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돌파 그렌라간 1~10 박스 세트 - 전10권 - 완결
모리 코타로 지음, 나카시마 카즈키 감수, GAINAX 원작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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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은 2007년에 공개되어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전설의 만화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대작을 만든 가이낙스가 11년의 공백을 깨고 공개한 만화였다고. 이 만화의 첫 정식 한국어판 코믹스가 마침내 대원씨아이에서 출시되었다. 그것도 무려 단행본 총 10권을 특별 제작 박스에 소장할 수 있는 박스판으로. ​ ​ ​ ​ 






노란색과 검정색의 대비가 분명하고 로봇 만화답게 메카닉이 연상되는 이미지가 디자인된 박스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단행본 표지 일러스트와도 잘 어울린다. 총 10권인 단행본은 표지 일러스트가 세로가 아닌 가로로 인쇄되어 있어서 신선하고 특별한 느낌을 준다. 각 인물의 이미지를 크게 볼 수 있는 점도 좋다. 가이낙스 애니메이션 하면 폰트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만화의 표지도 폰트를 잘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 ​ ​ ​ ​ 






이 만화는 지진을 피해 지하 세계에 살면서 땅을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7살 때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그후로 계속 지하 세계에서 살면서 굴착꾼으로 일해온 시몬은 형제처럼 지내는 '그렌단'의 리더 카미나로부터 지상에는 벽도 천장도 없으니 얼른 나가서 모험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의 말을 따를지 말지 고민하며 언제나처럼 땅을 파던 시몬은 땅에 묻혀 있는 거대한 금속 얼굴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카미나에게 알려주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 이제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천장이 무너지고 금속 얼굴의 전체 실루엣이 드러난다. ​ 






지진이 두려워서 땅속에 살고 있던 주인공이 공포와 불안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장 만화로서의 매력이 큰 작품 같다. 주역 메카닉인 그렌라간의 비주얼도 멋있고, 함께 등장한 여자 캐릭터를 시작으로 줄줄이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도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작화도 그렇고 설정이나 내용도 90년대-2000년대 만화 느낌이 낭낭해서 그 때 그 시절 만화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 반가운 선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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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fox486 2025-07-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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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 마스다 미리의 좌충우돌 여행기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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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로 읽은 책을 오랜만에 한국어판으로 다시 읽었다. 한국에는 2021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원서는 2011년에 출간되었다. 그만큼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서 그런지, 아마도 지금의 마스다 미리 작가라면 하지 않았을 것 같은 행동, 쓰지 않았을 것 같은 문장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불쾌했다거나 실망했다는 건 전혀 아니고, 그동안 여자 혼자 여행한 이야기로 에세이를 몇 권이나 낸 저자가 삼십 대 시절에는 혼자서 국내 여행조차 해본 적이 별로 없고, 혼자 여행하는 여자를 남들이 이상하게 볼 거라는 편견 때문에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거나 하고 싶은 체험을 포기한 적도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되고 용기를 주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른세 살 끝 무렵부터 서른일곱 살까지 일본의 47도도부현을 한 달에 한 곳씩 여행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일본에는 도도부현이 47개나 있는데 전부 안 가보면 아쉽잖아?'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한 여행이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여행 초반에는 지역 명물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먹느라 고생했고, 혼자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때라서 대화 상대가 없는 것이 외로웠다. 가장 놀란 건 비용이다. 여행에 쓴 돈을 모두 계산해 보니 무려 220만 엔. 원화로 약 2천만 원이 넘는다. 원흉(?)은 예상대로 교통비다. 여행지마다 '이번 여행에서 쓴 돈'이 정리되어 있는데 이 항목을 보면 교통비 비중이 가장 높다. (일본) 국내 항공편 비용이 몇십만 원 이러니 한국 갔다오는 게 차라리 싸다는 말이 나오지...


