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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천재 작곡가의 뮤직 로드, 잘츠부르크에서 빈까지 ㅣ 클래식 클라우드 7
김성현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평점 :
모차르트만큼 유명하고 모차르트만큼 오해받는 아티스트가 또 있을까. 팟캐스트 '김태훈의 책보다 여행' 모차르트 편을 들으며 든 생각이다. 음악에 문외한인 사람도 모차르트는 알 만큼 모차르트는 유명한 음악가다. 나 역시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모차르트를 배웠고, 방과후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에도 통과의례처럼 모차르트의 곡을 익혔다. 그런 나조차 모차르트 하면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뽐낸 타고난 천재, 도전하는 일마다 성공했던 팔방미인, 라이벌 살리에리의 질투와 음모로 인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비운의 사내 정도의 인상이 전부였다.
클래식 클라우드 <모차르트> 편의 저자 김성현은 이러한 인상 또는 이미지가 대체로 오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책에서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비롯해 모차르트가 연주 여행을 하고 작곡의 영감을 얻은 독일 뮌헨,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 밀라노 등을 직접 발로 누빈 여정을 소개한다. 아울러 수많은 자료와 연구 문헌을 조사해 찾아낸 모차르트의 생애와 음악에 관한 진실을 밝힌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고 음악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흐릿하고 모호한 인상으로부터 벗어나, 모차르트의 맨얼굴, 진정한 실체를 만날 수 있었다.
남들이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4쪽)
모차르트를 이해하려면 보통 사람과는 달랐던 복잡다단한 그의 생애부터 알아야 한다. 모차르트는 1756년에 출생해 1791년에 사망했다. 모차르트는 35년 생애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년 2개월 2일을 여행으로 보냈다. 모차르트의 생애에는 세 번의 중요한 여행이 있다. 첫 번째 여행은 어린 시절 아버지, 누나와 함께 떠난 '1차 그랜드 투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나름 유명한 궁정 음악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교육자였다. 일찌감치 아들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만 6살이 되던 해인 1762년에 모차르트와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르를 데리고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여행을 떠났다. 말이 여행이지 사실상 오늘날 뮤지션들이 하는 순회공연에 가까웠다. 왕과 귀족들 앞에서 모차르트 남매가 연주를 하는 것이 여행의 주된 일정이었다. 이 여행은 장장 3년 5개월 하고도 20일, 총 1269일 동안 이어졌다. 이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 가족은 레오폴트의 연수입의 몇 배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고 유럽 전역에 모차르트의 뛰어난 재능을 알렸다. 모차르트 또한 유럽 각지의 최고 수준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안목을 키우고 기량을 갈고닦았다.
두 번째 여행은 십 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떠난 '2차 그랜드 투어'다. 유럽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모차르트 가족은 모차르트의 성공을 시기한 기성 음악가들이 모차르트에 관한 비방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신동 음악가'가 아닌 '오페라 작곡가'로 키우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모차르트와 함께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를 돌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들로부터 최신 음악의 조류를 배우고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유력 인사들 앞에서 연주를 선보이며 이름을 알리고 연회를 즐기며 문화를 익혔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공부하는 동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취업 자리를 알아보았다. 이 두 차례에 걸친 그랜드 투어는, 요즘으로 치면 현지 유학 겸 구직활동이었던 셈이다.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모차르트가 1756~1777년에 유럽 전역과 이탈리아로 두 차례에 걸쳐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 시기를 '모차르트의 수련기'라고 부른다. 모차르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장기간의 힘든 수련기를 거치면서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111쪽)
세 번째 여행은 이십 대 시절 어머니와 함께 떠난 구직 여행이다. 두 번의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그만한 실력과 명성이면 순조롭게 취업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예상과 달리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는 자신을 받아줄 만한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차르트는 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이 여행은 처음부터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재능을 칭찬해주고 자신을 귀여워해줬던 사람들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해보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신동'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의 모차르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레오폴트는 점점 더 아들을 채근했고, 그럴수록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하라는 구직 활동은 안 하고 연애에 빠져들었다. 결국 힘든 여행에 지친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모차르트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차르트는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프리랜서 음악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멀쩡한 '정규직'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한 게 여간 아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고정된 후원자나 꼬박꼬박 급료가 나오는 직장 없이도 자신의 경력을 차근차근 잘 만들어나갔다. <후궁 탈출>을 시작으로 <대미사>, <마술피리>,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같은 오페라 작품이 연이어 대성공을 거두며 모차르트의 명성은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모차르트의 활동 반경은 잘츠부르크와 빈을 넘어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라하로 점차 넓어졌고, 수입 또한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문제으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상류층과 어울리며 생활한 탓인지 화려한 생활을 좋아했고 모차르트는 고가의 악기와 의상, 신발, 가구, 말과 마차, 와인과 음식 등을 엄청나게 사들였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선 스스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과로에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기도 한 듯, <레퀴엠>을 작곡하던 도중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숨 가쁘게 쫓아온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는 '타고난 천재'보다는 '만들어진 천재'에 가깝다. 그를 천재로 만든 건 우선 아버지 레오폴트였고 그다음엔 '18세기 유럽'이라는 드넓은 세상이었다. (314쪽)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차르트가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다행히 모차르트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봐주고 기꺼이 지원해준 아버지 레오폴트가 있었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도 그 방식이 고루한 편견이나 인습을 따르는 것이었다면 아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유럽에서 가장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길 원했고 그러려면 비좁은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유럽 전역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두 번이나 여행을 감행했다. 오늘날로 치면 모차르트는 평생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아버지에게 직접 '홈스쿨링'을 받고 '해외 원정 유학'까지 다녀온 셈이다. 모차르트라는 불세출의 천재를 키운 건 팔 할이 아버지였고 여행이었다.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도 성장했지만 인간으로서도 성숙했다. 모차르트는 여행을 하면서 자라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만 6세 때부터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기차도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이다. 어른에게도 불편한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누비는 여정은 어린 모차르트에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같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일이 힘에 부치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때로는 부담과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레슨이나 연습 따위는 까맣게 잊고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실컷 놀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평범한 소년이나 청년들처럼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 연애하는 꿈도 꿔봤을 것이다. 모차르트에게 여행은 이런 부담이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부담이나 욕망에 못이기는 척 넘어가보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구직 여행 당시 모차르트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몇 명의 여인을 만나고 그 중 한 명과는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결국 아버지의 만류로 결혼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지만,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모차르트가 느낀 희로애락은 그의 음악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모차르트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반짝 스타가 아닌,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위대한 음악가로 만든 것 역시 여행이었다. 모차르트는 연주자로서의 기량도 뛰어났지만 작곡가, 창작자로서의 영감과 창의성도 대단했다. 이는 모차르트가 어려서부터 유럽 전역을 누비면서 수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덕분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최고의 음악인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좋은 영감과 창의성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보통 음악가들보다 한참 커버린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는 너무나 비좁은 무대였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생활하는 걸 답답하게 여겼다. 잘츠부르크의 음악가들은 전통에 갇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한심해 했다. 모차르트의 이런 태도는 결코 오만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오스트리아는 물론 당대 유럽 전역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 수준의 작품이었다. 모차르트가 현재까지도 많은 음악가들의 귀감이 되고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모차르트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여행을 하면서 누구보다 많이 보고 넓게 배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