시하고 대안을 내놓는 자들이 없다. 그것이 위기의 실체다.(정리 김종목·사진 권호욱기자)


-김헌동 단장은?-

경실련 김헌동 국책사업감시단장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1년부터 19년 동안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97년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에는 사표를 내고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2004년 2월 경실련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 출범과 함께 본부장을 맡아 분양원가 공개운동을 벌여왔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씨가 친형이다.(*다른 건 몰라도 '아파트값 거품빼기' 같은 게 한국사회의 진보이다. 어려운 이슈들을 제기할 것도 없다. 이게 정치적 진보를 표나게 내세우는 것보다는 좀 복잡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일까? 김헌동 본부장은 아파트 반값 공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시민단체쪽의 탁상공론이 아니다. 지난 92년 대선에서 정주영의 대선공약이 아파트 반값 공급이었다. 문제는 혹 '의지'가 아닐까?)

06.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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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외)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에 끝난 6·25 전쟁은 3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국토를 분단시켰다. 유엔의 깃발 하에 이 나라를 짓밟은 소위 "서구문명"의 선봉장 미국은 우리 민족에게 의도적으로 대규모 폭격 테러를 자행했다. 심지어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핵공격을 감행할 계획까지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 끔찍한 학살행위는 폭로되지 않은 채 6·25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좋은 재료가 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 전쟁의 성격과 진실을 다시 한번 논쟁의 도마 위에 올릴 필요가 있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반격을 가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미국의 냉전 전략이 실행에 옮겨진 첫 번째 주요한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이 분출하였다. 이탈리아, 그리이스, 독일 등에서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로 인해 기존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근로 인민이 투쟁으로 일어선 것이었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패배로 지배질서가 붕괴했다. 이제 노동자와 농민이 각지에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여타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 필리핀, 인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가열되었다.

이러한 폭발적 세계정세는 세력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 일당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력을 국제적으로 확대하여 자신들의 특권, 정치권력 등을 더욱 공고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미국은 전후 제국주의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미국이 당면한 과제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동구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1948년 혁명으로 중국대륙에서도 모택동을 위시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대처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고 후퇴시킬" 냉전 전략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실제에 있어서 전세계에서 터져나오는 사회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을 압살하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과 자칭 좌익 정치세력들은 세계 곳곳에 유엔이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지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인류문명을 위기에서 구하는 고귀한 노력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의 첫 번째 대규모 군사적 개입행위였던 6·25전쟁의 진짜 목적이 한반도에서 끓어오르던 사회혁명을 압살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6·25 전쟁은 1950년대 초 각국에 산재해 있던 소위 맑스주의 정치조직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모택동의 군대가 장개석 세력을 대만으로 쫓아버리고 중국대륙에 사회혁명을 달성한 후 바로 뒤이어 이 전쟁이 발발했다. 따라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전세계에 진군하는 공산주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는 계기가 바로 6·25 전쟁이라고 많은 좌익조직들은 바라보았다.

6·25 전쟁의 기원을 연구한 대다수의 저술들은 누가 38선을 먼저 침해했느냐하는 재미없는 주제를 논의의 초점으로 잡고 있다. 대개의 서방 역사가들과 남북한 관변학자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지금껏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 분석틀은 1945년 종전과 함께 전세계에 밀어닥친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대대적인 사회혁명의 기운을 무시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진행된 한반도의 계급투쟁은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바로 이러한 전체적 상황이야말로 뒤이어 일어난 6·25 전쟁과 분단을 올바로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신좌익(New Left) 역사가인 브루스 커밍즈(Bruce Cummings)는 한때 독재정권에 의해서 금서가 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을 저술했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저술은 당시의 상황을 가장 철저하고 자세하게 분석한 결정적인 자료이다.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대항하여 미국이 주도한 냉전전략이 6·25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다.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인 제국주의 세력과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은 중국이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공산주의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 1945년 일본의 패망에 뒤이어 조성된 혁명적 격동에 의해서 갑자기 조성되었다.