그렇게 비싼 교통비를 치르면서 도착한 여행지에서 하는 일이 산책하고 밥 먹는 게 고작이라서 심심하다,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평소에 하지 않는 새로운 일, 특별한 일을 하는 여행보다 평소에 하는 일을 새로운 장소에서 하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 이를테면 낯선 도시의 서점을 구경한다든지 강변을 걷는다든지. 그러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 서점에 가거나 강변을 걸을 때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생각해 보니 이 책의 원서를 구입한 게 언젠가의 도쿄 여행에서였는데, 책만 봐도 그 때의 날씨와 서점의 풍경, 분위기 등이 떠오른다. 원서 사러 일본 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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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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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볼턴. 정세랑 작가의 추천으로 알게 된 작가로 기억한다. 국내에 출간된 샤론 볼턴의 책은 총 3권인데, 그중에 <희생양의 섬>을 먼저 읽었고 이번에 <뱀이 깨어나는 마을>을 읽었다. <희생양의 섬>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뱀이 깨어나는 마을>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형사나 탐정이 아니라 수의사라서 동물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이야기 전개도 추리 소설이나 미스터리 소설의 전형적인 전개로부터 약간 벗어나 있어서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영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수의사로 일하는 클래라 베닝은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웃에 사는 여성으로, 아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딸의 침대 위에 독사로 보이는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는 제보였다. 서둘러 달려간 클래라는 무사히 뱀을 구출하고 아기를 구하는데, 그날 하루 동안 뱀과 관련된 비슷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다. 날씨가 더워져서 뱀이 많이 출몰한 것 같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지만, 수의사이기 이전에 파충류 전공자이기도 한 클래라는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보기 힘든 종류의 뱀이 나온 걸 보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대량의 뱀을 푼 것 같다고 의심한다. 


이 소설은 여러 장르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먼저 이 소설은 평범한 수의사가 뱀 때문에 피해를 입은 환자의 수가 갑자기 늘어난 것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 탐정이 되어 범인을 찾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코지 미스터리'로 분류될 만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저택이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고딕 미스터리'로 분류될 수 있다. 얼굴의 화상 때문에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어 온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장 서사의 요소도 있고,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두 명의 남성과 '썸'을 탄다는 점에서 로맨스 서사의 요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에서 종교적인 면이 흥미로웠다. 뱀은 구약 성경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보통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떤 교파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영적인 깨달음, 혹은 지식을 상징한다고 보고 뱀을 선악과 나무의 수호자, 지식의 수호자, 이해와 계몽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426쪽 참조). 뱀을 사악하게 여기는 건 유대교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구 문명뿐이고, 다른 문화권, 이를테면 힌두, 그리스, 노르웨이,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서는 뱀이 지혜와 불멸, 생명과 다산, 지식을 나타낸다는 내용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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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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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채식주의자>, <몽고 반점>, <나무 불꽃>으로 연결되는 연작이다. <채식주의자>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 채식주의자가 된 아내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몽고 반점>은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소재로 예술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형부, <나무 불꽃>은 남편과 불륜을 벌인 여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언뜻 보기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여자 영혜가 모든 일의 발단이자 원흉으로 보인다. 육식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사람들 몸에서 나는 고기 냄새, 피 냄새에도 진저리를 치는 영혜가 지나치게 별나고 예민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영혜는 모든 일의 발단이 아니라 결과이며, 오히려 영혜 주변의 피해자처럼 보이는 인간들이야말로 발단이지 싶다. 다 큰 딸을 자기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말리지 않는 어머니, 아내를 살림하고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도구로만 여기는 남편, 처제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형부, 그걸 알면서도 눈 감는 언니까지. 영혜 주변의 인간들은 죄다 착하고 말 잘 듣는 영혜를 잡아먹으려 드는 포식자들이다.

남들이 살점을 달라 하면 살점을 내주고, 뜯어 먹으려 하면 몸뚱이마저 내주던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자기는 도무지 그들처럼 남의 살점을 뜯어먹을 수 없음을, 초식동물에서 육식동물로는 도저히 변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차라리 풀꽃이 될 수밖에. 형부가 자기 몸에 물감으로 꽃을 그려주었을 때 비로소 제 몸 같고 악몽 없이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는 영혜의 말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소설은 주로 남편, 아버지, 형부라는 남성들을 포식자로 그린다는 점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의 불평등을 그린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형부와 처제는 표면상 다른 관계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주체가 각각 남자와 여자인 이상 권력의 불평등이 발생하고 계급이 나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권력은 주로 남성에게 주어지고 계급 또한 남성이 우위다. 영혜는 아내일 때나 딸일 때나 처제일 때나 앞에 있는 남자에게 성적 대상,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착취되었다.

