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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키 작은 아이와 키 큰 아이가 바라보는 교실의 풍경이 전혀 다른 것처럼, 날씬한 사람과 뚱뚱한 사람이 경험하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의 저자 록산 게이에 따르면 그렇다. 저자의 키는 190센티미터, 몸무게는 가장 살이 쪘을 때 261킬로그램이었고 지금은 64킬로그램 정도가 줄었다. 저자가 어릴 때부터 뚱뚱했던 건 아니다. 어린 시절 저자는 무척 날씬했고 몸놀림도 날렵했다. 저자가 뚱뚱해진 건 '그 사건'이 일어난 후다. 저자는 건축기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의 장녀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학교에선 우등생 아니면 모범생 소리를 듣는 장래 유망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다. 좋은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잘 생기고 똑똑한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가 하라는 건 뭐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던 저자에게 그 아이가 말했다. 숲으로 와. 옷 벗고 누워. 그렇게 저자는 그 아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것도 그 아이의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들은 저자를 걸레라고 불렀다. 저자는 자신이 걸레라고 생각했다. 더럽혀져도 싸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듯 기숙학교로 진학했다. 부모님의 감시를 피해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또 먹었다. 성장기라는 핑계로 먹고 학업 스트레스라는 핑계로 먹었다. 하지만 사실은 몸을 찌우고 키워서 남자들이 함부로 자신을 건드릴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몸집이 커지고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줄어들면 남자들의 폭력은 물론 시선 강간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거라고 믿었다. 몸을 성(城)처럼 키워서 그 안에 숨어 있으면 평생 안전하리라고 생각했다.
'여성답지 않은' 큰 몸, 뚱뚱한 몸은 저자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또 다른 차별의 원인이 되었다. 가족은 저자에게 살 빼라,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등록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취업을 할 때도, 강단에 설 때도, 작가로서 북 토크를 하고 독자들 앞에 설 때도 저자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험한 말을 듣거나 차별을 당했다. 자기혐오 또한 상당했다. 누가 나에게 뚱뚱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저자 자신이 스스로를 뚱뚱하다고 비난하고, 뚱뚱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했다. 예쁜 옷, 즐거운 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등등. 뚱뚱한 사람은 뭘 하든 살부터 빼라는 말을 듣는다. 뚱뚱한 사람은 아무리 예쁘고 똑똑하고 성격이 좋아도 뚱뚱한 사람일 뿐이다. (뚱뚱한 사람에게 "살 빼면 예쁠 거다."라고 말하는 건 "지금은 안 예쁘다."라고 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에 깊이 공감하며 읽은 건, 나 역시 저자처럼 나 자신을 뚱뚱하다고 규정하고 여러 가지를 포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건강검진에서 비만 또는 과체중 진단을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몸무게가 48킬로그램이 넘는 여자는 뚱뚱하다는 말을 듣는다. 여자 옷은 대부분 44 아니면 55사이즈만 나와서 66사이즈 이상은 옷 사는 것조차 힘들다. 미니스커트, 크롭 티 이런 건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내 키는 170센티미터 이상이기 때문에 아주 조금 굽 높은 신발을 신어도 '남자 기 죽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애초에 발 사이즈가 250밀리미터가 넘는 여자는 발에 맞는 신발을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인터넷으로 남자 신발을 구입한다. 훨씬 저렴하고 편하고 튼튼하다.)
'여성답지 않은' 크고 뚱뚱한 몸이 남성의 불편한 시선이나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요새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다는 문장에도 깊이 공감했다. 어쩌다 짧은 치마를 입거나 하이힐을 신으면 몸을 아래부터 위까지 쭉 훑어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어릴 때는 즐기기도 한 것 같다. 남자들이 단지 내가 '쉬워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내게 음란한 말을 던지고 내 몸을 함부로 더듬는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일부러 몸을 감추는 옷만 입는다. 남자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머리 스타일을 하는 편이 훨씬 편하고 자유롭다. 여자가 '여자답게' 옷을 입을 때의 위험이 여자가 '여자답게' 옷을 입지 않을 때의 위험보다 큰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애초에 여자다운 옷차림, 여자답지 않은 옷차림이 정해져 있는 사회는 비정상이다. 어떤 옷차림을 하면 성폭행 대상이 되는 사회,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더 심한 비정상이다.
단지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대하고 폭력을 가하는 남자들이 싫어서 차라리 뚱뚱해지는 편을 택했다는 저자의 고백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르면 저자처럼 솔직하게 나의 몸이 말하거나 혹은 말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해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