일본 식민지통치 시기에 한반도에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가 "불균등 결합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이라고 개념화한 현상이 철저하게 전개되었다. 즉 봉건적 토지소유가 온존하는 가운데 제국주의 공업화가 일본의 전쟁 목적을 위해 이식되었다. 이 결과 이 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를 담당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양반이나 농민의 토지를 등록시켰다. 등록되지 않은 토지는 조선총독부의 재산이 되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우리 인민으로부터 강탈하는 데에 있었다. 식민지 지배에 응하여 협력한 지배층은 토지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으나 많은 인민은 일본군에 끌려가거나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노역을 강요당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인 기업은 130만명의 우리 동포를 고용하였으며 기타 수십만의 동포들이 일본이나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장악한 조선공산당은 파업이나 빨찌산 투쟁을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조선총독부는 압제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을 "공산주의 세력의 전복활동"이라고 선전하면서 역으로 공산당의 대중적 신망을 더 올려주었다.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소작료가 철폐되기를 열망하였으며 일제와 친일파 세력을 저주하였다. 자본주의 공업화, 지주제도, 식민지통치는 얼키고 설키면서 이 땅의 인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회혁명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친일세력이었던 지배층은 인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식민지 공업화로 노동계급이 성장해 있었다. 대중의 상당수는 공업 프롤레타리아로 변모했다. 그러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양반들은 아직 자본가 계급으로 전화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9일 조선총독부는 정권을 여운형에게 넘겼다. 그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로서 당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를 이미 조직하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마치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과 유사하였다. 건준은 당시 자생적으로 전국에서 생겨난 노동자-농민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 의 깃발 아래 노동자들은 전국에서 공장을 장악했다. 전평은 공산당이 주도하고 있었으나 사회민주주의 경향도 그 내부에 존재하였다. 미군정 노동문제 고문관 스튜어트 미첨(Stuart Meecham)에 의하면 "대공장의 거의 전부"는 노동조합이 장악하고 있었다.(커밍즈,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인용) 전국농민노동조합평의회(전농) 은 지주계급의 토지를 몰수할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당시 투쟁의 수준은 이탈리아나 그리이스에서 전개되었던 투쟁들과 유사하였다.

승리한 제국주의 연합세력은 바로 이러한 폭발적 혁명 상황에 대면하였다. 얄타에서 이들은 조선이 10년에서 30년에 걸쳐 공동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키자 미국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말 것을 주장했다. 사실 38선은 당시 미국 전쟁성의 하급 관료였던 딘 러스크(Dean Rusk)가 미군 점령지역에 서울이 포함되도록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전시에 미국과 맺었던 동맹관계를 훼손시킬 생각이 없었고 한반도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제안에 즉시 찬성하였으며 소련군은 곧 38선 북쪽으로 물러났다.

미국 대 인민운동

미국은 애초부터 인민운동과 임박한 사회혁명을 저지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미군의 태평양 지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포고한 "일반명령 제1호" 는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우리 인민이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장군이 이끈 미군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이들은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대표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준과 인민위원회는 예정대로 일주일 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 장군의 정무 수석고문관 메럴 베닝호프(Merrell Benninghoff)는 9월 15일 이렇게 보고했다:

"남한은 불꽃만 당기면 즉시 폭발할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일제 때 높은 지위에 오른 자들은 친일분자로 인정되어 일본인들만큼이나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든 정치그룹들은 일본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인을 몰아낸 후 곧바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선동가들이 활동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그러나 베닝호프는 미국의 통치를 가능하게 할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는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나이도 많고 교육도 많이 받았다. 비록 이들 중 많은 인사들이 일제에 협력했지만 이 오명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 (같은 글)

이러한 "민주주의자들"에게 미군정이 물질적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한민당으로 결집된 이 인사들은 한국이 보호를 받아야할 단계에 있으며 소련보다는 미국의 보호를 받는 것이 더 낫다고 공언했다는 사실을 그는 긍정적으로 주목했다. 성년 생활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이승만 박사가 이들에게는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미국은 일본군에 복무하여 훈련된 군대를 정부군으로 조직하면서 가냘픈 이승만 정권을 도왔다. 이제 맥아더의 군정포고령에 의해 일제의 모든 법률들은 계속 효력을 가졌다. 1945년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인민위원회를 불법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 장군은 "친미주의자나 친일분자나 한국민에게는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S. Lone & McCormack, [1850년 이후의 한국](Korea Since 1850)}

식민지 통치의 연장에 대해 당연히 인민은 저항의 길을 택했다. 1946년 여름 미군정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구속조치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의 훈련을 받았으며 미국이 지원한 경찰에게 인민의 자생적인 저항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200여 명의 경찰이 이 과정에서 죽음을 당했다. [시카고 선 ](Chicago Sun)지의 마크 게인(Mark Gayn)은 이 투쟁을 "본격적인 혁명"으로 묘사했으며 "수백만은 아니지만 수십만의 인민대중"이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인민운동을 억압한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이 운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스탈린은 "모든 반일 세력과 민주주의 정당들의 활동을 지원하라고 " 지시했다. 물론 이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1946년 2월 소련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기구는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내의 인민위원회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스탈린이 직접 선택한 청년 공산주의자 김일성이었다. 그는 중국공산당원과 소련군 대위로서 반일 독립운동에서 믿을만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주장한대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침으로써 북한의 지도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신좌익평론 , New Left Review]에 실린 맥코맥의 논문을 보시오) 정권을 장악한 직후 그는 대중의 지지를 받던 그의 라이벌인 부르조아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체포하여 나중에 처형했다.

