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제목을 봤을 때 착각을 했다. 쥐와 굴이라고 하니 쥐가 사는 장소를 뜻하는 굴인줄 알았다. 그런데 시를 읽어보니 그런 동굴할 때 굴이 아니라 먹는 굴을 말하고 있다. 쥐와 먹는 굴이라니...


  카프카가 쓴 소설 중에 굴이 있는데,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존재를 시로 썼다고 생각했다가, 이게 아니네 하는 생각을 했으니...


  왜 쥐와 굴이 함께 나오지? 쥐가 못 먹는 음식이 없다고 하지만, 굴을 잘 먹던가? 굴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텐데... 사람들도 굴을 자주, 많이 먹지는 않으니...


 시에는 쥐와 노인이 주로 나온다. 이 시집에서 쥐를 다루면서 도시, 집, 방, 그리고 노인을 다루고 있다. 오히려 시집 제목이 쥐와 굴이 아니라 쥐와 노인이라고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럼 읽는 독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존재를 표현한 시라고 쉽게 생각할텐데... 시인은 이렇게 쉽게 생각하기를 멈추라고, 더 생각해 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쥐는 도시와 집, 방에서 쫓아내야 할 존재...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 자신의 먹이를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 그런 존재다. 있어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존재.


노인도 그렇게 변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초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노인문제가 대두하고 있는데, 그들을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존재,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기보다는 짐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있지 않나.


그런 노인들에게 무릎은 자신이 힘이 없어졌음을 상징하는 존재 아니겠는가? 시인은 '쥐와 굴'이란 시에서 '쇠고리에 걸어둘 / 한 솥 뼈만 남은 / 노인이여 / 공기처럼 소파 위에 얹어놓은 / 무릎이여'(11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노인은 스스로 움직이기 힘든 상태. 


그러면서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는 일' (12쪽)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존재, 그런 존재가 어른이다. 


이와 더불어 시인은 '쥐와 노인'(58-59쪽)이라는 시에서 어떤 노인을 원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기존 통념과는 좀 다른. '이봐, 노인 / 늦잠을 자는 노인은 없나? 열 시 열한 시까지 자는 노인 / 나는 그런 노인이 될 거다' (58쪽)고 하고 있으니... 노인이라고 자신만의 삶이 왜 없겠는가.


'무릎과 발목, 심장이나 얼굴이 / 굴처럼 생긴' (13쪽)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에서 굴처럼이란 말을 생김새가 아니라 '유연한'이라고 읽으면 경직됨이 죽음과 가깝다면 유연함은 삶과 가까우니 쥐와 노인에게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 그런 존재는 무릎을 세우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한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지만, 이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쥐와 굴'에서 마지막 구절, '쥐는 무릎을 완성한다'(14쪽)고 하고 있으니... 무릎을 완성한다는 말은 자신의 의지로 꿇을 수도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있고, 무릎을 펴고 일어나 걸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제 무릎은 그냥 공기처럼 소파 위에 얹어놓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꿇을 수도 펴고 걸을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현대 일상에 치여 살아가는 우리들, 어쩌면 이렇게 무릎을 완성하지 못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무릎을 완성하고 자기 의지로 살아가야 함을 이 시를 통해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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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가차 없다는 말과 촉법소녀란 말. 결국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는 뜻이고, 가차 없다는 말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당당하게 살아간다기보다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기존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렵지만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어른의 세계에 짓눌려 있는 모습. 결국 자신의 존재를 어른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두려움 소게서 살아가던 존재.


  그 존재가 어느 날, 이제는 어른의 세계를 의식하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신을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모습이 기존 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고, 결국 법을 어긴 소녀라는 뜻을 지닌 촉법소녀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미 만들어진 틀 속에만 살아갈 수 있을까? 법이라는 잣대가 아니더라도, 어른의 세계에 그대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소녀)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장 선생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런 글쓰기를 원했다

