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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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 제6권이 나왔다. 제목은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제목만 보고 고전부 4인방이 드디어 졸업하는 줄 알았는데(일본에서는 졸업식 때 '날개를 주세요(翼をください)'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보니 고전부 4인방이 아직 졸업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졸업이 머지않은 것은 분명하다. 모두에게 장래를 좌우할 만한 변화가 생긴다. 


첫 번째 이야기는 호타로가 주인공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간략하게'가 좌우명인 호타로는 오늘도 혼자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저녁 식사로 야키소바를 만든 호타로가 젓가락을 집어 든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아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사토시. 별일은 아니고 같이 산책이나 하자는 말에 호타로는 승낙하지만, 한편으론 사토시가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두 번째 이야기의 화자는 마야카다. 만화 용품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난 마야카는 중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마야카가 졸업한 가부라야 중학교에는 매년 졸업생들이 함께 졸업 작품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 그 해에는 대형 거울에 두를 목제 장식 틀을 만들기로 했고, 각 반이 분담해 장식 틀을 조각하기로 했다. 반마다 다시 조를 나눠서 조각을 했는데, 마야카네 반은 호타로네 조가 조각을 대충 하는 바람에 전교생의 원성을 샀고, 반 아이들의 원망은 호타로에게 돌아갔다. 이 일을 계기로 마야카 역시 오랫동안 호타로를 미워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호타로에게도 사정은 있었을 터. 대체 그 사정은 무엇일까. 고전부 시리즈 팬이라면 궁금했을 이야기의 실체가 드디어 밝혀진다. 


이 밖에도 마야카가 만화 연구회의 내부 다툼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 합창 대회에서 사라진 지탄다의 행방을 쫓는 이야기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마야카를 끈질기게 괴롭힌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어 독자인 내가 다 후련했다. 마야카가 사토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대목도 귀엽다. 지탄다에게는 중대한 변화가 생겨서 고전부 시리즈를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라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라는 제목은 지탄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모처럼 고전부 4인방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실어서 초기 고전부 시리즈를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고전부 4인방이 학교 안팎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은데(수학여행을 간다든가, 문화제를 한 번 더 한다든가), 언젠가는 이들도 졸업을 하고 고전부 시리즈도 끝이 나겠지. 요네자와 호노부와 일상 미스터리의 매력을 알게 된 계기가 고전부 시리즈라서인지 완결이란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먹먹하다. 완결이 나더라도 부디 천천히 완결이 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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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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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 재작년 가을처럼 교토의 가을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하지만 떠날 수 없다. 여행 갈 돈도 시간도 없다. 할 수 없이 요즘 나는 교토 관련 여행 책을 잔뜩 사놓고 틈 날 때마다 읽고 있다. 여행 갈 돈도 시간도 없는 나 자신을 구박하며. 교토가 아닌 서울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내 처지를 한탄하며. 


씨네 21 기자 이다혜의 여행 에세이집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도 읽었다. 영화 기자가 되면 좋은 점은 영화를 실컷 볼 수 있고 잘 나가는 영화감독과 배우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닌가 보다. 일반 직장인과 다르게 마감만 마치면 비교적 자유롭게 휴가를 쓸 수 있고, 출장을 빙자해 외국에도 자주 나가는 편이라고. 덕분에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남부럽지 않은 여행 경험을 쌓았다니 그저 부럽다. 


떠났을 때만 '나'일 수 있는 사람들은 나름의 행복을 찾은 이들이겠지만, 나는 떠났을 때만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결국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는, 나라는 인간의 통일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여행이다. 이곳에서의 삶을 위한 떠나기. (9쪽)


저자는 여행을 좋아하고 자주 하지만, 여행만이 삶의 탈출구이고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진 않는다. 저자는 여행을 일상의 연장선상으로, '나라는 인간의 통일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여긴다. 평소에 책과 영화를 좋아하니까 여행을 가서도 책과 영화를 눈여겨본다. 평소에도 잘 먹고 잘 마시니까 여행지에서도 잘 먹고 잘 마신다. 이따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 도전하기도 하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해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삶이 바뀌고 인생관이 변하는 경험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삶이 보다 풍성해지고 인생의 빛깔이 하나 더 늘어날 뿐이다. 


