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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아이들 - 전범의 자식들, 역사와 대면하다
타냐 크라스냔스키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역사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그 많던 친일파는 광복 후 어떻게 되었을까.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시민들을 탄압하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가혹한 고문으로 멀쩡한 사람을 불구로 만든 고문관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군인들은, 민주화 운동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진압하던 경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들의 자식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한 일을 알기나 할까.
<나치의 아이들>을 쓴 타냐 크라스냔스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저자의 어머니는 독일인이고, 저자의 아버지는 프랑스계 러시아인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독일인인 외할아버지와 아주 가깝게 지냈는데, 외할아버지의 직업은 군인이었고 활동 시기는 나치 정권 시절과 겹친다. 저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가 전범에게 부역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로 귀화했고, 저자 역시 자신에게 한없이 인자한 외할아버지가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았다.
저자는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치밀하게 추적한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 설계자 하인리히 힘러,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 총통의 후계자 루돌프 헤스, 크라쿠프의 백정 한스 프랑크, 히틀러의 오른팔 마르틴 보어만,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 악마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생체실험가 요제프 멩겔레 등 대표적인 나치 전범 8인의 생애와 그들의 후손들의 삶을 추적한 결과물을 담고 있다.
'나치의 아이들'의 삶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아버지의 범죄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이다. 하인리히 힘러의 딸 구드른 힘러가 대표적이다. 힘러가 애지중지하는 딸이었던 힘러는 아버지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자살한 후에도 아버지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행위를 옹호했으며, 나중에는 독일 극우 정당에 가입하고 전범들을 돕는 ‘침묵의 원조’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행보를 보였다. 평생을 아버지 하인리히 힘러의 사랑스러운 딸이자 나치 정권의 '공주'로서 산 구드룬 힘러는 여러모로 '어떤 분'과 매우 흡사해 소름이 돋았다.
'공주'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앞에서 열을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전쟁 때 당신은 어디서 싸우셨나요?", "당신은 어느 부대에서 근무했나요?"라고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병참에 관해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찰 현장에 자신을 데리고 갔을 때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행렬을 이룬 옛 전투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뛰어난 부하의 딸 앞에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범죄를 증오하거나 속죄하는 모습이다. 나치의 악행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이들의 후손이 지구 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 불임 수술을 받은 사람도 있고, 아버지가 유대인을 학살한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사제가 되어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가 봉사하는 삶을 택한 사람도 있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딸은 아버지가 유대인들한테서 몰수한 그림을 팔아 예술과 과학계의 유대인 여성들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 전범을 엄격하게 처벌하고 나치에 가담한 이력이 있는 사람을 철저하게 추적한 나라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이 책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전쟁이 끝난 후 오랫동안 나치 전범에 관한 언급은 금기시되다시피 했고, 전쟁을 일으킨 책임은 히틀러와 최측근 몇 명에게만 지우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나치 전범의 아이들 또한 큰 어려움 없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저자는 나치 일당을 확실하게 뿌리뽑지 못했고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여전히 독일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극우파가 기승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지 지적한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