게다가 난 이미 도처에서 독자와 만나고 있었다

어머니 없이도 어머니를 믿고 자라는 아이처럼

그래서 아이는 어머니에게

앙심을 품게 되는 것이지만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도

어머니가 생겨나는 게 싫어서

언제 어디서나

어머니를 극복한 듯 보여지고 싶어서

시시각각 속에 들어찬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들

나만 이런 마법에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 전체가

나의 적이 되어야 하니까

환청을 들으며 여기까지 걸어오신 

선생께서는 아시겠지

환청도 없이 버텨야 하는 이 세계는

얼마나 큰 공포인지

천지에 집을 만들어놓고

어머니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차라리 매질을 당할 때가 좋았어요

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때는

손가락을 넣고 토해서라도

목구멍이 거기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피멍이 좀 들면 어때 그것이 평평한 

내 등을 사실로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난 이 등허리를 마음껏 펼치거나

쪼그릴 수 있을 텐데

어머니는 누구 마음대로 늙고 쇠약해지셨나

첫 울음을 배운 것이 엊그제 같은데

손수 가르쳐주실 게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니

용서하지 마세요

단 한 번에 실수 없이 졸라드릴게요

수십 번 수천 번도 더

태양을 상대로 연습한 일이었어요

작교 가녀린 시간의 통로와

예기치 못한 끝에 대해

공손하고 끊어짐 없는 손길로 한 번 정도는

나도 가르쳐드리고 싶었어요 한 번 정도는

나도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보고 싶었어요


황성희,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현대문학. 2020년. 60-62쪽.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를 읽으며 뒷부분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불교의 말도 떠올랐다. 이미 있던 세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더 나아가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럴 때는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를 하기도 한다.


나란 존재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다. 상처를 낸 순간, 느껴지는 통증, 고통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처를 내다가 자신이 아닌 자신보다 앞선 세대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지닌 두려움이 바로 그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끊어야 한다. 보이지 않아도 도처에서 그들을 의식하고 살아왔다.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래, 한 번쯤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꼭 가정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사회도 이래야 한다. 청년들은 기성세대를 딛고 나아가야 한다.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틀로 청년들을 틀지우려 하지만, 청년들은 그 틀에 갇히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어느 순간 어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그런 모습... 이 시를 읽으며 그런 모습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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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자, 전시회로'라는 제목이 있다. 코로나가 우리 생활을 완전히 제약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때가 되었다.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했고, 학교는 모두 등교 수업을 하게 됐다.


  학생들도 체육시간에 마스크를 벗어도 되고, 교실에서는 드디어 짝도 생겼다고 한다. 짝!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눌 사람. 코로나로 학생들은 짝도 잃었고, 대화도 잃었고, 몸을 움직일 시간도 잃었었다. 게다가 함께 잠을 자는, 학창시절 가장 큰 즐거움인 수학여행도 잃고 지냈으니...


  어떤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두 해가 지나고, 이제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이때를 맞이하여 빅이슈에서 다룬 주제가 바로 '전시회'다.


나하고는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장소. 전시회.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런 때를 맞아 빅이슈가 소개하고 있는 전시회에 가보아도 좋을 듯 싶다.


전시회와 더불어 저번 호에 이어서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보다는, 그들의 투쟁에 응원을 보내는 글들을 실었다. 그래. 언론에서는 중립을 표방한답시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을 함께 내보냈지만, 과연 그것이 중립일까?


중립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약자들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언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같은 말이라도 어느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임을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음을...


그것을 같은 비중으로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중립이라고 하면 그 중립은 강자 편을 드는 일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전시회'가 '장미'라면 '지하철 타기'는 '빵'이다. 장애인들이 전시회에 가려고 해도 지하철(버스)을 제대로 타고 갈 수 없다면, 전시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빵과 장미'로 대표되는 인간의 권리인데, 이들은 '장미'를 향유하기 위해서 '빵'이 확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빵'조차도 확보되지 않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다.


이번 호에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글이 실렸는데, 묘한 등치를 이룬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회를 즐기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두 주제가 함께 실린 이번 호는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에 탱고에 관한 글이 이 두 주제를 묶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탱고를 둘이 함께 추는데, 혼자만 잘한다고 상대 생각없이 제 멋대로만 춘다면, 그 춤은 볼썽사납게 되어버리고 만다고.


'나는 팀의 목표를 서로 잘 연결되어 기분 좋은 순간을 창조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를 위해 리더는 상대방이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상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본인도 움직여야 한다. 분명히 리드하지 않거나, 팔로워의 움직임을 확인하거나 기다려주지 않은 채 혼자만 급히 움직인다면 역할을 정성껏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는 불쾌한 순간과 보기 싫은 몸짓이다. 나는 대부분의 팔로워가 자신을 '추하게' 만드는 리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68쪽) 


리드와 팔로워를 정치인과 시민으로 바꾸고, '추하게'를 '힘들게'로 바꾸면 우리나라 정치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이때 팔로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장애인도 팔로워에 해당한다. 그들도 한 팀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춤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출 수 있게 리드해야 한다. 리드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지하철 출근 투쟁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치인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춤을 추는 리더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 팀은 제대로 춤을 출 수가 없다.


