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행복 - 2016년 17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조해진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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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단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한 여고생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죽음 뒤에 남겨진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누가 그를 죽였을까-라는 미스터리 기법이 살짝 들어가 있지만,

결국에는 남은 사람들이 받은 상처를 돌보고 찬찬히 따라간다.

희생자의 동생인 다언이, 용의자 중 한 명인 한만우의 집을 찾아가

계란 프라이를 얻어먹으며 섞여드는 장면은 삶이 별 거 아니구나-라는 해방감을 준다.

권여선 소설의 탁월함은 문장의 생생함에 있다.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고 느끼는, 한국어 문장의 탄력감 있는 묘사들이 쾌감을 선사한다.


이효석문학상 2016 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다른 작가 단편들과 묶여서 책으로 나왔다.

 

 

언니라는 말과 옛날이라는 말이 나를 슬프게 했지만 가장 슬픈 건 다언의 옅은 미소였다. 다언은 이렇게 웃는 아이가 아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입을 활짝 벌리고 맑은 고음을 내며 언덕길을 내려가는 자전거의 종처럼 당당당당 웃던 아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120p

나는 떠돌이처럼 외로웠으나 오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부에만 열중하는 포즈를 취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공부에만 열중하는 포즈를 취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실제로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해 겨울 혼자 등하교하던 서울 거리의 추위는 내가 겪어본 것 중에 가장 혹독했다. 나는 빨리 새 학년에 올라가고 싶었다. 틀이 잡혀 굳어지기 전의 말랑하고 유동적인 관계의 반죽 속에 뒤섞여 나만의 친교를 차근차근 맺어가고 싶었다.
121p

한때 내 시에 열광했던 다언이 아직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나는 시를 그만두었다. 이제껏 내게 시를 쓰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은 내가 계속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중략) 나는 자문했다. 나 또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조이스에 빠져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번 씨>라는 시를 쓰던 그 시절로.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인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135p

"우리는 지금 막요, 계란 부쳐 먹으려던 참인데."
"계란말이요?"
"아니, 계란 프라이요." 여동생이 거실 쪽을 향해, 오빠 2개 먹을 거지, 하자 응,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하나는 반숙에 소금 뿌리고요, 하나는 완숙에 케첩 뿌려요. 우리는 맨날 그렇게 먹어요."
나는 침을 삼켰다.
"나도 먹어도 돼요?"
"진짜요? 몇 개요?"
"나도 2개 먹을래요."
여동생이 씩 웃더니 몸을 돌려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불을 켰다. 몸을 돌려 냉장고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그럼 먹는 것도 우리랑 똑같이 먹을 거예요?"
"네, 똑같이요."
"오케이, 그럼 셋 다 똑같이!"
171p

그럼 언니, 다언은 장난스런 미소를 짓더니, 신은 안 믿어도 시는요? 하고 물었다. 시는 믿죠?
시는 믿지.
나도 미소를 지었다.
2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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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양품으로 시작하는 미니멀 라이프 - 적은 물건으로 깔끔하게 산다
야마구치 세이코 지음, 최고은 옮김 / 터닝포인트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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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브랜드 무인양품(무지)를 좋아한다.
심플한 디자인. 간결한 컬러. 유닛과 조합.
언젠가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홀가분해지면 집을 그런 느낌으로 꾸미고 싶다는 생각도.
일드 '빵과 고양이와 스프의 나날' 여주인공이 사는 집처럼.
<무인양품으로 시작하는 미니멀 라이프>는 그런 기대감으로 봤는데, 사실 좀 아쉬웠다.
요즘 유행하는 버리고 살기, 적은 가구와 물품으로 심플하게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집을 무인양품으로 채웠을 뿐. 무인양품의 가구나 소품의 디테일한 부분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일본에 가서 무지 매장 한바퀴 둘러보는 편이 더 즐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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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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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는 늘 읽을 만하다. 여행기도 그러하고.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제목을 보고 가졌던 기대감과 달리

올 여름에 나온 이 여행기는 세계 전역을 체류하거나 여행한 것을 옴니버스 식으로 묶은 것이서서,

집중도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책의 타이틀인 라오스나, 보스턴, 그리스에 대한 글들은 너무 느슨하게 느껴졌다.

'타임머신이 있다면-뉴욕의 재즈클럽', '하얀 길과 붉은 와인-토스카나', '소세키에서 구마몬까지-구마모토' 편이

가장 읽을 만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예전 여행기 <먼 북소리>, <우천염천>의 열띤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이번 여행기는 좀 아쉬웠다.

 

 

옛날 브롤리오 성의 주인이었던 베티노 리카솔리 남작은 이탈리아왕국의 총리까지 지낸 역사적 인물인데, 와인 양조에도 상당히 진지하게 열정을 불태워, 1872년 "앞으로 키안티 지방의 와인은 모두 똑같은 배합으로 만든다"라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그의 용단 덕분에 키안티 와인이 오늘날 같은 명성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산조베제 70퍼센트, 카나이올로 20퍼센트, 마지막으로 화이트와인의 원료 말바지아 탤 키안티가 10퍼센트, 이것이 바로 바로네(남작)가 정한 비율이다. 그로 인해 산조베제 특유의 강한 탄닌이 적절하게 누그러지고 프루티한 맛이 더해져 목 넘김이 부드러워졌다.
212p

