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해부 - 나치 전범들의 심리분석
조엘 딤스데일 지음, 박경선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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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해부>는 미국의 정신의학자 조엘 딤스데일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기록을 분석해 재구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열린 국제 군사재판이다. 재판의 피고는 당시 생존해 있던 최고위 나치 인사 23명이었고, 이 중에는 로베르트 레이, 헤르만 괴링, 율리우스 스트라이허, 루돌프 헤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재판의 원고인 연합군 측은 정신과 의사 더글라스 켈리와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를 파견해 나치 인사를 면담하고 심리검사를 실시해 궁극적으로 악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계획은 실패했다. 피고인 나치 인사들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사가 걸린(정확히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언도받을 것이 분명한) 재판을 받는 중인 관계로 정신 상태가 극도로 불안했다. 원고인 연합군 측에서 파견한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는 모종의 이유로 의견 차이를 드러내며 끝내 불화했다. 당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공감 능력을 상실하고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인물이었다고 분석했지만, 다른 나치 인사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 원고 측에서 보낸 정신과 의사를 자기 편으로 포섭한 자도 있었고, 나치의 두뇌로 불리며 적극적으로 악행에 가담한 자도 있었다. 


사람들은 악이 한 가지 색깔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드러난 것은 악의 기저에 있는 여러 행동과 장애의 '스펙트럼'이었다. (288쪽) 


악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시행된 계획은 아이러니하게도 악의 본질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끝났다. 하지만 수확이 전혀 없진 않았다. 한나 아렌트가 설명한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했을 뿐인 악인도 있었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악인도 분명 있었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라도 철저히 부수고 짓밟아서라도 치우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악인도 있었다. 


악인 중에는 전율이나 가학적 쾌감을 좇아서 타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걸리적거렸기" 때문에 괴롭히는 사이코패스도 있었다. 사이코패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책임감 또한 느끼지 않기 때문에 타자를 괴롭혀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게 "진실은 대체 가능한 것이고 기만이 곧 규범이다." "희생자는 사이코패스가 가는 길에 걸리적거리거나 사이코패스가 원하는 무엇인가 - 돈이나 섹스 -를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악이 한 가지 색깔이 아니라는 것뿐. 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이 책을 읽었기에 결론이 다소 허무하지만 읽은 보람이 전혀 없진 않다. 무엇보다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악은 평범함 속에도 있지만 비범함 속에도 있다는 것. 자기주장이 강하고 성취욕이 높은 사람의 이면에 악이 잠재할 수도 있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 높은 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들의 추악한 맨얼굴을 보는 시대에 살다보니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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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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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독일 소년 페터 데바우어는 여름방학마다 혼자서 스위스에 있는 할아버지 댁으로 간다. 할아버지는 은퇴 후 할머니와 함께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 총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데, 페터가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 되면 공부할 때 연습장으로 쓰라고 남은 원고 뭉치를 준다. 


언젠가 페터는 할아버지가 준 원고 뭉치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독일 병사 카를의 이야기다. 페터는 왠지 모르게 이 이야기에 마음이 끌려서 할아버지에게 뒷이야기를 읽게 해달라고 조를 생각이었지만, 얼마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뒷이야기를 읽을 수 없게 된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페터는 법학자의 꿈을 접고 출판사에서 법학 전문 편집자로 일한다. 일하는 틈틈이 독일 병사 카를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하던 페터의 책상 위에 어느 날 원고 한 부가 놓인다. 원고를 쓴 사람은 미국의 법학 교수 존 드 바우어. 이름을 본 순간 그가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직감한 페터는 곧바로 짐을 꾸려 미국으로 향한다. 과연 그는 페터의 아버지일까. 어떤 사연이 있어 아들까지 버리고 정체를 숨긴 채 사는 걸까.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2006년에 발표한 소설 <귀향>은 그가 직전에 출간한 <책 읽어주는 남자>와 여러모로 닮았다. 주인공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 시절에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을 한다. 그 후 세상사에 젖어 살다가 뜻밖의 공간에서 평생 찾았던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주인공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 이러한 줄거리를 비롯해 헌법재판소 판사 출신답게 작품 곳곳에 법학 관련 내용이 등장하고, 나치 전범 처리와 전후 세대의 역사 인식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거론하는 것도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귀향>은 <책 읽어주는 남자>와 달리 고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귀향>에서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는 고전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가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남편이 봐서 결코 유쾌할 리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귀향>에서도 몇십 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간 페터가 알게 되는 아버지의 진실은 아들이 알아서 결코 유쾌할 리 없는 내용이다.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페넬로페를 되찾는 것과 달리, 페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극적인 부자 상봉을 하는 대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서둘러 독일로 돌아간다. 페터가 죽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 따위의 허상. 페터는 그것들을 죽인 다음에야 소년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문제에서 벗어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멋들어진 말이나 가공된 이미지 말고, 추악한 진실과 약자들의 분노를 마주하고 그것들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공동체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되고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좋은 메시지를 담은 책이 하필 이 출판사에서 나오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기분이 개운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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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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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코는 한때 촉망받는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현재는 도의회 의원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전업주부다. 어느 날 독신인 여성 도의원이 도의회에서 만혼 현상에 관해 발언하는 도중 "당신부터 빨리 결혼해" "아이를 못 낳냐"라는 성희롱 섞인 야유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야유를 한 의원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 가운데, 아쓰코는 "아이를 못 낳냐"라고 말한 사람이 남편이라고 직감하지만 입을 다문다. 그리고 얼마 후 아쓰코는 집 안에서 남편이 지인에게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거액의 돈봉투를 발견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 <다리를 건너다>는 아쓰코의 이야기를 포함해 모두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세 편은 지금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그린다. 맥주 회사 영업 과장인 아키라는 미술관 큐레이터인 아내의 푸념을 가볍게 흘려넘긴다. 도의회 의원인 남편을 둔 아쓰코는 남편의 부정을 보고도 눈 감는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겐이치로는 누구보다 의협심에 불타고 정의를 추구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평온한 일상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 편의 이야기는 마지막 네 번째 편에 이르러 하나로 모인다. 