중립이란 바로 이렇게 리더가 제 역할을 해서 팔로워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힘들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하는 데 있다. 그것이 바로 중립이다. 양쪽 다 문제가 있다 또는 양쪽 다 이해가 간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


그래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함께 다룬 이번 호는 '빵과 장미'처럼 함께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런 주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렇게 '빵과 장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한 [빅이슈] 275호가 중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맙다. 이렇게 중립을 지켜주는 잡지가 있어서...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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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편안해지면서 따스해진다. 세상이 마냥 평화롭다. 평화로워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갈등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위안을 가져다 준다.


  시집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시인과 아내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 시인으로 살아가는 모습 등등... 


  여기에 '못난 시인의 기도3'이란 시가 있다. '시를 쓰는 시간만큼이라도 / 딱 그 시간만큼이라도 / 세상이 고요해질 수 있다면 / 날밤을 새워 시를 쓰겠습니다' (39쪽)라고 하는 시인.


  이런 마음을 지닌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세상을 위해서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시를 통해 잊지 않게 해주고 있다.


이런 잊지 않음, 기억은 시인의 친구들에게로 확장이 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는 시인. 그 전화번호를 그대로 둔다고 한다. 왜? '언젠가는 / 하늘나라에서 /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서로 떨어진 곳에 있으면 / 전화 걸어 / 막걸리 한잔 해야 하니까' (32쪽)라고 한다.


2부에서는 이웃사람들로 시상이 확대된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시인이 함께 살아가는 농민들 이야기를 시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젊은이가 거의 없는 농촌의 현실이 시에 나타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울하지만은 않다. 그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하도 구슬파서 웃었겄지'(슬퍼서 웃는 사람들 부분. 48쪽)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3부는 자연으로 더 시상이 확장된다. 사람이 사람과만 살 수 없고, 자연의 일부임을 시를 통해서 알게 된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간식거리와 저녁거리'(88-89쪽)라는 시에 너무도 잘 드러난다.


우리에게는 간식거리인 고구마가 새들에게는 저녁거리임을, 그런 저녁거리를 '간식거리 고구마말랭이를 / 어디 겁도 없이 훔쳐'(88쪽)라고 큰소리를 친 뒤 곧 놀란다. 왜냐하면 '오늘 당장 / 때까치 식구들 먹을 / 저녁거리가 마당에 떨어졌는데 // 어린 새끼들이 배가 고파 / 꼬르륵 꼬르륵 / 밤새 잠 못 들지 모르는데' (89쪽)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 


4부는 새로운 가족 이야기다. 시인의 아들이 결혼했나 보다. 그런데 새식구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 1-3부에 나온 시들에서 보여주는 시인, 마을, 자연과 비슷하다. 


서로 배려하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모습. 그런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우리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 시집에 나온 시들처럼... 시인처럼... 그렇게.


그 중에 짧은 시.. 그러나 정말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는 시.


   감골 할머니의 쓴소리


돌아댕기는 곡식을 줏으면 사램을 살리지만은, 


돌아댕기는 말을 줏으면 사램을 직이는 기라.


서정홍, 그대로 둔다. 상추쌈. 2021년 초판 3쇄.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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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창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그것도 잘나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어서 좋다.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다가 새로운 사실을 만나고는, 그래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글들을 만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빨리 실시했으면 좋을 그런 일들.


복지와 농업을 합할 수 있다는 사실. 그렇다. 농업과 치유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은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생활에서 하는 농업과 치유, 복지가 함께 할 수 있음을, 조예원의 글 '농업·농촌 치유의 공간으로 태어나'라는 글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는 치유농업(케어팜이라고 한단다)을 우리나라에서도 도입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업과 치유, 사회복지가 함께 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치유농업 말고도 우리가 받아들일 것이 많다. 


여기에 더불어 박총이 쓴 '전혀 시대착오적이지 않은'이라는 글에서는 여전히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만날 수 있다.


노조조직율이 매우 낮은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은,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가 힘듦을 이 글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데...


사회의 수준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여전히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반대도 있는 우리 사회로서는, 노동자들의 삶, 노동자들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삶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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