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써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 더 이상 충고라는 이름의 오지랖은 사절합니다
유민애(미내플)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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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자신의 본능을 따르기보다는 주변의 압력에 굴복할 때가 많다. 학교나 직장, 결혼 등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도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지 않고 가족과 친구, 지인의 충고나 조언을 진지하게 고려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주문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주문에 맞춰서 주문한다. 티셔츠 한 장을 살 때도 '가족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같은 생각을 한다. ​ 


이런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고민 상담과 자기 계발을 전문으로 하는 유튜브 '미내플'의 운영자 유민애의 책 <신경써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이다. 올해로 서른세 살인 저자는 나름 다사다난한 젊은 날을 보냈다.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부모님의 조언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1년 만에 그만뒀다. 대학 졸업 후 경제 전문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온라인 뉴스 에디터로 일하다가 4년 만에 그만뒀고, 스타트업에서 홍보 담당자로 일하다가 1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고향에서 부모님을 도와 사과를 팔다가 포기했고,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다가 역시 그만뒀다. ​ 


저자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별별 말을 다 들었다. "네 나이와 스펙에 거기보다 더 좋은 직장 없다", "빨리 결혼해야지. 서른 지나면 아무도 너 안 데려가" 같은 말들. 그런 말들에 상처받아 운 날도 많았다. 지금은 그런 말들이 정말 나를 위해서, 걱정해서 해준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친절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오지랖을 부렸을 뿐이다. 말하는 건 돈이 안 든다는 이유로 약자인 나를 상대로 스트레스를 푼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고, 돈이 더 많고, 지위가 더 높은 사람이었다면 그런 충고나 조언을 할 수 있었을까. 결국 그 또한 갑질이었다.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어릴 적 부모님에게 혼날 때 들었던 말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넌 못 해" "넌 안 돼" "넌 멍청해" "넌 게을러" 같은 말들이 마음에 남아서, 회사에 이력서를 내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못하게 막았다. 학창 시절 친구들한테 들었던 말이나 남자친구한테 들었던 말들도 상처로 남아서 저자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무리를 하면 무리하는 것 같다고 욕먹고, 무리하는 걸 그만두면 성의가 없다고 욕먹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줬다면 상대도 혼란스럽지 않고 나도 괜히 힘 빼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진짜 내 삶을 살고 싶으면 일단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방 청소를 해보는 건 어떨까. 저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의 책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읽고 집 정리를 시작했다.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옷과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을 정리하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눈에 보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나의 삶을 더욱 나답게 살기 위한 저자만의 팁이 여럿 나온다. 쉽고 명쾌한 조언이 마음에 쏙쏙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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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의 바닥
앤디 앤드루스 지음, 김은경 옮김 / 홍익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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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수영장에 갈 일이 별로 없지만 어릴 때는 여름만 되면 수영장으로 놀러 갔다. 수영장에 가면 부모님은 항상 수영장에서 가장 물이 얕은 어린이 풀장에서만 놀라고 말씀하셨다. 수영을 하더라도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지 말고 어른들이 볼 수 있는 물 위에서 놀라고 당부하셨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어린이였던 나는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어린이 풀장에서만 안전하게 놀았다. 그래서일까. 몇 년을 배웠는데도 수영 실력이 별로인 건. 물 근처에 가지도 않으면서 지레 겁먹고 무서워하는 건.


