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광장], 몇 번이나 개작을 했던가? 

처음에 읽었던 책은 세로로 조판된 책이었는데, 나중에 다시 가로로 조판된 책을 읽었고, 이번에 다시 읽었다. 

나이 20대에 읽고, 30대에 읽고, 40대에 읽고, 각자 다른 책으로 읽었는데, 20대에 느낀 감동이 40대에는 조금 이성적이 되었지만, 그래도 [광장]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읽히는 좋은 책임은 틀림없다. 

뭐... [광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으니, [광장]에 대한 평이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고, 이번에 [광장]을 읽으면서는 이명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며 읽었다. 

그가 남한에 있을 때는 철학도였고, 돈에는 초탈했으며, 북한에 있을 때에는 언론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끌었다고나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의 효용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명준은 생활인이 되지 못한 관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에서 돈과 관계가 없는 일은 없는데, 그는 돈에 대해서 아예 모르쇠로 일관한다. 세상에 부모가 없는 아버지 친구 집에서 기식하는 사람이 돈에 대한 관념을 지니지 못하고 지내다니... 

이 점에서 그는 생활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생활을 멀리서 관찰하기만 한다. 즉 그는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객체로 만들고 있다. 결국 그가 존경하는 정선생 집에서 본 미라는 결국 이명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는 그는 이념의 화신이 되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의 눈에 생활이 보인다. 그러나 생활은 보이되 생활을 바꿀 주체는 되지 못한다. 그가 언론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생활을 밖에서 관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자세는 철저한 이념을 우선시 하는 북한 사회 속에서도 그의 자리는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담, 남과 북 모두에서 실패한 삶을 산 이명준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제3국으로 도피하는 길밖에 없다. 자신의 분열된 모습을 모두 버리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곳, 이 곳에선 삶을 관조하지 않는 생활인이 되길 꿈꾼다. 이것이 그가 머리를 쓰는 직업을 이야기 하지 않고, 오직 몸을 움직이는 직업을 갖고자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생활인이 되지 못한다. 그를 끝까지 따라오는 갈매기, 이 갈매기는 다른 세상을 그에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생활인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연 그는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나? 

구원이 아니라, 이러한 관념인은 우리나라처럼 비극을 겪은 현대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야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여기에 비극이 있다. 문제는 알되, 해결할 의지는 없다. 그는 문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문제를 온몸으로 맞이할 마음이 없다. 그가 몸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기껏해야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몸을 느낄 뿐이다. 그에게 생활인으로서의 몸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체'만 있을 뿐이다. 남에서는 부르조아적인 삶에 어울리는 '체', 북에서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체'. 

이 '체'는 생활과 정신이 하나가 되지 않은, 분열된, 늘, 사회로부터 미끌어지는 사람의 자세일 뿐이다. 이런 '체'가 내면화된 이명준은 어디에서도 '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제3국행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 소설이 나온 지 50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읽힌다. 바로 우리 현실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북의 관계는 이명준이 생활과 정신 사이에서 분열을 느끼고, 계속 미끄러지듯이 우리 현실도 이러한 분리, 미끌어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이, 자주, 지속적으로 우리는 미끄러지고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이명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현실을 직시하되, 현실을 밖에서 보지 않고, 현실 안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미끌어짐을 방지할 수 있다. 관념인 이명준이 아니라, 생활인 이명준으로 우리는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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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장>..
    from 말의 양심 2011-11-10 11:05 
    최인훈의 <광장>이 100쇄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구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도 98년 쯔음인가 생각이 된다.조세희의 <난소공>과 더불어 100쇄를 넘었다는 건 당시 내게는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왜냐하면, 두 책은 일반 소설책이라기보다는 이념서나 사회비판서에 가까웠기 때문에 100쇄 돌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사실, 최인훈의 <광장>을 처음 접했던 건 고등학교 교과서 작품 해설집에서였다. 입시용 텍스트로 읽어
 
 
 

예술, 특정인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감정을, 생각을 다른 매체를 이용해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인만이 예술을 하는 사회는 닫힌 사회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을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한다면, 뭐 광고에서처럼 명화가 우리 생활에 들어온다든지 하는 그런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의 생활보다는 더욱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을텐데... 

