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삶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릴 뿐이다. 더이상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 삶에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제 삶에 빠져 있을 뿐이다.

 

가끔씩만 그러면 괜찮을텐데, 너무도 자주 그렇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보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의 역할을 "삶이 보이는 창"이 한다.

 

내 삶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행복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제 삶을 보지 못하고 제 멋에 겨워 살다가 가면 그 얼마나 불행한가.

 

따라서 삶창을 통해 내 삶을 볼 수 있다는 것, 삶을 볼 수 있는 창이 있다는 것, 그 삶이 보이는 창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다.

 

잊고 싶은 일들, 감추고 싶은 일들, 외면하고 싶었던 일들, 또는 잊고, 감추고, 외면하던 일들을 삶창을 통해 대면하게 된다.

 

그 대면은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깨달음이 행동으로 나아갈 때 힘이 된다. 그 힘은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삶창 99호"

 

세월호가 침몰한 지 90일이 넘어 100일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해결할 의지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세월호 특별법'은 6월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7월 국회로 넘어 왔으며, 책임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누구도 제대로 진상규명도 책임지지도, 그렇다고 실종자에 대한 완전한 해결도 되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태... 도대체 '세월호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특집으로 삶창 99호가 시작된다. 세월호는 나에게 무엇인가? 이 말은 계속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을 가슴 속에 지니고, 대한민국이라는 더 큰 '세월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세월호에 대한 생각이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냥 또 하나 과거의 사건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슬픔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으로 전환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삶이 바뀌어야 한다.

 

삶을 바꾸는 일, 그것이 바로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일 것이다. 또한 삶창을 보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다시 한 번 "삶창"을 통해 내 삶을 본다. 내 삶... 그 속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실천할 수 있도록 나를 채찍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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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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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권이 300쪽이 넘으니 한 권으로 구성되었다면 아마도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되었으리라.

 

이런 책은 이렇게 친절하게 나누어 놓는 편이 좋다. 그래야 읽기 좋다. 보관용, 즉 장식용이야 한 권으로 양장으로 두텁게 나오는 것이 좋겠지만, 읽기에는 이렇듯 두 권 또는 세 권으로 나누어 놓는 것이 편하다.

 

책이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분량이 너무 많으면 질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낯설은 이름이 계속 나오는데 그걸 한 권으로 읽으라고 하면 읽다가 신들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을 헷갈려 하기 십상이다.

 

물론 이렇게 두 권으로 나누어도 신들, 사람의 이름을 다 알 수는 없다. 읽으면서 까먹는다. 세상에 왜 이리도 이름이 길고 헷갈릴까.

 

게다가 그리스 이름과 로마 이름이 다르고 또 영어식 이름이 다르니 혼란은 가중될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자신들의 생활에서 경험한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아무리 많이 접했다고 해도 여전히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름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낯설다. 그러므로 이름이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외국의 그 많은 지명이 나오니 더 헷갈리기도 하고.

 

그래서 이름을 외우는 것을 포기하고 읽었다. 그랬더니 재미있다.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죽 읽어가면서 내 머릿속에 남는 이름이나 지명만을 기억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게 남아 있지 않은 이름들은 읽는 도중에 내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오비디우스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찬사로 끝을 맺는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신들의 이야기만을 다루지 않고 카이사르나 피타고라스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도 다루고 있다.

 

시대를 황금시대, 은의시대, 청동시대, 철의시대로 나누고 그가 살고 있던 로마 시대를 철의 시대로 지칭하고 있다. 즉 신들의 전성기에서 영웅들의 이야기로 나아가고 이제는 인류의 역사를 다루는 것에서 끝을 맺는 것이다.