소련이 수립한 북한 체제는 소련과 아주 유사한 관료적 노동자국가였다. 노동계급이 직접 권력을 행사한 경우는 전혀 없었으나 관료적이고 상명하달식의 사회혁명이 달성되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법적 평등권이 선언되었다. 1946년 3월 6일 토지개혁령이 발효되어 모든 농토가 농민에게 분배되었으며 "애국적" 지주들만 보상을 받았다. 토지 분배는 지역인민위원회가 주도하였다. 1946년 10월 6일 공포된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 91호는 일본인이나 친일분자가 소유한 모든 산업을 국유화했다. 스탈린의 인민전선 노선에 따라 이 경우에도 소위 애국적 부르조아들을 이 결정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계급협조 노선은 실패했다. 북한의 사업가들과 그 가족들은 거의 모두 남한으로 도망하여 이후 남한 우익 세력 내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오랫동안 한국문제 전문가였으며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던 조오지 맥쿤(George McCune)은 이렇게 썼다:

"북한 인민대중은 소련군정에게 우호적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혁명적 조치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남한에서대중은 소위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를 자신들이 누리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사회개혁 조치가 없었으며 민주주의적 잣대도 불공정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 (맥쿤, [오늘날의 한국, Korea Today])

미군정이 민주주의의 잣대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일률적으로 적용할 경우 그 결과가 지극히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1946년 미국 정보기관의 보고서는 공정한 선거가 실시될 경우 좌익 세력이 완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미군정은 민주주의의 잣대를 공정하게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정과 미군정이 차이를 보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차이는 스탈린이 트루먼이나 하지보다 인민에게 더 호의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 스탈린 체제가 트루먼의 미국과는 아주 다른 사회적 관계 위에 수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주요 생산수단은 사회적 소유였다. 동구든 북한이든 점령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소련은 자기 나라에 지배적인 사회관계들을 점령지에 이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농민의 요구가 사회주의 소유의 틀을 통해서만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민대중의 지향과 소련군정의 정치적 목적 사이에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자본주의 "동맹국"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전시의 동맹관계는 독일과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계속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양극화 현상은 한국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공동신탁통치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강대국 사이의 회담이 1946년 봄 그리고 1947년 가을에 진행되었으나 모두 결렬되었다. 이후 연속된 회담에서 소련은 양국의 군대가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1946년의 대중 봉기를 겨우 진압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남한의 정세에 우려를 나타낸 미국은 일방적으로 회담 불참을 선언하였다. 미국의 전략은 한국문제를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유엔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가 성립되어 한국이 서방의 입맛에 맞는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할 때까지 남한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주도 4·3 봉기

한국임시위원회의 통치는 남한 대중의 저항을 새로 불러 일으켰다. 스탈린주의를 추종한 남노당은 1948년 2월 7일에 3일간의 총파업을 개시했다. 곧이어 4월 한국임시위원회는 남한에서 단독으로 선거를 치룬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나 일부 우익 인사들과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피의 억압을 감행했다.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미군정은 도민의 10 내지 20%에 해당하는 3만에서 6만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수만 명의 도민들은 일본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악지대로 이동한 게릴라들은 보급품도 공급받지 못한 채 수개월 동안 정규군과 싸웠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초토화 작전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었다.

남한 단독 선거는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우익 세력 그리고 정권을 제외한 모든 계급 계층의 저항을 받았다.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민족주의자 김구 역시 남한 단독선거가 국토의 분단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난했다. 심지어 김구는 해주와 평양에서 북한 대표들과 회담을 가졌다. 결국 반대 진영은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임시위원회는 선거를 통해 "남한 유권자들의 자유 의사가 온전하게 표현되었다"고 선언했다.

