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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시선 - 우리 산문 다시 읽고 새로 쓰다
송혁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한때는 빠른 비트의 유행가를 즐겨 들었는데, 요즘은 클래식이나 재즈 외의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이 멋져 보였는데, 이제는 무채색의 단정한 차림이 좋다. 글도 마찬가지다. 어깨에 잔뜩 힘주고 쓴 글보다는 몸에 힘 빼고 자연스럽게 쓴 것 같은 글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고전의 시선>에는 바로 그런 글이 담겨 있다.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1,000년 넘게 쌓인 우리의 한문 산문 가운데 24편을 엄선해 현대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평설과 함께 이 책에 담았다. 한문 산문이라고 해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타당하지만 고리타분한 가르침이 주로 담겨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여유를 즐기며 사는 즐거움, 아름다움을 보는 법, 이미지에 속지 않는 태도 등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에게 꼭 맞는 성현의 가르침을 주로 담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조선 전기 문인 성간이 쓴 <용부전(慵夫傳)>이라는 글이다. 어느 마을에 씻지도 않고 매일 멍청히 앉아만 있는 게으름뱅이(慵夫)가 있었다. 하루는 부지런쟁이가 나타나 이 게으름뱅이의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는데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부지런쟁이는 작전을 바꾸어 맛난 술과 멋진 음악을 준비해 게으름뱅이를 초대했다. 그러자 게으름뱅이가 부리나케 달려와 그때부터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부지런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요, 게으르게 살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자기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즐거움을 찾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부지런하게 살라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일을 하라고 했던 故 스티브 잡스의 조언이 생각난다.
부지런함이야말로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내세울 수 있는 미덕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고 경제구조와 주력산업이 많이 변화된 오늘, 여전히 부지런함은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지상의 가치일까? (36쪽)
고려 시대 문인 이제현은 자연이 아닌 도심 주변 민가 즐비한 연못가에 '운금루'라는 누각을 짓고 <운금루기(雲錦樓記)>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아름다움이 어디 먼 곳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 속에 있다고 보았다. 짐을 머리에 이고 걷는 사람, 말 탄 사람, 걷는 사람, 어르신을 보고 달려가 절하는 사람. 이들을 보고도 아름답다 여기지 않는 건 이들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어둠이 껴 있기 때문이다.
가볼 만한 멋진 풍경이 외지고 먼 곳에만 있지는 않다. 왕이 도읍지로 삼은 곳,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그런 풍경이 없으란 법은 없다. 그러나 형산이나 여산, 동정호나 소상강 같은 절경이 반걸음만 내디디면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명예를 다투는 사람이나 시장에서 이익을 따지는 자들은 그런 풍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22쪽)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읽으니 내 마음도 따라서 잔잔해지고 깊어졌다. 옛글은 전부 고리타분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신선하고 파격적인 글도 제법 많다. 바쁘게 살지 말고 여유를 가져라. 아름다움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일상 속에서 찾아라. 이런 글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부터 옛글에 관심을 가졌을 텐데(학교 다닐 때 고전문학 시간이 즐거웠을 텐데). 옛글을 다시 읽는 기쁨, 새로 쓰는 즐거움을 이 책을 통해 만끽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