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일기 1
자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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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한 교복을 입고 맛없는 급식 먹으며 0교시부터 야자까지 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다. 매일 같이 예쁜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미팅 소개팅하는 여대생이 되고 싶어...라는 생각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현실은 어제 입은 후드 점퍼 또 입고 운동화 신고 집을 나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수업 듣고 치열한 학점 경쟁에 매달리는 나... 그때는 쉴 틈 없이 수업 듣고 과제하고 발표하고 시험 보는 나날이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대학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래도 역시 내 인생의 황금기는 대학 시절이었지 싶다. 





네이버 웹툰에서 평점 9.9를 자랑하는 인기 웹툰을 단행본으로 엮은 만화책 <대학일기>를 읽으며 나의 대학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05학번이고 저자는 13학번인데 대학 생활이 왜 이렇게 비슷할까. 수강신청 성공을 기원하며 새벽 칼바람을 가리고 동네 PC방으로 향하는 모습도, 호기롭게 아침 9시에 시작하는 1교시 수업을 신청해놓고 첫 수업 가는 순간부터 후회하는 모습도(우리 학교는 1교시가 아침 8시였다), 공강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리라 다짐했으나 현실은 동아리방 소파에 누워 쳐자는 모습도 진심 대학 생활 내 모습이어서 웃기고 슬펐다(이게 대한민국 청춘의 현실이라니요). 





나는 이 책을 올해 대학에 입학한 사촌동생에게 선물하고 싶다. 고등학생이 이 만화를 보면 대학 가기 싫어질 것 같고(ㅎㅎㅎ), 대학에 이미 와버린 대학생이 이 만화를 보면 '나만 이러고 사는 게 아니었구나'라고 위로받을 것 같다. 내 대학 생활은 어떤지 돌아보게 되고, 자까 님처럼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기록해보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살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내 지인들한테도 이 책을 추천하면 좋아할 듯. 워낙 인기 있는 웹툰이라서 다들 알려나? <대학일기>라는 제목만 보고 '내가 볼 만화가 아니야'라고 생각해 패스했다면 이참에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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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야외에서 일을 했더니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아직 애도 낳은 적 없는데 허리가 아파서 잠이 깨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ㅠㅠ 그나마 다행인 건 주말에는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아서 야외에서 일해도 별 지장이 없었던 반면, 어제와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해서 야외활동이 힘들다는 것. 이런 날에 집에서 푹 쉴 수 있으니 이 직장의 장점은 그것인가 싶다.






일찍 일어난 김에 그동안 야금야금 사들인 새 책들을 정리해본다. <세계 곳곳의 너무 멋진 여자들>은 제목을 보고 혹해서 구입한 책인데 먼저 읽으신 분들의 리뷰를 봐도 혹할 만한 멋진 책인 듯하다. 새벽에 트위터 타임라인을 쭉 보니 모 게임 기업에서 한국여성민우회 계정을 팔로우한 직원에 대해 사상검증을 했다는 것 같은데... 여성이 여성 자신의 인권도 보호할 수 없는 '민주주의' 사회 뭘까 싶다 진짜.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는 평소 자주 했던 생각이 제목에 딱 하고 박혀 있어서 구입했다. 나는 인권 이슈나 복지 이슈에 관해서는 진보가 확실한데 다른 이슈들에 대해서는 나조차 진보인지 보수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한국 진보가 유럽 진보를 기준으로 보면 우파에 가깝기 때문... 이라고 보기에는 내 가치관도 우파스럽다고 여겨질 때가 많아서뤼... 한 번 찬찬히 읽어봐야지.


<세계의 이면에 눈뜨는 지식들>은 목차를 쭉 봤는데 모르는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아서 구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란 명칭이 잘못된 이유, <강남스타일〉의 숨겨진 비용, 혜성, 소행성, 유성의 차이, 일본에는 왜 그렇게 성인 입양이 많을까, 레즈비언이 이성애자 여성보다 돈을 더 잘 버는 이유... 알 듯 말 듯한데 이 책 읽고 확실하게 알아야지. 




