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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 무례한 세상 속 페미니스트 엄마의 고군분투 육아 일기
박한아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9월
평점 :
페미니스트 엄마는 아들을 어떻게 키울까. 박한아의 책 <남자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는 페미니스트인 저자 박한아가 네 살 난 아들 바당이를 키우면서 경험한 일들, 얻게 된 생각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아이의 성별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저자가 임신 소식을 전하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이의 성별을 궁금해 했다. 아들이라고 전하자 들어오는 선물이 죄다 파란색으로 바뀐 정도는 예사였다. 남자애들은 때려야 한다느니, 남자애들은 더 크기 전에 기를 꺾어놔야 한다느니 같은 말을 조언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끔찍했다. 여자로서 살아가는 세상도 끔찍하지만 남자로서 살아가는 세상도 만만찮게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아이에게 분홍색이나 꽃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혔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가관이었다. "여자애처럼 생겼네"는 괜찮은 수준이고, "얘 정말 아들 맞아요?", "엄마가 딸 갖고 싶은가 보다. 여동생 낳아달라고 해." 같은 말을 들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뾰족한 대답이 나갔다. 다들 생각 좀 하고 말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때로는 저자 안에 남아있는 성차별적인 사고방식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날 아이가 쇼핑몰에서 한 가게에 걸려 있던 핑크색 샤스커트를 보고 사달라고 했을 때, 저자는 황급히 아이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 그 자리를 떴다. 아이가 여자와 남자의 몸에 관한 호기심을 드러냈을 때에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심 당황했다. 아이가 성기에 대해서 물으면 '누구는 있고 누구는 없다'고 얘기하지 말고 '모두 있다'고 말하라는 조언이 유용했다. 뭉뚱그려 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라는 조언도 도움이 되었다.
아이가 건강한 성관념, 성인지 감수성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은 굴뚝 같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언제부터인가 남자 아이들이 교사를 성희롱하고, 엄마의 영상을 찍어 '엄마 몰카'라는 제목으로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고, 같은 반 여자 아이에게 '김치녀' '느금마' '앙 기모띠' 같은 말을 수시로 내뱉는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보인다. 그런 기사를 볼 때면 저자는 이 험한 세상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함을 느낀다. 모부는 성차별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도,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TV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흡수하게 되는 성차별적 관념이나 편견들까지 모부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저자의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니 비혼 무자녀인 나조차도 참 답답하고, 답이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아이가 어려서 모부의 말을 잘 듣는다 해도 갈수록 친구들이나 미디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텐데, 과연 아이가 올바른 성관념을 지닌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지, 잘못된 성관념을 전파하는 미디어로부터 자신을 잘 지킬 수 있을지 걱정된다. 모부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노력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은 든다. 나의 모부만 해도 딸아들 구분 없이 나를 키워줬고, 덕분에 나는 또래보다 일찍 페미니즘에 눈뜨고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만약 내가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믿는 모부 슬하에서 자랐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결국 내가 되었겠지만 더 많이 흔들리고 방황했겠지. 이 세상 모든 페미니스트 모부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