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프
살만 루슈디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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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의 에세이 <나이프>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책이다. 저자 살만 루슈디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는 만큼 알고 있었다. 1981년 장편소설 <한밤의 아이들>로 부커상을 수상했고, 1988년 장편소설 <악마의 시> 또한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으나 이슬람교를 모독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가 작가를 처단하라는 내용의 종교 칙령(파트와)을 내리면서 최근까지 은둔 및 도피 생활을 했다. 2022년 8월 12일 미국 뉴욕주 셔터쿼의 야외 강연장에서 무슬림 극단주의자 청년에게 피습을 당해 오른쪽 눈을 실명했으나 목숨은 건졌다. 그런 저자가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일종의 회고록으로서 피습 이전과 이후의 기록을 시간 순서대로 보여준다. 파트와 이후 1995년까지 영국 정부의 보호 하에 도피 생활을 했던 저자는 2000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2022년에는 파트와가 내려진 지 33년이 지난 데다가 저자의 나이가 벌써 일흔을 넘겨서 지병으로 사망할 확률도 높았다. 돌이켜 보면 예지몽 비슷한 꿈을 사건 직전에 꾼 것도 같지만, 오랫동안 살해 협박에 시달리며 온갖 악몽을 꾸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건 당시 범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 오는 모습을 보면서 한 생각도 "그래, 너로구나, 이제 왔네."였을 만큼 저자는 많이 시달리고 지친 상태였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학적으로 다 그랬다.


그러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실제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저자는 파트와를 당하고 온갖 협박을 당하고 심지어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 당하는 일을 겪으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크게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사건 당시 칼을 든 남자가 사람을 찌르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망 가지 않고 자신을 구하러 와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차오른다. 오랫동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살았고, 실제로 피습을 당해 죽을 뻔했으나 결국 죽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 생사는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병문안을 와주었던 친구나 동료들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겸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파트와 이후 자신의 창작 활동이 전부 정치적, 종교적으로 해석되는 것에 대한 반감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피습 이후로는 그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피습까지 일어난 이상 더는 자신의 삶과 파트와를 분리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그것에 관해 직접적인 글을 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보면 피습 사건은 저자가 33년 넘게 겪은 고통이 실체화된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저자는 전 생애에 걸쳐 종교와 정치, 문학의 상호작용을 체험(또는 입증)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저자는 범인이 유튜브 영상 몇 개를 보고 자신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며, 무지와 혐오 그리고 이를 무분별하게 확산시키는 온라인 매체가 21세기의 새로운 '칼'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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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일기
최민석 지음 / 해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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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다. <베를린 일기>, <40일간의 남미 일주>, <기차와 생맥주> 등 최민석 작가가 쓴 여행 에세이는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마드리드 일기>는 출간된 지도 모르고 있다가 구독하는 전자책 서비스에서 발견하고 뒤늦게 읽었다. 나는 전자책으로 읽었지만, 멋진 사진이 많으니 종이책으로 읽는 편을 권한다. <베를린 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느낄 부분이 많으므로 <베를린 일기>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


이 책은 저자가 토지문화재단과 스페인 문화체육부가 협정한 '교환 작가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2022년 8월 31일부터 두 달간 마드리드에 머무르고 그 후 보름을 자비로 여행한 기록을 담고 있다. '여행' 에세이로 분류된 책이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여행보다 스페인어 공부를 더 많이 한다. 뜻밖의 일은 아닌 게, 최민석 작가의 팬이라면 다 알겠지만, 저자의 취미는 여행과 외국어다. 다른 사람들은 취업이나 진학을 목표로 외국어를 공부할 때 저자는 그냥 좋아서 공부할 만큼, 외국어 공부 자체를 좋아한다. (저자의 외국어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의 전작 <기차와 생맥주>에 자세히 나온다.)


이미 한국에서 오랫동안 스페인어 공부를 해왔던 저자는 이번 마드리드 여행을 기회로 자신의 스페인어 실력을 향상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어학원에 등록해 레벨 테스트를 치르고, 매일 성실하게 수업을 받고 과제를 해낸다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틈틈이 원고도 쓰고 마감도 하고, 어학원 동기들과 현지 식당과 술집, 카페도 다닌다. 아이리시 펍에서 축구도 보고, 스페인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도 만나러 간다. 책 후반부에 저자는 나이가 들어서 더는 예전처럼 여행을 못하겠다고 썼는데 젊은 사람도, 한국에서도, 이렇게 살면 번아웃 온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시간도 좀 가지셨으면.)


그래도 덕분에 그동안 어디에서도 못 읽은 스페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스페인어 가능자가 아니었다면, 스페인 사람들은 어떻게 중고 거래를 하는지, 스페인 사람들은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 받을 때 (한국인과 다른) 어떤 특징이 있는지 같은 이야기를 내가 어디서 읽을 수 있었을까. 몇십 년 전에 스페인으로 이민 가서 일가를 이룬 교포 어르신들이 당신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저자가 소설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최민석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여행 에세이가 있는데 더는 못 읽을까봐 두렵다. 바르셀로나 일기, 파리 일기, 기대하면 안 될까요... (물론 소설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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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 교토라서 특별한 바람 같은 이야기들
한수희 지음 / 마루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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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틀넥프레스 김보희 대표의 책 <사업일기>를 읽고 한수희 작가님을 알게 되었다. 어떤 글을 쓰시는 분일까 궁금했는데 마침 구독하는 전자책 서비스에 한수희 작가님의 책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이 있기에 읽어 보았다. 읽어보니 이 책은 교토 여행 책이지만 교토 여행만 다룬 책은 아니다. 교토 여행을 매개로 저자의 인생과 여행 철학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하다.