네 번째 편의 배경은 그로부터 70년 후인 2085년 일본. 작가는 이 시기의 일본을 인간과 로봇, 그리고 '사인'이라 불리는 새로운 생명체가 등장한 상태로 상상한다. 네 번째 편에는 앞의 세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들이 말한 것, 말하지 않은 것, 선택한 것, 선택하지 않은 것, 행동한 것, 행동하지 않은 것의 결과와 그 대가가 4장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작가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영위하는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선택이 훗날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공직자인 남편의 부정을 보고도 못 본 척한 아쓰코가 70년 후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아쓰코의 선택이 어떤 결말을 낳는지를 알면 오싹하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로는 드물게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지만, 작가 특유의 치밀한 감정 묘사나 번뜩이는 사회의식은 그대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일본 국내는 물론 국외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일본 내 여성, 성 소수자, 외국인 문제를 언급하고, 여성의 학교 갈 권리를 주장했다가 탈레반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201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이야기는 작품 전체에 걸쳐 등장한다. 세월호 참사도 등장한다. 


지난달에 이 세월호의 침몰 뉴스가 나왔을 때, 아키라는 희생된 아이들 중에 고타로나 유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동요하고 말았다. 희생된 아이들이 전날 밤에 자기 집에서 어떤 얼굴로 웃었을지 쉽게 상상이 가서 잇달아 전해지는 잔혹한 뉴스에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였다.

 

옆 부서에 작년에 입사한 성이 '곽(郭)'씨인 한국인 직원이 있는데, 그녀의 집이 이번 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가까워서 학생들과도 길에서 자주 마주쳤다고 한다. 평소에는 밝고 활기찬 곽이지만, 아무래도 이 사건 직후에는 표정이 어두웠다. 


아키라를 포함해서 같은 층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은 희생된 아이들과 전에 마주친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60쪽) 


작품 전체를 통틀어 세월호 참사가 언급된 부분은 한 페이지 남짓에 불과하지만, 이 작품이 과거의 무수한 사건들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현재를 만들고 미래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을 감안하면 마음이 무겁다. 과거의 어떤 사건들이 결합되어 세월호 참사를 낳았을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 중에 '제2의 세월호 참사'로 이어질 만한 일은 없을까. "그때 바꿨으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아무도 지금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작중인물의 말이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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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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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계기는 며칠 전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출근을 하던 그레고리우스는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여인을 발견하고 몸을 던져 구한다. 그런데 이 여인,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기 전에 그레고리우스의 이마 위에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를 적지 않나, 그레고리우스가 학교로 데려가자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나, 의문투성이다. 