베스트셀러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의 작가 앤디 앤드루스의 신작 <수영장의 바닥>을 읽으니 그 시절이 절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 저자는 어린 시절 수영장에서 겪은 일로 운을 뗀다. 저자도 어릴 적에 나처럼 여름만 되면 수영장으로 놀러 가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 사이에서 물속으로 일단 잠수했다가 물 밖으로 가능한 한 높이 솟구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러 친구들이 경쟁했지만 승자는 항상 아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케빈이 전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 새로운 승자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케빈이 승리한 방식은 기발하면서도 단순했다. 이전까지 친구들이 물속에서 헤엄을 치다가 순식간에 물 밖으로 치솟았다면, 케빈은 물속에서 헤엄을 치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을 박차고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바닥을 박차는 힘이 가해지면 물 밖으로 나왔을 때의 높이가 더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때까지 저자와 친구들은 하나의 방식만을 고집했다. 저자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승리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언제나 더 새로운 방식이 있고, 그 새로운 방식을 먼저 시도해 성공하는 사람이 새로운 승자가 될 수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 수영장 바닥에서 배운 교훈은 우리의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들 성공하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성공하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저마다 비슷비슷한 선택을 한다. 남들과 비슷비슷한 선택을 해서는 성공할 수도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다. 남다른 성공, 남다른 행복을 원한다면 남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모두가 정해진 방식으로 점프할 때, 자신은 반대쪽으로 돌아가 바닥을 치고 더 높이 솟구칠 각오와 재치,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책에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례가 여럿 나온다. 이 중에는 오늘날 가장 강력한 콘텐츠 파워를 자랑하는 디즈니 사의 창업자 월트 디즈니의 이야기도 있다. 디즈니는 젊은 시절 첫 직장이었던 신문사에서 '상상력이 부족하고 독창성이 결여돼 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적이 있다. 만약 이때 디즈니가 해고 이유를 받아들이고 만화를 그만뒀다면 지금의 디즈니 신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바닥까지 내려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만 승리의 여신은 미소를 보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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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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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버튼의 전작 <미니어처리스트>가 좋았기에 차기작인 <뮤즈>도 주저하지 않고 읽었다. <미니어처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낯선 곳에서 생활하게 된 여성 주인공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심쩍은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여성, 여성 예술가, 유색 인종 문제에 대한 인식은 전작보다 훨씬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야기는 1967년 영국 런던과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를 오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967년 영국 런던. 영국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나드 토바고 출신의 20대 여성 오델 바스티엔은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영문학 학위를 받고 작가가 되기를 꿈꾸며 런던으로 왔지만,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친구가 소개해준 구두점에서 일하며 하루 하루를 근근이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델은 '설마 되겠어?"라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보내본 런던 스켈턴 미술관으로부터 타이피스트로 채용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새 직장에 만족한 오델은 얼마 후 친구의 결혼식 파티에서 로리 스콧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오델이 미술관에서 일한다고 하자 로리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유품 중에 그림 한 점이 있다며 그걸 봐달라고 부탁한다.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술품 거래상 해럴드 슐로스는 아내 세라와 외동딸 올리브를 데리고 말라가에 정착한다. 올리브는 얼마 전 부모 몰래 유명 미술 학교에 자신의 그림을 보내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여자는 좋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버지 앞에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슐로스 가족의 집으로 이삭과 테레사가 찾아온다. 남매인 이삭과 테레사는 슐로스 가족의 허드렛일을 해주겠다고 하고 슐로스 가족은 이를 받아들인다. 올리브는 이 남매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둘에게 홀딱 반해버린다. 연상인 이삭에게는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나이가 비슷한 테레사에게는 친구로서의 우정을 기대한다. 이삭을 볼 때마다 영감이 떠오른 올리브는 그걸 그림으로 그린다. 어느 날 올리브는 자신의 그림을 테레사에게 보여주고, 테레사는 이 그림을 세상에 발표하자고 하지만 올리브는 거절한다. 여자는 좋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던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이루는 두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델과 올리브는 여러 면에서 닮았다. 둘 다 이방인이고,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사랑을 쉽게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 여자로부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지원을 받지만 그 또한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으면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델은 자신에게 작가가 될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 투고조차 하지 않고, 올리브는 미술 학교에 등록조차 안 한다. 남들이 그들의 작품을 보고 칭찬해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델과 올리브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나는 못 해', '나는 할 수 없어'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포기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그리고 오델과 올리브로 하여금 '나는 못 해',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게 만든 주변 사람들의 말 - '여자는 좋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 - 을 생각하니 더욱 답답했다.


어디 예술가뿐인가. 여자는 정치인이 될 수 없고, 법조인이 될 수 없고, 의사가 될 수 없고, 체육인이 될 수 없고... 등등의 수많은 편견이 역사상 존재했고 지금도 남아있다. 여성들은 그러한 말들을 이겨내왔고, 지금도 이겨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올리브의 뮤즈인 이삭이 올리브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롤하는 대목이다. 올리브는 자신이 이삭을 너무 사랑해서 이삭에게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지만, 이삭은 올리브가 자신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게 불편하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타인이 멋대로 그린 내 그림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평가되는 일이 마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에게 행해졌다. 수많은 남성 화가들이 여성을 뮤즈로 삼아 작품을 완성하고 그것들을 공개해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다(이 중에는 여성의 누드를 소재로 한 작품도 적지 않다). 그 작품들의 뮤즈였던 여성들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적나라한 모습이 노출되고, 입방아에 오르고, 부정확한 평판을 얻었지만,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졌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아내나 애인, 여자 형제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소개해 명성을 얻은 예술가들도 많다고 한다.