저자는 30대가 된 이후로 해마다 교토에 간다. 20대 시절부터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았는데 교토만큼 거리가 적당하고 혼자 여행하기 편하고 실망할 구석이 적은 도시를 찾지 못했다. 교토에 가서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마음이 끌리는 거리를 산책하면서 먹고 싶은 걸 먹고 쉬고 싶은 만큼 쉬다가 돌아온다.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친구로, 동료로 정신없이 살아온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시간을 스스로 선물한다. 


이 책의 초반부는 저자를 따라서 교토의 이곳저곳을 유유자적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저렴하고 침구가 깨끗한 숙소에서 단출한 차림의 조식을 먹고, 숙소에서 빌린 자전거를 타고 마음 가는 대로 달리다가, 교토에서만 나는 제철 채소로 만들었다는 정식으로 배를 채우고, 옛날 느낌 물씬 나는 카페에서 스페셜 블렌드 커피를 마시고, 또 다시 정처 없이 걷다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인 듯한 목욕탕에서 몸과 마음에 쌓인 피로를 푸는 하루.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하루를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저 여유롭고 한가하게만 보이는 여행의 장면 속에 이따금 등장하는 저자의 인생 이야기도 흥미롭다. 교토에서 가까운 오사카에서 청춘의 한때를 보낸 친구 이야기, 사랑하지만 좋아할 수는 없었던 외할머니와 엄마 이야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카페를 차리면서 겪은 몸 고생 마음 고생 등등. 원래 살던 곳에서라면 좀처럼 떠올릴 일이 없었을 과거의 편린들을 새삼 꺼내보게 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목적이자 필요가 아닐까. 아, 여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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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의 별 4
와야마 야마 지음, 현승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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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사이에 날씨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었다. 아침에 집에서 걸치고 나온 겉옷이 점심에는 거추장스럽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느껴졌던 햇볕이 점점 무덥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본격적인 여름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고, 더위에 유난히 약한 나는 미리 걱정부터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벌써 출간된 지 두 달이 된 와야마 야마의 <여학교의 별> 4권을 읽었다. 마침 이번 4권은 여름방학 에피소드가 대부분이다. 


이 만화에 나오는 학생들처럼 나도 여고를 다녔다. 여고 시절의 여름방학을 떠올리면 방학에도 매일 학교에 나가서 보충학습을 했던 기억뿐이다. 공학에 다녔어도 로맨스 만화에 나오는 여름방학 같은 여름방학은 못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여고에 다녔으니 가능성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 만화에 그려진 여름방학 풍경에 더욱 공감이 되었다. 여고인 데다가 방학이기도 하니까 편한 차림으로 학교에 오는 학생과 방학이라도 학교에 올 때는 교복을 입고 오라고 혼내는 선생님의 모습이 특히 그랬다 ^^


<여학교의 별>의 백미인 선생님들의 일상 이야기도 (역시나) 재미있었다. 방학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선생님들. 학생일 때는 몰랐는데 졸업하고 나서 보니 너무 힘드시겠다. 한밤중에 벽장 정리를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호시 선생님과 처음 보는 어린이를 학교에 데려온 고바야시 선생님도 재미있었고, 졸업앨범 촬영 에피소드도 코믹했다. 이 정도로 개성 강한 선생님들의 사진이 실린 졸업앨범이라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될 수도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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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도라에몽 : 너에게 푹 빠지는 연애 편 4 특별한 도라에몽
후지코 F. 후지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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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도라에몽>은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 <도라에몽> 시리즈 중에서 각각의 주제를 대표하는 에피소드들을 선별해 엮은 일종의 스페셜 에디션이다. <특별한 도라에몽 : 너에게 푹 빠지는 연애 편>은 제목 그대로 도라에몽의 다양한 에피소드들 중에서 연애에 관한 에피소드만 모아 놓은 책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초등학생인 만큼 진지하게 연애를 하는 관계는 당연히 없다. 이슬이를 짝사랑하는 진구가 혼자서 애를 태우거나 망상 때문에 사고를 치는 에피소드가 대부분이고, 부모님의 연애 시절 이야기, 퉁퉁이의 짝사랑, 도라에몽의 짝사랑 등 주변 캐릭터들의 짝사랑 이야기가 이어진다.


진구가 퉁순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무리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너무 차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반해 퉁순이의 오빠인 퉁퉁이는 이슬이만큼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진구에게 무시당하는 퉁순이를 누구보다 열심히 감싸고 아껴줘서 참 좋아 보인다. 진구는 좋은 아이, 퉁퉁이는 나쁜 아이라는 식의 구도가 적어도 퉁순이가 나오는 에피소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애초에 퉁순이는 진구를 재미있는 동네 오빠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진구 혼자 설레발치는 느낌. 퉁순이를 주인공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추녀 캐릭터로 마무리하지 않고, 만화가가 꿈인 퉁순이가 자신처럼 만화를 좋아하는 남자애를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에피소드가 있는 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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