 

제우스부터 시작하여 아테나, 아폴론, 디오니소소, 비너스, 테세우스, 이아곤, 미다스, 아킬레스, 아이네이아스 등등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 이야기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로 꿰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들과 인간의 흥망성쇠, 그리고 온갖 사물들의 유래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이 책은 어쩌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변신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기원을 설명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얼마나 많은 대상들이 요정이나 인간들이 변해서 된 것인지, 그래서 우리가 그 이름을 이런 신화를 읽으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래 운문으로 쓰여진 책을 산문으로 재 번역했는데, 운문에 익숙치 않은 우리들에게 산문으로 번역한 것이 더 읽기 편하게 다가온다. 내용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거의 마지막 부분에 피타고라스가 나오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주인공인 그는 오비디우스의 이 작품에 사상적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만물은 유전한다는, 어찌보면 불교의 인과론, 윤회론과 같은 사상을 펼치고 있으며, 또한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권장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총량이 정해져 있고, 그것들이 무한히 변화할 뿐이라는 피타고라스의 말은 이 작품의 제목이 변신이야기인 것과도 관련이 있다. 한 사물과 한 사물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저것으로 저것이 이것으로 변해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세상에 우리가 함부로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가 된다.

 

1권과 2권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용이 죽 이어지기에 두 권을 모두 읽는 것이 좋고, 그것이 싫다면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읽어도 좋다.

 

우리 신화와 다른 점이 우리 신화는 평화, 협조, 함께 함을 바탕으로 하는 점이 많은데, 이 변신이야기에서는 싸움, 경쟁, 복수 등이 많으니 서양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온갖 전쟁 등이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겠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신화 속에는 그 민족이 살아온 역사가 나타나 있는 것이니... 이들이 피타고라스의 말만 제대로 들었어도 그러한 피를 부르는 칼부림은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자, 만물은 변화한다. 그 점을 이 "변신이야기"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나오지만 나라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정권도 변화한다. 그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신의 권력이 영원불멸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현재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워야 할 것이고,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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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입이 크다 - 교사 시인 박일환의 청소년시, 2014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한티재시선 2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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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시인의 동시집에 이어 청소년시집이 나왔다. 동시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연령이 높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시집이다.

 

굳이 청소년시집이라든지, 동시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될텐데... 굳이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아마도 주요 내용이 청소년들의 삶과 생활, 그 중에서도 학교 생활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고, 시를 잘 읽지 않는 청소년들이 시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

 

교사이자 시인인 그는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청소년시를 쓰는 이유

... 2010년에 박성우 시인이 쓴 [난 빨강]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10대들을 위한 첫 번째 청소년시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청소년들을 가장 많이 만나고 청소년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있던 교사 시인이 아니라 일반 시인이 먼저 청소년들을 위한 시를 썼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겁니다. 교사이자 시인으로서 일종의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들면서 이제부터라도 청소년들을 위한 시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97쪽)

 

 

이런 이유로 청소년시를 쓰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지내고 있는 시인은 학생들이 시에서 멀어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으리라. 사실 우리는 국어 시간에 시를 우리의 감성을 풍부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배우지 않고 오로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배워왔다. 그것은 지금의 학생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학생들에게 시는 어려운 것,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할 수만 있다면 배우고 싶지 않은 것이 되기 십상이다. 이를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를 시로 대하는 게 아니라 문제풀이 대상으로 보게 되고, 더구나 자신의 고민과 전혀 상관없는 시를 억지로 배우는 동안 시는 나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의 주문 같은 것쯤으로 여기게 됩니다. (102쪽)

 

그렇다면 학생들이 시를 친숙하게 여기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인이 말하고 있듯이 청소년들의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시를 들려주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시로 표현되었을 때 학생들은 시란 자신들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시험에나 필요한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써 시를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감성을 시로 표현할 수도 있게 된다. 시가 청소년들에게 다가오게 된다.

 

... 청소년시도 비슷하게 정의를 내려 볼 수 있겠습니다. 청소년들의 감성과 이해 수준, 그리고 그들의 삶에 밀착한 시라고 말이지요.(100쪽)

... 청소년을 위해서 씁니다. ... 청소년들이 조금이나마 시를 가까이하면서 마음에 담아 두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한편 청소년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102쪽)

 

그렇다고 청소년시를 청소년들만 읽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청소년시는 청소년들이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지만 어른들 역시 읽어야만 한다.

 

어른들은 청소년시를 읽으면 자신들이 잊고 있던 청소년시기를 떠올릴 수 있다. 자신의 청소년기를 생각해낼 수 있다. 하여 자연스레 청소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 나도 그랬었지, 그래 요즘 아이들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청소년시는 청소년과 어른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집은 청소년들의 학교 생활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교사이자 시인으로서 경험하고 느낀 청소년들의 마음을 청소년의 처지에서 표현해 내고 있다.

