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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ㅣ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랩(lab)'이라고 하면, 대학 시절 흰색 가운을 입고 캠퍼스를 누비던 이과대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과대에는 같은 동아리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이 들려주는 실험 이야기 또는 실험실 사람들 이야기 - 어제는 이런 실험을 했어, 무슨 해부를 했어, 지난주에는 어느 실험실 사람이 어떤 사고를 당했대 - 가 사회대 소속인 나에게는 늘 신비로웠다.
얼마 되지 않는 랩에 관한 추억을 굳이 떠올린 건, 미국의 식물학자 호프 자런의 자전 에세이 <랩 걸(lab girl)>을 읽었기 때문이다. 저자 호프 자런은 1969년 미네소타 오스틴에서 과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 때문에 의대에 진학하지 못하고 영문학도가 되었으나 과학에 대한 관심이 하도 커서 결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로 진학해 식물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존스홉킨스 대학교, 하와이 대학교, 오슬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이 책은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험한 일들을 자신이 연구하는 식물에 관한 설명과 교차하여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자로서 저자의 업적 중 하나는 특정 기후나 토양에 적합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는 게 아니라, 식물 스스로 뿌리내릴 토양을 찾고 잎을 틔울 위치를 선택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력해 성공을 이뤄낸 저자의 삶과도 일치한다.
어느 누구도 저자가 과학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과학자가 되었다고 칭찬해주지 않았다. 저자 스스로 과학을 전공으로 택해 학위를 받고 일자리를 구하고 연구실을 운영했다. 때로는 돈이 없어서 배를 곯기도 하고, 큰 사고를 당해 다치기도 하고, 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종신 교수가 되었고 권위 있는 상도 여러 개 탔다. 아버지를 따라 실험실 정리를 하던 소녀, 교과서 살 돈이 없어 야간 근무를 자처하던 대학생, 유통기한이 임박한 햄버거를 왕창 사서 며칠 동안 그것만 먹었던 조교수 시절의 그녀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미래가 현실이 된 것이다.
저자가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쌓는 데 있어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연구 자체의 고됨이나 어려움, 경제적 지원의 부족보다도 여성 과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었다. 심지어 학계와 과학계 내부에서조차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인식은 혐오 내지는 차별에 가깝다. 여성 과학자가 운영하는 연구실은 제대로 일감을 받기조차 어렵다. 여성 과학자의 성과는 남성 과학자의 성과보다 주목을 덜 받을 뿐 아니라 평가절하된다. 저자는 임신한 사실을 대학에 알리자마자 임신한 몸으로 연구실에 출입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사실도 고백한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어 지칠 때마다 나는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대목도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서 저자 다음으로 깊은 인상을 준 인물은 단연 빌이다. 빌은 저자가 대학원에서 조교로 일할 때 만난 학부생인데, 이후 저자가 대학을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저자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저자와 빌이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기를 내심 바랐는데, 저자가 다른 남성과 결혼을 하면서 저자와 빌은 친구로 남았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간에 서로 관심 분야가 비슷하고 내밀한 속마음까지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누린 가장 큰 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