결국 수업도 내팽개치고 여인을 찾아 나선 그레고리우스는 한 책방에서 여인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가 망설임 끝에 내려놓고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서둘러 책방 안으로 들어가 무슨 책이냐고 묻자, 책방 주인이 말하기를 포르투갈 출신 작가 아마데우 프라두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포르투갈어를 모르는 그레고리우스가 몇 줄만 읽어달라고 부탁하니 책방 주인이 정말 몇 줄을 읽어주는데, 그 몇 줄이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을 180도로 바꾼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문장에 마음이 동한 그레고리우스는 며칠 후 학교도 집도 내팽개치고 무작정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뛰어든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44쪽) 


여기까지만 읽어도 내용이 상당히 드라마틱한데 이어지는 내용은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를 쓴 아마데우 프라두의 생애를 추적한다. 포르투갈이 독재 정권 치하에 있던 시절, 판사 출신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낸 프라두는 졸업 후 의사가 되었지만 남들 눈을 피해 독재 정권 전복을 기도하며 지하조직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여동생과 옛 친구, 동료들을 만나면서 프라두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알게 된다. 프라두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와 동시에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처음에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라두에 대해 알면 알수록 프라두의 생애 자체를 흠모하게 된다. 자신의 신념과 안전을 두고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매번 신념을 선택한 프라두를 존경하게 된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정을 저버리고, 사랑에 버림 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프라두를 숭배하게 된다. 그럴수록 자신의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평생 한 도시에서 살고 한 직장에 다니며 한 여자와 살고 학문 하나만 알며 산 자신을 부끄럽게 느낀다. 


하지만 과연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프라두의 삶만 못할까.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가 떠오른다. 그레고리우스와 프라두의 관계는 <싯다르타>에 나오는 고빈다와 싯다르타의 관계를 닮았다. 그레고리우스와 고빈다가 '구도자'라면, 프라두와 싯다르타는 '행동가'다. 프라두와 싯다르타가 일단 저지른 다음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사람이라면, 그레고리우스와 고빈다는 저질러진 일을 수습하고 성공과 실패의 의미를 성찰하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구도자와 행동가가 모두 필요하다. 누구의 삶이 더 좋다, 나쁘다고 가치 매길 수 없다.


다만 가능한 한 젊을 때 다양한 삶의 형태를 시도해보고 나에게 어떤 삶이 잘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겪어볼 필요는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레고리우스는 30년 이상 라틴어 교사로 재직하며 학교 일에만 헌신하느라 자기 안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한 것 같다. 스위스에 살면서, 같은 유럽인 데다가 기차로 단 몇 시간 거리인 리스본에 여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정도라니. 나라면 해마다, 아니 계절마다 갈 텐데. 가고 싶어도,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서울에서 리스본까지 기차로 한 번에 가는 경험은 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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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9-23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에 정답 없는 듯 합니다. ^^

키치 2017-09-23 22:04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
 
1인 가구 살림법 - 초보 혼족을 위한 살림의 요령, 삶의 기술
공아연 지음 / 로고폴리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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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 어른이 될까?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집을 샀을 때? 부모가 되었을 때? 


내 생각에 사람은 온전히 혼자 힘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물리적으로는 부모로부터 독립해도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경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부양할 수 있어도 간단한 집안일 하나 할 줄 모르면 제대로 된 어른으로 보기 어렵다. 자기가 벗은 속옷 한 번 빨아본 적 없고,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 하나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을 과연 어른으로 볼 수 있을까. 


온전히 혼자 힘으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이 책 <1인 가구 살림법>을 읽어보길 권한다. 저자 공아연은 대학 진학을 계기로 상경해 창문 하나 없는 월세 25만 원의 작은 고시원 방에서 자취를 시작한 이래 13년간 혼자서 생활했다. 처음엔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 버겁고 힘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집 구하기부터 청소, 요리, 세탁은 물론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챙기는 방법까지 터득할 수 있었다. 현재는 '세송'(@saesong_)이란 닉네임으로 트위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생활 정보와 살림 노하우를 부지런히 공유하고 있다. 


이 책은 집 구하기, 청소, 세탁, 요리, 건강, 안전 습관, 집 관리, 인테리어, 정리 수납의 요령, 시간을 아끼는 요령, 절약의 요령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 구하기' 편에는 자신에게 맞는 주거 형태 찾는 법, 부동산 이용할 때 주의할 점, 집 볼 때 체크할 사항, 집주인과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법 등 누구나 알아야 하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집을 볼 때는 낮 동네 분위기와 밤 동네 분위기를 따로 파악해야 하며, 밤에는 늦게까지 영업하는 가게가 있는지, 길거리가 충분히 밝은지 보면서 밤거리 보안이 잘 되는지 점검하라는 팁이 인상적이었다. 밤거리 보안에 가장 든든한 동지는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이다. 저자 역시 편의점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몇 번이나 있다고(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기 참 어렵다...). 