 

하여 우리들의 청소년시기, 학창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지금 아이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청소년과 어른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시집이다.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궁금하다고? 이 시집을 읽어보라. 그러면 우리가 학창시절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이 된 시

 

학교는 입이 크다

 

저기 먹잇감이 오시네

줄이어 떼 지어 오시네

 

고래가 새우를 삼키듯

아침마다 큰 입을 벌려

꿀꺽, 꿀꺽, 삼키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학교는 입이 크다

너무 커서 말이 안 통한다

 

박일환, 학교는 입이 크다. 한티재. 2014년. 58쪽

 

이게 바로 학교다. 아니 청소년들이 보는 학교일 수 있다. 교사 시인이 학생의 입장에서 바라본 학교이기도 하다.

 

그렇담, 이 시는? 한 번 답을 맟춰보시라. 도대체 답이 뭘까? 어른들의 눈에 보이는 답과 아이들이 생각하는 답이 같을까?

시험 문제 형식으로 쓴 청소년시다. 기가 막히다. 슬프다.

 

정답이 뭘까요?

 

※ 다음 글을 읽고 '거기'에 해당하는 말로 가장 어울리는 것을 고르시오.

 

  어른들이 말했습니다.

   "거기에 너무 매달리지 마라.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단다."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매달리라고 만들어 놓은 거 아닌가요?"

 

 ① 난간    ② 성적     ③ 옥상     ④ 놀이기구    ⑤ 그네

 

 박일환, 학교는 입이 크다. 한티재. 2014년. 61쪽

 

이 시집에는 이런 시들이 참 많다. 어른들이 아니 교사들이 찔리는 시도 있고, 또 웃음을 터뜨리는 시도 있고, 아이들이 이렇구나 생각하게 하는 시도 있다.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은 미처 자신이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이 시들을 통해 표출되는 즐거움을 지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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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들에게 모두 빚진 사람들이다 -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희망에 대하여 함께 걷는 교육
송인수 지음 / 우리학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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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

 

당연한 말이어야 하는데, 당연한 말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사람이 평생을 배워야 한다고 배움이 멈추는 날이 곧 죽음의 날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배움은 곧 교육을 동반하고, 배움이 없는 교육은 있을 수 없지만, 배움이라는 말과 교육이라는 말이 이렇게 일치하지 않은 시대도 없지 않을까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교육은 넘치는데 배움은 없는 상황이 되고, 교육이 꼭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되지만, 학교를 넘어서 학원이라는 거대한 공간으로 넘어간 지가 오래되었다. 즉 공교육에 투자하는 비용보다 사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이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는 얘기다.

 

학교에서 6-7교시 수업을 듣고, 그것도 모자라 학원에서 10시까지(지금은 법으로 심야 학원 교습을 막아서 그렇지 예전에는 새벽까지 학원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수업을 듣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교육이라는 이름에 갇혀 살고 있다. 그것도 무려 12년이나.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고, 이 책의 저자는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처음에는 공교육 현장의 교사로 활동하다가, '좋은 교사' 모임의 대표로 학교를 그만두고 상근 활동가로 활동하고, 그 모임에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으로 자신의 활동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사교육이 사라져 이런 이름을 지닌 단체가 발전적 해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 써왔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 이 책이다. 그의 내면 속에서 일어났던 고민들, 그리고 활동의 모습들을 이 책에서 만나볼 수가 있다.

 

그는 열심히 사는 것보다는 옳은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꿈꾸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과 같이 어른인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아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면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어떻게 갚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 이 땅에서 사교육을 없애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내 자식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는 이 현실을 가만 놔두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풍요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 풍요가 아이들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고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교육까지도 넘칠 정도로 풍요로울 필요가 있을까? 배움을 사장시키는 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여 교육 분야에서도 지나친 풍요는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 사교육이 다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학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배움은 당연히 사교육, 즉 학교 밖에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입시에 매달린 사교육은 아이들을 병들게 할 뿐이다.