부인이 남편의 그런 열정적인, 때로는 희미한 광기마저 느껴질 법한 토피어리 제작에 대해 오랜 세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장사할 군옥수수를 만드느라 바빠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투에서는 은근히 `좋아서 열심히 하는 거고 딱히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니 괜찮지 않은가`란 기색이 전해졌다. 테오와 고흐의 관계 같은 헌신과 숭배의 자세까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비판적인 뉘앙스 역시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실제로도 피해를 주기는커녕 토피어리가 늘어선 광경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차를 세우고, 내친김에 가게에 들러 옥수수를 사먹는 관광객이 한둘이 아니니 영업 면에서도 토피어리 무리는 아주 유익하다고 단언해도 좋은 것 같다. 이것을 `예술`이라고 부르기는 아마 어렵겠지만, 적어도 `성취`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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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자리 2016-10-11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먼 북소리>, <우천염천>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ㅎ

베쯔 2016-10-11 11:54   좋아요 1 | URL
네. 여행기의 정수라고 생각해요. 떠나고 싶어 막 두근두근하고요^^
 
당신의 별자리 당신의 별자리 시리즈
린다 굿맨 지음,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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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별자리>는 왜 양자리가 순수하고 자기본위인지, 쌍둥이자리는 호기심이 많고 사자자리는 위신에 신경쓰며, 황소자리는 변화를 싫어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다.
중국의 사주명리학, 주역만큼이나 서양의  점성술astrology은 역사가 깊다. 그 둘 다 나는 무척 흥미롭다. 한때 타로카드를 취미로 리딩한 적이 있는데 타로도 여기에 뿌리를 둔다.

미국의 astrologist 린다 굿맨의 이 책은 784쪽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는데, 각 별자리 별로 양자리를 알아보는 방법/양자리 남성/양자리 여성/양자리 어린이/양자리 사장/양자리 직원 이런 구성이다. 
시각이 따뜻하고 사례 위주로 되어 있어서 별자리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읽힌다. 심리학적인 책으로 봐도 무방할 듯.
주위 사람 누군가 잘 이해되지 않을 때 재미삼아 이 책을 넘겨보면 약간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나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 사람도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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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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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구암이라는 조그만 항구 마을이 있었다.

모자원에서 자란 희수라는 사내가 있었다.

구암의 실질적 주인 손영감의 관광호텔 지배인이자 행동대장 건달로 먹고 산다.

596쪽에 달하는 장편소설 <뜨거운 피>는 부산 촌동네 건달들에 대한 이야기다.

느와르 장르인데, 촌발 날린다. '뜨거움' 따위는 옛날의 코드지만 그래도 건달은 뜨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 '희수의 삶에 관심이 가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

희수라는 인물이 자기 욕심도 없고 주변이나 챙기고, 나쁜 건달이고 폭력적이지만 진짜로 사람이 나쁘지는 않아서일까.

그의 인생 한 단면을 들여다본 것 같은 몇 시간이었다.

이야기의 재미는 덤이다.

 

김언수 작가는 이 소설을 위해 건달을 따로 취재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구암이라는 동네는 없다고 한다.

영화 '신세계'나 '차이나타운'이 떠오르는데, 바로 영화화돼도 될 것 같은 이야기다.

 

 

인터넷서점에서 일찍 주문했더니 사인본이 왔다.

그에 비하면 구암은 토박이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게 왜 자랑거리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암의 건달들에겐 자신이 부산 토박이라는 게 굉장한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 바다에서 태어나서 빈둥거렸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이 바다에서 태어나서 빈둥거렸다는 것 말이다. 온천장, 동래, 해운대 같은 곳의 토박이 건달들이 뜨내기들에게 자기 구역을 다 빼앗겼지만 구암만큼은 여전히 뿌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그네들의 자랑이었다. 사실 구암 바다가 지금까지 토박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온천장이나 해운대처럼 화려한 동네와는 달리 너무나 초라해서 애써 먹어봐야 먹잘 것도 없는 동네라는 이유 단 하나뿐이었다.
68p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달자의 머리카락이 허옜다. 그래도 믿을 만한 놈은 달자밖에 없다고 손영감은 말했다. 슬프게도 구암 바다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늙었다. 쓸 만한 칼잡이도, 쓸 만한 건달도, 쓸 만한 밀수업자나 중개업자도 모두가 늙었다.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고 경찰의 협박이나 다른 지역 건달들의 유혹 때문에 배신을 한 적도 없었다. 정작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늙었다는 것 그 자체였다.
늙은 창녀처럼 늙은 건달도 갈 곳이 없다. 건달이 늙으면 겁이 많아지고 겁이 많아지면 일을 가리기 시작한다. 건달이 일을 가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똥파리들이 달라붙는다. 똥파리들이 소똥 위에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난 파리들이 소똥을 먹다가 급기야 소를 잡아먹는다, 우스갯소리 같겠지만 정말 그렇다. 이 바닥은 수고롭고 더러운 일을 하는 놈들이 주인이다. 그리고 수고롭고 더러운 일을 하는 놈들은 대체로 잃을 게 없는 놈들이다. 그놈들은 한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씩 치고 들어온다. 그런 놈들이 늙은 건달 따위를 겁내겠는가.
223p

희수가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고 탁자 위에 있는 소주잔을 비웠다. 이 구암 바다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하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 마련하면 이야기 쪼매 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희수가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만난 싸우고 지지고 볶아서 이 바다가 좋다."
"취향 참 특이합니다."
"나는 이 구암 바다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계속 이런 촌스러운 모양새면 좋겠다."
414p

"영감님이야 돈 많으니까 이 바다가 좋지예. 다른 사람들은 빨아묵을 것도 없는 이 바다, 다들 미워합니다. 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붙어 있는 거라니까요."
희수 말에 손영감이 빙긋 웃었다.
"그건 니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이가 들어봐라. 만날 지지고 볶아도 미운 마누라가 황금보다 낫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바다를 못 떠나는 기라."
"에이, 설마. 미운 마누라 마누라보단 황금이 낫지예."
"미운 마누라가 낫다."
"확실합니까?"
"확실하다."
4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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