<고문서 반납 여행>은 트위터였는지 어디선지 좋다는 리뷰를 보고 구입했다. 일본의 고문서 수집가가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일본 소설 <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고문서, 중고책, 헌책방 관련 책은 대체로 다 재미있는 것 같다. 요즘 읽고 있는 영국 소설 <희귀본 살인 사건>도 장르는 다르지만 꿀잼임 ㅎㅎ 

 










트위터 화제의 만화 <동인녀 츠즈이 씨> 1,2권을 드디어 득템했다!! 매번 짤방으로만 보다가 드디어 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어 ㅎㅎㅎ 


그러고보니 요새 국내에 소개되는 일본 만화 가운데 동인녀, 오타쿠가 주인공인 만화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공급이 많아서인지 수요가 많아서인지(둘 다겠죠). 가볍게 읽을 만화는 아닌 것 같아서 조만간 시간 날 때 각잡고 읽을 예정.











예약구매했던 <부디 계속해주세요>도 도착했다. 일본 문인들과 한국 문인들이 서로 교류한 내용을 담은 책이라고 하는데, 일본 소설가들이 한국 문학을 어떻게 보는지도 궁금하고, 김중혁, 정세랑 등 관심 있는 한국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기에 선뜻 구입했다. 제목을 보고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연상하는 건 나뿐일까.


우치다 타츠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도 구입했다. 우치다 타츠루의 글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종이 매체가 점점 사멸하고 이미지가 글을 대체하는 이런 시대에 어떤 글이 살아남게 될지 몹시 궁금하다. 저자에게 힌트를 얻고 싶다.








화제의 일본 소설 <달의 영휴>와 <죄의 목소리>도 구입했다. <달의 영휴>는 나오키상 수상작이고 <죄의 목소리>는 서점대상 10대 도서 선정작인데 둘 다 대중성을 보장하는 상이라서 재미는 있을 듯. 쇼와시대 최대의 미제사건인 '구리코 모리나가 사건'을 재구성한 <죄의 목소리> 쪽이 더 궁금하다. (표지도 으스스)























위의 세 책은 모 인터넷 서점 팟캐스트를 듣고 알게 된 책들이다(알라딘은 팟캐스트 안 하나요...). <용서에 대하여>는 저자 강남순의 다른 책 <배움에 관하여>를 읽고 너무 좋아서 구입했다. 철학에 대해 더 많은 공부와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조용한 삶의 정물화>는 저자에 대해서는 물론 책 자체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 팟캐스트에서 강력 추천하기에 구입했다. 글이 참 깔끔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표지만 봐도 단정한 느낌이 든다.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은 전부터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작품인데, 팟캐스트 진행자인 김동영 작가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강추하기에 구입했다. 사실 팟캐스트에서 강추했던 책은 이 책이 아니라 <워터멜론 슈가에서>였는데 이 책 표지가... (개정판 원츄합니다) 일단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을 읽어보고 표지를 감당할 만한 괜찮은 작품을 쓰는 작가다 싶은 확신이 들면 <워터멜론 슈가에서>도 구입해 읽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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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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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문학 내부에 고대 그리스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한 부류의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다. 작년에 읽은 앤 카슨의 소설 <빨강의 자서전>이 헤라클레스와 그가 활로 쏘아 죽인 괴물 게리온의 이야기라면, 최근 출간된 매들린 밀러의 장편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그의 동성 애인 파트로클로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파트로클로스가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고 급기야 한 소년을 실수로 죽이는 바람에 프티아로 쫓겨나면서 시작된다. 졸지에 왕자에서 노예로 신분이 하락한 파트로클로스는 프티아를 다스리는 펠레우스 왕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를 보자마자 그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아킬레우스 역시 파트로클로스를 다정하게 대하지만,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이자 여신인 테티스는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만의 사랑을 키우는 한편, 각각 왕국의 후계자이자 후계자를 보필하는 파트너로서 문무를 열심히 가다듬는다.