선거의 결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유엔 총회는 곧 이 정권을 한국의 유일한 정부라고 인정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북한에는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결국 국토분단은 공식화되었다. 1948년 후반 남한에는 봉기들이 또 일어났다. 여수와 순천의 군인들이 제주도 게릴라 잔당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위기에서 빠져 나온 이승만 정권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여수에는 인민위원회가 다시 수립되었다.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군들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1949년 미 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이승만은 경찰국가를 강화하는 일로 바빴다. 심지어 부정으로 얼룩진 1948년 국회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을 스파이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라이벌 김구를 암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제 해가 지나감에 따라 남북간의 전쟁 가능성이 점점 커졌다. 이승만은 친북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진압하지 못했다. 한편 게릴라들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 년 내내 국경선인 38선에서 전투가 빈발했다.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달라고 비밀리에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간청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결국 동의하였다. 남한 내에 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대단하여 북한이 침공할 경우 금방 남한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김일성과 남노당 지도자 박헌영이 이들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스탈린은 김일성의 침공이 제국주의 세력들을 골탕먹일 값싼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북한의 인민군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모택동은 대만으로 도망친 장개석의 국민당 잔당을 박멸하기 위해 대만 침공에 주된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어쨌든 김일성의 계획에 축복을 보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은 소련, 중국, 북한의 공식 역사 기술에서는 부인되고 있다. 즉 북한이 가만히 있는데 이승만 정권이 도발을 자행하다가 결국 38선을 넘어 북한을 침략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들은 김일성이 남침을 계획했으며 스탈린과 모택동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곤차로프 이하 공저, [불안한 동맹자들: 스탈린, 모택동, 한국전쟁,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을 참고하시오)

사실 이승만도 확실히 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북침통일을 선언한 바 있었다. 1949년 10월 그는 3일만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미 소 양군의 철수 후 이승만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한에 남아있던 미국 군사고문단의 우두머리 라버츠 장군은 이렇게 주장했다:

"전투로 단련된 500여명의 미군 병사와 장교들이 치밀하고도 지혜롭게 미군 대신 전투를 수행할 10만 군대를 양성하는 방식을 미국 군사고문단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북한의 침략을 유도하고 있다. 북한군이 좋은 사격훈련감을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 (커밍스, 핼리데이 공저 [한국전쟁 : 알려지지 않은 전쟁, Korea: The Unknown War])

그러나 라버츠 장군의 자신감은 허황된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첫 몇주동안 북한의 인민군은 전력이 우세한 것으로 생각된 남한의 국방군을 쉽게 물리치고 승승장구 남쪽으로 진군했다. 징집된 노동자 농민의 아들들이 이승만의 자본주의 정권이나 그의 제국주의 후원 세력들을 위해 "총을 쏠 "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민군의 진격 앞에 국방군은 급속히 전의를 상실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인민군의 총칼을 앞세우면서 북한의 기형화된 사회혁명의 성과들이 전진했다. 3개월 동안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인민군은 토지를 재분배하고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 일본 기업과 기타 독점기업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남한의 인민대중은 "침략자" 인민군을 반기는 듯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의 딘 장군은 그의 저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인민군에 대한 남한 인민의 태도는 열렬한 환영과 수동적인 인정의 중간인 것 같았다." --- (윌리엄 딘, [딘 장군의 이야기, General Dean's Story, 1954])

미국 정부는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50년 초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한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 발언은 김일성을 기쁘게 했고 이승만의 화를 끝까지 돋구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아시아의 신식민지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다. 1950년 4월 12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국무성에서 작성한 대외비 메모를 전달받았다. 이 메모는 전세계적으로 사회혁명의 확산을 막는 정책(containment)에서 이것을 저지하고 전복시키는 정책(rollback)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킴으로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자는 매파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들은 맥아더, 덜러스를 비롯한 극동 담당 군사 및 민간 고위 관리들의 명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몇 시간 만에 트루먼은 이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임시위원회는 6월 29일 성명을 통해 북한의 남침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고 규정하고 유엔의 개입을 촉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동의안이 즉시 통과되었다. 이때 소련은 중국의 회원국 가입을 거부한 유엔의 결정에 항의하여 불참했다. 유엔군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남아공 등 16개국에서 보낸 군대로 구성되었다. 과대망상증 환자 맥아더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9월로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승만의 군대가 곧 패배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연합군은 바다와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9월 15일 맥아더는 인천항에서 대대적인 수륙양용작전을 구사했다. 이 작전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로부터 2주가 채 되지 않아 원정군은 인민군을 38선 북쪽으로 쫓아내었다. 애초에 유엔은 국경선의 신성함을 수호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제 유엔군은 38선의 신성함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공산주의 세력을 밀어부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유엔의 반혁명 테러