소설 자체만 보면 1967년 영국 런던의 이야기와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미스터리한 사건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는 방식의 스릴러 소설인데, 구석구석을 잘 살펴보면 스릴 이상으로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곳곳에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왜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는가. 여성은 왜 욕망의 주체가 될 수는 없는가. 남성은 원래 이렇고 여성은 원래 이렇다는 생각은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재생산하고 있는가. 소설로서의 재미는 물론이고 의미도 적지 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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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클리어 1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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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니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 여행 연작 마지막 작품인 <올 클리어>를 완독했다. <올 클리어>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연작의 네 번째 작품인 <블랙아웃>으로부터 '이어지는' 소설이다. 다시 말해, <블랙아웃>을 읽고 나서 <올 클리어>를 읽어야지, <블랙아웃>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올 클리어>를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블랙아웃>을 읽지 않은 채로 <올 클리어>를 읽었다가 낭패 봤다는 사람을 실제로 여럿 봤다.)


<블랙아웃>, <올 클리어>의 설정은 이렇다. 때는 2060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과에는 역사학자가 자신이 맡은 시대로 직접 시간 여행을 갈 수 있는 실험실이 있다. 학부생인 폴리, 에일린, 마이크도 시간 여행을 앞두고 있다. 벌써 여러 번 시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폴리는 대공습이 한창인 런던 한복판으로 가서 민간인들의 생활을 관찰할 예정이다. 시간 여행이 처음인 에일린은 대공습 당시 런던을 떠난 피난민 아이들의 생활을 관찰할 계획이다. 마이크는 미국인 종군 기자로 가장해 진주만 공습 당시로 갈 예정이다. 이를 위해 미국인처럼 말하는 임플란트까지 심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들이 출발하기 직전에 역사학자들의 시간 여행 일정이 대거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마이크는 진주만이 아니라 됭케르크로 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폴리, 에일린, 마이크는 동시에 1940년대 영국으로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된다.


<블랙아웃>은 같은 시기에 각각 다른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폴리, 에일린, 마이크가 임무를 마치고 옥스퍼드로 복귀하려고 하지만 강하 지점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어 돌아가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이 런던에서 만나 사태를 극복하려 하지만 실패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올 클리어>는 여전히 강하 지점을 찾지 못한 세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비록 대공습이 한창인 런던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폴리가 앞으로 폭탄이 언제 어디에 떨어질지 알고, 백화점에서 돈도 벌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대로 강하 지점을 영영 찾지 못하거나 구조대를 만나지 못하면 이들은 폭탄이 언제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 두려워하며 일하러 가고 매일 밤 공포에 떨며 방공호에서 잠을 청해야 할 것이다.


런던에서는 던워디 교수가 폴리, 에일린, 마이크의 상황을 드디어(!) 알아챈다. 폴린을 짝사랑하는 콜린 역시 던워디 교수의 연구실 주변에 머무르다 폴리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던워디 교수와 콜린은 한시라도 빨리 폴리, 에일린,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들을 구하려 하지만, 이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들 셋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던워디 교수와 콜린 또한 과거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던워디 교수는 학생들을 구하러 과거로 떠나고, 콜린 역시 던워디 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과거로 떠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폴리, 에일린, 마이크를 만날 수 있을까. 과연 이들 모두는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1,2권 합해서 1100여 페이지가 훨씬 넘는 이 책을 이틀 만에 독파하고 난 지금. 머릿속이 무척 복잡하다. 결말은 과연 희극일까. 등장인물 모두 자신들이 바라던 결말을 맞기는 했으나, 독자의 시각에 따라서는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콜린은 과연 누구일까. 결말 부분에 나오는 대사를 보면 콜린과 에일린의 관계는 비교적 명확하게 알 수 있지만, 콜린과 랭 대위, 콜린과 고드프리 경의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다만 독자로 하여금 유추하게 만들 뿐이다. 나로서는 콜린이 랭 대위, 고드프리 경과 혈연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폴리가 이성을 볼 때 분명하고 일관된 취향(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며 웃는 모양과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줄줄 외우는 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겠다 ^^