신분의 차이, 어머니의 반대, 전쟁 발발, 죽음을 예고하는 신탁...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를 갈라놓을 만한 위기가 여러 번 발생하지만 그때마다 두 사람은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욱 단단하게 맺어진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선 동성애가 불법도 아니고 금기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이 항상 고운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자유롭게 한 방을 쓰고 한 침대를 쓰고 동침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BL 소설에 나올 법한 달콤한 대사와 후끈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19금 소설이 아닌 만큼 수위가 그리 높진 않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로맨틱한 장면도 좋았지만, 나는 이들이 당대의 풍습과 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모습이 특히 좋았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남자든 여자든, 귀족이든 노예든 난잡하게 사귀고 몸을 섞는 궁궐 내에서 서로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 노력한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거나 살상을 함부로 하지도 않고, 억지로 전쟁터에 나가서는 성노예로 잡혀온 여성들을 구해준다.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참다운 '영웅'이란 사실 이런 이들이 아닐까. 이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메시지를 지닌 '고전의 재해석'이라면 얼마든지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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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 - 위기의 남자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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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도 그 유명한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는 여태 읽지 못했다. 1992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출간된 해리 보슈 시리즈는 모두 22권. 국내에 정식 발행된 것만 따져도 15권에 이르니 대체 언제 다 사서 언제 다 읽는단 말인가. 그런데 최근 출간된 해리 보슈 시리즈 제15권 <드롭 : 위기의 남자>를 읽는 순간, 이 시리즈는 무조건 처음부터 정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롭 : 위기의 남자>만 읽어도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지만, 아무래도 주인공 해리 보슈의 캐릭터와 그가 그동안 겪은 일들을 알면 이 재미있는 소설이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재미있어질 것 같은 예감 또는 확신이 팍팍 들었기 때문이다. 


해리 보슈가 형사로 일하는 LA 경찰국에는 드롭(DROP)으로 불리는 퇴직유예제도가 있다. 혼자 몸으로 고등학생인 딸 하나를 키우는 보슈는 퇴직유예신청이 받아들여져 한숨 놓지만, 3년 후 퇴직이 현실로 다가오면 어떻게 살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마련해놓지 못한 상태다(한국의 월급쟁이들 현실과 별다르지 않다). 그런 해리에게 어느 날 아침 두 건의 사건이 할당된다. 하나는 미제로 남은 1989년 살인사건, 다른 하나는 시의원의 아들이 고급 호텔에서 추락사한 사건이다. 경찰청은 우선 시의원의 아들이 추락사한 사건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하지만, 보슈는 왠지 미제 사건 쪽이 끌린다. 


소설은 두 개의 사건이 교차되는 플롯임에도 쉽게 몰입되고 매끄럽게 읽힌다. 이 사건이 풀릴 조짐이 보이면 저 사건이 막히고, 저 사건이 풀릴 조짐이 보이면 이 사건이 막혀서 보슈와 독자의 숨통을 조인다. 보슈의 오랜 숙적인 어빈 어빙이 시의원으로 등장해 보슈를 압박하는 것으로 모자라 보슈의 전 동료인 키즈 라이더, 보슈의 현 동료인 데이비드 추까지 보슈를 긴장시킨다. 아버지를 따라 경찰이 되고자 하는 보슈의 딸 매디, 보슈의 새 연인이 될 조짐이 보이는 해나 스톤의 존재 정도가 이야기에 온기를 더한다. 


멀지 않은 퇴직도 직장 내 압박도 중년 남성을 괴롭히는 '위기'인 건 맞지만, 얼마 전에 읽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제9권 <팬텀>에 비하면 <드롭 : 위기의 남자> 속 상황은 훨씬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해리 홀레는 현재 위기 정도가 아니라 절망의 구렁텅이를 기어 다니고 있는데, 해리 보슈는 소설 내내 우는소리 하면서도 형사 생활과 아버지 노릇과 애인 만들기를 '해낸다'(해리 보슈가 이걸 정말 다 해냈는지, 못 해냈다면 뭘 못 해냈는지는 소설을 직접 읽고 확인하시길 ^^). 나는 <팬텀>을 읽는 내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드롭 : 위기의 남자>를 읽는 동안은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즐겁기까지 했다. 


