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이브 - 코드네임 빌라넬
루크 제닝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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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 시즌8 보려고 왓차 플레이에 가입했다. 큰맘 먹고 가입한 김에 밤마다 이것저것 보다가 <킬링 이브>를 보게 되었다. <그레이 아나토미>로 유명한 한국계 배우 산드라 오에게 2019년 골든 글로브 TV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화제의 드라마 말이다. 산드라 오는 이 드라마에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여성 킬러 '빌라넬'의 뒤를 쫓는 영국 정보부 요원으로 나온다. 남자가 남자를 뒤쫓는 이야기는 지겹게 봤지만 여자가 여자를 뒤쫓는 이야기는 처음이기도 하고, 드라마 자체가 워낙 완성도 높고 재밌어서 열심히 보다 보니 문득 원작 소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읽었다. 영국 소설가 루크 제닝스의 소설 <킬링 이브>를.


소설 <킬링 이브>는 드라마 <킬링 이브>와 여러모로 다르다. 일단 처음부터 '12(트웰브)'의 존재가 알려진다. 드라마에선 빌라넬과 이브의 대결을 주로 그리다가 나중에야 빌라넬의 배후에 12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데, 소설에선 맨 첫 장부터 빌라넬의 배후에 12가 있고, 12가 어떤 모임인지가 드러나 살짝 김이 빠졌다. 빌라넬의 과거도 이른 단계에서 밝혀진다. 드라마에선 빌라넬의 과거가 나중에야 조금씩 드러나는데, 소설에선 빌라넬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무슨 일을 계기로 킬러가 되었으며, 어떤 훈련을 받았고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가 자세히 나온다. 너무 자세히 나와서 소설 쪽이 원작이 아니라 2차 창작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드라마 <킬링 이브>는 이브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 반해, 소설 <킬링 이브>는 빌라넬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혹독한 훈련 끝에 정식 킬러가 된 빌라넬이 부여받은 임무를 하나씩 해나가다가 그 과정에서 영국 정보부 요원 이브의 감시망에 걸리게 되고, 이때부터 지독한 인연 또는 악연으로 묶이게 된다는 식이다. 빌라넬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한 사이코패스로 설정된 빌라넬의 심리를 자세하게 보여주니 사이코패스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드라마 <킬링 이브>가 평범하다 못해 미숙해 보이지만 실은 두뇌 회전도 빠르고 능력도 뛰어난 요원인 이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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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7-26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드라마로 보고 싶어서 찜해두었는데... 산드라 오는 연기가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인 듯.

키치 2019-07-26 08:34   좋아요 0 | URL
산드라 오 너무 멋있죠! 이 드라마에서도 멋진 연기를 보여줍니다 ^^bb
 
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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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하지만 마츠모토 세이초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사회파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읽어서 정통파로 분류되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었다. 명성에 비해 과히 적은 작품만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고려대학교와 출판사 이상이 손잡고 에도가와 란포를 비롯한 일본 추리소설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출간했다는 걸 알고 반가웠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중에서도 에도가와 란포의 초기 명작인 <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 그리고 만화, 영화, 드라마 등으로 여러 번 리메이크된 장편 소설 <검은 도마뱀>이 한 권에 수록된 이 책을 읽은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심리시험>은 1923년에 작가로 데뷔한 에도가와 란포가 1925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가 청년기에 큰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도쿄 소재의 대학에 다니는 후키야 세이이치로는 하숙집 할머니가 안방 도코노마에 거액의 돈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고 완전 범죄를 계획한다. 마침내 할머니를 살해하고 할머니가 숨기고 있던 돈을 훔친 후키야는 경찰이 자신의 동급생인 사이토 이사무를 강력한 용의자로 의심하는 걸 알고 짐짓 안심한다. 이때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가 나타나 경찰에게 후키야와 사이토를 상대로 '심리시험'을 해보라고 제안하고 후키야는 이에 응한다. 