'청소, 세탁' 편에서는 친환경 세제 삼총사로 불리는 베이킹소다, 구연산, 과탄산소다 사용법이 인상적이었다. 베이킹소다와 구연산은 주로 청소에 쓰이고, 과탄산소다는 빨래에 사용된다. 베이킹소다는 세균의 단백질이나 곰팡이를 녹여 없애는 데 사용되며, 구연산은 물때 제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언젠가 한 봉지씩 사다 놓고 잘 안 썼는데 이제부터 부지런히 사용해야겠다. 


와이셔츠나 칼라가 달려 있는 옷은 목 때가 쉽게 타는데 이 부분을 깨끗하게 세탁하고 싶을 때는 과탄산소다를 쓰는 것이 좋다. 과탄산소다를 푼 물에 옷을 30분 정도 담갔다가 세탁하면 깨끗해진다. 단, 과탄산소다는 피부에 닿으면 해로우니 반드시 고무장갑을 끼고 사용해야 한다. 안 그래도 때가 타서 입지 않는 셔츠가 있는데 과탄산소다로 지워봐야겠다. 


'요리' 편에는 식재료를 구입하는 방법부터 조리 도구 갖추는 법, 식재료 손질과 보관 요령, 간단한 반찬 만드는 법 등이 나와 있다. 금방 만들어 오래 먹을 수 있는 마른 반찬 만드는 법부터 혼자 살아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싶을 때 시도해볼 만한 고기 요리, 생선 요리, 냄비 요리까지 다양한 레시피가 실려 있어 매일 하나씩만 해 먹어도 요리 실력이 부쩍 늘 것 같다. 


큰맘 먹고 요리했다가 망친 경험이 수두룩한 사람이라면 151쪽에 실린 '당신이 요리를 망치는 이유가 있다'를 꼭 읽어보시길. 저자의 말대로 레시피만 잘 따라 해도 그럴싸한 맛을 낼 수 있는데, 요리를 망치는 '요리치'들은 레시피를 잘 안 볼뿐더러 레시피를 봐도 제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 뭐, 요리하다가 조금이라도 망친 것 같으면 굴 소스 뿌려서 무마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 


만약 본인이 요리에 소질이 없다고 느낀다면 혹시 이런 습관이 있진 않은지 점검해봅시다. 


1. 멋대로 레시피에 변화를 준다 

2. 조리 중인 요리를 제대로 관찰하지 않는다.

3. 음식 맛을 색으로 판단한다. 

4. 맛을 보지 않고 간을 한다. 

5. 다른 양념을 넣어 실패한 간을 상쇄하려고 한다.

6. 요리의 향을 살릴 줄 모른다.

7. 불 조절을 무시한다. 

8. 모르는 단위를 적당히 짐작한다. 

9. 요리를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혼자 사는 여성을 위해 사생활 보호 및 보안 팁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교환한 정보 중에 이 책에 정리한 것만 약 다섯 페이지에 달한다. 남자 신발을 현관에 갖다 두거나 남자 사진을 집에 걸어두는 고전적인 방법부터, 주변 남자 지인들에게 부탁해서 "누구세요?" 이 대사를 녹음해 두었다가 수상한 사람이 벨을 누르면 녹음한 대사를 틀어서 반응을 본다, 도어록을 이용해도 락이 걸리는 새에 침입하는 놈들이 있으니 문을 닫자마자 안전 걸쇠를 건다 등 새로운 팁도 많다. 


나는 아파트에 살지만 밤 아홉 시만 넘어도 단지 내에 다니는 사람이 확 줄고 조명도 꺼진 곳이 많아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대단지이다 보니 주변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알기도 어렵고, 외부인이 단지 안에 들어오기도 쉽고. 술 먹고 노상방뇨하는 아저씨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가끔 내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 느껴질 때, 마음에 여유를 주고 생활에 쾌적함을 선사하는 팁도 나온다. 이름하여 '마음을 위로하는 작은 사치'. 일단 가장 손쉬운 게 입에 닿는 수저나 컵, 피부가 닿는 이불, 베개 커버, 수건 등을 바꿔주는 것이다. 나는 철마다 마음에 드는 색상이나 디자인, 촉감의 베개 커버를 구입하는데, 기분 전환도 되고 잠도 잘 온다. 평소에 안 쓰는 독특한 맛의 치약을 써보거나, 조미료에 약간 사치를 부려보는 것도 좋다고. 


이것도 저것도 귀찮다면 330쪽에 나와 있는 '주기별 체크리스트'부터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일주일, 한 달, 반 년, 일 년 주기로 반드시 해야 하는 각종 집안일 및 건강관리 습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반 년에 한 번 구충제 먹기, 스케일링하기 같은 사소한 습관까지 담겨 있어서 여기 나와 있는 것만 잘 챙겨도 생활의 질이 높아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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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9-28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