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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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이랑 하면 2017년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의 일화가 떠오른다. 최우수 포크음반상이라는 큰 상을 받았지만, 이 상은 트로피만 주고 상금이 없어서 월세 5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트로피를 팔겠다고 했던, 시상식 조크인가 했는데 정말로 그 자리에서 관객에게 현찰 50만 원을 받고 트로피를 팔았던 그 사건은, 예술이라는 엄연한 노동을 하고 있지만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가, 창작자들의 현실을 보여준 사례로서 지금도 회자되곤 한다. 


나 역시 이랑의 팬으로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의 용기와 재치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만, 그에게 그런 기개 넘치는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덕분이다. 이랑은 이 팟캐스트에 종종 게스트로서 출연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줘 왔다. 그중에는 한국을 넘어 일본, 대만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예술가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부모에게 지지는커녕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했고, 사랑하는 언니가 죽고, 자궁경부암 선고를 받고, 반려묘 준이치를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내는 등 그의 인생에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는 이야기도 많았다. 


그래도 그 정도면 이랑이라는 사람에 대해 꽤 많이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출간된 이랑의 산문집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를 읽고 어림도 없는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명문대를 나온 부모, 교사인 아버지, 부유한 외가, 단란한 삼 남매. 남들 눈에는 행복에 가까운 조건을 갖춘 가족으로 보였겠지만, 부모의 결혼에는 남모를 사정이 있었고,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으며, 외가의 부는 친척들을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언니는 K-장녀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장애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 예술을 한다는 건 어떤 사람들 눈에는 이기적이고 무모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이랑 자신에게는 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이게 아니면 살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어린 나는 보호자인 어른들 앞에서 화내면 안 됐고, 울면 안 됐고, 좌절하면 안 됐고, 슬프면 안 됐다. 그래서 얼굴을 쥐어짜서 웃고, 웃고, 그저 웃었다. 감정 표현의 자유, 기록의 자유, 상상의 자유가 없는. 그저 눈앞의 어른들에게 '모든 것이 무사하고, 그중 내가 제일 무사하다'는 신호를 발신해야만 하는 시간들이었다. (중략) 울지 않으면서도 몸 안에 있던 무거운 뭔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다를 방법이 없을까. 금방 동나는 체력을 아낄 전략이 필요했다. 나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20-1쪽) 


이 책은 원래 이랑과 친구들의 커뮤니티에 관한 책이 될 예정이었지만, 2021년 언니가 죽은 후 이랑과 언니, 엄마 이렇게 모녀 3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되었다고 한다. '죽기 살기로' 썼다는 저자의 고백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가슴 아픈 내용이 많지만, 책을 다 읽은 후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개운하고 후련했던 것은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여 있던 가족에 대한 애증이나 원망 같은 감정이 책을 읽는 동안 정화되었기 때문일까. 죽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삶으로 귀결되고, 미움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사랑으로 마무리되는 이 책을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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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1 1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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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1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31 22: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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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쓰는 직업 -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일과 유물에 대한 깊은 사랑을 쓰다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신지은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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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국중박'이라는 줄임말로 주로 불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인 2022년에 나온 책이다. 저자 신지은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와 소장품을 소개하는 뉴스레터 <아침 행복이 똑똑>을 만드는 연구원이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유물이나 미술에 대해 잘 알겠지, 뉴스레터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글을 잘 쓰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글이 훨씬 더 좋았다. (나처럼) 유물이나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유물이나 미술에 관심이 가고, 가까운 주말이나 휴일에 박물관 나들이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글이다.


이 책은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로 나온 만큼 직업,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대학에서 예술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으니 저자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좋아하는 일로 한다고 해서 밥벌이의 고달픔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을 하면서 소모되는 부분을 일 덕분에 채울 수 있는 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는 복임에 분명하다. 가장 부러웠던 부분은 일하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사무실에서 도보로 몇 분 거리인 전시실로 이동해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는 것. 남들은 일부러 시간 내서 가야 하는 박물관이 직장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아닐까.