후키야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연습'만 제대로 하면 완벽하게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후키야의 예상과 달리 후키야가 연기한 '완벽함'이 후키야 자신의 뒤통수를 친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이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것과 달리 이 소설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밝힐 뿐 아니라 범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완전 범죄를 꿈꾸며 빠짐 없이 계획을 세운 범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꾀에 넘어가는 모습이 통쾌했다. 범인이 현장에 남긴 증거나 물리적인 정황을 이용해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범인의 심리를 이용해 범인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200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해 인기를 끈 심리 스릴러 장르의 효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붕 속 산책자>는 <심리시험>과 같은 해에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학교도 직장도 안 다니는 고다 사부로는 여러 하숙집을 전전하다 도쿄에 새로 지어진 하숙집인 '도에이칸'에 정착한다. 기이한 걸 좋아하는 고다는 새 하숙집이라서 아직 깨끗한 벽장 안에서 잠을 자거나 공상을 하다가 문득 천장 판자를 밀어본다. 그러자 판자가 위로 쑥 밀렸고, 밀린 판자 위의 공간, 즉 천장 위와 지붕 아래 사이의 공간이 나타났다. 고다는 그 후로 틈만 나면 천장 위로 올라가서 '지붕 속 산책'을 즐기며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를 걸어다니는 기분을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다는 그의 방과 맞은편에 있는 건물의 한쪽 구석 천장에 희미한 틈새가 있는 걸 발견한다. 틈새 사이로 보인 사람은 우연히도 고다가 도에이칸의 하숙인들 중에서 가장 미워하는 엔도였다. 


설마 천장에 난 틈 사이로 누가 날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엔도는 세상 모르는 표정으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고다는 자신이 숨기고 있는 비밀과 엔도가 지닌 어떤 물건을 결합하면 완전범죄를 꾸밀 수 있다는 걸 떠올리고 이를 실행한다. 고다의 범죄를 간파한 사람은 에도가와 란포의 페르소나인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다. 아케치는 의심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고다가 보인 사소한 행동만을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이는 영국의 추리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의 대표작 '셜록 홈스' 시리즈의 주인공 셜록 홈스의 추리 기법을 연상케 한다. 건물의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부 구조를 이용해 살인 계획을 세우고 완전 범죄를 꿈꾼다는 점에서 2017년에 읽은 에도가와 란포의 <유령탑>이 떠오르기도 했다. 


<도플갱어의 섬>은 이 책의 표제작이자 에도가와 란포가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연재한 장편 소설이다. 삼류 작가 히토미 히로스케의 꿈은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고 수백 수천 명을 동원해 지상 최대의 낙원, 꿈의 나라,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한데, 현실은 명색이 작가인데 싸구려 번역 하청이나 옛날이야기, 성인 소설 같은 것을 써서 그날 그날의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히토미는 자신과 꼭 닮은 M현 제일의 부호 고모다 겐자부로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고모다 겐자부로가 소유한 섬 '오키노시마'가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들기에 최적의 땅이라고 생각한 히토미는 M현의 고모다 지방에는 시체를 화장하는 풍습이 없다는 걸 이용해 미증유의 계획을 세운다. 고모다 겐자부로의 묘를 파서 (고모다 겐자부로의) 시체를 없애고 자신이 살아돌아온 고모다인 척하는 것이다. 


계획을 이루기 위해 히토미는 우선 자신은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고, 바다를 헤엄쳐 M현까지 가서 고모다 겐자부로의 묘를 찾아가 시체를 파내는 데까지 성공한다. 썩어가는 시체에서 옷을 벗겨내 그걸 자기 몸에 걸치고 고모다인 척하는 히토미. 결국 히토미는 자신이 고모다인 걸로 사람들을 속이는 데 성공하는데, 단 한 사람만은 히토미에게 속지 않고 히토미를 의심한다. 마음은 안타깝지만 원래의 자신을 없애면서까지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난 히토미는 끝내 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꿈꿔온 이상향을 완성하는 데 집중한다. 완벽한 유토피아를 만들려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지만 이 소설은 무려 90여 년 전에 쓰였다. 그 시절에 이미 인간의 한계와 완벽주의의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을 썼다는 점이 놀랍다.