반혁명 테러는 언제나 사회혁명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다. 유엔군의 한반도 점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민의 지지 때문에 쉽게 남한 국방군을 제압했던 인민군과는 달리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은 한국민 전체를 적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지극히 인종주의적 언어로 우리 민족을 "흰 파자마를 걸친 버러지들"이라고 불렀다. 맥코맥이 인용한 일본 자료에 따르면 유엔군이 한국을 "해방시킨" 기간 동안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처형되었다. 이 대대적인 양민 학살은 월남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이 자행한 대대적인 암살작전의 효시가 되었다. 월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들은 월등한 제공권과 제해권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감행했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할 때 맥아더는 그의 부관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에게 전선과 중국 국경 사이의 "모든 시설, 공장, 도시, 마을"을 공습하라고 명령했다. 르메이는 나중에 월남전에서 월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악명을 떨친 자였다.(커밍스, 핼리데이 공저, 앞의 책) 미국의 무차별적이며 인종주의적인 공격은 전쟁의 성격에서 도출되었다. 즉 미국은 단순히 적대국을 철저히 파괴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았다. 사회혁명을 괴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1월경에 제국주의자들은 별 저항이 없이 중국 국경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때 20만 명의 중국군과 15만 명의 인민군이 반격에 나서자 이들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고함을 질러대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전세는 다시 제국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유엔은 뻔뻔스럽게 중국의 "침략"을 비난했다. 트루먼은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고려 중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인종주의자들이 다시 원자폭탄으로 아시아 인민을 위협했다.

유엔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안 이들은 게릴라 부대들에게 시달렸다. 그러자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의 개시를 공공연히 촉구하기 시작했다. 1951년 초 미국 중앙정보국은 중국 본토에 비밀리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 맥아더는 중국의 주요 도시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5년부터 이 때까지 아주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즉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것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이 원자폭탄을 미국에 투하할 능력이 없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유럽 동맹국들은 걱정이 컸다. 영국의 수상 클리먼 애틀리는 워싱턴으로 날아가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하고 맥아더를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아시아인들이 대량 학살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지지했었다. 그리고 당시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군은 좌익 반군들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만 소련의 폭격기가 런던 상공을 날아다닐 일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트루먼은 애틀리의 우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실한 언질은 회피했다.

사실 1951년 4월 6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원자폭탄 26기를 통제할 권한을 주는 문서에 서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 뒤 그는 이 명령을 철회하고 맥아더를 해임했다. 제국주의 동맹관계가 완전히 붕괴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로운과 맥코맥, 앞의 책에서) 그러나 맥아더의 해임이 미국의 "핵무기 선택"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는 원자폭탄이 재래식 무기보다 "더 싸게 먹힌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었다. 소련의 핵무기가 아니었다면 미 제국주의자들은 또다시 아시아 도시들에 틀림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것이다.

사실 미 공군은 원자무기가 아닌 재래식 무기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전쟁 개입 첫 3개월 동안 780만 갤런의 네이팜탄이 사용되었다. 네이팜탄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미국은 국제 협정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이 결과 북한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3년에 걸쳐 우리는 북한의 도시는 물론이고 남한의 모든 도시들도 불태워 버렸다."고 르메이는 회고했다. 1951년 여름 지상전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유엔군은 주로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북한을 공격했다. 도시지역에 대해 계속 폭격을 가하면서 1953년 5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 공군은 북한의 농업을 파괴하고 인민들을 기아상태로 몰아 항복시키기 위해 관개 시설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휴전회담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었다. 어느 쪽도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했으나 전쟁은 회담 개시 후 2년 이 넘게 질질 끌었다. 전쟁포로 송환 문제가 핵심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선전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우겼다. 즉 전쟁포로들이 어느 진영으로 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이 결정은 전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민군 및 인민해방군 출신 전쟁포로들이 자본주의 쪽으로 넘어오도록 원하면서도 미 군부는 감언이설에 속지 않는 포로들에 대해서는 강경자세를 취했다. 맥아더의 후임자 리지웨이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빨갱이 포로들이 우리의 계획에 저항하거나 우리의 요구에 대해 지연술책을 쓸 경우에 이들을 총살시킬 결심이었다. 이 일을 확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살인무기들이 철저히 준비되어 있기를 나는 원했다." (커밍즈와 핼리데이, 앞의 책)

결국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우리 국토의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전쟁은 인구의 10%가 넘는 3백만 명을 죽였고 거의 백만 명의 중국군을 희생시켰다. 미군의 사망자는 33,500명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남한에서는 탄압의 광란이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의 반대파에 대한 "용공 재판"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그를 제거할 생각까지 했다. "만반의 준비 작전(Operation Everready)"은 그를 없애기 위해 비밀리에 수립된 계획이었다. 북한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생각된 분자들이 숙청을 통해 제거되었다. 박헌영도 이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남노당 지도자였던 그는 남침이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 김일성의 판단을 흐린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 죄목은 두 가지 점에서 괴상망칙했다. 우선 남침은 유엔군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 지장 없이 진행되었다. 둘째, 김일성 정권은 항상 남한에 의한 북침을 주장해왔다. 결국 박헌영의 처형은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늘상 일어나는 정치 라이벌에 대한 조작성 숙청의 일환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수립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를 전후 41년이 넘도록 통치했다. 북한은 역사상 가장 기괴한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에 속한다. 김일성 개인숭배는 유례가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국유화 조치에 의한 북한 사회의 변화는 인민에게 중요한 성과로 남아있다. 특히 여성의 권리, 의식주, 탁아시설, 의료와 교육 등에서 북한 인민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혜택들을 누려왔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이후 동맹국 중국은 북한을 버렸으며 이 결과 북한의 경제는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으며 인민의 생활수준 역시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의 복지를 도모한 북한 체제의 성과는 아직도 남아있으며 옹호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노동계급은 국토를 혁명적으로 통일시켜 전쟁이 남긴 국토통일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즉 북한 노동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고 남한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는 사회혁명을 달성해야 한다.

