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을 각오하지 않고 예술을 할 수 있을까. 예전 예술가들의 생애를 읽다보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이 나오지 않는 예술가가 별로 없던데... 생전에는 배고픔에 시달렸으나 죽어서 유명해져 그의 작품들만은 엄청난 가격을 유발하는.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취미로, 또는 한 순간의 성공으로 배고픔을 면하고도 예술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아니 어떤 예술가들은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예술가들에겐 남의 일이 아닐 터이고, 자식들이 예술에 종사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이 걱정부터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자 한겨레 신문의 한 제목 예술계통으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 이야기.

"등록금 비싼데 작업실은 열악" "졸업 뒤 계획 제발 묻지 마세요" 

이게 마음에 잘 다가오지 않으면 이 만화들을 보자. 

최규석의 "생태습지 보고서" 그리고 "울기엔 좀 애매한" 

미대생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미대에 진학하려는 돈없고, 빽없는 학생의 비애를 너무도 현실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우중충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의 만화에는 나름대로 유머가 있다. 이 유머가 현실을 가리기만 하지도 않고, 오히려 현실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누구는 몇십억짜리 그림을 집에다 떡 걸어놓고 산다는데, 예술가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 그게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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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대표 미셸 씨를 강제 출국조치하겠다는 기사가 뜬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 우리나라 경제에 이바지한 사람들.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는가? 

무슨 기계처럼 필요할 때 부려먹고, 더이상 필요가 없다면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것이 과연 선진국일까? 

선진국 운운하기 전에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 이것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원주민이 아니라, 선주민이란 생각을 지녀야 하고,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와 똑같은 권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 이주노동자로 와서 온갖 수모를 당하는 사람들. 

그들은 이주노동자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몇 년 전 마음 아프게 읽었던 찬드라 씨 얘기.. 이게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니... 

나라의 국격 운운하기 전에.. 우리 먼저 이주노동자 운운하기 전에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즉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태도를 지녀야겠다. 

이 책들 읽어보자. 그러면 쉽게 이들을 강제출국시킨다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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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잃게 된다. 

내 몸의 주인이 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몸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어진다. 

오직 의사의 말에 순응하는 말 잘듣는 순한 양이 될 뿐이다. 

일리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고 했는데, 말 그대로 병원이 진짜 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제도로 인해 병이 아닌 것들도 병으로 인식된다는 얘기겠지. 

몸을 기관으로 해부하고 어떤 기관이 잘못되었는지를 진단하는 병원.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갈 문제도 심각한 질병으로 분류하고 치료를 안 하면 큰 문제가 발생하는 양  병원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전체로서의 나는 신체의 각 부분의 나로 분해가 되고, 결국 나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해진다. 

가기 싫지만, 가지 않을 수 없고,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하지 못하는 거대한 권력. 그것이 바로 병원이다. 

언제끔 나는 내 몸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몸의 권리를 내가 행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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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의 학생 폭행 사건이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건의 진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학생 폭행이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기사이다. 

어디 학생뿐이랴. 의경들도, 전경들도, 군인들도 폭행이 일어났다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으니, 폭력이 만연한 사회라고 해야 하나. 

시집살이 고되게 한 며느리가 나중에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시킨다고, 군대에서도 맞은 놈이 나중에 후임들 때린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맞으며 자란 아이들은 몸으로 폭력을 기억한다. 머리로 기억하는 것보다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랴. 이 책을 보라. 새상에 사랑의 매는 없다. 매는 사랑이 아니라, 폭행일 뿐이다.

하여 최근에 학교 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교육청이 늘고 있는데, 이는 참 바람직한 일이다. 이 때 체벌에는 폭행을 포함하여 소위 얼차려라고 하는 신체를 힘들게 하는 기합도 포함이 된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교과부에서 기합은 허용하는 쪽으로 법률을 바꾼다고 하니, 이는 사회의 발전방향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기합을 주어야 정신차린다는 말, 이것은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는 습관이 들지 않게 하는 방법일텐데.. 오히려 학생들 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을 보라. 어릴 때부터 이렇게 자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교사들에게 또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은 힘으로 다른 사람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대화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게 습관이 되면  이 사회에서 폭행 문제는 사라질텐데. 가끔 국회의원들이 보여주는 무슨 무협지 같은 장면도 자연스레 사라질텐데.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행복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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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라고 하루를 누워서 빈둥빈둥 보냈다. 

이렇게 게을러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게으름이란 죄악이 아니라, 내 생활을 더 윤택하게 하는 윤활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게으름을 정당화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또 어렵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내 게으름을 뒷받침해주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강수돌 교수도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란 책을 썼고, 세계적인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책을 썼겠는가.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아질수록 삶이 풍요로와질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일자리도 나눌 수 있고. 

어른들이 많이 쉬고, 많이 놀면 자연스레 아이들도 그 많은 학습량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자기들만 놀고 니들은 공부해 하기엔 좀 뭐하지 않은가?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많이 놀 수 있는 나라. 그 삶의 여유에서 행복이 오지 않을까.  개미만을 찬양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베짱이도 찬양해야 한다. 문화는 개미보다는 베짱이에게서 오는 경우가 더 많을 테니까.

우리도 라파르그의 글 제목처럼 "게으를 수 있을 권리"를 확보하고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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