소설을 다 읽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유튜브에서 코니 윌리스의 인터뷰 영상을 몇 개 찾아봤다. 어느 영상에서인가 코니 윌리스는 전쟁 당시 민간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듯한 발언을 듣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책을 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의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절절하게 알 수 있다. 갓난 아기부터 몸이 불편한 노인들까지 매일 밤 등화관제 의무를 지키고 방공호에서 몸을 숨겨야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폭탄의 공포 속에서 매일 직장으로 출근하고 가정을 돌보고 폭격을 맞은 마을을 정비하고 건물의 잔해 속에서 사람들을 구했다.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민간인들은 집에서 편안히 잠자고 먹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코니 윌리스는 이 책의 맨 첫 장에 이 책을 모든 구급차 운전사들, 화재 감시원들, 공습 감시원들, 간호사들... 등등의 민간인들에게 바친다고 썼다.


이 중에는 물론 여성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에 남성들만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여성들 중 다수가 군인으로서 참전했고, 간호사, 약사, 운전사, 응급 구조대원, 암호 해독 요원 등으로 채용되어 활동했다(새라 워터스의 소설 <나이트 워치>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응급 구조 대원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이 당시에 병원에서 약제사로 봉사하며 폭격을 맞아 다친 사람들을 구했다(이 소설에도 그가 등장한다!). 방공호에서 노인과 아이들을 돌보고, 미처 방공호로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던 것도 여성들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와 역사는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가차 없이 지운다. 뭔가를 한 여성의 이야기가 무엇도 하지 않은 남성의 가치를 위협하기라고 하는 듯이.


<블랙아웃>과 <올 클리어>는 SF이면서 역사 소설의 면모가 강하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활용했다는 점 외에는 SF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SF 팬들은 이 소설을 가리켜 제대로 된 SF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SF 팬이 아닌 나로서는 이 소설이 다른 SF나 다른 코니 윌리스의 소설에 비해 훨씬 잘 읽히고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인류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결국 (이미 일이 벌어진) 과거로 갈 텐데,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어쩌면 코니 윌리스야말로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가 아닐까. 그래서 이토록 멋진 시간 여행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코니 윌리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옥스퍼드 시간 여행 연작이 이대로 끝이라니 너무 아쉽다. 부디 후속편이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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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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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밝고 재미있어서 좋다.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에 실린 소설들도 대체로 명랑하고 유쾌하다. 이를테면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가 그렇다. 화자인 '나'는 취업난을 뚫고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성희롱을 당한다. 이러면 덜할까 싶어 머리를 스포츠머리보다 짧게 잘랐더니 이번에는 은근한 희롱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 하필 이때 그동안 함께 옥상에서 담배 피우며 수다를 떨었던 회사 언니들이 연달아 시집을 간다며 사표를 냈다. 어쩌면 나만 두고 이럴 수 있느냐고 묻자 언니들이 주뼛주뼛 낡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제목은 <규중조녀비서>. 소원을 빌면 남편이 나타나는 신비의 책이라나 뭐라나. ​ 


한 벌의 웨딩드레스를 거쳐간 44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웨딩드레스44>, 한국과 일본, 중국을 아우르며 활동한 가왜(假倭) 은열을 동경하던 여성이 한국과 일본, 대만, 호주를 아우르는 환태평양 밴드의 멤버로 활동하는 <알다시피, 은열>도 재미있다. 지하도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목덜미를 물리는 바람에 좀비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원히 77사이즈>, 잘린 귀에서 과자가 자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해피 쿠키 이어>, 이혼을 결정한 친구의 살림을 나눠 받게 된 고등학교 동창들의 이야기인 <이혼 세일>, 글자 그대로 많이 먹는 나라인 대식국(大食國)과 적게 먹는 나라인 소식국(小食國)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을 그린 <이마와 모래>도 흥미롭다. ​ 


<효진>과 <보늬>는 마냥 밝고 유쾌하지만은 않다. <효진>은 화자인 효진이 '너'에게 건네는 말의 형태로 된 소설이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효진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으나 바랐던 일들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는 일본에서 제과를 배우고 있다. <보늬>는 과로로 돌연사한 언니를 기리기 위해 돌연사 맵을 만드는 보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작품 모두 죽어라 공부하고 밤낮없이 일했던 두 여성이 삶을 충분히 만끽할 기회도 누리지 못한 채 원래의 공동체에서 밀려나거나 급기야 목숨을 잃는 모습을 그린다. 팝핑 캔디처럼 가볍게 톡톡 튀는 이야기들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무겁고 아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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