6·25 전쟁에 대한 좌익 국제조직들의 반응

국제 노동계급 운동 조직들은 대체로 6·25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서막으로 바라보면서 조직의 성격에 걸맞게 이 전쟁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각국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 연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평화주의적 시각에 근거하여 냉전을 반대할 부르조아지의 진보적 분파와 동맹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주장인 북침설을 강조하면서 선동의 중심을 "평화" 호소와 협상에 의한 전쟁 종결에 두었다.

영국 노동당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국 지배계급의 노선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전쟁 개입을 찬양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노동계급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자본가 계급의 으뜸가는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미국 중앙정보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반공 마녀사냥을 솔선수범하여 열렬히 주도했다.

트로츠키주의 조직들만이 이 전쟁에 대해 혁명적 노선을 채택했다.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트로츠키는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degenerated workers' state)"로 규정했다. 이 체제의 사회적 기초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이므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방어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6·25 전쟁이 발발할 당시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 산하 조직들은 북한을 포함해서 전후 소련군의 점령으로 탄생한 국가들이 소련과 질적으로 유사한 체제라고 보았으며 이들을 "기형화된 노동자국가(deformed workers' state)"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올바른 분석의 결과 이들은 국제노동계급이 6·25 전쟁에서 제국주의 및 그 동맹 세력에 대항해서 북한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셸 파블로는 이 당시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다. 그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전쟁과 혁명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고는 크게 보아 한국전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노선은 철저히 수정주의적이었다. 즉 그는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이 사회민주주의 및 스탈린주의 대중정당으로 들어가고 트로츠키 혁명조직을 해소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청산주의는 역사발전을 지극히 조잡하게 객관주의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 노선은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혁명적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혁명적 노선을 주창하였다. 1950년 9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론지 [제4인터내셔널, Fourth International]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식민지 대중 운동에 가담하여 소련 관료집단이 이 운동을 이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은 토착 봉건-자본주의 계급 그리고 특히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이 운동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다."

당시 제4인터내셔널의 가장 강력한 지부였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 제임스 캐넌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올바른 입장을 견지했다. 이 글은 1950년 7월 31일자 당의 신문 [투사, The Militant]에 실렸다:

"이 전쟁은 국토통일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 그 이상이다. 이것은 내전이다. 한국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이 한국의 지주, 고리대금업자, 자본가, 경찰, 정치 하수인 등에 대항하는 전쟁이다. 빈곤에 찌들리고 착취받던 근로인민 대중이 지주와 매판자본가로 구성된 토착 기생집단과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소련 스탈린 일당의 소망이 어떻든 계급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북한 정권은 토지개혁령을 발표하고 국유화 조치를 시행했다.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이러한 개혁조치들 그리고 좀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체제에 대한 약속이 농민과 노동자들을 북한 정권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이 전망이야말로 굶주리고 있는 대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토착 하수인들로부터 이들이 국토의 3분의 2를 빼앗게 만든 `비밀무기'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막강한 월스트리트(Wall Street) 금융자본의 군대와 폭격을 이들이 견디도록 만들었다" --- (제임스 캐넌, [선동가의 노트, Notebook of an Agitator])

영국의 노동자 권력 그룹은 이 편지를 인용하며 캐넌이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어리석은 결론을 내렸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모든 글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를 주창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면 이것은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이런 노선을 주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의 비판은 따라서 정당하다." ([연속혁명, Permanent Revolution], 1988년 봄호,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편지에서 캐넌은 "이승만 괴뢰정권에게 매수된 몇 안되는 하수인들을 제외하면 한국의 인민 모두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싸움에서 정의는 한국 인민의 편에 있다. 아시아 전역의 식민지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국 또는 유엔의 `해방'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이 논조는 명확하게 유엔/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를 주창했다. 어느 편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근본 문제에서 캐넌은 옳았다. 그러나 반공 마녀사냥이 맹위를 떨치던 당시 미국 내 좌익에 대한 지배계급의 압박은 지극히 견디기 힘들었다. 이 악화된 상황에 굴복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노쇠한 중핵들은 가끔 심각한 정치적 동요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공식입장으로 널리 알려진 트루먼에게 보내는 캐넌의 공개서한은 평화주의적이며 심지어는 애국주의적 색채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캐넌은 1950년 12월 4일자에 보낸 이 편지에서 이렇게 결론내렸다:

"이 위대하고 선량한 미국 인민은 군국주의와 전쟁을 혐오한다. 이들은 평화와 자유를 사랑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전쟁을 중단하라!'는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심지어 그는 미국 독립전쟁의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전통"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들이 작성한 선전적 성격이 좀더 강한 글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다른 나라 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정치적 혼란을 보이고 있음을 증명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노동자 혁명의 무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들은 너무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파블로의 "새로운 세계 현실" 이론의 객관주의적 편향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맑스주의 중핵들은 개량주의 사민당 및 공산당에 입당하여 이들 정치세력의 들러리를 서는 길밖에 없었다. 즉 사민주의 및 스탈린주의 대중정당들은 역사의 긴급한 필요에 의해 엉성하나마 혁명적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수정주의적 방법론이 사회주의노동자당에 침투한 예는 제이 스튜어트가 쓴 [한국의 내전](Civil War in Korea)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제4인터내셔널] 1950년 9-10월호에 실렸는데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비판을 가한 후 노동계급 지도력 확립의 중요성을 말한 김일성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끝맺었다:

"아시아 대륙의 혁명적 위력은 각국 지도자들로 하여금 수십 년간 존재했던 스탈린주의의 잘못된 노선을 걷어치우고 아무리 주저하고 혼란된 방식으로나마 10월 혁명의 위대한 전략적 개념들을 추구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객관적 상황만으로도 스탈린주의자들과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혼동된" 트로츠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경향은 유고슬라비아 티토주의 관료집단을 제4인터내셔널이 잠시나마 지지한 것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수정주의로 인해 결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로부터 10년 후 쿠바의 카스트로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 트로츠키주의를 완전히 기각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을 제국주의 세력의 파괴공작에 맞서 군사적으로 방어하면서 동시에 이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어떤 정치적 지지도 보내서는 안된다. 그런데 제4인터내셔널은 일관되게 이렇게 나오지는 못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경향들은 냉전의 압력 속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한국 혁명을 방어해야할 의무를 한사코 거부했다. "워싱턴도 아니고 모스크바도 아니다"고 외치며 "제3진영" 의 입장을 지지한 느슨한 국제 조직들은 "스탈린 전체주의"를 방어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논쟁들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포했다. 이러한 경향들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아직도 살아남아 상당한 규모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0년대 말 클리프는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 내부에 분파를 결성했다. 이 분파는 소련과 동구의 국가들 내부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체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국가들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했다. 이 나라들이 생산수단을 축적하고 서방과 "군사적 경쟁"을 벌였으므로 자본주의 체제로 보아야 한다고 클리프는 주장했다. 이 이론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생산수단과 사회적 관계인 자본을 근본적으로 혼동했다. 그리고 군사적 경쟁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군사적 경쟁이란 체제의 성격과 무관한 모든 국가의 기능이다. 이 점은 너무도 자명하다. 예를 들어 레닌과 트로츠키가 정권을 장악했던 소련은 왜 "국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는지를 클리프는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레닌과 트로츠키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생산수단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8년에서 1921년 사이에 제국주의 군대와 그 동맹 세력에 대항해서 이들은 치열하게 군사적 경쟁을 벌였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클리프의 이론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부인할 수 없는 정치적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냉전이 한창일 때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방어할 의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모국에서 이 의무를 다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혀 대중성이 없었다.

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영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제명 당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 조직의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출당 조치된 후 이들은 노동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평론 ](Socialist Review)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독립된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 헌신할 "노동당의 조속한 집권"을 주창했다. 이들의 잡지 제2호는 트로츠키주의를 기각한 실론인의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남한 정부와 북한 정부가 모두 강대국의 허수아비 정권인 한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들 중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다." --- 비. 카랄어싱엄, "한국의 전쟁", [사회주의 평론 ], 1951년 1월

제국주의 동맹국들의 한반도 침략, 대대적인 살인적 공습, 핵무기 사용 위협도 이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한국은 두 강대국 진영이 제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고 있는 경기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사회주의나 한국 인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 "한국: 이 `해방전쟁'을 끝내라!", [사회주의 평론 ], 1952년 11월