<검은 도마뱀>은 에도가와 란포가 1934년에 연재한 장편 추리소설이다. 에도가와 란포의 페르소나인 아케치 고고로가 신출귀몰한 여도둑 검은 도마뱀(미도리카와 부인)과 대결을 벌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도쿄 G가(街)의 댄스홀. 뛰어난 미모와 화려한 춤솜씨, 매끄러운 쇼맨십을 자랑하는 댄스홀의 여왕 검은 도마뱀은 친하게 지내는 청년 아마미야 준이치의 부탁으로 그가 죽인 시체를 처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 최고의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와 여러 번에 걸친 두뇌 대결을 벌이게 된다. 이중에 가장 인상적인 대결은 오사카의 거물 보석상 이와세 상회의 주인 이와세 쇼베와 그의 딸 사나에를 둘러싼 대결이다. 


미도리카와 부인의 꿈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모두 모으는 것. 미도리카와 부인은 이와세 쇼베가 가지고 있는 일본 최고의 다이아몬드와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의 딸 사나에를 손에 넣기 위해 일부러 그들의 뒤를 밟아 그들과 같은 호텔에 투숙하는 데까지 성공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걱정한 이와세 쇼베가 일본 최고의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고용하는 바람에 계획을 이루기가 쉽지 않게 된다. 아케치 고고로와 미도라카와 부인은 변장과 인형이라는 동일한 트릭으로 서로 속고 속이는데, 이 과정에서 탐정과 범인 사이의 긴장감을 넘어선 남자와 여자 사이의 긴장감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반인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두뇌와 지략의 소유자인 두 남녀가 서로를 수렁에 빠뜨리고 또 그 수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책은 추리소설 독자로서도 재미있었지만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열렬한 팬으로서도 즐겁게 읽었다.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 '에도가와 코난'은 에도가와 란포의 '에도가와'와 영국의 추리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의 '코난'을 합쳐서 만든 이름이다(참고로 에도가와 란포는 미국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드가 앨런 포'를 일본식으로 바꿔서 만든 이름이다). 코난을 대신해 사건을 해결하는(?) 일본 최고의 명탐정 '모리 고고로'는 아케치 고고로를 변형해 만든 인물로 보인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동일 인물로 착각할 만큼 비슷한 외모를 이용해 주변 사람들을 속인다는 설정이나(쿠도 신이치와 쿠로바 카이토), 변장이나 인형 등을 활용해 도둑질을 한다는 설정(괴도 키드) 모두 <명탐정 코난>의 팬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마침 오늘 개봉한 <명탐정 코난> 극장판 새 시리즈 <명탐정 코난 : 감청의 권>을 보고 왔는데, 괴도 키드에게 납치된 코난이 엉겁결에 지은 가명이 '아서 히라이'였다. '아서'는 '아서 코난 도일'에서 따왔고 '히라이'는 에도가와 란포의 본명인 '히라이 타로'에서 따왔다고 영화 후반에 나온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에도가와 란포의 본명이 '아서 히라이'인 걸 몰랐다면 코난이 갑자기 왜 자신의 가명을 '아서 히라이'라고 지었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을 애정하는 독자이자 <명탐정 코난>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팬으로서 앞으로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꼼꼼히 읽어나갈 생각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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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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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의 소설가, 루시아 벌린의 단편집 <청소부 매뉴얼>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려면 우선 작가 루시아 벌린의 생애에 관해 알아야 한다. 1936년생인 루시아 벌린은 24살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미국 서부 탄광촌과 칠레 등지에서 10대를 보냈고, 32살에 이미 세 번 이혼했고 네 아들을 낳았으며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해야 했던 루시아 벌린은 버클리와 오클랜드에서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원,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했고 그러면서도 글을 썼다.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시아 벌린은 평생에 모두 7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청소부 매뉴얼>에는 그중 43편이 실려 있고, 대부분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은 여러 집을 전전하며 청소부 일을 하는 여자의 고단한 삶이 자세히 나온다. 집주인들은 청소부가 청소를 완벽하게 하는지보다 물건을 훔치지는 않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저자는 일을 시작할 때 면저 시계나 반지, 비싼 핸드백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한다. 나중에 그들이 집에 돌아와 물건의 소재를 확인할 때면 차분하게 '베개 밑, 아보카도 색 변기 뒤' 하는 식으로 위치를 말해주기 위해서다. <나의 기수>와 <관점>은 저자가 응급실 또는 내과 병원에서 일할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에인절의 빨래방>은 저자가 싱글맘으로 네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살던 시절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저자의 분신으로 보이는 '나'가 한 주에 몇 번씩 기저귀를 빨러가는 에인절 빨래방은 근처에 사는 노인들과 인디언들, 멕시코인들,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사랑방이다. 여기서 만난 어떤 할머니는 '나'에게 집 열쇠를 주면서, 언젠가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죽은 줄 알고 시신을 거두어달라고 부탁한다. 어떤 할아버지는 거울로 '나'의 손을 흘끗흘끗 보다가 마침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농을 건네며 치근댄다. 할아버지는 자꾸만 '나'가 인디언인 것 같다고 우기고, '나'는 할아버지의 눈길을 피하면서 벽에 붙은 게시문을 읽는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아기 침대 팝니다 - 아기를 사산했음."