서울 다음으로 편하게 느끼는 도시라면 역시 교토다. 가장 여러 번 간 도시이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오랜 외국 생활에서 귀국하는 기분으로 늘 하는 루틴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교토 빵집 체인인 시즈야에 가서 카르네라고 불리는 160엔짜리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다. (250쪽) 


내가 요즘 가고 싶어 안달인 교토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저자의 교토 여행 루틴은 이렇다. "기온을 걸어 야사카진자를 지나 이노다커피에서 아침을 먹고 기요미즈데라에 들러 지슈진자의 연애운 오미쿠지를 뽑는다." 사흘 이상 머물 때면 두 번 이상 하는 루틴이 따로 있다. "늘 다니는 호텔은 시조카라스마의 비즈니스호텔 체인. 그곳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가모강을 건너 야사카진자로 간다. 이 도시에 머물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가모강에서 조깅을 한다." 


기온, 야사카진자, 기요미즈데라, 지슈진자, 시조카라스마, 가모강... 모두 지난 교토 여행 때 가본 곳인데도 저자가 알려준 루틴을 따라 여행하는 상상을 하니 새롭게 다가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조깅 코스를 따라 아침 산책을 하고, 교토의 명물인 카페 조식을 먹고, 신사나 사찰을 둘러보면 얼마나 마음이 넉넉해질까. 점심엔 하루키가 애정하는 유두부나 지난 교토 여행 때 못 먹은 카레우동을 먹어야지. 아아. 떠나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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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
리즈 무어 지음, 공경희 옮김 / 소소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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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모두 진실일까? 열두 살 소녀 '에이더'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 '데이비드'의 진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1980년대 미국 보스턴 외곽의 어느 마을. 에이더는 보스턴 소재 대학의 컴퓨터공학 연구소 소장인 아버지 데이비드와 단둘이 살고 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대리모를 통해 딸을 얻은 데이비드는, 에이더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오로지 홈스쿨링만으로 수학, 과학, 암호학, 컴퓨터 공학까지 가르치고 있다. 에이더는 데이비드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만, 한편으로는 또래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이성 친구를 사귀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비드가 이상한 징후를 보인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명석한 그가 웬만해선 잊기 힘든 것을 하나둘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급기야 실종되었다가 돌아온다. 데이비드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둘은 함께 살 수 없게 된다. 데이비드는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에이더는 데이비드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리스턴의 집에서 그녀의 세 아들과 살게 된다. 이 와중에 데이비드의 비밀스러운 이력이 문제가 되고, 에이더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래전 데이비드가 자신에게 맡긴 파일의 암호를 풀려고 시도한다. 


소설 초반에 에이더는 자신만큼 데이비드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데이비드와 함께 사는 유일한 가족인 데다가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일상부터 학문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니 그렇게 믿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비밀스러운 이력이 문제가 되면서 에이더는 데이비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데이비드가 에이더를 얻기 전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가족은 어떤 사람들인지, 왜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대리모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으려고 했는지, 에이더가 아는 것의 대부분이 거짓임이 드러난다.


에이더가 알지 못한 것은 데이비드만이 아니다. 에이더는 평범한 가정이 어떤 건지, 학교생활이 어떤 건지, 친구와 사귀는 게 어떤 건지, 이성 친구와 단둘이 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해서 동경하고, 동경할 뿐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결국 에이더는 평범한 가정에서 살게 되고 학교에도 다니게 되지만 결국 데이비드와 함께 살고 함께 공부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 우정도 사랑도 에이더가 보는 곳과 다른 방향에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에이더는 알까. 이는 다 에이더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 했기 때문에 볼 수 있었다는걸. 시간이 흐르고 모든 진실이 드러나자 에이더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간극이 지구와 해왕성의 거리만큼 멀어 보여도 그리 멀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데이비드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든, 에이더가 어떤 삶을 동경했고 어떤 삶을 살든, 진실은 에이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어린 에이더에게 데이비드가 보여주었던 세계, 어린 에이더의 눈에 비친 데이비드의 모습은 확실히 실재했다는 것. 그 긴 시간을 보내고 먼 거리를 돌아서야 에이더의 눈에 겨우 '보이게 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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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는 달 - 환색에도력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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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하면 한국에선 <화차>나 <모방범> 같은 현대물이 유명하지만, 일본에선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과 시대물이 두루 사랑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출판사 북스피어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을 '미야베 월드 제2막'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도맡다시피 하여 선보이고 있는데,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번역과 만듦새가 훌륭해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부푼 마음으로 읽고 있다. 