[사회주의 평론 ]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 해방공간 당시의 계급투쟁이나 북한 정부의 진보적인 조치들이 전혀 의의가 없는 것인양 이것들에 대해 논평하기를 거부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 미국은 월남에서 또 다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들은 월남을 자의적으로 분단하였고 이 상황을 고착시키려 했다. 또한 자신들의 인기없는 괴뢰정권이 선거에서 질 것을 우려하여 전국적 차원의 선거도 실시하지 않았다. 한국과 월남의 경우 모두 자본주의 체제인 남쪽에서 봉기가 발생하면서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전면전이 전개되었다. 두 경우 모두 대중적 토착 게릴라 운동을 기반으로 하면서 중국,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는 스탈린주의 정권이 북쪽에 존재했다. 그리고 미국과 그 하수인 동맹국가들이 연합하여 지지한 괴뢰정권이 남쪽에 있었다. 결국 화해할 수 없는 두 남북 체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두 경우 다 자유를 옹호한다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자들은 우리 인민을 인간 이하의 "버러지"로 간주하면서 이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인종주의적 성격의 전쟁을 자행했다. 이 두 경우 모두 제국주의 군대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으로 간주된" 인민에 대해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려는 목적을 가진 대대적인 무차별적 폭격 전략이 채택되었다. 두 경우 모두 전쟁은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월남전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호지명의 군대가 월남의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곧이어 벌어졌다. 클리프의 [사회주의 평론 ]은 1952년 1 2월 합병호에서 한국에서 진행 중인 전쟁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월남전의 유사성을 지적한 글을 실었다. 그리고 전쟁 당사자 어느 쪽에 대한 지지도 거부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월남에서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월남 인민은 제국주의자들의 도구인 바오다이 정권과 스탈린의 하수인인 호치민 정권에게 똑같이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편집자 난에서 이 글의 논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 독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으로 불리우며 노동당을 탈당한 클리프주의자들은 월남연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자 호지명 정권의 승리를 주창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평론 ] 신판 1993년 10월호에 다시 실린 당시의 글에서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으로 불리웠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68년 초 3백 내지 4백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2천명의 시위대가 우리가 내건 깃발 뒤로 행진을 했다. 이 깃발에는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시위대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행진했다. 이것은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 [사회주의 평론 ], 1993년 10월

그렇다면 왜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은 이렇게 전혀 다른 노선을 주창했는가? 전쟁의 성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노선이 변했다. 전쟁 당사자들의 계급적 성격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대중의 분위기였다. 1950년대 초 반공 히스테리가 절정에 달했을 때 클리프주의자들은 영국 노동당에 입당해서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사회주의자 명부](Socialist Register)지의 1984년 판에서 존 핼리데이는 전쟁 기간 동안 노동당 내각이 진행한 토론을 소개하고 있다:

"앨런 위닝튼의 팜플렛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를 [노동자 일간지](Daily Worker)가 출판한 것에 대해 국가반역죄로 기소할 것인가가 토론의 주제였다. 이 팜플렛은 이승만 정권의 범죄행위들을 폭로했는데 어느 누구도 이 글의 진실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자 일간지]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기관지의 편집자가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법에 따라 무조건 사형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초 "제3진영" 은 좌익에 대한 지배계급의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수만 명의 급진적 학생운동이 존재했으며 해럴드 윌슨의 왼쪽에 있는 모든 정치 경향들은 월맹의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이 "제3진영" 노선을 고수했을 경우 이들은 급진적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클리프와 그의 동료들은 호치민과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을 높이 치켜올렸다. 좋은 원칙이든 나쁜 원칙이든 조직 확대에 방해가 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말이지 위대(胃大) 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의 전통은 이와 다르다. 제4인터내셔널 조직원들은 지배계급의 엄청난 압력 속에 그리고 혼란과 오류를 범하는 가운데에서도 트로츠키주의의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최소한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여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인 북한을 방어하는 용기를 보였다.

[Korea: The Forgotte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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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는 목적을 명확하게 하고, 책읽기목록과 성과물을 미리 계획하라.
2. 의욕 없는 책읽기는, 식욕 없는 식사 만큼 약간의 효용 밖에 없다.
3. 책이 쓰여진 배경을 늘 염두하고, 중요한 논리전개가 있을 경우, 바로 주제를 기록하고 문제의식을 전개하라.
4. 색인과 더 읽어야 할 책읽기목록을 말미에 덧붙여, 독서후기를 작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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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06-16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 책이 쓰여진 배경을 늘 염두하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어떤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가는 저도 어떤 책을 읽든지 늘 고민하는 문제인데 상당히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마법천자문 2006-06-16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역사'는 어떤 학문 분야든지 가장 기초가 되는 것 같아요.

승주나무 2006-06-16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글이 올라왔군.. 나는 요즘 바쁨^^ 잘 지내지!!

sb 2006-06-17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어달 자리를 비웠더니 마음이 불편해요. 책마을은 어찌 운영되고 있는지요. 일전에 네이버에 카페를 만드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정체성 논의는 아직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