예술적 감수성이 있는 국민들에게 저토록 일률적인 건물을 지을 수는 없을테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공의 손질로 바꿀 수 없을테고, 오로지 시험, 시험 하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을테고, 그리고 모두가 다 돈이 되는, 또는 명예와 권력이 있는 직업으로 달려가지 않을텐데... 

우리가 구불구불, 제 본성대로 흐르는 강을 직선으로 바꾸어 놓고, 인공 조형물을 설치하고, 인공으로 물을 가두어 놓는 그런 반(反)예술적인 행위는 하지 않을텐데... 

예전의 것들을 쉽게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만 바꾸는 모습을 지니지는 않을텐데... 

예술교육, 또는 교육예술이 필요한 때... 패러디를 이해 못해 처벌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을텐데...

예술적 감수성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을테니, 이는 교육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길러져야 할텐데... 그럴려면 지금의 교육은 변화해야만 하는데... 

예술교육이 아니라 교육예술이어야 한다는 이번 호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늦지 않았다.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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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다. 

세계에서 창조된 몇 안 되는 문자. 창제한 사람과 년도까지 밝혀진 문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라고 늘 자랑하는 문자. 

쉽고도 체계적이며 세상의 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는 문자. 

그래서 세계에서 문맹퇴치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세종상이라고 하지 않나. 

읽을 수 없는 괴로움, 쓸 수 없는 괴로움을 해결해준 문자이고, 또한 문자가 없는 종족에게 우리 문자인 한글을 알려주기도 하지도 않나. 

그런데 한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 

그냥 어렸을 때부터 써왔던 말이라서...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나. 

훈민정음이 언제 창제되었는지, 그 때는 글자수가 몇이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그걸 몰라도 우리는 언어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기네 나라 말에 대해 잘 모르고 어떻게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 한글은 중세시대의 라틴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학교에서 훈민정음을 제대로 배우기나 하는지... 기껏해야 세종대왕 서문만을 배우지 않나.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그 말은 배우되, 훈민정음의 원리를 배우지 않고 있지 않나. 

하다못해 훈민정음 책을 소장하고 있는 집은 몇 집이나 될까. 

문고판으로 싸게 구입할 수도 있는 책을.. 우리는 너무 홀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국경일이되, 공휴일에서도 제외된 한글날. 

이 날 우리는 한글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에 관한 책.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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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반대에도...미, 진범논란 사형수 결국 '형집행' 

23일 한겨레 신문에 난 기사 제목이다.  

작은 제목 중의 하나가 피해 유족에 "총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유언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는 죽기전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는 이야기다. 만약 나중에 그가 무죄로 밝혀지면... 

사형제도는 흉악범을 막는다는 이유로 존속되어 왔지만, 세계 여러나라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사형제도 없는 나라들에서 흉악범죄가 적다는 통계가 있으니... 하다못해 소매치기 범죄여서 그를 사형집행하는 장소에서도 소매치기들이 활동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니.

사형제도가 흉악범죄를 막는다는 말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많으니, 사형제도는 이제 고려해 볼 단계를 지나 폐지를 해야만 하는 제도이다. 

국제엠네스티에서도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꾸준히 반대를 해오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아직은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지 않으나, 집행을 10년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실질적 사형폐지국에 이르렀는데... 

또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사형집행을 한 뒤, 그 집행이 잘못되었다고 밝혀진 예가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누구나 오판을 할 가능성이 있고, 조금의 오판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극단의 형벌은 하지 않아야 한다. 

미국에서 집행된 이번 사형으로 다시 사형제가 논의의 대상이 되는데...인권의 차원에서 보면 이는 이미 논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이미 폐지되어 있어야 하는 제도일 뿐이다. 

사형제에 대한 책이 꽤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에게 유명한 알베르 까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을 읽으면 사형제가 범죄 예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쉽게 쓰여진 이유있는 반대도 좋고, 조금 더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극단의 형벌도 읽으면 좋다. 