“나는 다방면에서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을 좋아한다. 이 책의 제목 ‘드롭(The Drop)’은 작품 속 두 개의 사건과 해리 보슈의 상황을 의미한다. 하나는 22년 전 희생자에게서 채취된 ‘피 한 방울(a drop)’이 성폭행범의 DNA와 일치하는 데서 비롯된 미제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한 남자가 샤토마몽트 호텔에서 ‘추락(drop)’하여 사망한 사건으로, 해리 보슈는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니면 단순한 실수에 의한 것인지 수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근무연장프로그램(DROP;Deferred Retirement Option Plan)’을 신청하여 3년의 추가 근무를 허락받은 형사 해리 보슈의 앞날을 염두에 두었다.” _저자 인터뷰에서(www.michaelconnelly.com) 


제목의 의미에 대한 마이클 코넬리의 설명을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제목의 '드롭'이 퇴직유예제도를 뜻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다른 의미가 둘이나 더 있다니. 이래서 다들 마이클 코넬리, 마이클 코넬리 하나보다.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드롭> 다음에 출간된 '해리 보슈 시리즈' 제16권 <The black box>(2012)는 무슨 내용일까. 이 또한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일까. 국내에서도 어서 정식 발행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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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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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에 무지한 사람도 박헌영이나 김원봉, 여운형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고 해방공간을 누볐던 주세죽, 허정숙, 고명숙 - 이 세 여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를 읽기 전에는 나 역시 이들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소설은 표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다. 사진이 찍힌 건 한일 강제병합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20년대. 당시로선 드물게 머리를 짧게 자른 세 여자가 청계천 개울물에 맨발을 담그고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박헌영의 첫 번째 아내 주세죽과 북한의 초대 문화선전상 허정숙, 조선공산당원 고명자. 작가는 한소 수교가 이루어진 이듬해인 1991년에 박헌영과 주세죽의 딸 비비안나 박을 만나 이 사진을 처음 보았고, 사진 속 주인공 중 하나인 허정숙의 생애를 들여다보다가 이 소설을 구상했다. 


1920년 상해. 함흥 출신의 음대생 주세죽과 경성 제일의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이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이들은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청년동맹을 이끌던 박헌영과 임원근, 김단야를 만나고, 얼마 후 주세죽은 박헌영, 허정숙은 임원근과 사랑에 빠져 혼인을 한다. 몇 년 후 귀국한 허정숙은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고 여기에 고명자가 가입한다. '조선공산당의 여성 트로이카'로 불리던 세 여자는 혁명도 사랑도 순탄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 내 공산주의자를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운명 또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휘말려 짓밟히고 찢긴다. 


이 소설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한국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를 촘촘히 따라간다. 고려공산당이니 신흥청년동맹이니 여성동우회니 하는 이름은 낯설고 어렵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학창 시절 한국 근현대사 시간에 배운 신간회나 근우회, 건국준비위원회, 남북협상 등이 세 여자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 내지는 속사정에 대해 알 수 있었다(한국사, 특히 한국 근현대사 공부하시는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나는 가끔 이 남자들하고 혁명을 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 

다들 <자본론> 대신 <사서삼경>을 읽은 모양이야. (1권, 378쪽) 


이 소설은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를 재구성한 '역사 소설'인 동시에,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고찰한 '여성 소설'이기도 하다. 주세죽과 허정숙, 고명자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역할을 해내고자 했다. 하지만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이 직접 총칼을 들고 싸우기보다 집안에서 운동가들을 재우고 먹이는 역할을 담당하길 바랐고, 고명자는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사랑한 남자인 임단야에게 (그의 존재 이유인) 혁명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오직 허정숙만이 남성 동지들이 여자는 밥 짓고 빨래나 하라고 할 때마다 단호히 거부했고, 남편조차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떠났다. 이로 인해 허정숙은 당대의 요부 취급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삶의 태도가 북한 내에서 숙청의 바람이 불 때마다 허정숙을 살렸다. 


외동딸이 공산주의에 빠지고 항일운동을 하는데도 말리기는커녕 한 배를 탄,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도 인상적이었다. 조선인 최초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허헌은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당대의 지식인이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는 독지가였다. 아시아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꿈의 나라와도 같았던 스탈린 이전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상도 놀라웠다. 1930년대에 이미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보육원에서 책임지고 키워주고, 남자든 여자든 평등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니. 이런 사회를 목격하고 체험한 세 여자가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을까. 이런 사회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던 조선의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또 비참했을까.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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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26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읽는다고 해 놓고 못 읽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꼭 읽어봐야겠슴다.ㅠ

키치 2018-03-26 18:22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겨우 읽었는데 넘 재밌더라고요 ㅎㅎ
밤잠을 잊고 후다닥 읽었습니다. stella.K님께도 그런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