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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푹, 빠져버린 책
존 파울즈 <프랑스 중위의 여자>
재미있고 가슴뛰고 도발하는 힘이 있는,
제인 오스틴 풍의 19세기 영국소설 위에
내러티브 내 작가의 개입이라는 현대성이 더해진.
가벼운 일본 소설을 편식하던 요즘의 저에게
아주 오랜만에, 소설의 무게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더불어 내 인생의 무게감도요.
밑줄긋기
16~17쪽. 주인공 찰스가 사라 우드러프를 처음 만나는 장면
그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찰스에게는 그녀가 자기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첫 만남 이후 찰스의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 있는 특징 따위가 아니라, 그의 예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괜찮은 여성이라면 얌전하고 순종적이며 다소곳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찰스는 남의 딸에 불법 침입한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코브가 라임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소유지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어니스티나처럼 곱지는 않았다. 어느 시대, 어떤 취향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는 슬픔이 숲속의 샘물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솟아 나오고 있었다. 거기엔 어떤 꾸밈도, 위선도, 발작도, 가면도 없었다. 더욱이 광기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광기는 오히려 저 텅 빈 바다, 텅 빈 수평선,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에 있었다. 샘 자체는 아주 자연스럽지만, 사막에서 솟아 나오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같았다.
그 후 찰스는 그녀의 시선이 기억날 때마다 하나의 창(槍)을 떠올리곤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대상을 묘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효과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찰스는 자신이 그 창에 찔려 죽어야 할 부정한 적이라고 느꼈다.
25쪽. 찰스의 인간형에 대한 묘사
게으름이야말로 찰스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닐까 싶다.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19세기 초의 사회적 의무감이 개인적 자만심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영국을 새롭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선(善) 자체를 위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 대신 존경받는 인물로 행세하려는 욕망이었다. 찰스는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까다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토머스 매콜리가 바로 등 위에 있는데, 어느 누가 역사를 쓸 수 있겠는가? 눈부신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영국 문학사를 은하수처럼 빛내고 있는데, 어느 누가 시나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찰스 라이엘과 다윈이 버젓리 살아 있는데, 어느 누가 독창적인 과학자라고 나설 수 있겠는가?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이 모든 가용 공간을 양분해 가지고 있는데, 어느 누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앞으로 여러분은 찰스가 좀 더 놓은 곳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지성을 가진 게으름뱅이는 자신의 지성을 상대로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늘 그러는 법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바이런적 배출구, 즉 천재와 방탕한 기질은 전혀 없이, 다만 바이런적 권태만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