미국에서 사형집행이 실시된 이 때, 오히려 사형제도의 폐지를 향해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알베르 까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 책세상, 2004  

제라르 도텔, 이유있는 반대, 개마고원, 2010 

스콧 터로, 극단의 형벌, 교양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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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에 관한 글들 

녹색평론 120호를 읽다.  

이번 호까지 벌써 세 번째, 원자력에 대한 글들이 눈에 띈다. 물론 예전에도 원자력을 반대하는 글들이 실렸지만, 거의 6개월이 흐른 지금에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는 책은 내가 읽은 바가 적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녹색평론이 앞서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원자력이라는 괴물은 핵무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이는 가장 비민주적인 발전임을 수차례 주장해왔는데도,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이 있고 잠시 동안만 언론이 다뤄줄 뿐... 그 다음에는 게 눈 감추듯 원자력에 관한 이야기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왜 안 다루고 있는지, 못 다루는 것은 아닌지는 이 책에 '방사능과 언론'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반감기가 아무리 짧아도 몇 십년에서부터 몇 십만년 아니 몇 십억 년까지 있는 이 방사능 물질이 유출이 되었는데,,, 몇 달만에 관심을 접다니... 아무렇지도 않은양 지내고 있다니... 

이것은 지식인들의, 언론인들의 책임방기 아닌가. 

왜 자꾸 문제를 제기해 불안을 조성하냐고? 허... 바다에 유출된 방사능이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바다 생물들이 제 자리만 지키고 있단 말인가? 바람이, 공기가 일본에만 머문단 말인가? 

보이지 않기에, 그 부작용이 몇 년에서 몇 십년이 지나야 나타나기에 우리가 느끼고 있지 못할 뿐 위험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방사능의 위협을, 원자력 발전의 위험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요나스의 이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전체적 지식은 점점더 비교적인 것이 되어 일반인들에게 전달하기 어렵게 되고,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서 소외된다. (요나스, 책임의 원칙: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서광사  278쪽) 

그러니 일반인들은 원자력 발전의 위험을 모를 수밖에.

하지만 위험을 녹색평론이 계속 경고음을 내어 알려주고 있다.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경고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나?

따라서 녹색평론은 요나스의 이 말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결정은 최고의 선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최고의 악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후자의 생각만이 항상 우선권을 가지며, 또 필연성이라는구실을 가진다.(요나스, 같은 책 79쪽) 

우리는 최선의 결과가 아니라 최악의 상태를 생각하고, 이 최악의 상태가 도래할 가능성이 0.00001%라도 있으면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난 이 생각에 동의한다. 

녹색평론을 읽는 사람이 많아지면, 최소한 우리는 최악의 경우가 예상되는 일들은 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리를 울린 글 

배병삼의 글이다. 유교와 시장이라는. 

이 글에서 맹자가 양혜왕에게 했다는 말, 하필왈리(何必曰利)잇고?  

하, 왜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하냐?  

의로움을 말해야지 하는 이 맹자의 첫구절에서 유교는 시장을 반대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배병삼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교도 시장을 반대하지 않는다. 상당히 긍정한다. 다만 시장은 시민의 영역이고, 정치의 영역은 아니라고 말한다. 

맹자가 양혜왕에게 한 말은 왕은 시민사회의 영역에 관여하지 말고, 정치의 영역에, 즉 공공의 영역에 힘써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한다. 왕이 시장의 영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그 나라는 힘들어진다는 이야기... 

머리에 갑자기 대통령이 떠올랐다. 

최고경영자를 자처하는 대통령. 맹자가 그 분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허... 몇 천 년 전 맹자가 어찌 이리도 시대를 앞서갔을꼬?  

공자, 맹자를 배운 사람이 이리도 많은데.. 왜 대통령에게 하필왈리(何必曰利)잇고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하는 생각. 

맹자를 가까이 불러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그런가?   

 

덧글 

요나스의 책은 과학자들, 기술자들,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아니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는 너무도 앞선 첨단 과학기술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 인간이 지녀야 할 책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한 책은 없다. 

요나스, 책임의 원칙 :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서광사, 1994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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