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올클리어 1 ㅣ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9년 2월
평점 :
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 여행 연작 마지막 작품인 <올 클리어>를 완독했다. <올 클리어>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연작의 네 번째 작품인 <블랙아웃>으로부터 '이어지는' 소설이다. 다시 말해, <블랙아웃>을 읽고 나서 <올 클리어>를 읽어야지, <블랙아웃>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올 클리어>를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블랙아웃>을 읽지 않은 채로 <올 클리어>를 읽었다가 낭패 봤다는 사람을 실제로 여럿 봤다.)
<블랙아웃>, <올 클리어>의 설정은 이렇다. 때는 2060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과에는 역사학자가 자신이 맡은 시대로 직접 시간 여행을 갈 수 있는 실험실이 있다. 학부생인 폴리, 에일린, 마이크도 시간 여행을 앞두고 있다. 벌써 여러 번 시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폴리는 대공습이 한창인 런던 한복판으로 가서 민간인들의 생활을 관찰할 예정이다. 시간 여행이 처음인 에일린은 대공습 당시 런던을 떠난 피난민 아이들의 생활을 관찰할 계획이다. 마이크는 미국인 종군 기자로 가장해 진주만 공습 당시로 갈 예정이다. 이를 위해 미국인처럼 말하는 임플란트까지 심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들이 출발하기 직전에 역사학자들의 시간 여행 일정이 대거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마이크는 진주만이 아니라 됭케르크로 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폴리, 에일린, 마이크는 동시에 1940년대 영국으로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된다.
<블랙아웃>은 같은 시기에 각각 다른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폴리, 에일린, 마이크가 임무를 마치고 옥스퍼드로 복귀하려고 하지만 강하 지점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어 돌아가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이 런던에서 만나 사태를 극복하려 하지만 실패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올 클리어>는 여전히 강하 지점을 찾지 못한 세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대공습이 한창인 런던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폴리가 앞으로 폭탄이 언제 어디에 떨어질지 알고, 백화점에서 돈도 벌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대로 강하 지점을 영영 찾지 못하거나 구조대를 만나지 못하면 이들은 폭탄이 언제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 두려워하며 일하러 가고 매일 밤 공포에 떨며 방공호에서 잠을 청해야 할 것이다.
런던에서는 던워디 교수가 폴리, 에일린, 마이크의 상황을 드디어(!) 알아챈다. 폴린을 짝사랑하는 콜린 역시 던워디 교수의 연구실 주변에 머무르다 폴리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던워디 교수와 콜린은 한시라도 빨리 폴리, 에일린,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들을 구하려 하지만, 이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들 셋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던워디 교수와 콜린 또한 과거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던워디 교수는 학생들을 구하러 과거로 떠나고, 콜린 역시 던워디 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과거로 떠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폴리, 에일린, 마이크를 만날 수 있을까. 과연 이들 모두는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1,2권 합해서 1100여 페이지가 훨씬 넘는 이 책을 이틀 만에 독파하고 난 지금. 머릿속이 무척 복잡하다. 결말은 과연 희극일까. 등장인물 모두 자신들이 바라던 결말을 맞기는 했으나, 독자의 시각에 따라서는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콜린은 과연 누구일까. 결말 부분에 나오는 대사를 보면 콜린과 에일린의 관계는 비교적 명확하게 알 수 있지만, 콜린과 랭 대위, 콜린과 고드프리 경의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다만 독자로 하여금 유추하게 만들 뿐이다. 나로서는 콜린이 랭 대위, 고드프리 경과 혈연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폴리가 이성을 볼 때 분명하고 일관된 취향(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며 웃는 모양과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줄줄 외우는 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겠다 ^^
소설을 다 읽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유튜브에서 코니 윌리스의 인터뷰 영상을 몇 개 찾아봤다. 어느 영상에서인가 코니 윌리스는 전쟁 당시 민간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듯한 발언을 듣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책을 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의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절절하게 알 수 있다. 갓난 아기부터 몸이 불편한 노인들까지 매일 밤 등화관제 의무를 지키고 방공호에서 몸을 숨겨야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폭탄의 공포 속에서 매일 직장으로 출근하고 가정을 돌보고 폭격을 맞은 마을을 정비하고 건물의 잔해 속에서 사람들을 구했다.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민간인들은 집에서 편안히 잠자고 먹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코니 윌리스는 이 책의 맨 첫 장에 이 책을 모든 구급차 운전사들, 화재 감시원들, 공습 감시원들, 간호사들... 등등의 민간인들에게 바친다고 썼다.
이 중에는 물론 여성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에 남성들만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여성들 중 다수가 군인으로서 참전했고, 간호사, 약사, 운전사, 응급 구조대원, 암호 해독 요원 등으로 채용되어 활동했다(새라 워터스의 소설 <나이트 워치>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응급 구조 대원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이 당시에 병원에서 약제사로 봉사하며 폭격을 맞아 다친 사람들을 구했다(이 소설에도 그가 등장한다!). 방공호에서 노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미처 방공호로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던 것도 여성들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와 역사는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가차 없이 지운다. 뭔가를 한 여성의 이야기가 무엇도 하지 않은 남성의 가치를 위협하기라고 하는 듯이.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는 SF이면서 역사 소설의 면모가 강하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활용했다는 점 외에는 SF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SF 팬들은 이 소설을 가리켜 제대로 된 SF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SF 팬이 아닌 나로서는 이 소설이 다른 SF나 다른 코니 윌리스의 소설에 비해 훨씬 잘 읽히고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인류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결국 (이미 일이 벌어진) 과거로 갈 텐데,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어쩌면 코니 윌리스야말로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가 아닐까. 그래서 이토록 멋진 시간 여행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코니 윌리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옥스퍼드 시간 여행 연작이 이대로 끝이라니 너무 아쉽다. 부디 후속편이 나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