 

그런 사교육을 없애기 위해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글. 그런 활동의 이면에 있는 고민들, 안타까움들, 그러나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기꺼이 그 길을 가는 사람의 모습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하여 저자는 사교육이라는 현실의 벽이 아무리 공고하더라도 조금씩 틈을 내기 시작하면 결국 지금과 같은 사교육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을 몇 년이라고 못을 박지 않더라도 곧 그런 시대가 와야 한다고 한다. 아니, 그런 시대는 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미래가 없다.

 

사교육을 없애지 않고 지금처럼 우리 사회가 계속 나아가게 한다면 우라는 아이들에게 빚을 갚지 못하고, 오히려 빚만 더 지게 되는 꼴이 된다.

 

하여, 우선 나부터라도 불필요한 사교육을 줄이거나 받게 하지 않아야겠다. 그것이 바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테고... 그런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해준 책이다. 반가운 책이다.

 

덧글

 

출판사의 책읽고 서평쓰기에 응모했더니, 운 좋게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내게 돌아왔다. 책을 보내준 출판사...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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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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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왜 우리는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아니 열광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필수요소로 이야기를 받아들였는가.

 

진화론을 생각하면 이야기는 우리가 생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살아남았을 거고, 이것이 우리의 삶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야기가 없는 종족과 이야기가 있는 종족 중에 어느 종족이 살아남았을까? 답은 이야기가 있는 종족이다. 진화론을 거꾸로 역추적해 가면 우리가 지금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이야기가 있는 종족이 생존해 왔다는 증거도 될테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에서는 인간의 생존에 이야기가 어떤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꾸는 꿈 역시 일종의 이야기이고, 이 꿈은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연습이 된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을 연습하듯이, 꿈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삶을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꿈조차도 이야기가 되니, 우리의 기억은 당연히 이야기이다. 그것도 사실만을 나열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스토리를 지니기 위해서 우리가 창조해낸 이야기. 누가 자기의 기억이 전적으로 사실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는 기억에 관한 실험 결과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 똑같은 사건을 기억하게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 자신이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것도 더 많은 내용을 덧붙여서.

 

여기에 정신의학자 이야기도 나온다. 기억을 조작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기억인양 믿게 만들었던 실험을 한 사람 이야기.

 

그러니 우리의 기억은 믿을 것이 못된다. 우리는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의도에 의해, 이를 균형을 맞추지 위해 또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기억을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기억은 우리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야기로 재창조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도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비도덕적인 것에 대한 비난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여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런 활동들이 우리의 도덕성을 함양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사실 좋은 작품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삶에 대한 도덕적 윤리의식을 담고 있으니, 이 말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검열을 통하여 책이나 영화들을 통제했는데, 이는 책이나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폭력, 선정성을 규제하는 것도 이야기가 우리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내고, 우리들의 행동이 결국은 사회를 바꿀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미래의 이야기는 종이책을 떠나 이제는 게임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이야기는 우리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계에 있는 이야기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점 아니었을까.

 

재미 있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이 말은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야기 자체이기도 하다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는 신화는 물론이고 종교도 이야기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어떻게 이야기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는 동물이기에 이야기는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말로 바꿀 수가 있고, 이런 이야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덧글

 

충격. 충격. 작가와 작품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싶은, 사실인가 싶은.

 

너무도 감명깊게 읽었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이 책의 다른 번역본 제목은 '작은 나무야 작은 나무야'다)의 저자인 포리스트 카터의 본명이 아서 카트이고 할아버지가 체로키 인디언이어서 인디언 피가 섞이긴 했지만, 인종차별로 악명 높은 kkk단원의 리더라고 하니, 참... 아무리 작가와 작품이 달라도 그렇지 이거야 원.

 

'아메리카 원주민의 또 다른 유명 회고록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아서 카터라는 백인이 쓴 것으로 드러났다. (포리스트 카터는 필명이었다) 그는 '남부 연방 원조 큐 클럭스 클랜'이라는 민병대에서 리더를 맡기도 했다.' (196-197쪽)

 

그럼에도 이 책은 나에게 감명을 줬다. 또다시 읽고 싶은 책이기도 하고. 내 마음도 따뜻해지는 책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찾아서 읽고, 또 읽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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