<호랑이에게 물어뜯기다>는 저자가 첫 번째 남편과 헤어진 후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울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는 아들 벤을 데리고 사촌인 벨라 린의 집을 방문한다. '나'는 벨라 린에게 열일곱 살 때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남자 조가 자신을 떠났고, 조와의 두 번째 아이가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벨라 린은 '나'에게 낙태 수술을 제안하고, 그 길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낙태 수술을 받으러 간다. <그녀의 첫 중독치료>는 저자 자신의 알코올 중독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나'는 장남과 차남에게 삼남과 사남을 맡기고 중독 치료자를 위한 재활 병동에 들어간다. 재직 중인 학교에는 난소종양 수술을 받으러 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를 전제로 하는 문학이지만,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쓰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인생은 소설이 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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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천재 작곡가의 뮤직 로드, 잘츠부르크에서 빈까지 클래식 클라우드 7
김성현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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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만큼 유명하고 모차르트만큼 오해받는 아티스트가 또 있을까. 팟캐스트 '김태훈의 책보다 여행' 모차르트 편을 들으며 든 생각이다. 음악에 문외한인 사람도 모차르트는 알 만큼 모차르트는 유명한 음악가다. 나 역시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모차르트를 배웠고, 방과후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에도 통과의례처럼 모차르트의 곡을 익혔다. 그런 나조차 모차르트 하면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뽐낸 타고난 천재, 도전하는 일마다 성공했던 팔방미인, 라이벌 살리에리의 질투와 음모로 인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비운의 사내 정도의 인상이 전부였다. 


클래식 클라우드 <모차르트> 편의 저자 김성현은 이러한 인상 또는 이미지가 대체로 오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책에서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비롯해 모차르트가 연주 여행을 하고 작곡의 영감을 얻은 독일 뮌헨,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 밀라노 등을 직접 발로 누빈 여정을 소개한다. 아울러 수많은 자료와 연구 문헌을 조사해 찾아낸 모차르트의 생애와 음악에 관한 진실을 밝힌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고 음악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흐릿하고 모호한 인상으로부터 벗어나, 모차르트의 맨얼굴, 진정한 실체를 만날 수 있었다. 