얼마 전 '미야베 월드 제2막'의 신간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신이 없는 달>.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말하는 검>을 잇는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소설 작품집으로, 달력의 열두 달에 얽힌 열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단편집답게 작품마다 특색이 있다. 어떤 작품은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하고, 어떤 작품은 배를 잡고 구를 만큼 우습고, 어떤 작품은 애잔해서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얼굴 바라기>이다. 자타 공인 후카가와 제일의 추녀 오노부에게 어느 날 중매가 들어온다. 상대는 후카가와 최고의 미남이자 나막신 가게의 외아들 시게타로. 오노부는 시게타로가 자신을 아내로 삼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하며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시게타로와 그의 가족들을 만나보니 놀리는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오노부가 세상에 둘도 없는 미녀라고 칭송하며 하루빨리 식구로 맞이하고 싶어 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한국어판의 표제작 <신이 없는 달>은 읽으면 마음이 먹먹해지는 작품이다. 매년 시월이 되면 소액의 돈을 딱 한 번만 훔치는 강도가 있다. 강도가 돈을 훔치는 이유는 음력 시월에 태어난 딸의 병간호를 하기 위해서다. 일본에선 예부터 음력 시월을 '신무월(神無月)', 즉 '신이 없는 달'이라고 불렀다. 신이 없는 달에 태어난 딸을 위해, 신이 자리를 비운 탓에 생겨난 불행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강도는 신이 없는 달에만 돈을 훔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음력 시월이 오고, 아픈 딸은 여전히 병치레 중이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돈을 훔치러 나가는 강도. 과연 그는 무사할 수 있을까. 열린 결말이라서 더욱 애가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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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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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중인 남자에게 아내가 말을 건다. "오십 분마다 한 사람씩 프랑스 도로 위에서 죽어. 저 사람들 좀 봐. 주위에서 차를 굴리고 있는 저 미친 사람들. 저들은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털리는 걸 보면 지극히 몸을 사리는 바로 그들이야. 한데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거지?" 남자는 속으로 답한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제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밀란 쿤데라가 1993년에 발표한 소설 <느림>의 도입부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대개 그렇듯, 이 소설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호텔이 된 파리의 옛 성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과거에 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목격하는 이야기'쯤 되는데, 남자가 온갖 상념을 두서없이 떠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나의 경우, 꾸역꾸역 끝까지 다 읽고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첫 장을 펼쳤을 때 비로소 내용을 이해했다. 사람들은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잊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남자는 그들이 제 속도에 취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차의 속도에 취한 운전자가 주변을 보지 못하듯, 자신의 삶의 속도에 취한 사람 역시 주변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이따금 남의 눈에 무모하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선택을 하지만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할 여유가 없다. 


반면, 운전자가 주변을 보지 못하고 제 앞만 보듯, 주변 사람들은 운전자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운전자를 보고 무모하다, 어리석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운전자가 현재 절박하고 필사적인 상황임을 알지 못한다. 결국 만사가 상대적이다. 내 문제는 내 문제라서 바로 보지 못하고, 남의 문제는 남의 문제라서 바로 보지 못한다. 보는 시각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기해 보자. 웬 사내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48쪽) 


내 눈에 비치는 타인의 삶,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나의 삶이란 결국 일시적이고 피상적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소말리아 아이들이 굶주리는 영상을 1,2초 본 것만으로 소말리아 사람들이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는 것처럼(작가는 묻는다. "왜 아이들만 굶는가?"), 나는 극히 일부만 보고 타인의 삶을 지레짐작하고 나의 삶 역시 타인에 의해 지레짐작된다. 작가는 이를 18세기 프랑스 파리를 뒤흔든 T 부인과 젊은 기사의 스캔들, 지식인 베르크와 뱅상의 기싸움, 체코 출신 곤충 연구가 체호르집스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그들은 진지하지만 남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남들은 어리석다고 여기지만 그들에게는 진지한 문제였던 사랑과 경쟁,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들. 


작가는 소설 속 '나'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내일은 없다. 청중도 없다. 제발, 친구여, 행복하게나. 막연한 느낌이지만 난 행복할 수 있는 자네 능력에 우리 유일한 희망이 달렸다고 느끼네."라고.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 외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인간은 결국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존재'다. 그러니 내일도 없고 청중도 없는 것처럼 살아도 괜찮다. 때로는 느린 보폭으로 걷기도 하고 때로는 가볍게 몸을 흔들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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