저자가 뉴스레터로 전시와 유물을 소개하는 일을 하는 만큼, 책에 전시 보는 법, 유물 보는 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저자는 오랫동안 유물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유물뿐 아니라 유물을 만든 사람, 유물을 만든 환경, 자연 등에도 두루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만들었을까 상상하다 보면 그 어떤 유물도 특별해 보이고, 그것에 관해 쓴 글도 내용이나 표현이 더욱 생생해진다. 지금 내가 무심하게 대하는 사물 또는 대상이 미래에는 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대하는 마음 또한 귀해진다. 이런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곳 또한 박물관이라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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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 민주주의 - 알고리듬이 선거가 되고 고양이가 정치인을 대체한다
나리타 유스케 지음, 서유진.이상현 옮김 / 틔움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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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정치외교학 관련 서적을 전혀 읽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서점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보고 "알고리듬의 선거가 되고 고양이가 정치인을 대체한다"라는 문구에 호기심이 동해 바로 구입했다. 막상 읽은 건 최근인데, 책을 샀을 때 바로 읽지 않고 최근에 읽은 게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인공지능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더 이상 정치인(人)이 필요하지 않게 된 세상을 상정하는데, 이 책이 나온 2024년보다 인공지능, 즉 AI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그 내용이 훨씬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의료 기술이 발달해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면 인구 구조상 젊은 사람들은 영원히 약자, 소수자이고 나이 든 사람들은 영원히 강자, 다수자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정치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무의식 데이터 민주주의'이다. 무의식 데이터 민주주의란 쉽게 말해 민의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민의를 수집해 사실상의 직접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 정치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정당은 인간 대신 고양이처럼 귀여운 동물이나 캐릭터를 후보로 내세워 민의를 대표하게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남은 수명에 따라 투표 가중치를 부과하는 '남은 생애 투표', 조세 피난처처럼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 제도를 가진 나라로 이민하는 '민주주의 피난처'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엉뚱한 생각 같지만, 민주주의 피난처는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머지 증강현실을 이용해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보면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장강명 작가의 소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에 나온 상황과 유사하다. 민주주의 피난처처럼 물리적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기술을 활용해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니. 어쩌면 저자가 상상한 '22세기 민주주의'는 훨씬 빨리 실현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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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7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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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같지 않지만 모두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고전 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집 <백야>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책에는 도스토옙스키가 1848년부터 1877년에 걸쳐 발표한 단편 아홉 편이 실려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70년 전에 쓰인, 한국이 아닌 러시아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가정하고 쓴 이야기인데, 한 편 한 편이 마치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다. 


첫 번째 단편인 <약한 마음>에는 좋아하는 여자와의 약혼을 앞두고 밀린 서류 작업 때문에 괴로워하는 친구를 도와주는 남자가 나온다. 두 번째 단편 <정직한 도둑>는 도와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도 끝까지 그를 연민하는 남자가 나온다. 표제작인 세 번째 단편 <백야>에는 다리 위에서 우는 여자를 보고 불쌍해 결혼을 약속했지만, 여자와 약혼한 남자가 뒤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배신을 당하는 남자가 나온다.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은 끝까지 착하고 이타적이지만,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원치 않은 고난을 당한다. 평론가들은 이를 사회주의와 연결해 분석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기독교적으로도 읽힌다. 


아홉 편의 단편 중에서 지금의 현실과 가장 닮아 있다고 느낀 작품은 네 번째로 실린 단편 <악어>이다. 이 소설에는 장안의 화제인 악어를 구경하러 갔다가 악어에게 잡아먹힌 남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남자가 악어 뱃속에 살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를 구하기 위해 악어 배를 가르면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자를 구하지 않는다. 인간의 목숨보다 돈을 중시하는 요즘의 풍조와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이어지는 단편들도 인간들의 선한 면, 추한 면 등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고전이지만(심지어 어렵기로 소문난 러시아 소설이지만)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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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스토브 -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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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궁금증이 일었다. <해변의 스토브>라니. 해변에 스토브가 왜 있지. 있다 해도 작동이 가능할까. 만화를 보고 바로 이해가 되었다. 오시로 고가니가 그린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이 책. 맨 처음에 실려 있는 표제작 <해변의 스토브>는 1년간 동거한 여자친구 엣짱과 헤어진 스미오의 이야기를 스토브의 시선으로 그린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끝났고,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겨울에는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였지만 봄이 오면 쓸모를 잃는 스토브처럼,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중요했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끝을 맺어야 하는 인연이 있는 것이다. 


시절인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물론 이별뿐 아니라 만남에도 적용된다. 여름 축제를 보고 싶어 하는 설녀의 소원은 그를 측은하게 여긴 배달 기사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설녀의 여름>). 폭설로 얼어붙은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임신부(<눈을 껴안다>), 대학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뜻밖의 인물과 만난 여자(<눈 내린 마을>) 등도 그렇다. 일부러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떤 인연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고, 그것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짧은 만남에 불과하더라도 어떤 이의 인생에 진한 무늬를 남기기도 한다. 


이 책에는 사고로 투명 인간이 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사연(<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처럼 환상적인 이야기도 있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과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회사원(<바다 밑바닥에서>)이나 권태를 느끼는 3년 차 직장인의 사연(<소중한 일>)처럼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다. 작가의 화풍이나 서사는 간결하고 담백한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채로워서, 막상 읽을 때에는 단조롭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풍성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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