남들이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4쪽) 


모차르트를 이해하려면 보통 사람과는 달랐던 복잡다단한 그의 생애부터 알아야 한다. 모차르트는 1756년에 출생해 1791년에 사망했다. 모차르트는 35년 생애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년 2개월 2일을 여행으로 보냈다. 모차르트의 생애에는 세 번의 중요한 여행이 있다.  첫 번째 여행은 어린 시절 아버지, 누나와 함께 떠난 '1차 그랜드 투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나름 유명한 궁정 음악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교육자였다. 일찌감치 아들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만 6살이 되던 해인 1762년에 모차르트와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르를 데리고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여행을 떠났다. 말이 여행이지 사실상 오늘날 뮤지션들이 하는 순회공연에 가까웠다. 왕과 귀족들 앞에서 모차르트 남매가 연주를 하는 것이 여행의 주된 일정이었다. 이 여행은 장장 3년 5개월 하고도 20일, 총 1269일 동안 이어졌다. 이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 가족은 레오폴트의 연수입의 몇 배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고 유럽 전역에 모차르트의 뛰어난 재능을 알렸다. 모차르트 또한 유럽 각지의 최고 수준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안목을 키우고 기량을 갈고닦았다.


두 번째 여행은 십 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떠난 '2차 그랜드 투어'다. 유럽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모차르트 가족은 모차르트의 성공을 시기한 기성 음악가들이 모차르트에 관한 비방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신동 음악가'가 아닌 '오페라 작곡가'로 키우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모차르트와 함께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향한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를 돌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들로부터 최신 음악의 조류를 배우고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유력 인사들 앞에서 연주를 선보이며 이름을 알리고 연회를 즐기며 문화를 익혔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공부하는 동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취업 자리를 알아보았다. 이 두 차례에 걸친 그랜드 투어는, 요즘으로 치면 현지 유학 겸 구직활동이었던 셈이다.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모차르트가 1756~1777년에 유럽 전역과 이탈리아로 두 차례에 걸쳐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 시기를 '모차르트의 수련기'라고 부른다. 모차르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장기간의 힘든 수련기를 거치면서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111쪽) 


세 번째 여행은 이십 대 시절 어머니와 함께 떠난 구직 여행이다. 두 번의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그만한 실력과 명성이면 순조롭게 취업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예상과 달리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는 자신을 받아줄 만한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차르트는 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이 여행은 처음부터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재능을 칭찬해주고 자신을 귀여워해줬던 사람들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해보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신동'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의 모차르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레오폴트는 점점 더 아들을 채근했고, 그럴수록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하라는 구직 활동은 안 하고 연애에 빠져들었다. 결국 힘든 여행에 지친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모차르트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차르트는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고 프리랜서 음악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멀쩡한 '정규직'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한 게 여간 아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고정된 후원자나 꼬박꼬박 급료가 나오는 직장 없이도 자신의 경력을 차근차근 잘 만들어나갔다. <후궁 탈출>을 시작으로 <대미사>, <마술피리>,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같은 오페라 작품이 연이어 대성공을 거두며 모차르트의 명성은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모차르트의 활동 반경은 잘츠부르크와 빈을 넘어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라하로 점차 넓어졌고, 수입 또한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문제으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상류층과 어울리며 생활한 탓인지 화려한 생활을 좋아했고 모차르트는 고가의 악기와 의상, 신발, 가구, 말과 마차, 와인과 음식 등을 엄청나게 사들였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선 스스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과로에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기도 한 듯, <레퀴엠>을 작곡하던 도중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숨 가쁘게 쫓아온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는 '타고난 천재'보다는 '만들어진 천재'에 가깝다. 그를 천재로 만든 건 우선 아버지 레오폴트였고 그다음엔 '18세기 유럽'이라는 드넓은 세상이었다. (314쪽)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차르트가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다행히 모차르트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봐주고 기꺼이 지원해준 아버지 레오폴트가 있었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도 그 방식이 고루한 편견이나 인습을 따르는 것이었다면 아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유럽에서 가장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길 원했고 그러려면 비좁은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유럽 전역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두 번이나 여행을 감행했다. 오늘날로 치면 모차르트는 평생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아버지에게 직접 '홈스쿨링'을 받고 '해외 원정 유학'까지 다녀온 셈이다. 모차르트라는 불세출의 천재를 키운 건 팔 할이 아버지였고 여행이었다.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도 성장했지만 인간으로서도 성숙했다. 모차르트는 여행을 하면서 자라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만 6세 때부터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기차도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이다. 어른에게도 불편한 마차를 타고 먼 길을 누비는 여정은 어린 모차르트에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같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일이 힘에 부치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때로는 부담과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레슨이나 연습 따위는 까맣게 잊고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실컷 놀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평범한 소년이나 청년들처럼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 연애하는 꿈도 꿔봤을 것이다. 모차르트에게 여행은 이런 부담이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부담이나 욕망에 못이기는 척 넘어가보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구직 여행 당시 모차르트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몇 명의 여인을 만나고 그 중 한 명과는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결국 아버지의 만류로 결혼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지만,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모차르트가 느낀 희로애락은 그의 음악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모차르트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반짝 스타가 아닌,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위대한 음악가로 만든 것 역시 여행이었다. 모차르트는 연주자로서의 기량도 뛰어났지만 작곡가, 창작자로서의 영감과 창의성도 대단했다. 이는 모차르트가 어려서부터 유럽 전역을 누비면서 수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덕분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최고의 음악인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좋은 영감과 창의성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보통 음악가들보다 한참 커버린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는 너무나 비좁은 무대였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생활하는 걸 답답하게 여겼다. 잘츠부르크의 음악가들은 전통에 갇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한심해 했다. 모차르트의 이런 태도는 결코 오만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오스트리아는 물론 당대 유럽 전역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 수준의 작품이었다. 모차르트가 현재까지도 많은 음악가들의 귀감이 되고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모차르트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여행을 하면서 누구보다 많이 보고 넓게 배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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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1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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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고양이> 이후 1년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죽음에 관한 소설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1994년에 <타나토노트>라는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크게 새롭진 않았으나,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이야기라는 점은 신선했다.