그걸 자각한 영혜가 똑같이 포식자가 되거나 알면서도 당하는 피식자로 남지 않고 그 모든 걸 초월한 꽃이나 풀이 되길 택했다는 점, 그걸 처음으로 알아준 사람이 같은 피식자였던 언니라는 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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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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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이라면 나름 많이 읽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다 얼마 전 인터넷 서점에서 폴 윤의 소설 <벌집과 꿀>의 소개 글을 읽고 나의 오만과 편견을 깨달았다. 오만은 그저 디아스포라 문제에 관심이 약간 있어서 자주 거론되는 책 몇 권을 읽은 걸 가지고 많이 읽었다고 과장해서 생각한 것이고, 편견은 디아스포라의 범위를 너무 좁게 생각한 것이다. 디아스포라가 원래 기독교에서 비롯된 개념이고, 내가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처음 배운 게 서경식 선생의 저서 <디아스포라 기행>이기도 해서, 나는 그동안 디아스포라를 유대인이나 재일조선인 문제에 한정해 생각했다. 그런데 <벌집과 꿀>에 따르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자신이 원래 살았던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다시 일궈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 책의 초반에 실린 몇 작품은 내가 그동안 읽은 이민자, 이방인 소설의 결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장물 운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감옥 신세를 지고 이제는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처지에 놓인 남성 '보'의 이야기를 그린 <보선>이 그렇고,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해 서울에 도착했지만 자리를 잡는 데 실패하고 독일 함부르크를 거쳐 현재는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며 근근이 살고 있는 여성 '주연'의 이야기를 그린 <코마로프>, 북한 출신 아버지와 남한 출신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나 평생을 영국에서 살았지만 영국인들에게 늘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그들 또한 영국인보다 그들과 피부색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해리'와 '그레이스'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크로머>가 그렇다. 이 단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특수성보다는 이민자 또는 이민 2세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사회적, 정신적 고충이 두드러지며, 등장 인물의 배경을 다른 나라로 바꿔도 내용이 성립되지 않는 정도는 아니다.


반면 그 외의 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정치적 특수성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진다. 임진왜란 직후의 일본이 배경인 단편 <역참에서>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에는 임진왜란 중에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소년 '유미'가 등장한다. 활쏘기를 잘해서 주군의 마음에 들었으나 조선통신사 사절단을 따라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처지에 놓인 그의 운명은 조선과 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오랜 역사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벌집과 꿀>, <고려인> 역시 한국과 러시아, 그중에서도 연해주의 역사를 알아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고려인>은 고려인 3세인 '막심'이 사할린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 때 사할린으로 끌려간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마지막에 실린 <달의 골짜기>는 일견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작품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휴전선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 '동수'라는 남자가 몇 년을 은둔하며 지내다 '은혜'와 '운식'이라는 두 아이와 함께 살게 되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다. 전쟁 때문에 집을 떠났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가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고 그가 살게 된 집은 그가 그리워한 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집을 떠나 있는 상태인 것과 다름이 없다. 은혜와 운식 또한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집을 떠나 한 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한 명은 돌아오지만 그때의 집은 예전의 집과 다르다는 점에서 이방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방인의 운명이란 뭘까. 이 책에 나오는 '떠난 사람들' 중에는 떠나온 곳을 그리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보선>의 보는 오래 전에 떠나온 한국은 물론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뉴욕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코마로프>의 주연은 북에서 나올 때 헤어진 아들은 그리워 하지만 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고려인>의 막심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예정이 없음은 막심이 아버지와 헤어진 후 막심을 스칠 뻔하며 달려 지나가는 '시커먼 차 한 대'와 요란한 경보기 소리가 암시한다. 결국 이들은 원해서 떠났든 원치 않게 떠났든 간에 한 번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없다. <달의 골짜기>의 동수가 아프게 확인한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고 장소 자체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예전과 다르게 변해서 돌아가도 돌아간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반면, 어떤 장소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아서 돌아갈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달의 골짜기>에서 은혜가 도시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느끼는 '낯섦'은 그곳이 전과 다르게 변해서 느끼는 생경함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불쾌감에 가깝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거나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고려인>의 막심의 아버지, 바실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거 아니? 그자들이 하는 일이라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세상은 달라지는데, 그리고 언제나 달라질 텐데, 그자들은 언제나 똑같은 거야. 왜 그런지 아니? 고집 센 바보들이니까." (239쪽)


회귀는 퇴보이며 정주(定住)보다 이주를 택하는 삶이 현명하다는 생각은 <역참에서>에서 히로코가 유미에게 하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내가 뭘 봤는지 알아, 유미? 그 해골 입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있었어. 어린 벚나무였어. 신기하지 않니? 우린 이 생을 살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야. 네 생각도 그렇지 않니? 너는 이 생을 살았지만, 내일이면 금방 또 다른 누군가와 살게 될 거잖아. 그런 변화를 두려워해선 안 되는 거야. 그걸 받아들이고 더 강해져야 돼." (96-7쪽) 이런 문장들은 막연한 생각으로 이방인의 삶을 동정했던 과거를 반성하게 한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화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발적으로 떠나기 보다는 비자발적으로(사실은 자발적으로) 체념하고 타협하는 편을 택하며 살아온 삶이 과연 맞는 건지 자문하게 만든다. 물리적으로 떠나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택한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면, 나는 여태 이방인이 되지 못했구나. 떠나야겠다. 아니,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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