<죽음>은 추리 소설가 '가브리엘 웰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브리엘은 평소처럼 아침에 눈을 떠 집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의사를 찾아간 가브리엘은 진료소에서 자신의 우상인 1930년대 미국 배우 헤디 라마를 빼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자의 이름은 뤼시 필리피니. 자신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매라고 소개한 뤼시는, 아무래도 가브리엘이 죽은 것 같다며 가브리엘을 도와 가브리엘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함께 찾기로 한다.


가브리엘을 죽인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들 중 가장 유력해 보이는 인물은 총 세 명이다. 가브리엘의 쌍둥이 형 토마, 가브리엘의 출판사 대표 알렉상드르 드 빌랑브뢰즈, 그리고 가브리엘을 적대시하는 평론가이자 작가 장 무아지다. 가브리엘은 용의자 세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경쟁 상대였다고만 여겼던 쌍둥이 형 토마는, 알고보니 그 누구보다 가브리엘을 염려하고 또 지원했다. 가브리엘을 이용해 돈 벌 궁리만 하는 줄 알았던 출판사 대표 빌랑브뢰즈는, 알고보니 그 누구보다 가브리엘의 재능을 높게 평가해 가브리엘 사후 가브리엘처럼 글을 쓰는 인공지능을 개발할 생각을 할 정도였다. 대중 앞에서 가브리엘을 공공연히 비난했던 평론가 무아지는, 알고보니 그 누구보다 가브리엘의 재능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이제야 그들의 진심을 알게 되었지만, 죽음의 강을 건너버린 지금, 돌이킬 방법은 없다. 그저 저승에서 그들의 안녕을 기원할 뿐이다. 가브리엘은 끝내 자신을 죽인 범인을 알게 되고,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푸는 데 성공한다. 원래의 육체를 되찾을 길은 없지만,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매 뤼시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로서 존재하기로 결심한다.

<죽음>은 그동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선보인 작품들과 달리,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 같은 면모가 많이 보인다. 주인공 가브리엘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마찬가지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점, 장르 소설 작가라는 점, 범죄학, 생물학, 심령술 등에 두루 관심이 많은 점 등이 그렇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으나 자국인 프랑스에선 장르 소설 작가라고 폄하당하고, 외국에선 영미권 작가가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다는 설정은, 혹시 베르나르 베르베르 자신의 발언이 아닐지. 이 밖에도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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